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운현이 작은 감탄성을 내뱉고 희연을 바라보았다.
“사이먼 회장이었군. 어쩐지 낯이 익다 했지.
혜란이가 이번엔 거물을 골랐군. 김 희연씨도 그를 아는 겁니까?”
쓴 맛이 느껴지는 운현의 어투에
희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연결된 두 개의 호실 열쇠 중 하나를 희연에게 건네주고
운현이 먼저 들어가자,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문을 연 희연이
가까운 소파의 가장자리에 무너지듯 앉았다.
혜란과의 키스신을 본 충격은 예상 밖으로 희연을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닉을 향해 웃음을 보인 것도 일종의 오기에 다름 아니었다.
‘당신이 무얼 하든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당신은 이미 나의 밖에 서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마음을 미소에 실어 보내는 마음이었지만,
마음속을 관찰해보면 그건 확연히 질투에 지나지 않았다.
헤어진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게 정상인가?
아니면 자신이 어느 한 가지도 닉에게서 마음을
거두지 못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시차 차이에서 오는 멍한 현기증과
혜란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주는 충격 속에서
희연의 정신이 까무룩 가라앉았다.
반은 잠들고 반은 정신을 놓아버린 희연의 폰이
길게 울어댔지만 축 늘어진 희연은 미동도 없었다.
희연은 그렇게 가물거리는 의식을 떠돌다
맞춰둔 알람에 눈을 떴다.
구겨진 옷을 갈아입고
일정에 따라 운현과 진행하던 사업의 중간 과정을 매듭지은 후,
식욕이 없던 두 사람은 서로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힘든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을 가장한 두 사람이었지만
음식의 양은 줄어들지 않은 반면 와인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잔을 천천히 비운 운현이
희연의 잔이 비길 기다려 입을 열었다.
“난 독한 걸로 한 잔 더 해야겠소. ......,
혼자 마시긴 싫은데 괜찮다면 자리를 옮겨서 같이 한 잔 하겠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희연이 먼저 일어났다.
자기엔 이른 시간이기도 했지만 선잠을 잔 후라,
혼자 있으면 생각만 많아질 것이 걱정되던 참이었던 희연이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비교적 조명이 어두운 칵테일 바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김 희연 씨는 어떤 걸로 하시겠소?
난 독한 위스키 생각이 간절한데 말이오.”
“폭탄주 보다 독한가요? 전 소주는 두병 정도 먹을 수 있는데요.”
“후, 나보다 센데요. 우리 한 병 시켜서 반씩 마십시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꼭 필요할 때가 가끔은 있더군요.”
부르기도 전에 다가와 주문을 받아가는 직원에게 팁을 건네고
고개를 돌리던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희연은 운현의 시선을 따라가려는
자신의 얼굴을 힘겹게 테이블에 고정시켰다.
운현이 말을 잇새로 내 뱉었다.
“오 대리와 사이먼 회장이 한 칸 건너의 테이블에 앉았소.”
운현의 말에 어깨를 움찔한 희연이
차분한 눈길을 들어 운현을 바라봤다.
“......, 본부장님, 불편하시면 그냥 일어서시죠.”
“......, 희연씨가 괜찮다면 나도 상관없소.”
두 사람은 세팅된 위스키를 한 잔 씩 마시고 다시 잔을 채워,
약속이나 한 듯 연거푸 잔을 비웠다.
목으로 넘어간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속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희연은 목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것이
술기운 탓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굳이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우리를 향해 나란히 앉았소.
유치한 짓은 아까 한 번으로 끝내는 게 낫겠지?”
여유로워 보이는 운현의 말에 희연의 마음이 아릿해 졌다.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은 희연이 운현에게
사과를 강요하자 운현이 과장되게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 규현에게 비밀을 지켜 준다면
다음에 희연씨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 주겠소.
책임지라고 한다면 규현에게 몰매를 맞더라도 책임질 테고 말이오.“
“어떤 책임이요?”
“흠, 아가씨의 입술을 뺏었으니 당연히.......,”
“
됐어요. 실없는 농담 하시는 걸 보니 형제간이 맞긴 맞나 보군요.
어이없는 일이긴 했지만 더 이상 거론하지 마세요.
그리고 몰매를 맞는 다면 저에게 맞으셔야지 팀장님이 거기 왜 들어가요?”
“흠,......, 그럼 용서한다는 의미로 한 잔 더 합시다.”
세 번째 잔을 홀짝 거리며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운현이나 희연 모두 시선을 일정한 범위에 한정시켜놓고
서로의 속도에 맞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술병을 비워갔다.
마지막 잔을 비우며 운현이 입을 열었다.
“사이먼 회장과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어도 되겠소?”
“......, 잠깐 사귀다 헤어진 사이요.”
“......, ”
“......,”
희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운현이 다가와 희연의 팔을 잡았다.
“전 괜찮아요.”
“난, 괜찮지 않아요. 희연씨를 잡고 걸어야 될 것 같아요.”
가라앉은 운현의 눈 속에서 어른거리는
자신의 얼굴이 너무 초라해 보여,
희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세요. 혼자보단 둘이 낳겠죠.”
자신을 잡은 운현의 팔을
가만히 푼 희연이 그 팔에 팔짱을 끼었다.
희연이 운현에게 입술을 벙긋거리자
운현이 귀를 가까이했다.
“아는 체 하는 게 자연스러울까요? 아니면......,”
“서로에게 정신이 팔린 연인의 연기는 어떻소? 어려울까?”
“......, 제가 안쪽에서 걸으면서 시선을 본부장님께로 돌리면
저 쪽에선 본부장님의 얼굴만 보일 테니
연기는 본부장님께서 알아서 하시면 되겠네요.”
“희연씨 같은 미인이 상대라면 너무 쉬운 연기지. 자, 그럼 갑시다.”
바의 어두운 분위기와 희연의 긴 머리가, 고개를 돌린 얼굴을 가려주었다.
운현은 희연에게 눈길을 고정 시키고 걸어 나갔는데,
희연의 눈에 비친 운현의 얼굴은, 사랑의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냉정하고 거만해 보였던,
그래서 애정도 가볍게 볼 것 같았던 운현의 고통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 희연의 마음을 아리게 하고 마음을 흔들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로 보였던 닉의 얼굴이 운현의 아픈 표정과 겹치자,
겹겹이 감싸 놓았던 마음의 벽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테이블에 가까워지는 내내 느꼈던 닉의 시선,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지나칠 그 거리에서 희연의 발이 머뭇거렸다.
그리고 강제로 당겨지기라도 한 듯
희연의 시선이 닉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희연이 몸을 돌리자 운현도 멈춰서며 턱을 세웠다.
희연의 시선이 닉과 혜란 사이를 헤매는 사이, 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닉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혜란의 쨍하며 깨지는 음성이 먼저 울렸다.
“어머, 희연씨도 한 잔 하러 왔나봐?
우리도 분위기 좀 잡으려고 왔는데 말이야.
같이 한 잔 할래? 아, 아니지. 그러면 내가 좋은 분위기를 깨는 건가?”
희연은 혜란의 말을 흘리며 닉을 바라보았다.
닉은 무표정한 얼굴로 희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동안 닉과 시선을 맞추던 희연의 입이 열렸다.
“아뇨, 오 대리님. 우린 이미 한 잔 했습니다.......,
그리고 뒤의 말씀은.... 예. 라고 해두지요.
운현씨, 한 잔 더 하시고 싶으시면 그러시던 지요.”
희연의 제안에 표정을 가라앉힌 운현이 대답했다.
“평소라면 사이먼 회장님과의 자리를 마다할 내가 아니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라서 말이야.
오 대리도 그럴 것 같으니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 미안합니다. 회장님.”
운현의 말에 닉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디비비입니다.
마음만큼 글 쓸 시간이 나지않아 아쉽고,
제 글을 보아주시는 분 들께 죄송하기만 합니다.
설 연휴 후에나 희연과 다시 만나시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중편 ]
그녀의 조건 29
디비비
추천 0
조회 772
08.01.30 00:48
댓글 12
다음검색
첫댓글 너무 오랜만이에요, 디비비님ㅜㅜ 설 연휴 지나고야 볼수있다니ㅜㅜ 완결때까지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위에 오타요! 운현 말 중에 낳겠지? 요부분이요, 작가님~
강가라님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기다림을 주시는 것은 아닌지.... 잘 읽고 갑니다. 건필!!
노력해 보겠습니다.^^ 형광펜님 감사합니다.^^
펜이예요 ^^* 글이 늦게 올라와서 아쉽네요
ㅎㅎ^^;; 명운사랑님 감사합니다.^^
저두요~~ 맨날맨날 기다렸는데.. 다음편은 빨리 주시면 더욱 좋겠어요 ㅎㅎ
네, 점점 더 죄송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라밴다님 감사합니다.^^
어머어머 기다리고 있었어요 ㅜ _ㅜ디비비님 완전 사랑해요 << 꺄하하하 , 설연휴 잘 보내시구요 기다리겠어요 -_-*
헉!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규현? 개보다 운현이란 캐릭이 더 맘에 들어요~무튼 정말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 저도 그렇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