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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과 당(唐), ‘이란(Iran)·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왕조(王朝)?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 이건 매우(대단히) 중요(重要)한 부분(部分)이요, 문제(問題)다. 조선사(朝鮮史)가 대륙(大陸) 땅(東方)에서 벌어졌던 역사기록(歷史記錄)이라고 했을 때, 역설적(逆說的)인 이야기지만 “한(漢)과 당(唐)은 오늘날의 대륙(大陸) 땅에 없었다.”는 것을 고증(考證)한다거나 증명(證明)해야 하고, 또 그 논거(論據)를 필요(必要)로 한다.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강토(疆土)가 반도(半島)가 아닌 대륙(大陸)의 땅이었다.〉라고 주장(主張)한다면 그 논거(論據)는 필수적(必須的)이다. 혹자(或者)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제부터는 ‘전체(全體)가 아닌 지명(地名) 하나하나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물론 지명(地名) 하나하나가 중요(重要)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 없다.
여기서 문제(問題)는, “대륙(大陸)의 땅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이었다.”고 하는 주장(主張)에 대해 누가 이를 믿고, 신봉(信奉)하고 있는가? 하는 건(件)에 대해 누구도 자신(自身)있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는, 특정인(特定人)인들의 주장(主張)일 뿐이다.’라는 인식(認識)이 강(强)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重要)한 첫 번째는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대륙(大陸)의 왕조(王朝)였다.〉는 것에 대해, 큰 틀 안에서 설득(說得)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라는 프레임【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라는 패러다임(paradigm)를 깨야한다.】을 깨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1) 첫 번째로, 한(漢)과 당(唐)이 고구려(高句驪)요, 신라(新羅)였는가? 하는 것이고,
(2) 두 번째로, 한(漢)과 당(唐)이 지방제후(地方諸侯)로써 조선천자(朝鮮天子) 모셨는가? 하는 것이며,
(3) 세 번째로, 한(漢)과 당(唐)은 별도(別途)의 독립(獨立) 왕조(王朝)로써,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남부(南部) 오늘날의 “이란(Iran)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지역쯤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筆者)는, 위의 세 가지 안(案)에서 「세 번째 ➌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오늘은 그 논리(論理)를 갖고, 논거(論據)를 정리(整理)해 보고자 한다.
● 계몽편(啓蒙篇) 지편(地篇) 2 에, 이런 구절(句節)이 있다. 곧 〈전한(前漢)의 중랑장(中郎將)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게 잡혀 있을 때, “東 還 沙 塞 遠 : 동쪽으로 돌아가려니 沙漠의 변방 아득하고” 하며 한탄(恨歎)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북해(北海)를 ‘바이칼(Baikal)호수=패가이호(貝加爾湖)’로 추정(推定)하여 해설(解說)하고 있다.
북해(北海) 변(邊)에서, 소무(蘇武)가 양(羊)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위의 계몽(啓蒙)편의 지편(地篇) 구절(句節)에 따르면 :「바이칼(Baikal) 호수(湖水)의 동(東)쪽에 옛 한(漢)나라 장안(長安)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게 가능(可能)한 일인가? 왜냐하면 소무(蘇武)가 말하기를 : “동쪽으로 돌아가려니 사막(沙漠)의 변방이 아득하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이건 아니잖은가!
결론(結論)부터 말하면 : 소무(蘇武)가 양(羊)을 키우며 억류생활(抑留生活)을 했다는 북해(北海)는, 장안(長安)으로부터 서(西)쪽 수만리(數萬里) 사막(沙漠) 밖에 있어야 맞는 말이다. 이럴 때, 소무(蘇武)가 말하기를 : “동쪽으로 돌아가려니 사막(沙漠)의 변방이 아득하다”고 말한 것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맞는 말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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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啓蒙篇 地篇 2
《天下之水가 莫大於四海하니 四海者는 東海西海南海北海也니라 : 천하의 물이 사해(四海)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사해란 동해·서해·남해·북해이다.》라고 하였다. <인용/끝>.
북해(北海)가 어떻게 ‘바이칼(Baikal)호수=패가이호(貝加爾湖)’가 될 수 있겠는가? 이건 아니다.
(2) 古文眞寶 前集 제2권 > 五言古風 短篇 > 蘇武
蘇武在匈奴하여 十年持漢節이라 : 蘇武는 匈奴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십년 동안 漢나라 깃발 잡고 있었네. 白雁上林(注1)飛하여空傳一書札이라 : 흰 기러기 上林苑에 날아가면서 空中에서 한 書札 전하였다오. 匈奴詭言武死러니 後漢使復至한대 常惠敎使者하여 爲單于言호되 天子射上林中하여 得雁하니 足有繫帛書하여 言武在某澤中이라하다 使者如惠語하여 以誚單于한대 單于驚謝曰 武等實在라하니라 : 羊 치느라 변방 땅에서 괴로우니 흉노(匈奴)는 소무(蘇武)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는데, 뒤에 한(漢)나라 사자(使者)가 다시 오자 상혜(常惠)는 사자를 시켜 單于(선우)에게 “천자(天子)가 상림원(上林苑)에서 활을 쏘아 기러기를 잡았는데 기러기의 발에 백서(帛書)가 매여 있었는바, 소무가 아무 늪 속에 있다고 쓰여 있었다.”고 말하게 하였다. 사자가 상혜의 말대로 선우를 꾸짖자, 선우는 놀라서 사죄하기를 “소무 등이 참으로 살아 있다.” 하였다.
牧羊邊地苦(注2)하니落日歸心絶이라渴飮月窟水하고飢餐天上雪이라 飢餐天上雪, 匈奴幽武하여 置大窖中하고 絶不飮食이러니 會天雨雪한대 武臥齧雪하여 與旃毛並咽之하니라 : 양(羊) 치느라 변방 땅에서 괴로우니, 지는 해에 고국(故國)으로 돌아갈 마음 끊겼네. 목마르면 월굴(月窟)의 물마시고, 굶주리면 천상(天上)의 눈 먹었다오. 흉노(匈奴)는 소무(蘇武)를 유치하여 큰 움속에 두고는 전혀 음식을 주지 않았는데, 마침 하늘에서 눈이 내리자 소무는 누워서 눈을 씹어서 털방석의 털과 함께 삼켰다.
東還沙塞遠하고, 北愴河梁別이라, 泣把李陵衣하고, 相看淚成血이라 泣把李陵衣 相看淚成血 : 李陵別蘇武詩에 有携手上河梁及不覺淚沾裳之句. : 동쪽으로 돌아가려니 사막(沙漠)의 변방 아득하고, 북쪽으로 하수(河水) 다리의 작별 서글퍼라. 울며 이릉(李陵)의 옷 잡고, 서로 보니 눈물이 피 이루었네. 이릉(李陵)이 소무(蘇武)와 작별한 시(詩)에 “손을 잡고 하량(河梁)에 올랐다.” 하였으며, 또 “눈물이 치마를 적심을 깨닫지 못하네.”라는 시구가 있다. 중략(中略). <인용출처 (1)+(2) / 고전번역원Db. 동양고전종합db / 끝>.
소무(蘇武)가 숫양을 키우며, 어떻게 새끼를 칠 수 있었겠는가!
「동(東)쪽의 장안(長安)에 가려해도 사막(沙漠)의 변방(邊方) 땅이 아득하니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한 것이다.
● 그렇다면 당시(當時) 중랑장(中郎將) 소무(蘇武)가 억류(抑留)되어 숫양이 새끼를 낳을 때까지 있어야 했던 그 북해(北海) 땅은, 장안(長安)으로부터 수만리(數萬里) 서(西)쪽 사막(沙漠) 너머(外)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는, 이제 영면(永眠)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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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해(北海)의 서남(西南)에 북방오군(北方五郡)이 있다.
➊ 사기열전(史記列傳) : 史記 卷111 / 衛將軍驃騎列傳 第51 / 衛靑 :《元光五年,中略.軍各萬騎.青至蘢城,斬首虜數百. : 위청은 용성(蘢城)에 진격해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인용/끝>.
위에서 말하는 용성(蘢城)은 곧 용성(龍城)이다. 이곳은 서방(西方) 오랑캐가 추사(秋社)하는 곳이다.
용성(龍城)은 지난 회(回)에서 설명(說明)한 용황(龍荒)이다. 「고구려(高駒驪)의 북계(北界)는, 용황(龍荒)과 가깝다(近) 또는 용황(龍荒)과 접(接)해 있다」는 등의 기록(記錄)을 접할 수 있다.
〈용(龍)은 흉노(匈奴)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용성(龍城)을 가리키고, 황(荒)은 멀리 떨어진 변방(邊方)이라는 뜻의 황복(荒服)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 오랑캐가 출몰(出沒)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대륙사(大陸史)에서는 “용황(龍荒)”에 대해 설명(說明)하기를, 「「용황(龍荒)은 즉(卽) 용성(龍城)이다. 서호(西胡)【서(西)쪽 오랑캐(胡)】는 모두 용신(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고로 큰 회합처(會合處)를 부르기를 용황(龍荒)이라고 한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서호(西胡)란 서방(西方)에 살고 있었던 오랑캐(胡)를 말하는 것이지, 동방(東方)에 살고 있었던 오랑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본시(本是) 용성(龍城)이란 서방(西方)에 있었다는 것이고, 동방(東方)에는 없었다는 거다.”
漢 書 卷 一 百 下. 敘 傳 第 七 十 下 편중에서 : 《中 宗 明 明, 夤 用 刑 名 時 舉 傅 納, 聽 斷 惟 精. 柔 遠 能 邇, 燀 燿 威 靈, 『龍 荒 幕 朔, 莫 不 來 庭』 丕 顯 祖 烈, 尚 於 有 成. : 중종(中宗)은 밝고 밝아서 형명(刑名)을 공경히 사용하였다. 이때에 어진 자를 들어 쓰고 말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받아들여서 시(時)는 이것이니, 이때에 어진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다. 다스리고 결단함에 정밀하였다.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여서 위엄이 빛나니, 「용황(龍荒)은 사막(沙漠) 북쪽 지역으로, 모두 와서 복종하여」 찬란한 조종(祖宗)의 공열(功烈)이 이루어짐이 있었다.》고 하였다.
「용황(龍荒)은 즉(卽) 용성(龍城)이다. 서호(西胡)【서(西)쪽 오랑캐(胡)】는 모두 용신(龍神)에 제사를 지내는데, 큰 회합처(會合處)를 부르기를 용황(龍荒)이라고 한다. 막(幕)은 즉(卽) 사막(沙漠)으로, 모두 와서 복종(服從)하였다.」는 이야기다.
“용황(龍荒)”에 대해서 가장 이해(理解)하기 쉽고, 객관적(客觀的)으로 서술(敍述)되었다고 판단(判斷)되는 것은. “한서(漢書)와 통감절요(通鑑節要)”의 것이다.
서방(西方) 땅에 살고 있는 서(西)쪽 오랑캐(西胡)가 회합(會合)하며, 용신(龍神)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 “동방(東方) 땅일 수 없는 노릇이다.”
한서(漢書)에서도, 통감절요(通鑑節要)에서도 말하기를 :〈사막(沙漠)의 북(北)쪽 황복(荒服)에 용성(龍城)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환경(環境)으로 미뤄보면,
오늘날의 “하서(河西)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에 이르는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용성(龍城)이 있었다.”는 것이다. 곧 서북방지대(西北方地帶)【장안(長安)기준(基準)】에 있었다는 것이다. 【서방(西方)의 땅에, 삭(朔)은 북방(北方)을 뜻하니 곧 서북방지대(西北方地帶)다.】
◇ 따라서 위청(衛靑)이 출정(出征)한 용성(龍城)은, 서방(西方) 땅에 있어야 하며, 위청(衛靑)은, 곧 서호(西胡)들을 토벌(討伐)한 것이다.
➋ 史記 卷111 / 衛將軍驃騎列傳 第51 / 驃騎將軍(霍去病)편의 주석(注釋) :《集解張晏曰:登海邊山以望海也.索隱按:崔浩云北海名,群鳥之所解羽,故云翰海.廣異志云在沙漠北. : 집해(集解)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 바닷가의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색은(索隱)은 : 최호(崔浩)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여러 새들의 무리들이 이곳에서 털을 간다. 옛 부터 전하기를 한해(翰海)라고 하였다. 광이지(廣異志)에 따르면 사막(沙漠)의 북(北)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史記本文 :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1),而皆在河南,因其故俗,為屬國.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殺略漢千餘人. : 이에 변방 5군의 옛 새외(塞外)에서 항복한 자들을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모두 하남(河南)에 있다. 이로 인하여 속국이 되었다. 명년(明年), 흉노(匈奴)가 우북평(右北平)과 정양(定壤)에 들어와 한(漢)인 천여 인을 죽이고 약탈(掠奪)하였다.》
《주석(注釋) (1) : 正義五郡謂隴西,北地,上郡,朔方,雲中,並是故塞外,又在北海西南. : 정의(正義), 5군은 소위 롱서(隴西)·북지(北地)·상군(上郡)·삭방(朔方)·운중(雲中)군인데, 나란히 옛 새외에 있다. 또 북해(北海) 서남(西南)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주석(注釋) (1)에서 말하는 것은, “북해(北海)의 서남(西南)에 소위 북방오군(北方五郡)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 북방오군(北方五郡)은, “롱서군(隴西郡)·북지군(北地郡)·상군(上郡)·삭방군(朔方郡)·운중군(雲中郡)”이란 거다.
◇ 그렇다면 북해(北海)가 어디냐에 따라 북방오군(北方五郡)의 위치(位置)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➌ 예(例)들어, ‘바이칼(Baikal)호수=패가이호(貝加爾湖)’가 북해(北海)라면 : 서남(西南)쪽의 북방오군(北方五郡)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외몽골(蒙古) 서(西)쪽 항애산(杭愛山)일대(一帶)로부터 알타이(Altai)산맥(山脈) 남쪽기슭, 오노목제(烏魯木劑),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지대(沙漠地帶)와 그 주변일대(周邊一帶)다.
➍ 예(例)를 들어, 준갈이(準喝爾)의 북방지대(北方地帶) ‘서(西)시베리아’저지대(低地帶)에 북해(北海)가 있었다고 한다면, 서남(西南)쪽의 북방오군(北方五郡)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 지도(地圖)를 놓고 보면, 서남(西南)쪽은 카스피 해(Caspi 海) 서(西)쪽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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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시(唐詩) / 自薊北歸(자계북귀) 高適(고적) / 홀로 계북(薊北)에 돌아오다.
驅馬薊門北 : 말을 몰아 계문(薊門) 북쪽에 오니
北風邊馬哀 : 북풍에 변방의 말도 애처롭다.
蒼茫遠山口 : 먼 산의 어귀가 아득히 푸르르고,
豁達胡天開 : 활달(豁達)하게 오랑캐 하늘이 열려있다.
五將已深入 : 다섯 장수가 이미 깊이 들어갔는데
前軍止半廻 : 선봉군은 오직 반만 돌아왔구나.
誰憐不得意 : 누가 뜻을 얻지 못했다 가엽다하는가
長劍獨歸來 : 장검(長劍)을 차고 홀로 돌아왔다.
이때의 상황(狀況)에 대해 사가(史家)들이 설명(說明)하기를,
고적(高適)은 집이 가난하여 공(功)을 세울 기회를 찾았다. 개원(開元) 20년(732) 봄, 계문(薊門)에 신안왕(信安王) ‘이의(李禕)’의 행군부대총관(行軍副大總管)의 막부(幕府)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信安王) 이의(李禕)는 큰 승리(勝利)를 얻게 된다.【舊唐書 列傳 第149 北狄 : 契丹 : 開元二十年,詔禮部尚書信安王禕為行軍副大總管,領眾與幽州長史趙含章出塞擊破之,俘獲甚眾.可突於率其麾下遠遁,奚眾盡降,禕乃班師.】
그러나 이듬해 개원(開元) 21년(733)봄, 글란(契丹) 가돌우(可突于)가 다시 침략(侵略)하자, 당군(唐軍)은 대패(大敗)하고, 이곳에서 공(功)을 세워보고자 했던 고적(高適)은, 여름에 계문(薊門)을 떠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위의 시(詩)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舊唐書 列傳 第149 北狄 : 契丹 : 明年,可突於又來抄掠.幽州長史薛楚玉遣副將郭英傑,吳克勤,鄔知義,羅守忠率精騎萬人,並領降奚之眾追擊之.軍至渝關都山之下,可突於領突厥兵以拒官軍.奚眾遂持兩端,散走保險.官軍大敗,知義,守忠率麾下遁歸,英傑,克勤沒於陣,其下六千餘人,盡為賊所殺.】
위에서 말하는 「계(薊)」는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동(東)쪽에 있는 옛 ‘어양(漁陽)’ 땅을 말하는 것이며, “계문(薊門)이니 계구(薊丘)니 계문연수(薊門煙樹)의 신기루(蜃氣樓)”등으로 더 알려진 땅이다.
따라서 계북(薊北)이란 계(薊) 땅의 북(北)쪽을 말하며, 오늘날의 북경(北京) 북(北)쪽 지방이라고 봐도 된다.
‘계(薊)’ 땅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인식(認識)하면서 아래의 구절(句節)을 보자. 아래의 시(詩) 역시 고적(高適)의 것이다.
아래에서 말하는 ‘계(薊)’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보면, 〈(4)의 북경(北京) 동(東)쪽 근교(近郊)의 땅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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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燕歌行幷序(연가행 병서) 高適(고적) / 【開元二十六年,客有從御史大夫張公,出塞而還者,作燕歌行以示適,感征戍之事,因而和焉. : 개원 26년(738), 어사대부인 장공을 따라, 변새로 출정하였다가 돌아온 객이 있어, 〈연가행〉을 지어 나에게 보였는데, 출정하여 수자리 살던 일에, 느낀 바가 있어 화답한다.】
漢家煙塵在東北 : 한(漢)나라의 동북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漢將辭家破殘賊 : 한나라 장군은 집 떠나 잔악한 적 물리쳤네.
男兒本自重橫行 : 남자는 본래 전장에서 종횡무진하는 것 중시하니,
天子非常賜顔色 : 천자가 특별히 총애함에 있어서랴.
摐金伐鼓下楡關 : 징을 치고 북 두드려 산해관(山海關)으로 내려가니,
旌旆逶迤碣石間 : 깃발들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연이어져 있네.
校尉羽書飛瀚海 : 교위(校尉)의 우서(羽書)는 사막(沙漠)을 날듯이 건너오고,
單于獵火照狼山 : 선우(單于)의 사냥하는 불빛은 낭산(狼山)을 비추는구나.
山川蕭條極邊土 : 산천은 황량하여 변방 끝에 달했으니,
胡騎憑陵雜風雨 : 오랑캐의 기병들은 비바람 몰아치듯 침범한다.
戰士軍前半死生 : 전사들은 군진(軍陣) 앞에서 태반이 죽어 가는데,
美人帳下猶歌舞 : 미인들은 장막 안에서 여전히 춤추며 노래하네.
大漠窮秋塞草腓 : 큰 사막은 가을이 깊어 변새의 풀들 시들어지고,
孤城落日鬭兵稀 : 외로운 성에 해 지는데 싸우는 병사 드물다
身當恩遇常輕敵 : 몸은 나라의 은혜 입어 항상 적을 경시하지만,
力盡關山未解圍 : 병사는 온 힘 다해 관산에서 싸워도 포위를 풀지 못한다.
鐵衣遠戍辛勤久 : 철갑옷 입고 멀리 수자리 사니 고통과 수고가 오래되었고,
玉筯應啼別離後 : 아내는 옥(玉)같은 두 줄기 눈물 이별 후에 응당 흘렸으리라
少婦城南欲斷腸 : 어린아내(少婦)는 성(城) 남(南)쪽에서 애간장 끊어지려 하는데,
征人薊北空回首 : 원정 간 남편은 계북(薊北)에서 공연히 고개만 돌려보네.
邊庭飄颻那可度 : 변방은 아득하니 어찌 건널 수 있으랴,
絶域蒼茫更何有 : 넓고 먼 외딴 땅에 무엇이 있으리오.
殺氣三時作陣雲 : 살기(殺氣)는 하루 종일 서려 전운(戰雲)을 만들어내고,
寒聲一夜傳刁斗 : 밤새도록 차가운 조두(刁斗) 소리 전해오네
相看白刃血紛紛 : 바라보니 흰 칼날에 혈흔이 분분(紛紛)하니
死節從來豈顧勳 : 예로부터 절개에 죽지 어찌 공훈을 돌아보랴.
君不見沙場征戰苦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 싸움하는 고통을,
至今猶憶李將軍 : 지금도 여전히 이장군을 그리워하고 있다네.
※ 고적(高適)은 :고적(高適)【AD 706∼765】: 당(唐)나라 시인으로 자는 달부(達夫)이고 지금의 하북성 경현(景縣)인 발해(渤海) 인이다. 젊었을 때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산동(山東)과 하북(河北)지방을 방랑하며 이백(李白)·두보(杜甫) 등과 사귀었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간의태부(諫議太夫)로 발탁되었으나, 그의 직언(直言) 탓으로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에게 미움을 사서 팽주[彭州]·촉주[蜀州:四川]의 자사(刺史)로 좌천되었으며, 청두[成都]에 유배되어 있던 두보와 가까이 지냈다.
그 후 영전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고, 보하이현후[渤海縣侯]에 봉해졌다. 그의 시는 호쾌하면서도 침통한데, 특히 변경에서의 외로움과 전쟁·이별의 비참함을 읊은 변새시(邊塞詩)가 뛰어나다. 잠참(岑參)의 시와 더불어 성당시(盛唐詩)의 일면을 대표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고적 [高適] (두산백과)】-
위의 구절(句節)을 몇 개로 단락으로 나눠 설명(說明)하고자 한다.
➊ 한(漢)【당시(當時)의 당(唐)나를 뜻하는 말이다.】나라의 동북방(東北方)이라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다. 특히 계(薊)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벌어졌던 전쟁(戰爭)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곳에서 흉노(匈奴)인 이민족(異民族)들이 침입(侵入)하자 그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원문(原文)에서 말하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계북(薊北)”이다.
➋ 이때 병사(兵士)들은 유관(楡關)【산해관(山海關)】으로 내려가니 갈석산(碣石山)사이에 각(各) 군(軍)의 깃발이 펄럭이며 연이어져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 유관(楡關)은 곧 산해관(山海關)이며, 갈석산(碣石山)에 있고, 바닷가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유관(楡關)과 갈석산(碣石山) 사이(間)란 말은 이어질 수 없다.
위 본문(本文) 이야기대로라면 : 유관(楡關)과 갈석산(碣石山)은,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유관(楡關)으로 내려가는 군대(軍隊)의 군기(軍旗)가 수없이 갈석산(碣石山)사이에 이어져 바람에 휘날렸다는 뜻이다.
➌〈한해(瀚海)로부터 교위(校尉)의 우격(羽檄) 곧 우서(羽書)는 날아들고〉하였으니,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에서조차, “고비(Gobi)사막(沙漠)을 한해(瀚海)”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 산해관(山海關)이나 갈석산(碣石山)까지는 수천(數千)리 떨어져 있어 우격(羽檄)이 날아올 때 쯤 이면 이미 전쟁(戰爭)은 끝나고, 상황(狀況) 종료(終了)이다.
따라서 원문(原文)에서 말하는 “한해(瀚海)나 유관(楡關)이나 갈석산(碣石山)은 서로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➍ 위의 시(詩) 구절(句節)을 보면 : “한(漢)의 동북방(東北方)에 연경(燕京)과 계(薊)【계(薊) : 어양(漁陽) : 범양(范陽)】도 있다.” 계북(薊北)이란 표현(表現)은, 바로 연경(燕京)의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원문(原文)에서 말하는 전쟁터는 “동서남북(東西南北) 모두가 큰(大)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라는 것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볼 때, 한(漢)나라의 장안(長安)에서 동북방(東北方), 그 어느 곳에도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이때의 사막지대(沙漠地帶)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하(河)의 서(西)쪽 땅인 하서지방(河西地方)에 있었을 뿐이다. 당시(唐詩) 로 보면,
오늘날의 영하성(寧夏省)과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하란산맥(賀蘭山脈) 서(西)쪽으로, 장액(張掖)·주천(酒泉)의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동구라파(東歐羅巴)사이의 땅이다. 이곳이 곧 대막(大漠)이다.
아주 중요(重要)한 상황(狀況) 설명(說明)인데,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조건(條件)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동북방(東北方) 지대(地帶)에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지구(地球)상에 존재(存在)했었을 수 없는 왕조(王朝)가 된다.
그러나 분명(分明)히 말하기를,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동북방(東北方)은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있어 이민족(異民族)들이 시도 때도 없이 침입(侵入)하여 군현(郡縣)을 약탈(掠奪)하였다고 한다.
더더구나 고적(高適)이 표현(表現)하기를 : “君 不 見 沙 場 征 戰 苦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 싸움하는 고통을” 이라고 하였다. 모래벌판(沙場)에서의 싸움은 말 그대로 인간(人間) 최악(最惡)의 고통(苦痛)을 감내(堪耐)해야 한다는 뜻이다.
➎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동북방(東北方)에, 이러한 땅, 즉(卽) 큰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있었다고 한다면 : ‘한(漢)과 당(唐)나라’는 어디쯤에 있어야 할까?
바로 오늘날의 〈이란(Iran) 땅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땅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 “범양(范陽)절도사(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또한 이해(理解)될 수가 있다.〉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 있을 있을까? 사고(思考)의 전환(轉換)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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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塞下曲 王昌齡 / 변방의 노래 왕창령
《蟬鳴空桑林, 八月蕭關道 : 매미가 빈 뽕나무 숲에서 울어대는, 팔월의 숙관(蕭關)길 / 出塞入塞寒, 處處黃蘆草 : 변방에 입출(入出)할 사이 날은 추워지고, 곳곳엔 누런 갈대들 / 從來幽幷客, 皆向沙場老 : 예로부터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객(客)들은, 모두 사막(沙漠)에서 늙는다네. / 莫學遊俠兒, 矜誇紫騮好 : 저 유협객들이 자류마(紫騮馬) 좋다고 자랑하는 것을 배우지 말라.》하였다.
예로부터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풍속(風俗)은 호협(豪俠)을 숭상(崇尙)하였는데, 이들 ‘유협객(遊俠客)들은 대부분 사막(沙漠)에서 죽어갔다’는 이야기다.
즉(卽)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는 사막지대(沙漠地帶)에 자리 잡고 있다라고 보아야 하는데,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유협객(遊俠客)들에 대한 많은 기록(記錄)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幽州와 幷州에서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여, 소년들은 말달려 사냥하기를 좋아하네.【六朝시대 宋나라 鮑照의 擬古八首 세 번째 수에, 幽幷重騎射, 少年好馳逐】라고 하였으며,
曹植의 白馬篇에, “묻노니 어느 집 자제인가, 幽州와 并州의 유협객이라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사막에서 명성을 떨쳤다오.[借問誰家子,幽并遊俠兒,少小去鄉邑,揚聲沙漠垂]”라는 구절(句節)도 있다.
곧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유협객(遊俠客)들이 수천(數千), 수만리(數萬里) 고향(故鄕)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지어낸 말이다. 왜냐하면 이들 유협객(遊俠客)들이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그 진가(眞價)를 발휘(發揮)했다면 이들이 살았던 고향(故鄕) 땅, 유주(幽州)와 병주(幷州)는 사막지대(沙漠地帶)로 그곳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의 싸움에 능했다고 보는 곳이 타당(妥當)한 것이다.
사막지대(沙漠地帶)는 특이지형(特異地形)으로, “이곳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병사(兵士)들은 전투(戰鬪)는 고사하고 지 몸 하나 간수(看守)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이다.
이러한 특이지형(特異地形)은 하서(河西)의 땅에 있을 뿐이며, 위의 글 (1)∼(5)에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천산북로(天山北路)와 그 서(西)쪽 일대가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땅이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산서성(山西省) 등지가 옛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의 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형지세(地形地勢)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왜곡(歪曲)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는 어디에 있었는가?」
… 한(漢)과 당(唐)이 고구려(高句驪)요, 신라(新羅)였을까?
… 한(漢)과 당(唐)이 제후(地方諸侯)로써 조선천자(朝鮮天子)를 모셨을까?
… 한(漢)과 당(唐)이 별도(別途)의 독립(獨立) 왕조(王朝)로써,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남부(南部) 오늘날의 “이란(Iran)과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지역쯤에 있었을까?
○ 대륙조선(大陸朝鮮)에 있어, 한·당(漢·唐)은 필히 넘어가야 할 산(山)이다. 이걸 넘지 않고는 더 이상(以上)의 진전(進展)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2019년 02월 2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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