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구 수상(足球 隨想)
[수상(隨想): 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 생활과 인생에 대한 자기의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산문]
김진섭 著
1968년 4월 초순 김포 기지의 제101 전투101 비행 대대장으로 부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오후의 일로 기억한다. 대대 브리핑 실 옆 배구장에서 사람들이 왁짜지껄 떠들며 공을 차는 소리가 단속적(斷續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으로 들려오는데 배구 같지는 않고 귀에 익숙지 않아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얼마 전에 전입한 CRT 학생 네 명이 두 명씩 편을 짜고 배구장 반쪽 Court에 탁구대 두 배 너비 가량의 금을 그어 놓고 배구공을 발로 차며 흡사 탁구와 같은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 운동이라면 누구 못지 않게 좋아하는 터라 유심히 관찰을 해보니 매우 흥미롭고 관심이 끌리었다. 네 명중 가장 기량이 뛰어나 보이는 안택순 중위(공사 14기, 소장 예편)를 따로 불러 자세히 물어본 바로는, 이 운동이 근간에 사천 훈련 비행단 비행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아직 정식명칭은 없으나 ‘족 탁구’로 흔히 불려지며, 축구공이나 농구공을 사용할 수도 있으나 크기와 무게가 발로 차기에 가장 적당한 배구공을 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또, 경기 규칙은 정해진 것이 없고 장소의 넓이와 인원수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매우 손쉽고 융통성이 많은 운동으로 생각되어 그날부터 시간이 나면 대대원과 어울려 공을 차게 되었는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기량도 향상되고 경기 방법도 개발되어 갔다. 당시 101대대에는 운동을 잘하는 대원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배구팀의 주 공격수였던 조승명 소령, 축구 선수 출신인 김명수(공사 9기), 배인수(공사 10기), 정덕진(공사 11기)대위 등의 기량이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앞서 언급한 안택순 중위의 기술이 출중하였었다.
그해 1월 21일 발생한 북괴 무장 게릴라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안보 상황은 초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비행 훈련 또한 실전적인 내용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동안 주간에만 수행하던 비행 임무가 야간 작전 능력의 필요성에 따라 박모(薄暮: 해가 진 뒤 어스레한 동안) 비행에서 심야 비행으로, 나아가 야간 대지 사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 심야 비행 때는 항법 비행을 하고 나서도 조종복을 땀으로 흠뻑 적시던 조종사들이 훈련을 거듭함에 따라 야간 편대 특수 비행 기동도 거뜬히 소화하게 되었고, C46기의 조명 지원을 받으며 ‘Kooni’ 사격장에서 처음 실시한 야간 대지 사격 임무를 마친 뒤 전(全) 기(機)가 기지에 무사히 착륙하였을 때는 극도의 긴장과 피로와 함께 뿌듯한 성취감으로 전 편대원이 한참 동안cockpit(항공기의 조종석)에서 나오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막 끝날 무렵으로 아직 생활수준이 빈곤상태를 면하지 못했던 시기라 비행 대대에 전기냉장고는 커녕 청량음료도 구경하기 어려웠고, 비행이나 운동 후에 마실 것이라고는 20밀리 기관포 탄피 통으로 만든 Ice box에 기지 전대에서 얻어온 어름으로 식힌 찬물이 고작이었다. 자정을 지난 심야 비행이 있을 때는 관사에서 부인들이 종종 위문 방문을 하였었다. Runway Control(착륙 통제소)에서 귀환하는 전투기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Position Light를 깜빡이며 한 대 한 대 접근 착륙할 때 저것이 댁의 낭군이라고 알려주면 눈물을 글썽이면서 감격하였고 무사히 착륙한 조종사들에게 준비해온 떡 만두 국을 정성껏 서비스 하였었다.
부대 운영비라고는 전혀 없었던 때라 수고하는 부하들에게 아무런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음을 한탄하던 중 10월 중순의 어느 날, 한 건의 공군 본부 인사 국 공문이 눈에 번쩍 띄었다. 즉, 공군 창안 제도에 관한 것으로 부대 운영에 도움이 되는 창의 적인 개선 방안을 공모하여 우수작을 등급별로 시상한다는 내용으로, 특히 특등 10만 원의 상금이 나를 사로잡았다. 10만 원이면 전 대대원이 불고기 파티를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옳거니! 아직 시작 단계에 있는 족구 경기를 정리하여 응모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뭉개 구름같이 솟아올랐다..
우선 공군 본부 최종 심사 시에 결정적 지원을 얻는데 적격인 자리에 집안의 숙부가 되시는 통신감 김병탁 장군이 재직하고 계시다니 그야말로 행운이 겹친 것이 아닌가? 곧바로 전화를 올려서 사연을 설명하고 *벽고지에 위치한 통신 및 Radar 기지 근무요원의 체력 향상에 더할 나위 없이 효과가 큰 족구의 장점을 역설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벽고지: 원문에는 僻孤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국어사전에는 없음. 군 부대 중 섬 처럼 멀리 떨어져 있고, 외진 곳을 이르는 말로 추정 됨
그 후 2~3일 동안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명칭은 족 탁구에서 탁자를 뺀 ‘족구’라 하고 용어와 경기 규칙을 정리하였고 특히 심사의 관건이 되는 창안 내용의 장단점을 설득력 있게 기술하였다. 즉 이 운동은 장소와 인원에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융통성과 아무 복장이나 어느 공으로도 할 수 있는 경제성, 그리고 연령 성별 또는 기술 수준에 관계없이 초심자라도 재미있게 경기를 할 수 있는 용이성 등 장점을 열거하고 단점으로는 “이 제안은 단점이 너무 없는 것이 단점”이라고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였다, 작성한 초안을 행정 계장인 김명수 대위에게 구술 기록하게 한 다음 대대 보직 장교 회의의 검토를 거쳐 공군본부로 제출하였다.
이 제안은 11월 중 공군 본부 심사에서 특급으로 선정되었고, 그 후 국방부 체육 교본에 ‘족구’ 종목으로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족구는 공군의 각 기지에 급속히 보급되었고 육군, 해군은 물론 민간에도 확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가을 UH-1H 헬기 편에 족구 실력이 우수한 조종사 몇 명과 함께 위문품으로 배구공을 가지고 용문산 Radar 기지를 방문하여 장병들 앞에서 족구 경기 방법을 설명하고 시범 경기를 가진 다음 곧 귀환하였는데 이륙 상승하는 창 아래로 내려다보니 2~3개 조의 병사들이 벌써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뿌듯한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70년대 중 후반 광주 제1 전투 비행단장 재임 시에는 부대 대항 족구대회도 몇 차례 개최한 바 있었고 예편 후에는 전국 족구 협회 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나 연부역강(年富力强: 나이가 젊고 기력이 왕성함)한 후진이 맡도록 고사하였으며 수년 전까지 정덕진 대령(예)이 협회장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안다.
광음은 이 시요 세월이 유수라 하였던가? 어언 70년을 훌쩍 넘긴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족구와 나의 오랜 인연은 분명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족구가 세계적인 운동 경기로 널리 보급되고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위 글은 '족구의 대부' 김진섭 선생이 70대 중반 정도에 족구를 창안하는 과정 중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적은 글입니다.
선생님! 족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