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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The Battle of Okinawa, 1945년)
찰스 터너 조이: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일본군은 전쟁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구역에서는요.
체스터 니미츠: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만 빼고 다 취소하도록.
- 오키나와 상륙 직후 대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이오지마(행정구역상 도쿄도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해 있다.)와 함께 전후의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는 소련군이 치른 슘슈 섬 전투 등이 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지옥을 체험했던 미군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을 감행한다. 이후 6월 말에 함락될 때까지 약 2개월간 오키나와는 생지옥이 되었다. 오키나와 점령 이후 류큐 독립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될 무렵 유럽 전선에선 동부 독일을 제외한 독일 지역에 서부 연합군이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라인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루르 지역에 갇힌 B집단군은 포위되어 수주 후 항복을 하게 된다. 라인강과 베를린 사이엔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할 지형적 이점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부대들은 그간의 전투로 포위되어 소멸된다.
당초 미국은 중국의 일본 점령지를 먼저 탈환하려 했는데,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군이 개박살나 해안가가 전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오키나와 상륙으로 작전을 바꿨다
오키나와 전투가 한창이던 1945년 4월 12일,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뒤를 이었다.
2.1. 1944년 말~1945년 초
1944년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태평양 전선의 승패가 명확히 갈린 해였다. 마셜 제도 강습을 시작으로 라바울 무력화, 사이판 전투와 괌 탈환전,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항모 기동부대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리면서 미국은 이제 태평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 시간을 정해놓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2.2. 대만에서 오키나와
오키나와 침공에 대한 플랜을 처음 내놓은 것은 미국의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사이판 전투 이후 체스터 니미츠와 어니스트 킹의 회담 자리에서 킹 제독이 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물었고 스프루언스는 그 자리에서 "오키나와"라고 답했다.
미 해군의 기존 계획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후 괌을 거쳐서 대만으로 가서 최종적으로 중국에 상륙, 중국군과 합세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을 축출해 내고서 일본의 항복를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인해 이 대만 침공론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해 버리고 만다. 태평양 해역군에서는 대만침공론의 전략적 의의가 없어지자 팔라우 제도의 펠레리우 섬 침공 이후에는 차후 전략적인 목표가 없었고, 이대로면 필리핀의 루손 섬을 점령, 필리핀을 발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확한 마스터플랜을 가진 맥아더 장군이 본인의 소원대로 대일전의 단일 총사령관이 되어 태평양 함대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떨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이 변화를 태평양 함대 내에서 감지한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니미츠가 태평양해역군의 육군 관계자들에게 이를 물었고,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10월 3일, 합동참모본부에 3월 1일까지 오키나와 상륙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아내게 된다.
3. 양군의 전투 준비
3.1. 일본군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 준비는 1944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천호 작전이라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천호 작전 이전에 첩(捷)호 작전이 있었다. 필리핀이 공격받을 경우 첩1호, 오키나와/대만 방면이 공격받을 경우 첩2호 작전이,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가 공격받을 경우 첩3호가, 홋카이도가 공격받을 경우 첩4호가 각각 발동되는 개념이었다. 이에 필리핀 방면으로 미군이 진공해 오고 44년 10월 첩1호 작전이 발동되지만 작전은 실패, 궁지에 몰린 대본영은 새 방어계획으로 천(天)호 작전을 수립한다. 오키나와 방면이 천1호, 대만 방면이 천2호, 남중국해 방면이 천3호, 하이난 방면의 천4호로 계획되었고 미국이 오키나와 방면으로 진군하면서 45년 4월 1일 정식으로 천1호 작전이 발령된다. 그러나 천1호 작전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작전계획이라는 것이 오키나와가 공격받을 경우 대만, 큐슈, 필리핀에 전개한 항공세력이 일제히 총출격해 침공하는 미국 함대에 맹렬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오키나와 전투 발발 기준으로 필리핀은 일찌감치 무너졌고, 대만의 항공세력은 대만 항공전으로 소멸했기에 남은 건 본토의 전력뿐이었다.
이런 항공작전과는 별개로 오키나와 방위를 위해 1944년 3월 22일, 제32군이 창설되었다. 뒤이어 필리핀 해 해전과 사이판 전투, 제2차 괌 전투 등이 연이어 벌어지자 경악한 대본영은 필리핀과 오키나와에 가용할 수 있는 병력과 장비를 있는 대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중 다수는 필리핀으로 가다가 물고기 밥(...)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키나와에는 충실한 전력 증강이 이뤄졌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육군의 핵심 전투부대는 아래 5개다.
• 9사단: 본래 호쿠리쿠 지역에 기반한 사단이었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3년여간 중국에서 실전을 경험한 정예부대였다. 이후 잠시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삼각사단으로 편제를 개편한 후 만주에 배치되었으며 사이판 섬 함락 후 대만으로 전환 배치되었다가 다시 오키나와로 옮겨졌다.
• 24사단: 만주 하얼빈에 주둔한 사단으로 1939년 창설된 신편사단이지만 그래도 리즈 시절에 창설된 부대라 병력이나 장비는 충실한 편이었다. 다만, 울아이 환초, 야프 환초, 사이판 섬 등에 부대를 쪼개어 파견했고 이들 파견대들이 모두 전멸당한지라 오키나와에 도착한 본대 전력은 부실한 편이었다. 24사단은 그 부족한 전력을 현지징병을 통해 메꿨으나 훈련도나 경험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 62사단: 1943년에 창설된 신편사단이지만, 중일전쟁의 대륙타통작전에 참여하여 괜찮은 전공을 올린 부대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오키나와로 전환배치되던 중 사단의 중장비와 차량을 싣고오던 쓰시마마루가 미군 잠수함에게 격침당해서 도착 후에는 거의 알보병 사단이 되어버렸다.
• 44독립혼성여단: 1944년 6월 창설되었으나 오키나와로 오던 중 수송선이 격침당해 여단 병력 90% 이상이 수장되었다.(...) 때문에 본토의 긴급증원병력이 새로이 44여단에 편성되었고 현지 징병으로 부족한 병력을 메꿨다.
• 27전차연대: 전차연대긴 하지만 있다는게 97식 전차 14량과 95식 경전차 13량이 전부다. 참고로 오키나와에 투입된 M4 셔먼 전차와 그 파생형이 600대가 넘는다.
이 외에 시설단(공병)이 만 명 넘게 있었고, 현지 민간인들을 강제로 동원한 전력이 수만 단위로 있었다. 그리고 육군 외에도 해군이 오키나와 기진 기간요원을 중심으로 하여 1만 명 넘게 있었고, 놀랍게도 오키나와 전투 기간 내내 해군은 육군의 지휘에 협조적이었다.
추가로 이들을 지원해줄 항공세력으로 본토의 수많은 가미카제 기체들(...), 해상세력으로는 전함 야마토 및 약간의 호위함이 있지만 익히 알다시피 해상세력은 오키나와 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2. 연합군
연합군의 공격부대는 당장 해군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50임무부대가 오키나와 인근 해역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철저히 장악하고, 50임무부대와 별도로 직접적인 상륙지원을 하는 51임무부대에는 화력지원을 위한 다수의 전함, 순양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별개로 사이판의 21폭격기사령부도 오키나와에 공습을 해주기로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상륙부대의 경우 육군과 해병대에서 각 1개 군단씩이 편성하여 제10군이 만들어졌다.
• 제10군: 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중장
◦ 군 직할 육군 제27사단: 길버트 군도, 마셜 군도 전투 및 사이판 전투에 참전했다.
◦ 군 직할 육군 제77사단: 괌 탈환전과 레이테 섬 전투에 참전했다.
◦ 군 직할 해병 제2사단: 과달카날 전투, 타라와 전투, 사이판 전투, 티니안 전투에 참전했다.
• 육군 제24군단: 군단장 존 하지 소장 - 해방 후 한국 미군정청 장관을 지냈다.
◦ 육군 제7사단: 알류샨 열도 전역과 콰잘레인 전투 및 레이테 섬 전투에 참전했고 종전후 오랫동안 주한미군으로 주둔하여 한국과도 인연이 큰 부대이다.
◦ 육군 제96사단: 레이테 섬 전투에 참전했다.
• 해병 제3상륙군단: 군단장 로이 가이거 소장
◦ 해병 제1사단: 과달카날 전투, 글로스터 곶 전투, 펠렐리우 전투에 참전했다.
◦ 해병 제6사단: 1944년 편성된 신설사단이지만 예하 대대 다수가 실전 경험이 있다.
하나같이 베테랑들로 강훈련에 무지막지한 실전을 거친 정예들이었다. 장비도 풍부해서 사단마다 전차대대가 배속되어 있었고 포병화력도 강했다. 심지어 이게 정상편제인데, 오키나와서부터 일본군의 방어가 강해질 것이라 예상한 미군 지휘부는 침공을 맡은 각 사단에 예비병력과 각종 지원부대를 넉넉히 배속해줘서 사단마다 병력이 2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이걸로도 부족해서 만에 하나 진격이 막힐 경우 예비부대로서 뉴칼레도니아에 육군 1개 사단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10・10 대공습
1944년 10월 미군은 오키나와에서의 본격적인 작전에 앞서,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 해군력 및 방공 전력 등을 미리 손보기 위해서 폭격을 계획하였다. 목표는 일본 군함이 다수 정박해 있는 나하항 및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 여러 활주로 등이었다. 44년 10월 9일 밤 미국 항공모함이 오키나와 근해에 도달하였고, 다음 날 오전 6시경에 출격, 공습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레이다 및 초계기의 부족 등으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공습이 있었던 10일에 오키나와를 담당하던 제32군의 도상연습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각지의 사령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지휘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병사들도 "정말 훈련 실감나게 하네"라고 생각하다가 대처가 늦어지기도 했다. 주민들도 공습을 훈련으로 오해하고 있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공습으로 일어난 화재가 11일까지 지속되어 나하 시가지의 9할이 파괴되는 등, 오키나와는 이 공습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주둔한 일본군의 전투력은 심각하게 깎여 나갔다.
4.2. 지상 전투
펠레리우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해안 수비를 포기하고 내륙 수비에 주력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자체는 대단히 순조로웠다. 그러나 일단 내륙 점령을 위해 진격을 개시하자 각지에서 일본군이 격렬한 저항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미군의 피해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 당시 섬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한 미군의 전술(함포로 해안 방어선 제거→상륙 후 거점 확보→공격해 오는 일본군 격멸)은 43년과 44년의 경험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나,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애초에 미군 격퇴 같은 건 아예 포기하고 최대한 동굴 진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끄는 것을 택했고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미군 측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군은 류큐 왕국의 요새였던 우라소에 구스쿠(浦添城)를 주요 방어 거점으로 삼아 틀어박혔는데, 12세기 무렵 지어진 이 성이 완전 천연의 요새였던지라 미군의 육상작전을 지휘한 존 하지 소장으로부터 '구조물을 폭격으로 싸그리 날려 버리지 않는 한 이곳의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소리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또 류큐 왕국의 궁성이었던 슈리성은 일본 육군 제32군의 사령부로 개조되어 방어를 담당하였다. 한편 오키나와는 석회암 지대로서 가마(ガマ)라고 불리는 석회동굴이 많이 발달해 있는데, 일본군은 이 가마들을 기지로써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가마에 피난민들이 들어차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내쫓고 점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미군은 여러 차례 이런 전투를 겪어 어느 정도 대처 방안을 마련한 상태였고, 이오지마에 비해 큰 섬인 오키나와는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활동하기 용이했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하고 수송하기도 편리했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본군을 아작내기 쉬운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은 동굴 진지를 엿 먹이기 위해 이곳으로 보병용 화염방사기와 M4 셔먼의 화염방사기 장착 모델들을 대량 공수해 왔으며, 덕분에 미군이 이오지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섬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데에는 겨우 3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단기간 엄청난 희생으로 전략폭격의 필요성이 커진 전투)
오키나와를 수비하는 일본 육군 제32군에게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던 것도 비교적 신속한 전투 경과에 한몫했다. 제32군에 배속된 전투부대는 보병사단 4개, 보병여단 5개라는 방대한 것이었으나, 정작 오키나와 섬에 배치된 병력은 9, 24, 62사단과 44여단뿐이었고, 그나마도 9사단이 대만으로 차출당하면서 새로 보충해 준다는 84사단도 수송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견되지 않았다. 만약 84사단이 히메지에서 오키나와로 배치되고 미야코 섬에 배치된 28사단과 나머지 4개 여단(일본군 여단은 보병연대 2개가 기본편성이다.)이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보병대대의 숫자만으로는 미군보다 더 많아지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미군이 2개월 만에 점령을 완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일본 육군 중 2개 사단만이 완전 장비를 갖췄고, 전차도 95식 경전차 하고와 97식 전차 치하로 구성된 1개 연대뿐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오키나와 일본군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었는데 일본군 치고는 비교적 넉넉한 포병 전력이었다. 본래 일본군 사단 및 여단 포병대는 미군에 비하면 양과 질 모두 열악하여 보병 부대에 제대로 된 화력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군과의 교전은 2차대전 내내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독일/소련 육군은 사단포병을 4인치 대의 야포를 주력으로 6인치 대의 대구경 야포를 지원 화력으로 구성했지만, 일본 육군 보병사단들은 대부분이 95식 75mm 야포나 동구경의 산포로 사단포병의 주력을 구성했다. 4인치 야포는 그야말로 지원화력이고, 그나마도 포병연대 전체의 야포수는 미/독/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사실 75밀리 야포라고 갖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62사단은 아예 사단포병대가 없었다! 보병여단의 포병대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10cm 이상의 중포는 아예 배치되지도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섬에 주둔한 24보병사단의 포병대에게 100mm 야포와 150mm 곡사포가 배치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필리핀으로 가야 할 중포병 화력들이 수송로의 안전 문제 때문에 배치되지 못한 채 오키나와로 몰렸기 때문으로 일본군에게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사단포병이 없던 62사단에게 포병 화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군단포병조차 열악하던 당시 일본육군에게 야전군 직할로나 배치되는 중포들이 군단에게 무더기로 굴러들어 온 것. 거기다 근거리에서 미군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던 98식 중박격포도 있었는데, 최대사정은 1.2km로 매우 짧지만 거대한 쓰레기통에 작약을 가득 채운 듯한 포탄 때문에 한번 터지면 파편량이 엄청나서 모여 있는 보병에게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도 도저히 오키나와 방위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과 미군의 전력차는 컸다.
카미카제 공격을 받고 불타오르는 미 해군 에식스급 항공모함 벙커힐.
하지만 카미카제로 격침된 정규 항공모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수송선을 개조한 호위항공모함은 몇척 격침되긴 하지만, 미 해군은 호위항공모함을 한 함급에서만 50척을 만들었으니.
미 해군 내 오키나와 상륙 반대론자들은, '이오지마에서도 일본 앞마당에 가니까 육상 발진 항공기의 항공 위협에 계속 시달렸는데, 큐슈에서 채 1000km도 떨어지지 않은 오키나와는 카미카제 등을 비롯한 일본군의 육상 발진 항공기에 의한 항공 위협은 이오지마에서 겪었던 것과 견주어도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항공 위협의 차단을 위해서 미 해군은 영국 태평양 함대까지 끌여들이기에 이른다. 킹 제독은 영국이 다 해 놓은 밥에 밥숟가락이나 얹으려는 거라며 반대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스프루언스랑 니미츠가 찬성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별로 사이도 안 좋던 육군 항공대에 사정해서 제21폭격사령부 소속 B-29를 동원해 카미카제 특공기가 이륙할 것으로 추정되는 비행장을 쉬지 않고 폭격해서 아예 비행기를 띄우지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 이는 특공기 이륙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뼛속까지 전략폭격론자였던 커티스 르메이는 불만이 가득해서 기회만 나면 다시 산업 시설 폭격하게 해 달라면서 징징거렸다. 여기에 헨리 아놀드 육군 항공대사령관까지 가세해 해군에 불만을 제기하였으나 킹 제독은 '그럼 해군 협조 없이 육군 항공대 혼자 잘해 보시든가'라고 하며 불만을 잠재웠다.
미 해군은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시행된 기쿠스이 작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격침 26척에 피격에 의한 피해는 164척이었다. 기쿠스이 작전에 동원된 일본 항공기 수가 육해군 항공대 합쳐서 약 8,000대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로 관한 미 해군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육상 전선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서 해군 지원 함대가 해안에 묶여 점점 더 카미카제에 노출된다고 생각한 태평양 함대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4월 23일 시찰 나온 자리에서 미 제5함대 56기동부대(TF-56, 5함대 상륙 해상군) 사령관 겸 미 제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육군 중장에게 전선을 조금 움직이라는 압박을 주었으나, 버크너 중장은 육군 소관인데 해군이 상관 마셈~이라는 취지로 '그것은 지상작전'이라고 언급하며 불만을 표시했고, 니미츠는 곧바로 "그것이 지상작전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루에 1.5척을 함정을 잃고 있으니 5일 이내에 전선을 이동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전선을 움직이게 하겠다"고 그가 해임될 수 있음을 언급했다. 10군은 해병대 제3상륙군단과 육군 24군단으로 구성된 합동부대로 니미츠 제독의 지휘통제 아래 있었다.
미 해군이 카미카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는지 알만한 사례. 이건 카미카제에 예민해져 있던 것도 한몫 하지만, 버크너 중장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니미츠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을 단순한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태평양 해역군의 통합군 사령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해군뿐만 아닌 통합군으로서의 시각을 계속 요구했다. 사이판에서 해군의 같른 식구라 할 수 있었던 해병대의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랄프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했을 때도 각 군의 차이를 간과한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잘못이 더 크다 보고 내친 판에, 저런 식으로 각 군간 선을 딱 그으려는 행위는 니미츠 제독의 눈밖에 벗어나기 충분했다.
버크너 중장은 곧 바로 현실을 인식하고, 그날 오후에 제3상륙군단장 로이 가이거 해병 소장의 사무실에서 이어진 브리핑에서 몇일 안으로 가이거의 3상륙군단을 육로를 통해 남쪽의 주요 전투지역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말했다. 해병대 사령관 반데크리프트 장군은 사이판에 있는 해병대 2사단으로 적의 측면이나 후방에 상륙작전을 제안했지만, 버크너는 거절하고 원안을 고수했다. 니미츠 제독은 버크너 중장의 제안을 승인했다. 그러나,10군이 실제 전선을 돌파하는데는 거의 1개월이 걸렸고, 상륙작전 계획을 버크너가 거부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 8개월 전 사이판 전투 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육군과 해병대로 이루어진 상륙부대를 해병대 장교가 지휘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들끓었다. (사이판 전투 당시에는 해병대 장교가 지휘하는 육군과 해병대 상륙부대의 인명손실이 커서 해병대를 육군 장교가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이런 보도와 여론은 각 군간의 불협화음을 가져올 수 있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포레스털 해군장관과 미 제5함대 합동원정부대(TF-51) 사령관 리치몬드 터너 해군 중장, 미 제5함대 고속항모 기동함대(TF-58) 사령관 마크 밋처 해군 중장은 황급히 육군의 전술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해군 대장도 이례적으로 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오키나와 작전이 훌륭하게 수행되었다고 언급함으로써 육군의 전술을 칭찬했다. 이런 조치로 큰일이 벌어질거 같았던 대립은 곧 사라졌다.
기쿠스이 작전 자체는 카미카제를 이용해서 최대한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였고, 비용 대비 효과로 보자면 상당한 낭비였다. 이 작전의 일부로 행해진 야마토 특공 작전에서 전함 야마토와 상당한 해군 전투함들도 상실되었다. 야마토를 이용한 기쿠스이 작전의 요지는, 해군 선박을 먹이로 내주고, 미군 항공기를 대공포로 격추, 이후 항공기로 인한 호위를 잃은 미군 항모를 카미카제로 요격, 격침한다는 것이지만 사실 이래도 당시의 미군 앞에서는 티스푼으로 바닷물 퍼내기 같은,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왜냐하니 저 무렵의 미 해군 항공모함 규모가 호위항공모함까지 포함하면 100척이 넘었기 때문. 호위항공모함을 빼고 정규항공모함으로만 쳐도 10척은 넘었던 때다. 그나마 실제 전과는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4척 침몰 외에도 구축함 4척이 크고 작은 손실을 입고 야마토에서만 전사 3,055명, 그 외 함선에서 1,187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은 전투기 3대, 헬다이버 4대, 어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었고 조종사 4명과 항공 승무원 8명이 전사하였다.
사족으로 기쿠스이 작전기간중 벙커힐이 피격되는등 가장 치열했던 5월 11일 전투에서 15번 초계구역의 구축함 에반스에 9시20분을 전후해 격돌한 하야부사 4대는 조선인 가미카제로 유명한 탁경현 소위의 기체거나 적어도 함께 출격한 51진무대의 편대기들로 추정됨.
45년 4월 1일 천1호 작전 발령과 동시에 남아있던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에도 수상 특공 명령이 내려온다. 당시 껍데기만 남은 제2함대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는 작전에 반발했지만 1억 총특공의 선구가 되어라라는 명령에 수긍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전함 야마토는 키쿠스이 작전의 일환으로 편도 연료와 1170발의 주포탄을 싣고 오키나와로 상륙해오는 미군을 막기 위해 출항한다.편도연료로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그 상태로 해안 모래밭에 올라타(좌초)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작전이었다. 숨겨둔 비밀 무기로 일거에 전황을 바꾸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 그저 죽을자리를 찾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최소한의 호위로 제2수뢰전대(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 외 구축함 8척)가 동행했지만, 항공엄호는 제공되지 않았다.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세운 이유는 당시 일본 제국의 해군 함정용 중유의 비축분이 바닥을 드러냈던 것도 있지만, 출격 자체가 제국해군의 상징답게 "장렬히 죽어라"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난 뒤, 높으신 분들에게 '우리 해군은 이렇게 열심히 싸웠음에도 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최대전력이었던 야마토가 살아남아있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작전 자체가 미군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아닌 야마토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고 아무도 야마토가 미군을 막아내리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미 해군의 대함대의 방해를 뚫고 오키나와까지 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만일 오키나와 해안에 계획대로 좌초하더라도 오키나와 전투를 수행중인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 없이는 그냥 고정표적 1호가 되어버린다. 재수없으면 미군에게 육박공격이나 당해서 점령당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며, 그런 일이 없더라도 좌초된 군함의 탄약이 떨어지면 그냥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는데다 앞서 말했듯이 이동능력이 전무하므로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타겟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이 작전의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데다가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것은 설령 야마토가 작전지역에 멀쩡하게 도착했더라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출격시기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일기예보상 2~3일 뒤에 항공기 운용에 지장을 주는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었던지라 그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날이 흐려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을 골랐다. 결국 구름과 안개속에서 갑툭튀하는 미국 함재기들을 상대로 한 대공사격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당시 유류탱크 담당 장교가 윗선과는 다르게 생각이 있어서인지 유류 탱크 펌프가 닿지 않는 아랫쪽까지 인력으로 퍼내서 '적어도 멍청하게 꼬라박느니' 중간에 회항할 것을 어느정도 가정하고 왕복연료로 메꿔서 줬다고 한다. 물론 상부에 보고한 것은 편도분 연료만 넣은 걸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류 탱크 바닥에 남아있는 연료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분량이기 때문이다. 해군 선임자들도 알면서 눈감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상 자살임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므로 만일 배가 격침될 경우 살아남은 승조원이 주변 섬에 표류할 것을 생각해서 약간의 돈과 비상용 물자를 승조원에게 배급하기도 했으며 출격 전에 술판을 벌여서 최대한 사기의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출항 직전에는 B-29를 개조한 장거리 정찰기에, 출항해서는 일본 근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잠수함에게 들켰으니 이미 그 상황에서 미국은 야마토의 출항을 알아냈고 오키나와에 근처에 가기도 전에 미군 함재기 부대에 포착되었다. 일본군 함대가 출항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마크 미처 제독 휘하의 항모들에게 처리를 맡겼다.
무사시가 양현에 골고루 어뢰를 맞아서 함내 구획이 균등하게 침수되는 바람에 오히려 격침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무사시는 잠수함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낭설까지 돌았었다. 해당 전투의 전훈을 살려 미군의 조종사들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야마토를 공격할 때 좌현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야마토는 이 해전에서 좌현에 9발의 어뢰를 맞은 반면 우현에는 단 1발의 어뢰만 피격당했다.
약 117대의 항공기에게 다수의 어뢰와 폭탄에 피격 당하고 배가 기울어지자 2시 2분, 작전 중지와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 2시 23분 야마토의 탄약고가 유폭하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야마토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며 순식간에 해저 밑바닥으로 침몰하고 만다. 폭발이 위력이 매우 거대하여 폭음은 100㎞나 떨어진 규슈 남부까지 들렸고, 폭발연기는 160㎞ 거리에서도 관측되었으며, 퇴함한 승조원중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서 사망했다. 일단 버섯구름 옆에 있는 함선의 크기와 비교해도 엄청난 폭발인게 보인다. 버섯구름은 6㎞ 고도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함정 중 피해가 적었던 3척의 구축함이 살아남은 야마토의 승조원들을 구조하여 귀항하였다. 구조된 승조원은 전체 3000여 명 중 단 269명에 불과했다.
폭발의 여파로 함체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난 채 각각 멀리 뒹굴고 있다는 것이 근래의 수중탐사로 밝혀졌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의 인명손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F6F 헬캣 3대, SB2C 헬다이버 4대, 어벤저 3대가 격추됐고 조종사 4명, 항공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총 12명. 일본군은 야마토에서 3055명, 야하기를 포함한 제2수뢰전대에서 1187명이 사망했다. 따라서 둘을 합친 일본군의 총 전사자 숫자는 4242명. 미군 한 명이 전사할 때 일본군은 353.5명이 전사하는 더없이 초라하고 굴욕적인 전과를 기록하며 연합함대의 자존심은 그렇게 태평양에 가라앉았다. 거기에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소중한 목숨을 값비싼 수업료로 지불해 가며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온 항공모함에게 주도권을 상실당한 전함은 마침내 초거함 야마토급의 격침과 함께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맞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대 최고로 호화로운 스펙으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타이타닉과 닮았다. 그리고 침몰된 야마토를 조사한 것도 타이타닉을 조사한 그 탐사선이었다.
야마토의 침몰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가진 최대의 함선이자, 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함선을 미국의 본토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그냥 갖다 바쳤다. 이를 본 미국은 카미카제에 이어 자신들의 최고 전함까지 자살공격에 쏟아붓는 일본 제국을 일반 공격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 의견이 강해졌다.
여담이지만 야마토를 공격하던 도중 격추된 헬다이버의 조종사는 아주 가까이에서 야마토가 침몰하는 하이라이트를 보고나서 비행정에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 내내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하여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도민(島民)이 희생당했으며, 전쟁 통에 끌려온 조선인 다수도 이 전투 도중에 죽었다. 현재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조선인 유골은 아직도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다수의 민간인을 기리는 평화 공원이 있으며,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오키나와 전투 중 조선인 군속, 위안부와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을 재일교포가 오랜 시간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제목은 '오키나와의 옥편'이다.
일본군은 이외에도 류큐어 사용자나 미군의 삐라를 주운 주민들을 스파이로 규정해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또 병사들 가운데 이동이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은 자들을 청산가리가 든 우유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기어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강간 및 학살을 저지른 전적이 있다. 이래서 미국은 뻔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랍시고 지껄이자 열 받은 미 의회가 대동단결하며 위안부 성명을 통과시켜버렸다.
다만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많은 수가 포탄에 목숨을 잃었다. 또, 동굴 속에 틀어박혀 있는 일본군을 끄집어 낸답시고 위해 연막탄을 사용했는데, 사용이 금기시 돼있는 생화학무기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그 속에 숨어 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사망하였다. 물론 일부 병사들의 일탈로 강간이나 살인이 저질러졌지만, 이런 짓을 한 미군 다수가 총살당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이 욕 먹은 건 이걸 미국 정부가 주도하거나 모른 척했다는 투로 말했기 때문.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영양 실조 및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매우 많았다. 상당수 피난민들은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山原) 밀림 등으로 몸을 피했는데, 이곳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었고, 영양 부족 및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항복 후 미군 감시정으로 이동하는 일본군, 1945년 5월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유일하게 일본군 투항자가 만 단위를 넘기고 좌관급 장교가 포로가 된 전투이다. 최종 집계된 일본군 포로의 수는 약 1만 5천 명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8%에 달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이전에 벌어졌던 전투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고, 일본군 병력의 상당수가 현지 징집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일본군이 포로가 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군이 놀랄 정도로 많이들 항복했는데, 심지어는 몇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항복하는 통에 함정이 아닐까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 미군의 심리전이 상당히 통한 탓도 있으며, 상당수의 일본군이 이미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소위 옥쇄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 설령 본토 결전이 벌어졌더라도 일본 군부가 주장한 '최후의 한 명까지' 저항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때문에 대전 중 일본군의 투항을 담은 영상기록물은 대부분 오키나와에서 촬영된 것이다. 회유된 포로가 확성기로 항복을 종용하자 동굴에서 민간인들과 함께 나와 투항하는 병사들이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주워와 항복하는 모습, 징집된 오키나와 소년병 등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2011년 일본은 이걸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 주민들이 미군이 두려워 집단 자결했다고 교과서에 실었다. 이게 헛소리라는 것은 아주 미 군정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미군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먹을거리, 잠자리를 보장받은 후에는 전선에 보급품을 나르는 위험천만한 임무까지 자원해서 참여했다. 자세한 내용은 미 군정에서 주민들에게 보장해 준 것과 주민들의 이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때 주일미군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 현장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조와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미군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집단 자살이 있었는데 오키나와 전투 이전부터 있었다. 당장 1년 전에 있었던 사이판 섬의 전투에서 민간인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부터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일본군이 귀축영미 운운하며 미군이 상륙하면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한다며 주민들에게 계속 세뇌시켜 놨는데 이걸 믿은 주민들은 미군이 오기 전에 딸과 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일본군의 말들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고 미군과 접촉을 해 사실을 알게 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게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응했다. 퍼시픽 논픽션판을 보면 미군의 대민 작전이 나오는데 오키나와 주민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수용 구역 내에서 나오지 않으면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미군의 작업을 돕는 대신 미군의 식료품, 담배, 통조림(C-레이션)등을 받아가는 장면도 나온다. 지나가던 오키나와 농부에게 게이샤는 어디에 있냐고 묻자 농부가 유창한 영어로 여기에는 없고 시내에 가 보라고 해서 미군 병사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 농부는 미국 농장에서 취업한 경력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이오지마에 이어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학을 뗀 미군은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일본전선 참전을 강력히 주문하는 한편 원자탄을 이용해 일본에 압박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의 결과에 일본군 수뇌부인 대본영과 일본 정부가 받은 충격은 사이판 전투의 결과보다 훨씬 어마했다. 간단하게 보면 미군의 세력권과 공격범위권이 정말로 일본 본토 앞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섬과 일본 본토 사이엔 미군의 진격을 저지할 어떠한 종심이 없었고 미군의 다음 공격(몰락 작전)은 바로 일본 본토로 향해질 것이 명백했다. 과거 일본의 마리아나 제도, 이오지마의 상실은 그들이 설정했던 내부방어선(절대국방권)에 큰 타격을 입고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으로 이어지고 그 공습이 효율적으로 촉진되게 했지만 거리상이나 섬의 환경으로 보면 미군의 일본 본토를 침공할 전진기지로선 부족한 면이 많았다.
또 오키나와는 이오지마와 함께 몇 안 되는 미군에 전투를 치르고 점령당한 일본 본토이기에, 1951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미국(미군)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문서 참고. 이오지마는 1969년에야 일본으로 복귀했으며,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 본토로 복귀, 큐슈에 속한 오키나와 현이 되었는데 현재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는 류큐 독립 운동 문서를 참고하자.
오키나와 섬의 교통에 있어서도 이 전쟁은 전환점이 될 만큼 굉장히 중요한데, 이 전쟁을 계기로 오키나와 섬에 있던 모든 철도 노선이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박살이 났고 전쟁 이후 섬을 접수한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가 도로 교통 복원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전쟁 이후 미군 및 미군정이 섬에 자가용 문화를 전파했고, 철도는 복구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 섬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자동차 사회로 변모하였다.
6. 창작물
•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 (激動の昭和史沖縄決戦) (영화) - 1971년작.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 일본의 창작물에서 자주 나오는 '적이 7할, 바다가 3할!'이라는 대사가 여기서 나왔다. 일본군 시각에서의 오키나와 전투의 전반적인 흐름을 조명한 영화로 내용 자체는 괜찮은 편, 현재 넷파일(웹하드)에서 영화를 다운받을수 있는데 자막은 영어인데 읽기 실력이 있다면 해석은 어렵지 않다.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미 해병대 후반 미션의 배경이 오키나와 슈리성 전투이다. 주인공 C. 밀러가 소속된 중대가 슈리성에 돌입하여 점령하는 장면이 미군 캠페인의 마지막.
• 더 퍼시픽 9화: 평범한 아낙네(그것도 갓난애를 업은!!)에게 부비트랩을 장착해 터트리고 그 직후 민간인을 인간방패 삼아 총을 쏴 갈기며 개돌하는가 하면, 도민들을 내쫓은 뒤 기관총으로 갈기는 일본군의 미친 짓을 볼 수 있다. 유진 슬레지는 이 전투의 후유증으로 PTSD를 심하게 앓게 되었다.
• 사탕수수밭의 노래: 일본 드라마로 오키나와 출신 가족들이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그 본능이 강한 가장과 일본인이 아닌 오키나와인으로서 겪는 차별이 표현된 작품으로 전반적으로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일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는 전쟁전 화목한 오키나와 생활을 보여주다가 전쟁이 발발하며 나하 공습, 주민들을 동원한 방공호 건설, 점차 빈약해지는 식사, 본격적인 오키나와 전투로 점점 악화된다.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오키나와인들을 차별하거나 사진사 출신 아버지가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학대하려는 일본군 장교를 막는 등 일본군에 대한 비판과 반전주의를 표하는 작품. 아버지 역은 아카시야 산마, 어머니 역은 쿠로키 히토미가 맡았다.
• 島唄(섬노래): 일본의 4인조 락그룹 The boom이 1993년 발표한 곡이다. 오키나와 전통 음율에 따라 '라'와 '레'음을 사용하지 않은 곡으로, 해당 그룹의 보컬 미야자와 카즈후미가 실제로 '히메유리 평화기념공원'에 가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생존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발매 당시와 리바이벌 셋트를 합쳐 160만 매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 만화 맨발의 겐에서 나카오카 가족이 셋방에서 쫓겨난 건 셋집 주인의 아들이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화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