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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우리는 눈을 들어 높은 산들을 한 번 바라다 봅시다.
산색(山色)은 고금동(古今同)이나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옛 글과 같이 과연 산색은 언제나 보아도
한 모양을 가지고서 조석으로 변하는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산은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형산백옥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금. 은. 동. 철과 같은 모든 보물을 한량없이 품안에 품고 있건만 산은 조금도 자랑하는 빛을 보이지 않는 것이 흡사 군자가 훌륭한 재지를 가졌으되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설혹 사람들이 물욕에 탐을 내어 산 속을 잡아 헤치고 모든 보물을 끄집어 내 간다 할지라도 산은 조금도 성을 내며 거역하는 태도가 없으니 과연 세속 인간들이 본받아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합니다.
더구나 태산교악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웅장한 기세는 출세한 장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입지의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약한 물줄기지만 첩첩이 쌓인 나무 수풀을 헤치고 사나운 바윗돌을 피하여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때로는 깊은 못도 만들고 얕은 여울도 만들며 때로는 잔잔한 세류가 갑자기 변하여 몇 십 척 몇 백 척의 폭포도 만들어가며 갖은 수단과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 흘러가는 목적은 과연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백 천 강 물이 한곳에 모여서 만리장강을 이루어 가지고 결국은 바다에 들어가자는 것이 흐르는 물의 목적이 아닙니까.
우리는 목적달성을 위하여 천신만고(千辛萬苦)를 아끼지 않고 전진노력(前進努力)을 하는 물(水)의 정신에 대하여 크게 감탄하며 배워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또 물은 힘이 약하지만 처마 끝에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굳은 주춧돌을 뚫어내는 것을 볼 때에 유능승강이라는 말과 같이 유한 놈이 강한 놈을 이겨낸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물은 한량없는 변화작용이 많습니다.
한 번 바다에 들어간 물은 뜨거운 태양의 열을 받아 수증기로 변하여 공중으로 올라가서 구름이 됩니다. 그리하여 기압의 고저와 온도의 변화에 따라서 비와 안개며 이슬과 서리로 눈과 우박으로 얼음과 같은 여러 가지 물체로 변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에 기체와 액체와 고체라는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합니다만 물의 젖는 성질 곧 습성만은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우리 인간들이 세력에 눌려서 금전에 팔려서 또는 부귀영화에 끌려서 절개를 팔고 지조를 변하여 제 정신을 잃고 결국은 인간의 본성까지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물에 대하여 볼 때에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올시다.
그러므로 자경문에 말씀하시되 금생(今生)에 미명심(未明心)이면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라고 하셨으니, 그 뜻은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의 양심을 밝히지 못한다고 하면 한 방울 물도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상에 말씀드린 산과 물에 대해서는 고인들의 비유가 하도 많습니다만 그중에도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어진 군자(君者)는 산(山)을 좋아하고 지혜(智慧)있는 사람은 물(水)을 좋아한다 하였으며
불교에서 견성하였다고 하는 송나라 문장 소동파는 산을 법신의 체에다 비유하고
물은 화신의 용에다 비유하여 게송을 짓되
계성변시장광설 (溪聲便是長廣舌) 이요,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이냐 하였으니, 그 뜻은 귀에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우주의 진리를 설파하시는 부처님의 법음으로 들리우고, 눈에 보이는 고요한 산 빛은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으로 나타나 보인다는 말이니
과연 산수에 대한 진리를 그럴 듯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유정동물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물과 같은 날짐승이지만 까마귀는 반포의 효도를 알고 원앙새는 죽음으로써 정조를 지키며 닭은 때를 알고 울며 개는 도적을 살펴 짖습니다.
그리고 고래로 십장생에 든다는 사슴과 학과 거북들을 보면 사슴은 잠을 잘 때에 흡기장생(吸氣長生)하는 법을 행하고 학과 거북은 절식복기하여 불로장생의 술(術)을 알고 있으며 노루와 여우는 세 구멍을 파고 살고 있고 봉황은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까치는 천기를 보아서 집을 짓고 기러기는 그물에 걸릴까봐 입에다 갈대를 물고 날아가며 벌은 군대의 규율이 엄숙하고 개미는 공동 작업으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는 부처님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과연 미물 곤충까지라도 꾸물거리는 것은 다 같이 불성의 영지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풍간선사와 이통현 장자는 범을 타고 다녔었고
화림선각선사는 대공 소공이라는 범 두 마리를 두고 시봉을 시켰다고 하며
지금부터 팔십 년 전에 경운원기 선사는 양산 통도사에서 금자로 법화경을 쓸 때에
족제비가 법당에 들어와 꼬리를 흔들매 그 꼬리털을 뽑아서 붓을 매고 경책을 써서 완성한 후에 지금 통도사에 국보로서 보관되었다고 하니
말 못하는 짐승과 사람 사이에 통하는 부사의한 영지적작용은 과연 만유공통의 불성이 없다고 하면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는 동시에 준동함령이 개유불성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확실히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기 전 태자로 계실 때에 부왕을 모시고 춘경전에 나아가 밭가는 것을 보셨는데
때마침 쟁기 보습 끝에 꿈틀거리며 튀어나오는 굼뱅이를 별안간 새가 날아와 쪼아 먹는 것을 보시고 갑자기 무상을
느끼시며 같은 동물로서 어찌 살아 있는 놈이 목숨 있는 다른 놈을 잡아먹는가 하고 그 날부터 좋아하시던 고기를 잡수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또 고령신찬선사께서는 벌이 빈 문으로 들어왔다가 빈 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공연히 창을 뚫고 돌아다니며 나가려고 애쓰는 것을 보시고 그 벌의 어리석은 것을 비유하여
공문(空門)을 불긍출(不肯出)하고 투장야대치(透窓也大痴)로다,
백년(百年)을 찬고지(鑽古紙)한들 하시(何時)에 출두기(出頭起)냐,
그 뜻은 빈 문으로 곧 나가지 않고 애를 쓰니 미련하기 짝이 없다,
백년을 앉아 옛 글을 본들 어느 때나 견성할꼬.
이와 같이 게송을 읊어 자기 스승 되시는 계현선사를 깨우쳐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느 중이 선으로 유명한 당나라 조주선사님께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은즉 스님께서 대답하시되 무(無)라고 하셨습니다.
준동함령이 개유불성이라고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무슨 까닭에 무라고 하셨는가,
천 칠백 공안 가운데 이 무자 화두는 천년 이상을 내려오면서 몇 백만 몇 천만 명의 머리를 썩히고 울리며, 밝히고 웃겼는지 알 수 없는 가장 무섭고 가장 유명한 화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서산대사께서는 이십일 세(歲) 되시던 해 운수납자로써 촌락을 지나시다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신 후에,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회루설(古人會漏洩) 금청일성계(今聽一聲鷄)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털이 흰 것이요 마음이 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옛 사람이 벌써 알렸다고 하니
이제 우는 닭소리에 장부의 할 일을 마쳤도다 하는 오도송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상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하대지. 일월성신. 금수초목. 유정무정을 막론하고 우리 불교에 있어서는 직접 간접의 모든 인연을 가지고서 수도상에 많은 도움과 가르침이 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에 말씀 드린 바 우주 자연계에서 성립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우주만유의 천종만물이 영원히 존재해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생노병사와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이라는 열 두가지 법칙에 의지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생멸하며 생했다 멸했다 할 뿐이요
한 물건도 실성의 자체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주 안에 가득찬 천종만물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 문제는 과연 철학상 가장 중대한 문제올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삼계만유가 유심소조라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요
오직 심식의 작용에 따라 자작자수(自作自受)하고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써
변전윤회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한 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제 말한 바와 같이 천종만물이 심식(心識)의 작용으로 되었다 할지라도 그 천종만물을 담아 가지고 있는 우주허공의 그 본체는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주(宇宙)라는 무엇을 가리켜 우주라고 하는가 하면
우주라는 글자가 집우(宇)자 집주(宙)를 합해서 우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집 우, 집 주라고 하니까 같은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기실 내용은 두 글자의 뜻이 각각 다릅니다.
첫째 집우(宇)자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니 동서남북. 사방사유. 상하시방 모든 세계의 허공을 통틀어 공간 전체의 대명사로써 집우(宇)자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다음 집 주(宙)자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니 천지개벽한 지가 몇 백억 몇 천 억만 년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마는
고왕금래하는 세월의 장단을 통틀어 시간 전체의 대명사로서 집 주자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과 가를 모르는 무변허공과 고금시종을 모르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합하여 우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주는 공간과 시간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면 공간과 시간은 과연 어느 때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점에 대하여 자고로
많은 학설이 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말하기를
무변찰경자타(無邊刹境自他) 불격어호단(不隔於毫端)하고
십세고금시종(十世古今始終)이 불리어당념(不離於當念)이라 하셨습니다.
그 뜻은 무변허공도 한 털 끝에 불과하고
십세고금도 한 생각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안에 있는 천종만물이 전부 다 심식(心識)의 작용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종만물을 담아 가지고 있는 우주 자체까지도
다만 우리의 한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경(원각경)에 말씀하시되 공생대각중이 여해일구발(空生大覺中이 如海一發)이라, 허공이 부처님의 대각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 바다 위에 적은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며,
옛날 석옥화상께서는 태고 화상에게 묻기를 공겁 이전에 태고가 있었던가 하고 물으시매 태고화상이 대답하시기를
공생태고중이라, 허공(虛空)이 태고(太古) 가운데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석옥화상께서는 웃으시며 찬탄하시되「불법이 동으로 갔다」하시고 법을 인가 하셨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우주만유가 전부 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란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이며 어디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 불교 최고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만유의 근본이 마음에서 나온 까닭에 마음의 근원을 밝히지 않고는 우주만유의 진리를 깨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밖으로 만유의 진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안으로 내 마음의 근원을 찾으라, 그러면 이것이 곧 불도수행의 골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께서도 심심심(心心心)이여 난가심(難可尋)이라,
마음을 마음이라고 부르는 그 마음 참으로 찾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찾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 내가 가지고 내가 찾는 것이니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 마음을 찾겠다는 마음까지도 마저 비워버리고 빈 허공과 같이 모든 생각을 버려 버린다고 하면 비로소 그때 에 드러나는 참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현담에 말씀하시되
법성(法性)이 본공적(本空寂) 하니 무취역무견(無取亦無見)하라,
성공(性空)하면 즉시불(卽是佛)이니 불가득사량(不可得思量)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만법의 자성이 본래부터 공공적적한 것이니 취하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 자성이 언제나 공적만 하면 그것이 곧 부처라 사량분별로는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또 말씀하시되 약유욕지불경계면 당정기의여허공하라 원리망상급제취하면 영심소향개무애(若有欲知佛境界면 當淨其意如虛空하라 遠離妄想及諸取하면 令心所向皆無碍)니라 하셨으니,
그 뜻은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 같이 비워 맑히라, 모든 망상과 취하려는 욕심만 없애버리면 내 마음 향하는 곳에 무엇이 걸림이 있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각 자기의 심성만 찾아 밝힌다고 하면
우주 자연의 대학(宇宙 自然 大學)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을 것이요
한 걸음 나아가서 부처와 극락까지도 내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는 바는 옛날 조사의 말씀에 내 눈앞에 보이는 이 공간과 이 시간을 초월하여 공겁 밖에 앉아서 줄 없는 거문고(琴)를 타고 구멍 없는 저(笛)를 불며 겁외가(劫外歌)를 부르고 현중곡(玄中曲)을 들을 줄 알아야만 비로소 출세대장부(出世大丈夫)의 사업(事業)을 마쳤다고 하니 과연 그 경계는 어떠한 경지에 가야만 되는지 한번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