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묵주신공’
박해시대의 기도생활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묵주기도를 아는가? 박해시대 사람들은 이를 ‘묵주신공’이라고 하거나 한자어로 ‘매괴경’이라 불렀다. 묵주알을 굴리면서 열 번의 성모송과 한 번의 ‘주님의 기도’ 그리고 영광송을 바치는 이 기도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바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였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이 기도를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장미 꽃다발로 설명해 왔다.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 전통문화 안에서 불교식 염주에 익숙해 있었고, 부처에 대한 꽃 공양을 알고 있었다. 신앙을 받아들인 뒤 우리네 믿음의 조상들은 ‘묵주신공’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쉽게 알 수 있었고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 이를 실천했다.
이 땅에 전해진 묵주기도
18세기 말엽 조선에 교회가 창설된 이후, 신자들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묵주기도를 알게 되었다. 매괴경 또는 묵주신공은 이렇게 조선땅에 전해졌고, 새로 입교한 신도들은 이 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이 기도를 드리는 데에 쓰이는 묵주는 청국에 파견되었던 사행을 따라가서 그곳에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하던 교회의 밀사들이 가지고 들어왔다. 뒷날한글로 번역 간행되었던 “천주성교공과”에도 ‘매괴경 하는 규식’ 곧, 묵주기도를 드리는 방법과 함께 ‘환희’ ‘통고’ ‘영복’의 기도문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처럼 ‘묵주신공’은 일찍부터 보급되어 갔다.
1801년의 박해 이전 묵주기도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홍낙민 루가이다. 그는 정조 임금 밑에서 사간원 정언과 같은 정6품 중견관리를 지내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단언한 바에 의하면 홍낙민은 매일 묵주신공을 드렸다고 한다. 공무를 집행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찾아오는 많은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그는 묵주신공을 한 번도 궐한 일이 없었다 한다.”
그가 1801년 순교의 은혜를 얻은 데에는 아마도 이 신심 실천이 가장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평가되었다. 1801년 공주에서 순교한 김광옥도 사형장으로 꿀려가면서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서적이 없었던 감옥 안에서 묵주기도는 순교자들이 드린 기도의 중심에 있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한신애라는 여성신도의 집에서는 십자가가 달린 ‘염주’ 4개를 압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오석충의 집에서도 십자가가 달린 ‘염주’ 3개가 압수되었고, 김조이(金召史)도 스스로 염주 한 개를 들고 관청에 자수해 왔다. 이를 보면 교회 창설 직후부터 묵주기도는 당시의 신도들에게 보편적 신심의 하나였다. 또한 묵주는 이때 벌써 신자임을 상징하는 도구처럼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들의 기도 묵주신공
1801년의 박해가 끝난 다음에도 숨어 지내던 신도들은 ‘묵주신공’을 열심히 바쳤다. 그들이 기도를 드릴 때 사용하던 묵주는 중국교회에서 들여왔다. 1812년 조선교회의 밀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이여진은 묵주를 가져와 이를 신자들에게 팔아서 여행경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도들은 비싼 가격의 묵주를 사는 데에 아낌없이 재물을 들였다. 그만큼 그들은 묵주신공을 선호했고, 묵주와 같은 성물을 갖고 싶어했다.
19세기 중엽 조선에 건너온 프랑스의 선교사들도 모국에서 체험했던 묵주기도의 신비를 선교지 조선에서 실천해 나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묵주기도에 열심이었고 조선인 신도들도 이 묵주기도에 열심을 더해갔다. 김대건 부제는 조선입국을 준비하면서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묵주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면서 묵주기도를 무수히 드리고 있었다.
바로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에서 묵주기도는 더욱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이제 묵주는 중국에서 수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조선인들이 직접 만들어 쓰게 되었다. 1857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마카오에 머물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시되 묵주는 보내지 마십시오.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듭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중엽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묵주를 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내에서 제작된 묵주를 손쉽게 구하게 된 많은 신도들은 그 묵주를 들고 아름다운 모국어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1860년 전후 철종 말년, 아직 공식적인 박해가 일어나지는 않은 시기였으나 신도들은 천주교에 대한 금령을 여전히 적용받고 있었고, 법의 보호 밖에 놓여있었다. 불한당 패거리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교우촌을 번질나게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교우촌을 습격한 불한당들은 신자들이 자신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우선 묵주와 같은 성물부터 약탈했다. 묵주를 빼앗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피해를 입은 신도들로부터 관가에 고발당할 염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해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자들을 찾기에 눈을 밝혔던 서울의 포졸이나 지방의 나졸들도 신자들을 체포하면 그들의 신표와 같았던 묵주부터 내놓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대원군의 박해를 겪었던 칼레 신부의 기록을 보면, 순순히 묵주를 내놓을 경우에는 이를 배교로 간주하고 신자들을 풀어주었던 사례도 있었다. 묵주는 사학죄인 천주학쟁이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 박해 때에도 신자들은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위해 그침 없는 묵주기도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갇혀있던 감옥 안에서도, 그들이 신앙을 마지막으로 증거하던 형장에서도 묵주기도는 이어지고 있었다. 묵주기도는 고통 중의 공동체를 하나로 엮어 주었으며, 그들을 위해 궁극적 희망을 지켜주었다.
남은 말
신도들은 풍비박산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짐도 꾸리지 못하고 떠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신도들은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묵주와 같은 성물과 교회서적을 땅에 묻고, 신자로서의 형적을 숨기면서 길을 떠났다. 천주학쟁이를 잡고자 기찰이 강화된 길에서 짐뒤짐을 당하다가 묵주가 발견되면, 신도들은 그 길로 죽음의 시련을 당해야 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박해가 일어날 때 관청에 자수하는 것을 금지했고, 피하여 목숨을 안전하게 보전하라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그들은 소중한 묵주를 땅에 묻고 뒷날을 기약하며 떠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묻힌 묵주 가운데 일부가 오늘날에 발굴되어 절두산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녹이 슬어 상한 묵주에는 박해시대의 절박함과 순교자의 소박한 신심이 아직도 살아있다. 그 묵주를 통해 우리는 박해시대의 선조들과 일체감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나 텔레비전의 화면에서 반지묵주를 낀 사람들을 우연히 대면할 때면 신자들은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묵주는 예나 지금이나 신도들의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성모께 봉헌된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한 신도들의 염원이 그 묵주를 통해 영글어가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