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온전케
시편40편
시편이라고 하면 일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곧장 자신의 삶으로 끌어당겨 적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왜냐하면 시편을 읽어 보게 되면 자신의 어려움과 고난들을 마치 시편 기자가 대변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떤 목사님은 우리 성도들도 시편을 쓸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시편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는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 삶으로 시편을 적용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 본성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가장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찾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으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구약을 보든 신약을 보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찾되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미리 앞당겨 알려 주시는가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유대교 신앙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구약을 보게 된다면 결국 성경대로 나타난 글자 그대로밖에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왜 예수님을 볼수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영으로 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성경접근 방식은 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는가? 그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자는 식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히브리서 11장을 보게 되면 성경을 순종하시는 식으로 믿음의 선진들이 살았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이 히브리서11장 24-26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저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갑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상상도 못하는 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5장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율법서를 아무리 읽어도,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예수님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자들은 모든 성경이,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해, 장차오실 메시야 되신 예수님을 위한 삶임을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야 신약의 관심에서 보니까 그렇지요 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40편을 한번 봅시다.
1,2절을 보게 되면 자신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를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자신의 발을 반석 위에 두시어 다윗의 걸음을 견고케 하셨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다윗이 당한 죽음의 고난 가운데서 건지시어 자신을 견고케 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노래로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이 찬송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헛된 우상을 좇지 않고 여호와만 의지하는 자는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6-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그러면서 9,10절에서는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의를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11-17절에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잉 나를 둘러사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하게 하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시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분명 1절에서 4절은 다윗 자신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5-10절에서는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다윗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 11절에서 17절에서는 자신의 죄악에 대한 고백이 나오며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며 자신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우리들이 다윗의 시대로 들어가서 해석하려면 상당이 난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미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답해 놓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0절을 봅시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다윗 자신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 들어 주심이 자신의 의로운 삶을 통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폐하시고 오시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죄가 사해 지며 이것으로 인해 원수들은 수치를 당케 될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죄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시는 죄를 위해 제사 드릴 것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말씀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가져올 의의 기쁜소식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다윗이 기다리고 기다린 분은 바로 메시야되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니 새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새노래는 예수님의 피공로를 노래하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셀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윗은 입술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11절부터는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합니다. 뿐만아니라 원수에 대한 심판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17절 마지막에는 자신은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분명 기가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셨고 그 건져 주심에 대해 찬양하였는데, 왜 다시 지체하지 말고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1절에서 5절은 과거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며, 11절부터는 이제 현재 슬픔가운데 있는 자신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해석이야 어떻게 되었던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사실은 히브리서에서 이 말씀을 율법을 폐하시고, 성소 안으로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하신 사실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단순히 다윗 시대로 국한해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성도들이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윗이 믿고 기다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도의 죄를 용서하시고 발을 반석위에 두셨으며 성도로 하여금 새노래로 찬양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긍휼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습니다. 죄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깨끗이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 우리들이 함께 적용할 것은 율법을 폐하시고, 자신의 몸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그 사랑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온 삶도 참 의가 되신 예수님을 널리 선포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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