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 金振聲 (1892 ~ 1968)】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892년 7월 15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성양면(成陽面) 좌양리(左陽里)에서 김형률(金亨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소아(素我)이다. 본명은 김필보(弼堡)이고, 김정만(金禎萬)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한 후 단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초순 하얼빈(哈爾濱)에서 유동열(柳東說)·신영삼(申榮三) 등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인 2세 청년 800여 명을 모아 독립군으로 양성하였다. 러시아군 사령관인 호리왓트 대장과 교섭해 동청철도수비대(東淸鐵道守備隊)에 편입시켰는데, 표면적으로 동청철도를 수비하도록 하면서 독립군으로 훈련시킨 것이다.
이후 신영삼·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중국 펑텐(奉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국내외에 100여 개의 지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 경찰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한편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대한독립단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19년 12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던 중 유동열·양기탁(梁起鐸) 등의 석방 운동으로 2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1920년 전남 광양지역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7,000원을 모금해 양기탁에게 전달하였다.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격문 1,000여 매를 만들어 배포를 시도하였다.
1920년 8월 18일 전북 익산군(益山郡)에 거주하는 이순명(李順明)·김한규(金漢奎), 서울에 거주하는 김교우(金敎雨)와 함께 전주군 고산면(高山面) 부호 고갑준(高甲俊)에게서 현금 9,600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이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종로경찰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해 ‘강도’라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1920년 11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1년 2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 때 통위부장(統衛部長) 유동열(柳東說)을 보좌하며 국군 창건에 협조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