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기억, 끝낼 수 없는 사랑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2004년)’에서 조엘(오른쪽)은 연인 클레먼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라쿠나 회사와 계약하지만 결국 헤어진 연인과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롯데컬처웍스 제공
✺[漢詩 映畵로 읊다]〈106회〉대필(代筆)도, 대언(代言)도… 결국 나를 고백하는 것
https://cafe.daum.net/201s/AYJ5/8462
남모를 사랑의 고통을 대신 쓴 편지로 표현한 한시들이 있다(칼럼 106회 참조). 영화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1963-)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2004년)의 제목이 유래한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가 알렉산더 포프가 실존 인물을 대변해 쓴 것처럼, 당(唐)나라 李白(이백, 701-762)의 다음 시도 여성을 대신하여 쓴 편지다.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https://youtu.be/m50yO5bG3MU
✺[漢詩 映畵로 읊다〈139〉아내 대신 써서 먼 곳으로 보내는 편지(2)
代贈遠(대증원) ― 李白(이백, 701-762)
소첩은 본래 낙양의 여인으로
북방을 떠도는 서방님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목 마르면 역수(易水)에서 역수 물을 마시고도
옛날부터 지금까지 좋아하셨지요
호마(胡馬)는 서북의 변경을 내달리고
푸른 빛 말갈기[香騣]는 바람에 날리지요
채찍 휘둘러 말 갈기[鳴鞭]며 떠나간 당신
변경에서 적 무찔러 공 세운다 하셨지요
떠날 때 곧 오겠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이별이 길어질 거란 말 하지 않았지요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많고
눈바람 속도 가볍게 달리는 남정네도 많다지요
당신이 저를 잊어버리셨다면
제 마음과 사랑 역시 끊어야 할 터이지요
울면서 흘리는 눈물 그칠 날이 없고
좋은 집에 살아도 한이 절절한 나머지
소혜(蘇蕙)처럼 비단에 짧은 글을 새기며
회문시 짜는 동안 애가 끊어진답니다
원래는 회문시(回文詩)를 보낼 생각이었으나
그대가 속내 몰라볼까 무서운 맘 들어서
그것을 태워서 재를 날려버리고
손에 남은 흔적까지 없애버렸답니다
妾本洛陽人(첩본낙양인) 狂夫幽燕客(광부유연객)
渴飮易水波(갈음역수파) 由來多感激(유래다감격)
胡馬西北馳(호마서북치) 香騣搖綠絲(향종요녹사)
鳴鞭從此去(명편종차거) 逐虜蕩邊陲(축로탕변수)
昔去有好言(석거유호언) 不言久離別(불언구이별)
燕支多美女(연지다미녀) 走馬輕風雪(주마경풍설)
見此不記人(견차불기인) 恩情雲雨絶(은정운우절)
啼流玉筯盡(제류옥저진) 坐恨金閨切(좌한금규절)
織錦作短書(직금작단서) 腸隨回文結(장수회문결)
相思欲有寄(상사욕유기) 恐君不見察(공군불견찰)
焚之揚其灰(분지양기회) 手跡自此滅(수적자차멸)
*易水(역수) : 하북河北 역주易州에 있다.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진시황을 죽일 자객으로 형가荊軻를 역수로 보냈다고 했을 때도 이곳을 이른 것이다. 도잠陶潛은 「의고擬古」에서 ‘기식수양미 갈음역수류 飢食首陽薇 渴飮易水流(배 고프면 수양산의 고사리 먹고, 목 마르면 역수의 물을 마셨네)’라고 읊었다.
*香騣(향종) : 준마의 목 위에 있는 긴 털, 즉 갈기를 가리킨다. ‘종騣’은 ‘鬃’과 같고 ‘鬃’은 ‘馬鬣’, 즉 말갈기를 뜻한다.
*鳴鞭(명편) : 채찍을 휘두를 때 나는 소리.
*邊陲(변수) : 변경. ‘변수邊垂’ 또는 ‘변타變埵’로도 쓴다.
*燕支(연지) : 산 이름. 깐수성甘肅省의 기련산祁連山과 용수산龍首山 사이에 있으며, 단하丹河와 석양하石羊河로 나뉘는 곳이기도 하다. 북쪽지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쓴다.
*玉筯(옥저): 옥으로 만든 젓가락. 젓가락의 미칭이기도 하다. ‘玉箸’로도 쓴다.
*回文(회문) : 두도竇滔는 부견符堅의 전진前秦에서 진주자사秦州刺史를 지낸 사람인데, 용사龍沙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처 소혜蘇蕙가 남편을 생각하며 회문시回文詩를 넣어 비단을 짜서 남편에게 보냈다. 모두840자로 이루어졌고 종횡으로 바꿔 읽을 수 있다.
*焚之揚其灰(분지양기회) 구 : 한요가십팔곡漢饒歌十八曲 중 하나인 「유소사有所思」에 ‘聞君有他心(문군유타심), 拉雜摧燒之(납잡최소지). 摧燒之(최소지), 當風揚其灰(당풍양기회). 듣자니 그대가 딴 맘 먹고 있다던데, 그것을 쌓아두고 불을 질러버리려네, 그것들을 불에 태워, 재들을 바람에 날려버렸네.)’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백이 두 번째 부인이었던 종씨宗氏가 하는 말들을 듣고 지은 시라고 한다. 사랑싸움에는 동서도 고금도 따질 일이 못 되는 모양이다. 유람遊覽과 유랑流浪의 세월이 적지 않았고 글 잘하고 술 좋아하는 이백 옆에 미녀가 없을 것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남자가 남자를 보기에도 그러할진대 집 떠나 있는 남자를 생각하는 여인의 생각의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랑도 지나치면 원망이 되는 법이다. 투정의 정도를 지나 협박에 가깝게 변해버린 여인의 원망을 남의 집 일이라고 웃으면서 읽는다. 아무리 이백이라도 술 한 잔 진하게 걸치고 나서야 썼음직한 내용이다.
시는 멀리 떠나 소식도 없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마음을 읊었다. 중간 녹색 부분에는 변방에 출정한 남편이 다시 돌아오겠노라 달콤한 약속은 했지만, 변방의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은 기억조차 못 할까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에서 눈길을 끄는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비단에 수놓은 회문시(回文詩)의 고사와 곡진하게 연결시킨 표현이다. 회문시(回文詩)는 전진(前秦) 시기 소혜(蘇蕙)가 자신을 두고 떠난 남편 두도(竇滔)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어느 방향으로 돌려 읽어도 시가 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회문시의 순환성은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모티프로 마지막 내용이 다시 처음으로 연결되는 ‘이터널 선샤인’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영화는 조엘이 클레먼타인을 몬탁행 기차에서 처음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내용이기도 하다.
시 역시 원정(遠征) 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마음을 색다른 구성과 표현 방식으로 풀어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전개되던 시는 읽어주지 않을까 두려워 썼던 편지를 태워버리겠다는 말로 마무리되며 사랑의 고통을 부각시킨다. 영화에선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는 주인공 남녀 간의 엇갈린 사랑이 독특한 비선형적 내러티브로 펼쳐진다.
사랑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과 파국을 야기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엘은 자신의 기억을 지운 연인 클레먼타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라쿠나 회사와 기억을 지우기로 계약한다. 한시 속 아내는 자신을 잊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편지를 태워버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조엘과 클레먼타인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한시 속 아내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거두지 못한다.
편지를 태우겠다는 다짐도, 기억을 지우겠다는 계약도 사랑의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 시도 자체가 도리어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결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고통이 사랑을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하는 것일까.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漢詩를 映畵로 읊다(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6년 09월 03일(목)〉, Daum∙Naver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