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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대공습(東京大空襲 / Bombing of Tokyo, 1945년)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커티스 르메이
일본의 도시란 이런 식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모든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순서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 폭격 직전에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보고.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의 사실상 수도인 도쿄에 가해진 공습으로 1945년 3월 9일~10일, 미군이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일본 제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 도쿄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한 폭격 작전을 말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쿄에는 60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공습 이후에는 피난민과 사상자 등으로 인구가 약 200만 명까지 급감했고, 뒤이어 주요 도시들(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도 비슷한 방식의 폭격으로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폭격이 유발한 직접적인 피해(특히 사상자수)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도 도쿄 등에 이뤄진 공습이 더 심했다.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옥쇄를 외치며 버틸 경우에 진행하려고 계획했던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몰락 작전에서도 원자폭탄 투하가 예정되었고, 원폭 투하 후 부대 상륙까지 준비되고 있었다. 몰락 작전 문서 참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몰락 작전에서 사용하게 될 핵무기를 실전에서 실험하는 목적이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도쿄 대공습은 현대 일본 최대의 정신적인 트라우마 중 하나다.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한국인이 전쟁하면 6.25 전쟁 당시 피 말리던 산악 고지전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듯, 많은 일본인들에게 전쟁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비가 대도시를 불태우고 박살내는 모습으로 각인시킨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전대물들에서 거대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모습들이 일본인에게 내재된 전쟁 트라우마를 보여준다는 시각도 있다.
타 국가
영국도 같은 섬나라라서 본토에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까지 자국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여러차례 폭격을 당했다. V1, V2와 같은 무기가 유명하지만,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독일은 여전히 폭격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대전 말에도 보복을 위해서 영국에 공습을 시도했다. 심지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제트 폭격기인 Ar 234를 영국 상공에 날려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독일은 2차대전 참전국 중 가장 심한 폭격을 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한 끝에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최초로 대규모 폭격을 당한 나라는 폴란드이다. 그 중에서 수도 바르샤바가 가장 큰 참화를 가장 오랫동안 입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고 9월 28일 바르샤바 전투가 폴란드군의 항복으로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는 매일 폭격을 당했다. 특히 9월 25일에는 독일 지상군의 대규모의 포격과 함께 1,200여 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출격하여 바르샤바를 때려부쉈다.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인구는 135만여 명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항복할 때까지 폴란드군 6천여 명과 시민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의 폭격으로 도시의 12%가 폐허가 되고 50% 이상의 건물이 손상을 입었다. 바르샤바뿐만 아니라 프람폴(Frampol), 비엘룬(Wielun) 등 다른 폴란드 도시들도 독일 공군의 극심한 폭격에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프람폴은 폭격 직후 멀쩡히 남은 것이 도로 2개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0월 6일, 본토의 마지막 폴란드군이 항복하면서 폴란드 침공이 종료될 때까지 폴란드 민간인 10만여 명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초창기 (1944년 6월 ~ 1945년 2월)
작전반경의 한계 탓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폭격은 처음에는 미미한 것이었다. 첫 폭격은 둘리틀 특공대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인 전체에 충격을 줬다기보단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다. 애초에 이들이 몰고갔던 건 중(中)형 폭격기라 피해를 크게 줄 수도 없었다. 둘리틀 특공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둘리틀 특공대는 애초에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어떨까?" 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항공모함에서 날아갈 수 있으면서 일본에 그나마 제대로 된 폭격을 때릴 수 있는 폭격기로 중(中)형 폭격기인 B-25가 결정되었고, 그나마도 착함은 불가능해서 기체를 1회용으로 써야 했다. B-25보다 항속거리가 길면서 폭장량도 많은 폭격기도 있었으나 덩치 및 활주거리 문제 때문에 항모에서는 이함은 커녕 탑재조차 불가능했다. 이러한 중형 폭격기 몇 대의 공격에 대해 당시 일본인들 반응은 "어떻게 미국이 천황폐하가 계신 곳에 폭격을 가한단 말인가?"라고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카더라.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를 통해 비로소 B-29의 작전반경 안에 일본 본토 전역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부터, 그리고 다른 곳에서부터 일본 공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의 일본 폭격 근거지는 중국이었다. 미국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과 동맹국이었기에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활용할 수 있었고, B-29는 쿤밍과 충칭에서 발진하면 큐슈 등 일본 본토 서부지역을 작전반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44년 초반부터 열심히 발진했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일본군의 점령지를 너무 많이 지나야 하는 탓에 가능한 한 고고도를 오래 비행해야 했고, B-29가 지닌 폭장량(약 9톤)의 반의 반도 제대로 쓰지를 못한 것이다.
이것이 B-29 한 대의 최대 폭장량. 폭탄의 크기와 양으로 보아 가벼운 소이탄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이판 전투의 전략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사이판과 괌은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안정적인 폭격기지로서, 중국 내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기에 B-29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미군은 보병들이 일본군을 사이판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투닥거리는 와중에 부랴부랴 대규모 활주로와 기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군 공병대는 무시무시한 건설능력을 발휘해서 1~2개월 만에, 사실상 임야나 다름없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다가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초대형 비행장을 뚝딱 건설해내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란 미군은 폭격기 항로상의 비상활주로 겸 호위전투기(P-51)의 기지로서 딱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를 손에 넣고자 했고, 이는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의 전략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애써 확보한 전략기지 사이판ㆍ괌에서 출격한 B-29 폭격대의 초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일본군은 빈약한 공군력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방공전을 전개했고 J2M 라이덴, Ki-45 토류 등으로 꾸준히 반격에 나서 1~3%의 소규모 손실이나마 꾸준히 입히고 있었다. 물론 Bf109, Fw190 등에 비하면 항속력도 화력도 방어력도 눈물겹게 빈약한 비행기를 몰고, 죽을 힘을 써 가며 B-29의 비행고도까지 올라갔다가,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11정+20 mm 기관포 1정으로 무장한 B-29의 밀집대형에 뛰어들며 갈려나간 일본군 전투기와 조종사는 훨씬 더 많았지만. 때문에 일본군은 B-29에 대한 자살충돌공격까지 감수했다. 때문에 중국에서 발진할 때도 사이판에서 발진한 초기 폭격에도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은 그 규모에 매우 소극적인 편이었다. 일본군 방공전투기가 도달하기도 힘들고, 도달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7,000 ~ 9,000m 이상의 고고도는 B-29에게 매우 안전한 공역(空域)이었고, '매우매우 귀한' B-29의 손실을 우려한 폭격대장은 그냥 이 고도에서 폭탄을 때려부어버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폭격대장은 무차별 융단폭격을 상정하긴 했으나 민간인의 피해까지 고려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럽 상공에서는 이렇게 폭격해도 효과를 봤지만, 문제는 일본 상공에서는 제트기류에 의해 폭탄의 명중률이 최악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고고도에서 투하되는 폭탄들은 시속 수십~수백 km의 바람(기류)를 만나며 마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종잇조각을 마구 뿌리는 것마냥 사방천지로 흩어져 낙하 탄도가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폭탄 또한 폭장량의 절반 이하 밖에 실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이루어진 폭격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B-29 약 100여 대가 출격하여 1,000 파운드 폭탄 수천 발을 때려부었는데, 명중률은 2%에 불과했다.
도쿄의 방공화기로 배치된 일본군의 3년식 기관총. 다만 오해의 여지가 있는게 도쿄 방공 목적으로 45년 당시에는 이미 780기에 달하는 대공포들이 배치된 상태였다. 이 중에는 75mm 고사포나 심지어 120mm 같은 것들 역시 배치된 상태였다. 아무리 항공기나 대공포가 부족/빈약해도 구 일본군 정도의 능력으로 자국의 수도 및 주요 도시에 방공망을 깔아놓을 정도의 여력은 되었다. 모스크바, 평양, 냉전시기의 바르샤바의 방공망을 생각하면 쉽다.
마찬가지로 도쿄에도 공습이 가해졌으나 대다수의 도쿄 시민들은 이 폭격을 한낱 유희거리로 여겼다. 시가지가 아닌, 시 외곽의 군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명중률이 형편없는 폭격이었는데다가 도쿄 시민들은 대본영에서 내보내는 엉터리 조작, 선동 방송이나 들으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근방 뒷산이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 폭격을 구경하거나, 심지어 폭격기가 오는 날짜(보통 3일 간격)까지 헤아려 가며 애타게 기다릴 정도였다. 다른 지방에서는 어디가 공습당했다고 해도 자기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무심한 투로 '또 폭격인가...'라고 관망하는 듯 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맨발의 겐같은 작품을 보면 나온다.
미군으로서는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가며 세계에서도 손꼽는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폭격기 B-29를 수백 대라는 최대 규모로 생산하고,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일본 본토를 폭격할 최적의 비행기지도 확보하고서 폭격을 가했는데 성과가 미미하니, "도대체 우리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회의가 들기에는 충분했다.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 중장은 이를 보다 못해 전략폭격대장(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을 헤이우드 핸셀(Haywood S. Hansell) 소장에서 약간 더 과격한 인사로 교체했다.
그리고 도쿄 시민들은 폭격이 더이상 놀이나 구경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다.
작전 내용
그냥 전쟁광인 성격이였으면 역사에 남지 않았거나 악명만이 남았겠지만, 르메이는 값비싼 B-29, B-29에 탑승하는 승무원, 그리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하는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르메이는 유럽 전선에서 십수 차례나 선두 기체에 직접 탑승하여 폭격기 대열을 진두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 때 그의 부관은 후방 기체를 맡았는데, 폭격기 대열에서 가장 먼저 전투기에게 공격받는 대상이 선두와 후방기체임을 생각하면 가히 솔선수범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신들을 호위하던 편대기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갈 때도 이 양반이 탑승한 선두기는 왠지 멀쩡했다. 심지어 대공포 직격을 당하고도 살아돌아온 적도 있다. 그에게 떨어진 작전 명령은 일본의 산업역량을 완전히 무력화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전임자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 거주지역을 피해 산업지대에 다시 한번 고고도 폭격을 시험해봤지만 결과는 역시 형편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대공 방어가 취약해지는 야간에 1,500~3,000 m의 저고도로 B-29를 한꺼번에 대량으로 때려넣는 것이었다. 때문에 후술하겠지만 르메이는 주간 고고도 폭격 전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도, 전임 지휘관인 핸셀 본인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다. 핸셀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전술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된 것.
겉보기에 자살 돌격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는 몇 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다. 우선, 고도 2,000 m는 기관포와 같은 소구경 대공 화기가 제대로 닿지 않으면서도 대구경 대공포는 시한 신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높이였다.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에 대해 대전 초부터 충분한 경험을 쌓아온 독일의 방공망이라면 대공포를 낮게 조준해서 다가오는 폭격기 대열에 멀리서부터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일본 측은 저공으로 날아드는 폭격기를 제대로 타격할 수단이 없었다. 기습을 포착하고 대응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전투기가 제대로 방공 임무를 수행할 리도 만무했다. 아니 애초에 저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를 줄줄이 떨어뜨릴 만한 훌륭한 조종사들이 이미 다 죽거나 자기들이 죽여버리고 없었다. 르메이는 이런 기습을 통해 아군의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저공으로 비행할 때는 고공비행에 비해 필요연료량이 적어지니 탑재 중량을 더 확보할 수 있으므로, 폭격기 설계시에 상정한 대로 폭탄 적재량을 최대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은 목조였으므로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꽉꽉 채워 보내기로 하였다.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던 기존의 폭장 비율을 소이탄 100%로 변경하고 폭격 소티 수를 대폭 늘려서,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간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제21폭격기사령부 전체와 르메이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민간인 피해가 크게 발생할 것임은 자명했고 이를 지적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메이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의 공장 노동자, 즉 일본의 군수 산업 역량 그 자체였으므로, 이 산업 역량을 무력화시키려면 결국 공장 노동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르메이는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 하지."라고 설명하고는 민간인 피해에 대한 지적을 상큼하게 씹었다. 전후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반응이었다.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르메이는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가 있었을 때인 1944년 12월에 일본군 제6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한커우(漢口)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을 가하고 위력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에서도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1945년 2월 4일에는 고베를 공습하였고 2월 25일에는 도쿄에 소이탄 공습을 가해 260헥타르 면적을 파괴하면서 소이탄의 위력을 다시 확인하였다.
소이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는, 육군 항공대에서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는 동안 해군에서는 소이탄만으로 폭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던 기존의 방법을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를 쓴 저고도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바꾼 결정적인 배경은 이 항목을 참고하자.
당시 일본의 가옥은 90%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이는 누군가 작정하고 방화하면 쉽게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건축물 재료가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고,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시점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을 실제로 투입한 이유는 3가지였다.
• 첫 번째는 몰락 작전의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져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나 인명손실을 입을지 모르는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일본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국 장병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당시의 최첨단 정밀 폭격용 조준기인 노던 조준기(Norden bombsight)조차 원형 공산 오차(圓形公算誤差)가 20~370m로 고도에 따라 조준 성능이 크게 벌어졌던 탓에 특정 건물을 정확하게 노려서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다가 일본 상공에서 불어대는 제트기류로 인해 아무리 정밀 조준해서 폭격을 한다 해도 폭탄들이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폭탄의 탄도부터 엉망이 되며 폭격 정확도는 개판이 된다. 즉 특정 건물을 노려서 폭격한다 해도 떨어지는 폭탄들이 바람에 휘말리면서 탄착지점이 투하시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서도 투하 예정지에서 벗어나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의 전임자이며, 정밀폭격론자였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제 21 폭격기 사령부에서 전출된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네이팜탄을 선택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 게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앞에서는 건물이 목조냐 석조냐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조 건축물 위주인 드레스덴도 이렇게 박살 났으니 목조 건축물 위주의 도쿄는 과연? 심지어 드레스덴 폭격때는 고폭탄과 소이탄 비율이 4:6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무사시노의 항공기 공장을 폭격할 때 르메이와 핸셀은 무려 15번이나 고고도에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쓴 정밀 폭격을 했는데 해군에서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한 저고도 소이탄 폭격을 딱 한 번 했는데 르메이와 핸셀이 15번 정밀 폭격을 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도 르메이의 폭격방침이 바뀌는데 근거가 됐다.
또한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을 비롯한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다가 쓴 방식에 똑같이 당했다는 말이다.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2가지 공습 사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된 드레스덴 폭격이고 2번째가 다름아닌 이 충칭 대공습이다. 그뿐 아니라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이 충칭 대공습 당시 소이탄을 전쟁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투하해댄 일본군을 보고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 이 사실로 인해 도쿄 대공습으로 일본이 피해자 행세와 망언을 하면 가장 먼저 중국이 비웃는다.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약점은 일본도 인식은 하고 있었다. 워낙 목조 건축물이 많으니 역사적인 대화재도 여러번 겪었고, 화재에 예민해진 덕분에 수백 년전부터 민간 의용 소방대가 치밀하게 조직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 왔다. 이런 약점에 처해 있던 차에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대본영은, 시내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는 화재가 빠르게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없을테니 시내를 일정 구역으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한 방화대(防火帶)라 부르는 빈 공간을 만들었다. 물론 그 방화대 안에 있던 가옥은 전체주의 국가답게 그냥 헐어버렸다. 또한 시내 곳곳에 방화수조, 물을 채운 구덩이 등을 마련했는데 이 탓에 모기 떼가 창궐하며 이미 반 년이 넘는 소방훈련에 지쳐있는 도쿄 시민들을 더 힘겹게 했다.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 폭격작전을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이라 이름 붙이고 폭격기를 준비한다, 그리고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 기의 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가 출격했다. 이들은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천 피트(약 1.5 k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총 2,400여톤의 소이탄(네이팜탄)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소령의 지휘하에 폭격에 나섰다.
도쿄시각으로 3월 9일 밤 10시 30분, NHK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 만(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군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몇시간 뒤인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lkg[출처 필요]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 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폭격기 280여 대가 폭음을 울리며 3,000 m의 고도로 진입해왔다. 책상에 올려놓은 찻잔 속의 녹차가 밖으로 튈 정도로,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B-29 놀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것을 다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6시간 동안 300여대가 넘는 B-29들은 도쿄 상공에 E-46 확산탄 8500발과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은 도쿄 시내 8,500여 곳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불꽃이 밤하늘 30 m 높이까지 치솟으며 치명적인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여기에 애초부터 불어 오던 시속 27 ~ 45 km의 지상풍이 만나자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화재는 화재끼리 만나면 덧셈이 아닌 곱셈으로 위력이 증폭되는 속성이 있는데, 이를 '화재선풍'(火災旋風)이라고 한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소이탄으로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재로 가열된 공기는 팽창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여 풍속은 점점 강해졌다. 이 격렬한 대류 현상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을 만들었으며 시속 65km가 넘는 강풍은 불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를 빨아올렸다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불티들은 다시 잔불을 일으키며 화재를 확산시키고 작은 화재들이 다시 합쳐져 더욱 더 화재를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수십~수백 m를 우습게 뛰어넘어서, 경로상에 위치한 목재든 인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유기물을 닥치는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스스로 꺼지거나 큰 비가 내리는 것 외에 인력으로는 소화가 불가능하다. 화재 예상 진로상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화대를 구축하는 정도가 한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 때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경찰, 소방관, 훈련받은 민간요원들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당시의 행동지침을 다룬 군가겸 가요도 존재했다.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 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 ㎢당 1개 꼴로 투하하고, 그로 인한 화재 그 자체가 폭풍처럼 회오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 진압을 시도하던 사람들도 모조리 화재에 잡아먹혀 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지만 화재선풍이 시속 100km 가까운 속도로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버린 탓에 뜨거운 연기 속에서 질식해 죽어갔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화재현장의 열기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화상을 입거나, 옷이 갑자기 화르륵 타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도쿄 동북쪽에는 피난민들이 간논사라는 절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공창가가 있었으며 여기는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불에 타 죽어갔다.
도쿄 남쪽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明治座)로 피난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안의 산소도 부족해져갔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했고 극장 안으로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그냥 산채로 화마(火魔)의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스미다 강은 화염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사람들 수만 명이 강의 얕은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네이팜은 강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랐으며, 화재 선풍의 열기로 인해 강물도 끓어올랐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은 물 속에서 삶아져 죽었다. 강변에,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도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끓는 물에 뛰어들어 죽어갔다. 강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불에 타 죽거나 증기에 질식사하곤 했고 겨우 살아남았어도 심각한 화상은 피할 수 없었다. 네이팜탄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투하된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이 이 강렬한 불길을 지속시켰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 상당수도 이런 죽음을 맞았다. 이건 뭐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이렇듯 미군의 본격적인 폭격으로 도쿄는 밤에는 시뻘겋게, 낮에는 새카맣게 타올랐으며,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도처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스미다 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시체인 것은 틀림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군대가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제서야 히로히토 덴노는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2시간 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의 화신'이라는 덴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다고.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 ㎢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83,793명이 목숨을 잃었고 40,918명이 중상, 이재민이 100만 명 이상 발생했다. 조선인은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로 인하여, 종전 직후 도쿄 인구수는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관동 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 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시는 옛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에는 이런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평가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수도를 불타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공습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제국 치하에서 지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씻어지기 어려운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켜준 덕분인지 한동안 한국 네티즌들에게 옹호를 받았고 일본 제국 풍자와 일본 극우를 조롱하는 가치가 있었으나 실제 전술적, 전략적으로 불가피했는지는 따로 확인해볼 문제다.
예로 르메이는 중간에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미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르메이 장군은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게 더 효과적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르메이는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후 연구에 따르면 미 육군 폭격기가 허구헌날 비행장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일본 육해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실제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트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비행장을 폭격하는 와중인 4월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의 일부를 떼서 항만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그 결과 한달간 기뢰가 1만 2천여 개가 살포되었는데, 약 배수량 100만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을 격침시키고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릴 수 있었다. 또한 현대까지도 연안 해운에 대한 의존이 큰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폭격기로 불바다로 만들어버린 도쿄 대공습의 화려함에 비하면 수수한 작전이라 가려지긴 했지만 전후 분석 보고서는 이 기뢰 살포가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만 여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인을 직접 죽인 것까지 포함해도) 민간인을 죽게 한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전후 분석 결과로는 해상 수송을 차단한 작전도 매우 효율적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군내부에서 나왔다.
Warren Kozak,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에서는 일본 전역의 공업기반을 쑥 재배지로 만들어버린 덕분에 몰락 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제의 공업 생산량이 급락해서, 원자폭탄과 함께 수십만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분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란 걸 감안하자. # 위의 군사보고서같은 전문가는 아니다. 오히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닌데 일본군에게 치명적 피해를 주며, 일본 내부에서 굶어죽는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나와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고도 (일본군이 항복하지 않아) 일본인들이 알아서 내부에서 대량으로 자멸해준 게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정도다.
민간인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꼭 불가피했다고도 볼 수 없으며 이런 방식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지역 폭격으로 발전해서 민간인들이 떼로 학살되는 상황까지 발전했다. 특히 문제는 정작 북진할 때는 무차별 폭격이 없었는데, 북진을 하지 않을 때 발생했다는 것.
차라리 중일전쟁과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복수란 관점에서 옹호하는 게 낫다. 그러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기엔 미군에게 너무 미안한 것이, 중일전쟁기 일본군은 민간인을 대놓고 학살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과 포로를 상대로 참수 경쟁까지 벌였던 미치광이들이었다는 점에서...
민간인 희생이 있었지만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내서 희생자가 줄어들었다는 평가는 도쿄대공습이 아니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작전이다.
리그베다 위키부터 이 문서의 원폭 투하의 성과를 도쿄 대공습의 성과로 잘못 썼었고 학술적 근거 없이 지속됐다.
대공습의 원인
일단 현재까진 학설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인종주의다.
• John W. Dower, War Without Mercy: Race and Power in the Pacific War
• Craig M. Cameron, American Samurai: Myth and Imagination in the Conduct of Battle in the First Marine Division 1941-1951
태평양전쟁기 미국과 일본은 서로 인종차별적인 선전으로 비하하며 서로 증오심을 키운 것을 근거로 제시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게 독일지역 폭격과 북한지역 폭격인데 독일지역에 대한 민간인 폭격은 미국 내에서도 여론이 비판적이었으나 일본과 북한에 대한 폭격은 독일같은 비판적인 여론이 없었다.
위의 단순 인종주의설에 반대하면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는 학자에는 미국 일리노이대학 역사학과 교수 존 린이 있다. 존 린은 진주만 공습, 죽음을 불사하는 일본 군인들의 전투력, 미국인 포로학대, 집단자살 등 군사요소와 문화요소가 태평양지역 미군들에게 영향을 준 것도 복합적인 원인이라 지적한다.
• 존린, 배틀 전쟁의 문화사, 청어람미디어, 2006
한국의 김태우 교수는 미국의 폭격전략과 함께 중일전쟁에서 벌인 일본군의 무자비한 폭격이 도쿄 대공습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한다.
•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현재 학계에서는 도쿄 대공습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처럼 전술 전략적으로 불가피한 행위로 평가받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