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
요즘 일부 한국인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랜 원한이 맺힌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한다’라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한 나라의 모든 문화적 사안 중에서 언어가 단연 문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수 세기 동안 한국을 속국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패해 한국을 떠나자마자 한국인들은 곧바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일본어로 말하라고 강요받았을 때도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공적으로 일본어를 말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했다.
(16-17)
나는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는 평화와 안정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를 흔히 ‘희생의 역사’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와 많이 비교해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장에서는 천 년 이상 동안 필기시험(과거제도)를 통해 정부 관료들을 채용해온 한국의 전동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이를 일본의 사무라이 역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리를 계승했고 그것이 실패하면 자결했다. 일본의 역사는 삶과 죽음, 살인과 권력 장악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자는 라이벌을 가장 성공적으로 죽인 사람이다.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다이묘가 마침내 천황까지 통제한다. 일본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투성이다. 바면 한국에서의 권력은 최고의 문장력 및 학식으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최고의 학생에게 돌아간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한국에서는 문자 그래도 펜이 칼보다 강했다.
(35)
한국사에 대한 나의 가장 기본적 시각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가난과 억압으로 왜곡되었고 외부의 영향, 특히 일본에 의해 때로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왜곡되어온 것이다. 나는 한국을 희생자라고 보는 일반적 서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대부분 기간에 일본의 희생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한 한국의 분단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피해의식의 요인이 되었다. 희생이 한국 역사에서 강력한 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다.
(48)
1627년과 1636년에 일어난 만주족(후금, 청나라)의 두 차례 침략(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침략으로 언급되지만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에 그쳤습니다. 이 침략의 목적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새로 들어온 청왕조가 조선을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지요. 그 전쟁이 두 차례의 침약으로 이어진 이유는 조선이 동맹국이 되는데 동의했으면서도 비밀리에 명나라와 접촉해 청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밀약을 알게 된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 왕(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청 왕도에 대한 조선 왕의 충성을 담보하기 위해 왕의 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조선에서 철수했지요.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남겨두거나, 총독을 임명해 조선 조정을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전히 조선을 떠났습니다.
(83)
나는 한국이 안정적으로 평화적인 문치의 역사를 유지해온 핵심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인이 아닌 선비에 의한 정부였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되었으니까요. 정말이지 한국의 역사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과거 시험은 유교적 철학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지요. 비록 그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한국은 중국보다 그 제도를 훨씬 더 완벽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은 중국처럼 그렇게 많은 침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겪은 침략과 중국이 겪은 침략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횟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이야말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침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요.
(108)
최근에는 ‘한(恨)’이라는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신 박사님도 그것이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나온 식민지 역사관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나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해석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식민사관이 한국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조선 시대 당파 논쟁도 자신들의 시각대로 극단적인 대립으로 해석했지요. 한국 역사를 식민지 과점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한국 역사의 왜곡은 일부는 식민사관을 가진 악의적인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긴 것이고, 일부는 유럽에서 들어온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148)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이런 변화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592년, 1627년, 1636년의 전쟁 이후에 조선이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 한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 이전 상태의 사회와 정부를 복원하는 것이었지, 어떤 변화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언급하는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변화는 그로부터 2~3세기 지난 뒤에 찾아왔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이런 변화가 일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남겨 놓고 도망간 불명예스러운 왕, 한양을 떠날 때 백성들이 돌을 던졌던 그 왕이 돌아와 다시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정의 관리들과 정부도 이전과 같이 재건되었고, 농부들도 다시 그들의 농토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노비들도 다시 노비로 돌아왔습니다.
(230)
조선 왕실 사위들의 족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신채용 박사는 <선원록>이라는 왕실의 족보를 통해 왕실 사람들과 주요 정치 세력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선원록>은 세계 어느 왕실의 왕족 족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말 웅장한 족보입니다. 조선의 왕실보다 족보를 더 소중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왕실의 족보는 그 나라 족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요. 더구나 한국의 모든 왕실은 어느 왕조에서나 자신들의 족보를 인쇄물로 남겼습니다. 족보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으니까요.
(246)
국제사외는 이제 막 시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시조를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한국 밖에서 시조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국내에서도 시조를 한국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부흥시키고, 교육 시스템 내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생활 속에서도 시조를 쓰는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창의적이 되기 위한 길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시조 만세, 만만세.
(264)
물론 이외에 더 많은 다른 질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신은 내 말의 요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1965년의 한국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역사 교과서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이론 성과, 독특함, 우수한 능력을 설명해 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니까 한국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게 강하고 역동적인 나라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제 나는 그 모든 잘못된 역사관을 확실하게 바꾸고 싶다. ‘우물 밖의 개구리’로서 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265)
물론 한국사 교육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적4어도 한국사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국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이다. 물론 20세기만 보면 한국은 분명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20세기가 아니다. 그리고 20세를 너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의 전 역사를 희생의 측면으로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니거니와 비생산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