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1920.3.16(음력)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해에는 만주에서 청산리전투가 나던해에 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16살 아버지는 22살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결혼 8년만에야 큰딸을 낳았답니다 1927.7.18. 큰누나부터 1947.4.2. 막내인 저까지 7남3녀를 낳았는데 3남2녀만 잘 기르시고 4남1녀는 8개월부터 4살때까지 사이에 죽어 버렸답니다 다섯다 홍진 (홍역) 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홍역 예방주사 한번만 맞으면 해결되는데 그시절에는 그렇게 무서운병 이었던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홍역이 저승사자 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항상 " 우리는 반타작만 했어 반타작만 (절반만) " 하셨습니다
다른것들은 전부다 조고만 항아리나 포대기에 싸서 부안촌앞 공동산에다가 조고만 무덤을 만들어서 묻었드랍니다 그것을 내가 어릴때는 애장이라고했고 여시가 (여우) 애장을 파먹는다고 했었습니다 무덤을 조고맣게 대충만들어 놓으니 산짐승들도 죽은사람의 시신 냄새를 맞으면 그럴수도 있었을것 같습니다 80년대 까지도 해남이나 진도의 바닷가에는 애장과 초분이 있었고 산짐승들이 애장이나 초분을 건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 오해방 큰형보다 4살더먹은 해만이는 어머니 말로는 죽은것들중 가장 잘생기고 영리해서 3살때에부터 하나둘 셋부터 열까지 셀줄도 알았고 다섯살 더먹은 누나한테 배워서 일본놈들의 군가도 잘불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11살이나 덜먹은 막내동생도 아들을 낳아서 동내 가운데에있는 모정까지 뛰어다니면서 놀기에 무척이나 부러워 하였드랍니다 그때 이쁘기만한 해만이가 태어나서 노래도 잘하고 이쁜짓만해서 그즈음에는 날마다 행복한날들 이었드랍니다
아버지께서 어느날은 지게에 솔차니 무거운 짐을지고 들어왔는데 3살먹은 해만이가 아버지를 보고는 좋아서 마루에서 훌쩍훌쩍 뛰면서 "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이 " 하면서 손벽을 치면서 좋아하면서 반겨주니 아버지는 너무나 좋아서 무거운짐을 짊어진체 멍하니 서서 얼굴가득히 미소를 지으면서 해만이만 바라보고 좋아서 웃고만 있었드랍니다 어머니가 " 무겅게 (무거우니) 얼른 벗어놓고 밥먹어야제 멋하고있어 " 하니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지게를 벗드라고 했습니다 해만이와 아버지는 둘이는 서로좋아 하면서 손을잡고 흔들기도하고 서로 얼굴도 만지면서 비비기도하곤 했드랍니다 그렇게 귀엽고 이쁜짓만하던 해만이가 4살때 홍진을 앓다가 근열흘만에 어느날 죽어 버렸답니다
해만이가 안아팟을때는 날마다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그치지 안고 즐거웠던 그리고 행복했던 우리집 이었는데 그렇게 사랑하던 그렇게 영리하던 그렇게 귀엽던 해만이가 홍진으로 10여일 앓다가 죽어 버리고나니 모든 행복이 사라져 버리고 온집안 식구들이 방안에서도 부억에서도 마당에서도 눈물들만 흘렸드랍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외할머니와 2학년짜리 큰누나 까지도 몇날 며칠을 큰소리를 내면서 울기도 하였드랍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안울릴려고 뒤안 (뒤뜰) 장독대에 앉아서 소리없이 많이도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외할머니는 근한달 동안은 셋이다 곡기를 거의 끈다싶이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외핱머니 께서는 정신을 차리셔서 그때 학교에 다니는 큰누나에게 밥을해서 먹였다고 했습니다 한달정도 사이에 뚱뚱한 헤비급 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허리끈이 한뼘도 훨씬더 줄었다고 했습니다
해만이는 손재주가 좋아서 나무통도 잘만드는 연정아재한테 부탁해서 쌀3되 값을주고 신정양반한테 소반을 만들다버린 행자판을 사다가 은행나무 판자로 좋은관을 만들어서 동내앞 공동산에 묻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해만이의 묫등에 가보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사정을해도 눈을 부라리며 왜 또그러냐고 짜증만 내드라고 했습니다 해만이를 지게에 짊어지고 공동산에갔던 학전아재 한테가서 가르쳐 달라고 사정을하니 멍하니 쳐다보다가 검다희다는 말도없이 어디로 도망가 버리드랍니다 아버지께 몇번을 사정도하고 싸우기도 여러번 한후에서야 " 이번에 한번만 가보고 다시는 절대로 안간다고 히여이 (약속해) " 다짐을 하면서 가자고 하더랍니다
둘이는 해만이의 묘에 갈때까지 꼭싸운 사람들처럼 아무런 이야기도 안하면서 갔드랍니다 평소에도 걸음이빠른 아버지를 따라가느라 무척힘이 들었으나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그리운 해만이의 묘를 보러가기에 꾹참고 달음박질 (달리기) 하듯이 아버지를 따라 갔드랍니다 빨간 황톳길 구신작로가 보이고 꽃두레산도 보이는 남향으로 남들의 큰묘사이 좋은곳에 해만이의 조고만묘가 있드랍니다 안울려고 했으나 눈물이 저절로 나와서 돌아서서 얼마 동안을 훌쩍 거리면서 울었드랍니다 울다가 언듯보니 무심하고 무덤덤 한것같던 아버지도 어께가 들썩 거리면서 꽃두레산쪽을 보면서 옷소매로 몇번이나 눈물을 닦으시 드랍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묘아래 밭뚝옆에있는 큰호박정도 크기의 무거운 돌맹이를 들고와서 해만이 묘앞에 대충 세웠더니 " 그렇게 놔두면 굴러가 버리리니 못써 " 하면서 아버지는 묘앞을 나뭇가지를 줏어서 땅을 파고나서는 돌맹이를 보기좋게 잘고정시키고 잘심어 주드랍니다 어머니는 집에 올때까지 훌쩍이며 울면서 왔드랍니다 그후도 해만이 생일날이나 추석지나고 나서랑 근열번정도 가봤고 언제나 집에올때까지 울면서 왔다고 했습니다 해만이가 세살때 동생으로 이쁘게생긴 딸숙자를 낳았답니다 숙자도 똘똘하니 돐안때부터 잘걸어 다니고 이쁜짓도 잘했답니다 돐지나서 부터는 혼자서 마루에서 넘어지면서도 토방으로 내려도가고 솜씨좋은 새내 이모가 만들어다준 버선을신고 마당에 나가서 닭도 잘몰고 다녔는데 그놈의 그숙자도 홍진때문에 죽어 버렸답니다 " 그때도 학전아재가 고생했단다 "
어머니는 " 그것이 죽었을때는 불쌍하기는 했어도 눈물도 몇방울 안났고 해만이 묫등옆 어디다 묻었다는데 해만이 묘등만 둘러보았제 그것 묫등은 못가봤다이 " 하셨습니다 그해 큰형이 태어났는데 튼튼하고 젖도 많이씩먹고 잘크더랍니다 젖이많이 나오라고 끼니때마다 외할머니께서 소고기가든 미역국이나 마른명태가든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주셨다고 했습니다 고기를 별로 안좋아했던 우리 어머니는 소고기가든 미역국의 소고기를 잘안먹는다고 외할머니한테 수시로 혼도났드랍니다 외할머니는 소고기가든 미역국을 잘먹어야 젖이 많이나온다고 하셨답니다 큰형이 자라면서 부터는 해만이 생각이 저절로 잊혀져 갔다고 했습니다 고추 달린놈이 젖을 먹고나서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좋아서 방긋방긋 웃는것이 한없이 이쁘고 좋기만 했답니다 해만이가 죽어버리고 난뒤에는 생전안웃던 아버지도 큰형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얼리면서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드랍니다 " 늬성은 젖을 잘먹응게 금방금방 커버리드라 " 그바람에 죽은 해만이에대한 사랑이나 그리움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잊혀져 지드랍니다 그런걸보면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것같고 망각도 필요한것 같습니다
열번째로 태어난 나는우는소리도 아주 우렁차고 아버지가보니 죽어버린것들 과는달리 눈구멍이 초롱초롱 한것이 안죽을것 같드라고 하셨습니다 나보다 8살더먹은 작은형이 소성초등학교 2학년때인데 학교에서 집에오니 조그만한 애기랑 누워있던 어머니가 " 이놈이 아들잉게 우리도이제 3형제를 체웠다이 " 하시드랍니다 그시절에는 아들을 많이 낳는게 최고의자랑 이었답니다 그때 아버지는49세 어머니는43세 이셨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첫이레가 막지난 어느날 소성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사위가 부안촌 뒷동내인 독골에 갔다가 온다면서 우리집에 왔드랍니다 자기반 학생이 근보름 간이나 아프다고 학교에 안오고 장기결석을하니 교장선생님이 가보라고해서 가서보니 괜찮을것 같더랍니다 부억에서는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제일로 반가운 손님이 왔다고 맛있는 반찬을 장만을하고 방에서는 장인과 사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윗목에 밀어놓았던 조고만 보따리 속에서 잠을자던 내가 잠이께서 우렁차게 우는소리가 낫드랍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보따리를 잡아당겨 오더니 " 엇그저끄 막둥이하나 낳았단다 여바라이 (이것봐라) 눈구멍이 확실한 것을봉게 안죽것서야 (안죽을것같다) " 하시드랍니다 이틀후 토요일날 앞동내인 항골에사는 21살먹은딸과 22살먹은 사위가 알을 잘낳는 암닭한마리와 달걀 3개를갖고 문안겸 축하하러 왔드랍니다 큰누나는 어쩌다 한번씩 앞동내인 친정에 왔어도 자기 어머니가 원래 헤비급 이기에 친정어머니가 임신한것을 전혀몰랐 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흰머리가 절반이나난 늙은것이 애기를 낳은게사위보기가 참으로 부끄러웠다고 하셨습니다 큰딸이 부억에 들어가서 달걀3개를 삶아갖고 소곰과함께 갖고들어 왔는데 한개만먹고 팍팍해서 안들어간다고 나중에 먹는다고 안먹었드랍니다 " 그까짓것 댓개라도 (5개) 먹을수 있었지만 다른입을 생각하니 못먹것드라 " 다른입은 아버지와형들 이었드랍니다 한개는 아버지가 잡수시고 한개는 숫가락으로 쪼개서 형들에게 주어서 먹어버리고 났는데 작은누나가 얻어먹고 싶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드랍니다 그때 계란을 조금못떼어 주었던것이 두고두고 짠했다고 했습니다
항골큰딸이 친정어머니가 해산했으니 몸보신하라고 갖다준닭이 날마다 알을 낳으니 잡아먹을수가 없었드랍니다 낮설어서 도망갈까봐서 묶어놨어도 매일알을 낳아서 우리집 닭들과함께 장날마다 달걀두줄을 (20개) 체우고 어쩌다가 한두개가 남으면 큰그릇에 물을 가득붓고 양념을 잘하여서 밥위에쪄서 특식으로 온식구들의 단백질을 보충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궁핍했던 그시절에는 그것으로 돈을 만들수있는 유일한 경제수단 이었드랍니다 그돈으로 비누도사고 양잿물도사고 갈치랑 생선도사고 외할머니의 사탕이랑 담배도사다 드렸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헤비급 이었으나 나를 낳고나서는 젖이 안나와서 아버지께서는 한달에 한번씩 언제나 90kg짜리 쌀한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6km 거리인 정읍에가서 분유1통을 (1가론) 사갖고 지게에 단단히 묶어갖고 오셨드랍니다 그비싼 우유를 끓여서 먹이면 꼭설사를하고 토해버리니 나는 어머니한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많이도 맞았드랍니다 그래서 외할머니께서는 작은솥단지에 쌀밥을 하여서 일부러 누릉지를 만들어 가지고 말린후 절구통에 찧어서 가루를 만들어서 우유에 섞어서 먹이니 잘먹고 설사도 안하고 구토도 안하드랍니다 저는 지금도 하얀우유를 마시면 한시간내에 설사를 하면서 장청소가 거의 깨끗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딸기우유나 쪼코렛 우유는 잘먹지만 하얀우유는 절대로 안마신답니다
그때 동내에서 저에게 젖을먹여 주셨던 흥덕이모님 강주꿀이모님 간동이모님 용리이모님 망근이모님께 한없이 감사드린 답니다 여지껏 간동이모님 산소에만 성묘드렸는데 더늦기전에 다른이모님들의 산소에도 찾아가서 공손하게 절을하면서 감사의 술도올리고 성묘를 드려야 겠습니다 음력 4.2. 내생일때는 언제나 없는살림에도 모떡과 찰떡을 아주 많이하고 소고기도든 미역국도 큰솥에 많이끓여서 나에게 젖을먹여 주셨던 이모님들께 잘대접 하였습니다 아침일찍 강주꿀 이모님과 망근이모님께는 언제나 내가 심부름가서 " 오늘이 내생일잉게 어머니가 얼렁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하데요 " 하면은 이모님들은 두분다 웃으시면서 ' 응 그려 알았다이 벌써생일이여 금방갈께이 "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모님들께 아침을 잘대접하고 집집마다 떡도골고루 싸주셨습니다 참으로 정겨운 이야기이고 안타깝고 짠했던 그때의 아름다운 인정이 넘치던 이야기인것 같아서 찡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도 반찬을 맛있게 잘해주었지만 신세대인 줄포 외숙모가 우리집에 오셨다가 반찬을 만들어서 밥을해주는 날에는 우리 아버지는 모든반찬이 다맛있다고 하시면서 잔칫집에 온것같다고 아주좋아 하셨다고 했습니다 내생일때는 언제나 줄포 외숙모님이 오셔서 떡이랑 반찬도 만들어 주셨답니다 모든 반찬을 맛있게 잘만드시는 외할머니 께서도 젊은줄포 외숙모님의 음식솜씨를 항상칭찬 하셨답니다 줄포 외숙모님은 바느질 솜씨도 좋으셔서 항상 외할머니와 우리아버지 어머니옷도 번개같이 깨긋이 빨아서 손질을 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밀가루로 여러가지 맛있는 전도 잘부치고 소다를넣고 밀가루빵도 항상 맛있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식구들은 줄포외숙모가 오는것을 언제나 좋아 했답니다 구정때는 항상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가막히게 맛있는 모찌떡을 만들어서 갖고오셨습니다 작은각시네 며느리라고 춘수리에서 그렇게 괄세받고 설움받을때 우리집에 한번씩오면 외할머니와 우리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항상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감싸준것에대한 영원한 감사의 보답이기도 했던것 같습니다
전방에서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여름에 우리집에서는 닷세만에 아주큰 불행한 사건이 두건이나 났드랍니다 한건은 빨치산들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보급투쟁중 소를만나면 그날은 땡잡는날 이었드랍니다 돼지는 소리를 지르고 발광을 하기에 산체로는 못갖고 가기에 항상 도살해 가지고 무거운 고기를 짊어지고 험한산으로 갖고가야하고 맴생이는(염소) 잡아놔도 누린 냄새가나고 맛이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는 끈만쥐고 끌고갈수있고 산속의 험한길도 잘걸어가고 잡아서 산속에서 끓여먹고 구워먹으니 횡제만났다 하면서 무조건 끌고갔답니다 전남지역의 영암이나 장흥등지 에서는 소나돼지 염소를 빼앗아갈때는 가져간다는 차용증을 써주고 가져갔다는데 정읍지역의 빨치산들은 싸가지가 없었던지 무조건 강제로 빼앗아 가버렸답니다 우리동내 부안촌은 어제나 새내에서 빨치산들이 넘어와서 곡식과 간장 된장 닭같은걸 강제로 빼았이 갔답니다 새내에서 넘어와서 우리동내를 거쳐서 등거물로 가는코스의 길목이기에 소를갖고있는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저녁밥을 일찍잡수고 소를끌고 뒷산으로 피난을 갔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녁밥을 먹고는 어미소를갖고 언제나 지서가 가까운 춘수리 임실아짐네 집으로 피난을가고 아버지는 1년조금넘은 새끼소를 데리고 동내뒷산인 두암낭갓으로 피난을 갔드랍니다 다른날은 아무렇지도 안했는데 그날은 자정무렵에 송아지가 음메음메 하면서 어미를 부르드랍니다 모깃불도 피워주니 잘자던놈이 일어나서 어미찾는 소리를 지르니 새내에서 넘어오던 총을든 빨치산들이 포위를 하면서 송아지랑 여러사람들이 피해있던 곳으로 욕을하면서 왔드랍니다 이반동놈의 새끼들 개놈의 새끼들 하면서 빨치산 몇놈은 사람들을 발로차고 욕을하고 나서는 " 앉져 이반동놈의 새끼들아 발모가지를 쭉뻣고 눈을감고 가만히 앉아있어 이반동놈의 새끼들아 눈을 뜨는놈 새끼는 팍까버릴 것이여 (죽여버릴것) " 하면서 " 소야치 (송아지) 쥔이 어떤놈이여 이리나와봐 " 하기에 우리 아버지는 벌벌떨면서 앞으로 나갔드랍니다 빨치산들중 대장인듯 한者가 " 집놔두고 왜여그까지 멋헐라고 (무엇하렬고) 기어올라왔냐 이반동놈의 새끼야 해뜰때까지 꼼짝말고 그데로 앉아있어 알었어 반동새끼야 " 라고 하고는 송아지를끌고 가버리 드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큰재산인 송아지를 빼았겼으니 정신이 하나도없고 허탈감에 빠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산다는 인민공화국의 빨치산놈들이 죽여버리고 싶도록 원망스럽기만 하드랍니다 동내사람들은 빨치산이 지나갔으니 다내려갔으나 우리 아버지만 혼자서 넋이나가서 모기를 뜯끼면서 앉아있었 드랍니다 날이밝아 오기에 집에왔더니 어머니가 춘수리에서 큰소를끌고 오셨답니다 " 송아치는 어디매놨어 " 하는데 할말이 없어서 멍하니 서있었 드랍니다 어머니는 재차 " 얼릉 겨물을 (정미후 나오는 고은쌀겨를 혼합한물) 맥여서 어시새끼 (어미와새끼) 두마리다 작답논 틈에다 매놓고와서 아침밥먹어이 " 하더랍니다 (냇가 뚝에는 물이없기에 아침에는 꼭물을 먹여서 소를 풀밭에묶어 놨드랍니다) 허나 송아지가 있어야 겨물을 맥이고 풀뜯어 먹으라고 데리고가지 빨치산들이 끌고가 버렸으니 할말이 없었답니다 " 엇저녁으 두암낭갓티서 빨치산들한티 송아치를 뺏겨버렸어 " 했더니 어머니는 큰소리로 악을쓰면서 " 뭐라고 나가 어서나가서 송아치 찾어와 얼렁찾어 오라고 "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드 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집에서 쫒겨나서 나오고보니 큰집에는 가기가 껄그러웁고 줄포 외삼촌집에는 병든군산 외할머니만 누워계시고 아침밥을 아주 잘잡수는 우리 아버지는 배는고프고 누구 집에가서 밥을얻어 먹을곳도없고 잠은오고 큰집사랑방으로 잠을자러 갔더랍니다 큰아버지께서 낮에일안하고 먼잠을 자러왔냐고 하기에 송아치를 빨치산들이 빼앗아 갔다고하니 " 아이고 큰일났다이 큰손해 낫네이 어쩐다냐 폭을 잘대소이 폭을 잘대이 " 하면서 위로를 해주면서 매꼴 형수님한테 밥을 차려오라고 하드랍니다 큰집 사랑방에서 잠을푹자고 점심때쯤 집에들어가니 외할머니가 큰소리로 어머니를 나무라 시면서 " 누가 쇠야치를 (송아지) 빨치산들한테 뺏기고 싶어서 뺏겼것냐 쇠꼬피를 안놔주면 그놈들이 총으로 싸죽이제 놔두것냐 사람 안다친것을 다행으로 알어야제 볶아댄다고 쇠야치가 나오냐 " 하시면서 어머니를 나무라 시드랍니다 두번째사건은 닷세후 우리 어머니가 큰소를끌고 춘수리 임실아짐네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날은 초저녁에 빨치산들이 왔드랍니다 어미소는 함께살던 송아지가 안보이니 가끔씩 제새끼인 송아지를 찾느라고 음메에 음메에 하면서 찾기도 했드랍니다
춘수리는 지서가 가까우니 빨치산들이 잘안오는데 새내나 부안촌은 수십번씩 다뒤져 훝어서 먹었기에 그날은 좀부자 동내인 춘수리에 왔든것 이었답니다 그당시 빨치산들의 길안내는 언제나 그근처에사는 간신같은 더러운 좌익세포들이 안내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태 : 남부군 정지아 : 빨치산의딸 이병주 : 지리산 참조) " 어이동무 어이동무 여근처서 분명히 큰소가우는 소리가났어 큰소 소리드만 " 우리 어머니는 초저녁잠을 자느라고 못들었는데 임실아짐이 빨치산들의 이야기를 들은것을 나중에 우리어머니에게 가르쳐준 말이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소를끌고가는 빨치산의 바지가랑을 붙잡고 사정하면서 " 댓세전에도 부안촌에서 우리중소를 한마리 가져갔응게 이소는 우리집 몸숨잉게 지발지발 (제발제발) 존일허게 놔주시요이 놔주시요이 " 하였더니 한놈이 시끄럽다고 욕을하면서 총으로 젖가슴팍을 인정 사정없이 힘껏푹푹 두번이나 힘껏 찔러버려서 한참동안 숨을실수가 없어서 죽는줄 알았답니다 언제나 아침일찍 소를끌고오던 어머니가 안오니 아침밥을먹은 아버지가 임실아짐네 집으로 와서보니 어머니가 숨도제데로 못쉬면서 누워있드랍니다 어머니를 부축해서 집에오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 되야지랑 멤생이를 (염소) 잘키우고 빚좀얻어서 내년봄에는 송아치 한마리사서 키우세이 그놈 새끼들한테 한번뺏긴것 어쩔수 있단가 얼렁포기 허세이 " 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해 주드랍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나절이나 안보여서 궁금했는데 메다리에서 한약방을하는 당숙한테가서 한약반제를 (10봉지) 외상으로 지어갖고 왔드랍니다 외할머니가 아침저녁으로 잘달여서 주시는 한약을 서너번 먹고나니 숨을못쉬게 결리던 가슴팍의 아프던기가 풀리고 숨쉬기도 아주수월 하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빨치산 들한테 송아치를 뺏겼다고 아버지에게 밥도안주고 볶아먹었는데 아버지는 궂은소리를 한마디도 안허고 약을지어 왔다고 " 그리서 (그래서) 붕알달린 남자허고 붕알없는 여자허고 다른것 이구나를 싶드라이 " 하시면서 그때 10리가넘는 메다리에가서 약을지어온 고마운 이야기를 여러사람 들에게 하면서 아버지를 칭찬했답니다 그당시 큰소한마리는 부안촌앞논 세마지기값 (논600평) 이었답니다 우리집은 닷세사이에 네마지기반이 (논900평) 빨치산들의 주둥이 속으로 들어가 버린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리산 백무동 인민군사령부나 장당골 조개골 피아골 거림골 청내골 등지에서 빨치산들의 실제모습의 마내킹 조형물을 만나면 꼭스틱으로 대가리를 한번씩 쥐어박고 등산화발로 쪼인트를 한번씩 까면서 다녔답니다 2000 - 2010년 까지는 지리산 곳곳에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등 지리산주위 지자체에서 빨치산들이 활동했던 지리산 곳곳에 빨치산 실물크기의 모형 마내킹들을 많이 만들어 놨었습니다
2005년여름 지리산 법계사 (1450m 산청군 삼장면) 우물옆에서 " 장기수 선생님 (빨치산으로 20 - 30년 복역한者) 지리산 전적지 답사 " 라는 프랭카드를 걸어두고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검거되어서 장기간동안 형무소에서 (교도소) 복역을하고 출소한 빨치산 영감들이 현장인 지리산에와서 진주경상대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학생은50여명 교수2명) 강의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산리 - 원지 - 서울버스만 타면되기에 시간도 충분하고 6.25와 빨치산들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많았기에 아주 유익한 공부였습니다 질의 응답시간에 손을들고 정중하게 " 뻘치산들이 토벌대에쫒겨 다니면서 지리산 백운산 황매산등 깊은산속에 숨어지내면서 산아래 주민들에게 많은피해를 준것을 어떻게생각 하시는지요 " 질문을하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빤히쳐다만 보면서도 대답을 안했습니다 한참후에 함양 휴천면 출신이라는 빨치산 장기수한테 " 선생님은 몇살때 어디로 입산해서 빨치산이 되었는가요? " 질문을 하였더니 그者는 환하게 웃으면서 " 함양 휴천면 동내에서 6.25 나던해 가을에 열여섯살때 동내사람들 11명과함께 마천면 벽송사까지 곡식 간장 고추장 옷과 이불등을 짊어지고 갔었어요 " 하였습니다 분위기로봐서 내가더 있으면 껄끄러울것 같았던지 조교인듯 나이좀든 사람과 학생한명이 오더니 퍽공손하게 교수님들께서 1년전부터 어렵게 마련하신행사 라면서 나에게 내려가 주시면 좋겠다고 사정하면서 이야기 하기에 솔차니 아쉽지만 모른체하고 내려온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한 여자 4사람은 ( 새내 이모님과 줄포 외숙모님 두분이 공동 1위 입니다) 1. 새내 이모님 (수십년간 추석과 구정설때 우리 아버지옷을 다해주셨고 이모부님과도 평생 얼굴한번 안붉히면서 잘지내셨음) 1. 줄포 외숙모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평생 자기친정 어머니와 친정 아버지처럼 대우해 주셨고 새내 이모님과 더불어 외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큰누나의옷도 꼭해주셨으며 줄포 외삼촌과는 서로가 친형제들 보다도 더잘지냈고 평생 얼굴한번 안붉혔음) 2. 용리 막내고모님 (친정에 오실때마다 술을안먹는15살 더먹은 오빠에게 떡과전등을 많이씩 해다주시고 볼때마다 꼭큰절로 인사를 하셨음 아버지가 용리에가면 꼭닭을 잡아서대접 하셨다고 했습니다 큰매형과 매제셋중 막내매제인 박서방이 (박귀동) 제일이라고 칭찬하시고 언제나 좋아하셨음) 3. 그리고 제일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한 여자는 큰며느리 였답니다 (큰며느리말은 무조건 Okey 였습니다 어머니와 심하게 싸우시다가도 큰며느리가 아버님 이제그만 하세요하면 휴전이 되었답니다 큰며느리와는 죽는날까지 서로가 한번도 서운한일이 없었드랍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고 좋아한 사람은 1. 유동열 (큰사위) 2. 오승용 (큰아들네 장손) 3. 유재영 (큰딸네 둘째아들) 4. 오금선 (큰아들네 큰딸) 5. 오정근 (작은아들네 큰아들) 6. 오봉숙 (큰아들네 3째딸) 7. 오초자 (작은딸) 이었답니다
1. 유동열 : 5년제농중 4학년이던해에 사위로 맞았는데 아주 양반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농사꾼 사위가 아니고 앞으로 학교선생님을할 사위라고 아주좋아 하셨답니다 농중을 졸업하고는 소성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서 군에입대 하여서 전방전쟁터로 가야하기에 유일하게 징집이 면제되는 철도공무원으로 직업을 바꾸었 드랍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있다가 우리어머니는 떡을해갖고 찹쌀과 팥 녹두등 여러가지 먹을것들을 보따리 몇개에 싸가지고 난생처음으로 기차를타고 솜니 (익산 당시는 이리) 딸네집에 갔더랍니다
그때 우리어머니는 사위가 방을쓸고 걸레를 빨아다가 방을닦는 것을보고 처음보는 모습이라 그것만 으로도 아주 좋아했는데 방으로 세면대야에 따뜻한 물을담아갖고 오더니 어린것들의 얼굴과발을 깨끗하게 씻기는것을 보고는 기가막히 드랍니다 우리집에서는 그런광경을 여지껏 한번도 본일이 없었고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에 그져 한없이 부럽기만하고 사위 유서방이 감사하기만 하드랍니다 집에와서는 아버지와 그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 조선 천지에는 우리 유서방같은 사람은 없을것 이여이 " 했드랍니다 아버지께서는 " 그려 저기 아부지 탁히서 (닮아서) 아조 (아주) 느자구가 (사람됨됨이) 있어이 " 어쩌다가 아버지가 잡곡등 여러가지 먹을것들을갖고 딸내집에 갈때는 항상 " 유서방 허는것좀 꼭 잘보고 배와 (배워) 갖고와이 " 하셨답니다 논이나 밭에서일을 하다가도 유서방 이야기만 나오면 두분다 좋아서 미소지으면서 어절줄을 몰라하면서 기분이 좋았드랍니다
2. 오승용 : 큰아들이 딸만 넷을낳고 난후에 다섯번째로 태어난 장손입니다 어릴때부터 점잖하고 온순하다고 두분다 아주좋아 하셨습니다 부모님들은 두분이 이삼일 간으로 교대로 정읍에 가셔서 손주를보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 참 이쁘제이 얼마나 컷등가 머리도 지애비랑 똑같이 곱슬머리여이 " 하셨드랍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깨서는 승용이의 이름만 들어도 좋아하셨 드랍니다 어머니는 " 꼬치조께 만져볼라고 기저구를 벗기느라고 한참을 고생히서 만져밧그만 " 아버지께서는 " 나는 애기 이불을 떠들어봉게 기저구를 고무줄로 깍묶어놔서 못봣네이 " 장손인 손주가 얼마나 예뻤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3. 유재영 : 큰딸네 둘째아들인데 4살때부터 초등학교에 갈때까지 큰형이 우리집으로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아주 토실토실하고 어린것이 양반이라고 두분다 칭찬하시면서 무척이나 좋아 하셨습니다 작은누나가 맛있는 반찬을 해먹이면서 엄마처럼 길렀습니다 무엇이든지 잘먹고 성가싫을 것이없는 유재영 이었습니다 부부싸움을 아주 잘하셨던 어머니와 아버지도 재영이가 있을때는 싸움을 안하셨기에 우리집 UN군 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외손주 재영이에게 우렁이나 메뚜기를 자주구워서 먹이고 장날은 정읍에가서 과자랑 사탕도 잘사다가 먹였습니다 해병대를 지원하여 중위로 전역한후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서 전무까지 승진했던 유재영은 우리부모님 자손들중 2018년 현재까지는 제일로크게 성공한 자랑스러운 외손이기도 합니다 4. 오금선 : 외손주는 5남매가 있었지만 친손주는 처음인 큰아들의 큰딸 이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선이만보면 항상 좋아하면서 웃으셨습니다 아버지 께서는 금선이가 어릴때 마당에서 돌아다니면 손녀딸의 뒤를 만면에 웃음을띠고 천천히 졸졸 따라다니 셨습니다 아버지는 재영이에게 했듯이 금선이 에게도 메뚜기도 잡아다 구워주시고 우렁도 잡아다가 구워주시곤 하셨습니다만 재영이처럼 맛있게 잘먹지는 못하드랍니다
5. 오정근 : 작은아들의 큰아들 입니다 큰아들은 딸만넷을 낳았는데 작은아들이 아들을 낳으니 아주 대단히 좋으면서도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심스러워서 대놓고는 좋아하지도 못했드랍니다 돌아다니시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이틀 거리로 작은아들네 집에가서 고추달린 손주를보고 오셨으며 고추를 만져보고와서는 어머니와 둘이서 정근이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좋아서 한참씩 웃으면서 도란 도란 손주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좋아하셨 드랍니다 6. 오봉숙 : 큰형네 셋째딸 입니다 봉숙이는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소성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봄가을 소풍때는 꼭 팥이든빵을 두개씩 사갖고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렸답니다 고등학교는 정읍으로 나가서 다녔기에 못왔드라고 했습니다 제언니 들이나 누가 시킨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꼭빵을 사갖고와서 빵을 좋아하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드렸드랍니다 참으로 신통한일 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봉숙이는 복있는 집에서 데려갈 것이다라고 하셨답니다 어느해 여름휴가때 형님네 방앗간에서 봉숙이네 시부모님을 만났을때 그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두분다 오늘 처음듣는 이야기라시며 그런일이 있었냐 하시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께서는 아주 흐뭇해 하셨습니다 봉숙이가 자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그랬기에 봉숙이네 민지 희지 우주를보면 언제나 반갑고 더정이 간답니다
7. 오초자 : 우리집 3남2녀중 서열이 4번째 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닐때부터 밤늦게까지 밭일을 하였기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싫은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23살에 용산 산속의 가난한 복숭아밭 과수원으로 시집을가서 2남3녀를낳고 일을많이도하는 매형과함께 농사일 과수원일 하면서 잘살던중 누나가 38살봄에 43살의 매형이 남의집 모심는데 모터를돌릴 전기선을 잘라준다고 좋은일을 하다가 매형이 감전사고로 사망을 하였드랍니다 전기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이 있으신 분이면서도 왜두꺼비집을 내려서 전기를 차단을 안하고 220볼트 전기가 통하는 선잘랐는가 모르겠습니다 5남매중 큰아들과 작은딸은 자기들이 대학교를 안간다고 하기에 못보냈고 작은아들은 전북대치대 큰딸과 막내딸은 충남대 간호학과 보냈답니다 부지런 하였기에 남보다먼저 풋고추와 상추와 열무등을 뜯어다가 그산속에서 정읍장까지 버스타고 나가서 팔아서 몇푼안되는 돈으로 5남매의 학용품등을 사주었답니다 매형이 사망하고난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녁에 잠을자다가 일어나서 작은딸 걱정을 하다가 날이훤하게 새버리는일이 셀수도없었 드랍니다 친척들이와서 맛있는것 사잡수시라고 용돈을조금 주고가면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 것까지 챙겨서 눈둘원불교 교당에 갔다가 오면서 언제나 5리길 용산으로 작은딸네 집으로가서 그돈을 작은딸손에 쥐어주었답니다
교당에 갈때마다 큰형이 차비하라고 3000원이나 어쩌다가 5000원을 주면 교당에는 1000원만 유지비를내고 (기독교의 헌금격) 눈둘에서 용산의 산속까지 걸어가서 남어지 몇푼을 작은딸손에 쥐어주고는 부안촌까지 10리길을 걸어서 왔었답니다 한번은 어떻게 저떻게해서 큰돈인 60000원을 만들어 놨는데 두분이다 다리가 아파서 용산까지 갈수가 없어서 걱정을 하다가 이종형인 상균형님네 형수님한테 사정해서 용산에 갔다주었는데 그것이 들통이나서 우리 어머니는 큰며느리한테 아주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드랍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서운하고 괫심했던지 나에게 그이야기를 여러번 하셨었습니다 어느해 여름에는 작은딸이 애들 뒷치닥거리 하느라고 풋고추와 열무와 상추를 정읍장까지 팔러다니는게 짠해서 3돈반짜리 금반지를 작은누나에게 빼주면서 정읍 금방에가서 팔아서 새끼들 학비에 보태쓰라고 하였더니 누나는 절대로 거절했지만 빼주고 왔드랍니다 그후 언젠가 집에가니 나는 묻지도 안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밭에서 일을하고 나서보니 늬가히준 반지가 어디로 빠져서 달아나 버렸다이 하셨습니다 그 이튿날 작은형님이 소개해주는 정읍 금방에가서 3돈반짜리 반지를 맞추어 드린다고하니 그만두라고 하시면서도 먼져것같이 무거우면 어디로또 빠져버린다고 가벼운것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2돈반 짜리로 해드렸더니 이놈이 더맘에들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작은형님네 집에가기전에 어머니와 중국집에 갔더니 막둥이덕에 맺년만에 맛난것을 먹는다면서 우동을 국물까지다 맛있게 다잡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다음에는 간짜장을 사드릴께 했으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안계셔서 그약속은 지킬수가 없었습니다 그반지도 반년을 다안끼고 작은 누나에게 비눗물을 묻혀서 빼주셨다고 했습니다 작은누나는 나에게 그이야기를 10번도넘게 하였습니다 작은누나가 그렇게 어렵게 그렇게 힘들게살때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누나는 치과대학에 다니는 재건이의 등록금을 2번을 내주셔서 얼마나 고맙고 부드럽게 넘어갔는지 모른다고 작은누나는 나에게 몇번이나 그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큰누나한테 고맙다고 전화를 하면서 마음속깊이 참으로 부끄러웠 습니다 일년에 2-3번 만나는 작은누나에게 푼돈만 몇푼씩 쥐어준게 참으로 미안해서 내깐에는 큰마음을먹고 50만원을 한번 드렸더니 " 월급쟁이이가 먼돈이 있다고그려 동생 마음은 잘안게 그만두어이 몇년만 있으면 힘이필것 같은게 그때 갚을께이 " 하였습니다 " 새끼가 하나둘 이어야 띠어놓고 마땅한 홀애비한테 훗시집 이라도 보내것는디 새끼가 다섯이나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노릇를 어쩨야 쓰까이 " 하시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작은누나가 편하게 잘사는것을 한번도 못보시고 하늘나라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젊었을때 작은 외할아버지의 꼬임에 빠져서 사기를 당하고 큰곤욕을 치룬일을 수십년을두고 울궈먹으면서 수시로 바가지를 긁어대기에 부부싸움을 대단히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서로욕도 하시면서 싸우다가도 큰며느리가 " 아버님 이제그만 하세요 " 한마디하면 그것으로 싸움이 끝났답니다 우리 아버지는 큰며느리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OK 였습니다 어머니도 며느리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싸움을 더는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외손주 재영이가 이모랑 놀러갔다가 오던가 잠자다가 껬을때는 두분이 싸우다가도 자동으로 휴전이 되었드랍니다 그래서 재영이는 우리집의 UN군 이었답니다 제가 어렸을때부터 우리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는 사소한 일을가지고 한달에 2-3번은 꼭 싸우셨습니다 이웃인 대나실댁네나 동천댁네 입석댁네 집에서는 1년내내 한번도 안싸우는데 우리 집에서는 꼭 크소리가 나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시는게 참으로 싫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굶다싶이 살다가 처가살이 온것과 작은 외할아버지한테 사기당한것이 큰핸디켑이고 그2건 때문에 어머니한테 쥐어살다가 가끔 폭발하는것 같았습니다 나는 약혼때 우리집 사람에게 우리 부모님이 싸우시는게 아주 싫었으니 우리는 절대로 부부싸움을 하지말자고 했으나 부끄럽게도 가금씩 싸우면서 산답니다 이제는 무조건 참으면서 싸우지안고 살도록 하겠습니다
광주에살때 언제인가 방앗간 큰형네 집에가니 어머니와 큰형수님이 입다툼을하고 있었습니다 싸움내용은 면의원 선거의투표 였는데 큰며느리가 부탁한 큰형수님네 친정사돈이고 큰형님과 라이온스와 JC 친목모임등 3가지 모임의 같은회원인 하영철씨를 찍으라고 아침밥을 먹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신신당부를 하였드랍니다 투표를 마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방앗간으로 점심을 먹으러 오셨는데 " 어머니 투표 잘하셨어요 하영철씨 잘찍었어요 " " 아니 너한티 미안헌디 하영철이 안찍었다이 너그 아버지랑 나는 붓깍지가 노병도한티 찍어지드라 " " 왜요 어머니와 아버님이 제일로 좋아하시는 백산 외삼촌까지 오셔서 신신당부 하실때는 그런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고는 왜들 그릿서요 " " 해권이가 (우리 사촌형) 나허고 너그아버지한테 3000원 씩이나 주면서 해일이 동서인 노병도를 꼭찍으라고 허드라 돈을받았는디 안찍어주면 우리손지 새끼들한테 해로울것 같아서 노병도를 찍어주었다이 " " 참말로 우리어머니 허고는 못히봐 아들말을 들어야제 조카말을 들어요 " 나는 어머니에게 " 어머니는 참양심가네이 잘했네 노병도 사돈한티 돈을받았으니 당연히 찍어줘야제이 돈받어먹고 안찍어주면 죄받을것 같아서 꺼림찍 허제이 " 하였더니 " 아 그려 돈받어먹고 안찍어주면 참말로 죄받제이 " 큰형수님은 어이없어 하시면서 " 우리어머니 허고는 못히봐 멀정한 아버지까지 하영철을 못찍게 헌것봐 " 아버지는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어쩔줄을 몰라하시면서 입맛만 다셨습니다 투표결과는 하영철씨가 월등하게 큰표차로 당선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6살차이인데 두분다 82세 동짓달에 교통사고 가나서 그후유증으로 이듬해 8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정읍에서 야리쪽으로 걸어오시다가 시내버스 인줄알고 고창가는 직행버스를보고 손을들었던것 같았습니다 버스는앞에 무슨장애물이 있었는지 손을든 우리아버지 쪽으로 버스가 스쳐서 지나가면서 우리아버지의 우측 손바닥에는 버스의 새카만 기름때가 묻어있는 흔적이 그데로남아 있었습니다 버스가 아버지 옆으로 가깝게 지나가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는 넘어지면서 아스팔트길 가장자리턱에 뒷머리를 크게 부디치신것 같았습니다 윗저고리와 내의는 피가많이 흘러서 갑옷같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애기업은 엄마가 가방에서 애기의 기저귀를 꺼내서 아버지의 머리를 동여매 주셨다고 했습니다 (어디사는 누구실까요? 참으로 고마운 그엄마!!! 고맙습니다 영원히 영원하게 행복한일만 있으세요 한없이 한없이 감사하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잔다리목 박정형외과 에가서 8바늘을 꿰메고 약을타가지고 집에왔더니 어머니 께서는 " 먼일이다냐 차에 치였다냐 피가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배개에 피가말라서 가죽같아야 머리팍박이 (머리가) 많이 터졌다냐 어쩌야 쓰까이 (어쩌면 좋을까) 영감이 헐일도 없음서 멀라고 정읍까지 돌아댕기다가 그릿을까이 " 하셨습니다 피를 많이흘려서 조끔은 어지러운것 같다고 하시면서도 김도 잘싸잡수고 장조림 간장에 밥을비벼서 밥한그릇을 다잡수셨습니다 걸음도 잘걸으시고 밥도 잘잡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괜찮하실것 같았습니다 저녁을먹고 정읍에가서 소고기2근 돼지고기2근을 사갖고와서 어머니께 드리면서 피를많이 흘렸으니 몸보신을 하시게 고기를 삶아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어버지께서는 젊어서부터 고기는 무슨고기든지 아주 잘잡수 셨습니다 큰형님과 작은형님께 아버님의 교통사고를 전화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작은형님께 며칠있다가 박정형외과에 모시고가서 실밥도 빼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저녁늦게 광주로 왔으나 아버지께서 다치신게 많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82세의 나이에 피를많이 흘리셨기에 링겔도 맞혀드리고 몸보신도 잘해드렸어야 하는데 모두들 바쁘다고 연로하신 어머니께만 맞겨놓으니 몸이많이 약해지신것 같았습니다 교통사고가 나기전 가을에 우리집논은 전부남에게 맞겨버고 없으니 아버지께서는 심심하시고 옛날에 하시던 습성이 몸에베어서 지게를 짊어지고 큰집에 가셔서 두엄을 한짐씩 짊어지고 큰집논 네마지기에다 두엄을 부려놓으시곤 했드랍니다 지게질도 안하는 큰집 해권이형님은 자기를망신 시킨다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못하시게 말려도 우리 아버지는 큰집두엄 퍼내는일을 계속해서 다하셨드랍니다 어머니 께서는 나에게 " 해권이한티 좋은소리도 못들으면서 욕먹음서도 두엄을 매칠이나 ( 며칠) 내다줬단다 나같으면 부애나서도 (화나서) 안허것인디 아침밥만 먹으면 꼭지게지고 큰집으로 갔단다 " 하셨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교통사고 후에는 치매기가 왔답니다 추운데도 마당에서 계속한나절씩 서있고 마루에서서 멍하니 한나절씩 담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쳐다보고 서있기만 하였답니다 어머니가 누집에서 애기업어주는 띠를 얻어다가 큰방문고리 에묶고 아버지의 허리띠에 묶어놓으니 그띠를 끄를줄을 몰라서 새끼 강아지처럼 마루까지만 나갔다가 들어오시곤 하면서 더는못나가 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밥을주면 다잡수고 나서는 어머니 눈치를 살피면서 밥상에남은 간장도 물을 마시듯이 다마셔버리고 반찬이란 반찬은 다잡수어 버리니 반찬을 아주 조금씩만 주셨드랍니다 손이 닷는곳에 빵이있으면 2개고 3개고 다잡수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때 병간호는 어머니가 다하셨는데 6년후 동짓달에 어머니가 방앗간 앞에서 교통사고가나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후 방앗간으로 오셨을때는 큰형수님이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교통사고 사고개요는 등거물에서 방앗간으로 오는데 승용차 운전수가 머리가하얀 할머니 이시니 먼저 지나가시라고 하니까 고맙다고 등거물에서 얻어오던 찰떡을 차앞에서 양보해준 운전수에게 떼어주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임시 범버를단 승용차가 서있는 승용차를 미쳐못보고 들이받으니 우리 어머니는 튕겨나가 떨어지면서 대퇴부에 네군데나 금이가 버렸답니다 임시범버 승용차가 다행히 종합보험이 들어있서 치료도 잘받고 보상도 잘받았답니다 형님네 방앗간에서 4km정도인 아산병원에 계실때는 집사람과 교대로 한달에 2-3번씩 문병가면서 담당간호사인 조형원님께 간단한 선물과 약소한 봉투도 전하면서 우리어머니의 보살핌을 신신당부를 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병원침대에 누워서 문병간 나에게 " 그놈새끼가 애리다는디 (어리다) 눈을뜨고 운전을 잘헐것이제 작것이 지아푸가 (자기앞에) 차가있능것을 못봤다고 허드란다 그밥통같은놈 새끼땜시 내가여그 누어서 먼고상인가 (고생) 모르것다이 그리도 그놈새끼가 보험을 들어놔서 늬성돈은 안깨진다고히서 다행이다이 " 하시면서 밖에못돌아 댕기니 답답해서 죽것다고 하셨습니다 " 늬가 잘히주라고 맺번이나 이야기 힛다고 애기엄씨 간호원이 주사도 안아프게 잘노아주고 약도 잘맥여주고 기저구도 고실고실허게 잘갈어주고 아조 잘헌다이 " 하셨습니다 퇴원후 방앗간에 와서는 방에서 요강에다가 대소변을 보시는데 제데로 깨끗하게 사용을 못하시니 큰형수님이 참으로 큰고생을 하셨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오후에는 눈둘 원불교 교당에서 여자 교무님과 신도들이 조를짜서 병문안을 오셨답니다 문병오시는 분들에게 노인냄새나 대소변 냄새가나면 안되니까 여름인데도 방에서 빨간 고무장갑을끼고 고무다라이에 따뜻한물을 담아서 목욕도 시켜드리고 봉걸레로 방을 몇번씩닦고 방향제와 은은한 향수를 많이 뿌리면서 손님을 맞으셨드랍니다
방앗간 부잣집 이라고 소문이 낫기에 손님들에게 과일이나 과자 음료수 원비와 박카스 수박 참외등 좋은것 으로만 대접을해야 했드랍니다 방앗간일로 바쁘기는한데 문병오신 손님들은 한나절씩 안가시고 이야기를 하시고 때로는 7-8명의 저녁도몇번 대접했다고 했습니다 그당시 부천은 사건이 많기도한데 형사반장을 하던때지만 나는 금요일밤에는 무조건 정읍으로 왔습니다 그런나를 두말도 안하고 배려해 주셨던 김경부 과장님 (총경퇴직 진도군수 1회역임) 안성이 고향이고 큰형님과 동갑인 소진섭 계장님께는 지금도 감사하답니다 내가 갔을때는 과일과 빵을 많이잡수니 어머니가 설사를 하실까봐 옷을버리니 팬티만 입고자는 나에게 큰형수님은 " 아들이 셋이지만 막둥이라 확실히 다르요이 나는 방문열면 냄새가나서 마스크를 물에담갓다 꽉짜서쓰고 그위에 수건을 한번더감고 봉걸레로만 방청소를 하는데 시아제는 참으로 신통하고 효자요이 "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어머니께 매끼니마다 밥을가져다준 방앗간 살림꾼 박종옥 동생에게는 지금도 고맙고 감사 하기에 부안촌 동내에서 한번씩 만나면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기에 약소한 용돈을 가끔씩 주기도 합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씨멘트 마당에서 기어다니 시다가 좌측옆쪽 종아리에 상처가 낫기에 방앗간 옆집에사는 영찬이형네 재춘이한테 삼거리가서 마이싱과 대일밴드와 소독약을 사다달라고 부탁해서 마당에서 고름을짜내고 소독을하고 마이싱 가루를넣고 대일밴드를 붙이면서 바르게 못붙여드리고 아주많이 비툴어지게 붙여 드렸습니다
그리고 큰형수님께 날마다 한번씩 소독을 해드리도록 부탁을하고 저녁에 왔습니다 그후 48시간이 다안되었는데 어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전화를받고 작은형님과함께 논스톱으로 방앗간에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죽어버린 어머니의 머리칼부터 이마 얼굴 코 귀 젖가슴 손 손가락 10개 발과 발가락 10개까지 천천히 더듬으면서 만져보았습니다 종아리의 대일밴드가 아주바르게 잘붙여져 있어서 형수님께서 치료를 해주신게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 고마움은 내가 죽을때까지 못잊을것 같았답니다 큰형님 덕으로 장례식도 4일장으로 아주 정성껏 성대히 잘모셨습니다 그때 어머님의 영정사진옆에 진열된 글라디오라스꽃이 왜그렇게 붉고 고왔던지 지금도 글라디오라스를보면 언제나 거룩한 어머님의 영정사진이 생각난답니다 큰형님께서는 매주일요일 눈둘원불교 교당에서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빌어드리는 제를올려 드리고 음식을 잘차려서 근50여명의 교인들께 대접하셨습니다 원불교 교무님이신 사촌형 해인형님은 한번도 안빠지시고 전부참석 해주셨기에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저와같이 부천에살던 작은형은 생업으로 마지막 49제때만 참석했습니다 큰형수님은 남이듣기에는 그져그런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큰며느리 이니까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하는것이 당연하다고 할수도 있지만 매주 일요일마다 조를짜서 문병오시는 원불교 교인들 때문에 참으로 큰고생 하셨습니다 열번을 잘하다가도 한번잘못하면 잘못한것만 남는것 이기에 한없이 고맙답니다 추석이나 구정설과 형님 생일때는 약소한 선물을 보내드렸지만 어머니의 다리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대일밴드를 잘붙여주신 큰형수님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49제때 가장좋은 은수저 두벌을 선물해 드렸습니다
2000년봄 산에는 철쭉꽃이 피고있을때 남여 초등학교 동창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가장높은곳인 백운대에 (836m)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소문이 전주까지 들려서 배영중학교 교장을하던 춘수리 장성기 교장이 친구들에게 음료수와 커피라도 사주라고 10만원을 보내왔습니다 모두들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하룻재 까지는 올라갔으나 죽어도 더는 못올라 간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운대 정상은 포기를하고 가까운 하룻재우측 영봉까지만 올라가기로 합의를보고 로프를잡고 아주 힘들게 영봉에 올라갔습니다 영봉에 오르는 좌우에는 북한산 도봉산에서 사고로 산에서죽은 사람들의 슬픈 추모비들이 수십개가있고 난코스라 겁이좀 나는곳 입니다 추모비의 주인공들은 거으가다 (90%정도) 대학생들 이었습니다 " 고려대학교 000 인천교대 000 서울시립대 000 등등 " 추모비는 남자 여자모두 젊디젊은 대학생 들이기에 더욱짠 했습니다 영봉에서는 삼각산인 백운대 인수봉 망경대와 도봉산도 아주 환하게 잘보였습니다 " 아이고 나죽것네이 오해봉씨 나좀 살려주어 " 하면서 로프를잡고 유격훈련하듯 고생하고 올라와서보니 삼각산 도봉산 남산타워 까지가 한눈에 다보이니 모두들 좋아서 난리가들 났습니다
춘수리 우리 외갓집 아랫집에살던 유필례씨가 " 오해봉씨가 월남에서 죽어버렸드라면 이좋은곳구경을 못했것네이 " 하면서 72년 여름에 우리 어머니가 친정인 상영이네 집에왔다가 나와동갑인 상영이는 월남갔다가 살어서 돌아왔는데 우리막둥이는 어째야 할랑가 모르겠다면서 대성통곡을 하시드라고 했습니다 연동 외숙모님은 " 암시랑 안헝게 울지마시요잉 살어서오제 먼죽는다요 " 하시면서 위로하시 드라고 했습니다 해마다 저희군 동기회에서 현충일날 동작동에있는 월남에서 전사한 23명의 동기생들이 잠들어있는 4묘역에 참배드리러 간답니다 1년간 나와함께 같은내무반 옆침상에서 마주바라 보면서 생활했던 월남에서 전사한 남택준의 (4묘역 301번) 묘소에 참배드릴 때마다 만일내가 월남에서 전사했드라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슬퍼하시며 우셨을까 내묘소에는 누가찾아 와줄까가 궁금했습니다 남택준은 해마다 남동생 두명과 여동생이 조카들까지 데리고 오는데 나는 형님들과 누나들이 돌아가시고나면 어느누가 찾아와줄까? 그런 슬픈생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중대장까지 마치고 올려고 했었는데 73년3월에 파리평화협정 체결때문에 11개월만에 월남에서 귀국해서 20일간 휴가로 쉬면서 6km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던 추억속의 그길 등거물 - 재넘어- 띠밭머리 - 상평리 - 당고개재 - 호남중학교에 가봤습니다 띠밭머리 징검다리를 건널때에는 (호남고속 도로덕에 지금은 큰다리가 놓였음) 젖이없는 나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서 부안촌 에서부터 그무거운 90kg짜리 쌀한가마니를 짊어지고 정읍에 가다가 이곳에 와서야 지게를 바쳐놓고 한번씩 쉬셨다는 아버지 생각이 낫습니다 한없이 고맙고 미안하고 가엽고 위대하고 장하고 짠했습니다 " 아버지 고맙습니다 저때문에 그무거운 쌀가마니를 짊어지시고 얼마나 무겁고 힘드셨나요 아버지가 사다주신 그우유덕에 홍진도 이기고 잘자랐습니다 고맙고 고마운 우리아버지 그져 한없이 고맙습니다 " 인정많은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계실때 우리보다 가난한 외갓집 친척들이나 이웃들에게 약소한 곡식이나 고구마등을 나누어 줄때마다 이상하게 아버지한테 꼭 들켰드랍니다 " 넘존일 헐라고 그뜨건 (무더운) 여름에 뼈빠지게 농사 지었당가 " " 굶는다는디 몇되빡 이라도 주어야제 어쩌것능가 인자그런 소리는좀 허지말어이 " 아버지의 only for my family (오직 내가족만을 위해서) 어머니의 feeds to the pool (가난한 이웃들에게 곡식을) 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밥을 굶으면서자란 아버지와 부자집에서 4계절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으면서자란 어머니의 차이점과 어떤기준의 가치관 이었던것 같습니다 " 저것 막둥이란놈 고등학교만 졸업시켜놓고 죽으면 좋것는디이 " 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걱정속에서 그래도 그런데로 잘자랐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서 81.3.24. (음력) 83세로 돌아가신 아버님상때와 87.7.6. (음력) 83세로 돌아가신 어머님상때에 조문을 와주신 많은친지 친척들등 고마운 조문객님들과 아버님상때 조전을 보내주신 군선배님과 연대장님 이었던 송영환 중령 (갑종 220기 보안사 인사과장 청주 1사단 12연대 동료중대장) 故양인목 중령 (육사22기 7군단장 중장전역 인천 12연대 작전주임) 故정수열 대령 (육사15기 22사단장 소장전역 함흥 12연대 중대장때 대대장) 故안필준 준장 (육사12기 보안사령관 1군사령관 보사부장관 대장전역 청주 12연대 중대장때 연대장) 어머님상때 부천 남부경찰서 이주호 서장님과 조의금을 보내주신 118명의 직원들과 정읍 군수님 정읍 읍장님 고광철 정읍 경찰서장님께서 조화를 보내주시고 3분이 함께오셔서 조문을 해주신것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자식 결혼때는 부모가 부모님 상때는 자식이 란말이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큰형님이 더불어 잘살아온 몫이고 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