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통령후보 노무현이 태어난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은 읍내에서 4㎞ 정도 들어가면 나온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40여호 안팎 띄엄띄엄 있는 전형적인 빈농(貧農)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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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차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가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마을 뒤편엔 옛날에 봉화를 올렸다는 봉화산이 있다. 말 형상의 바위산이다. 가야시대 왕자가 살았다는 골짜기 자왕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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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1일, 음력으론 8월 6일 노무현은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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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盧씨인 판석씨 집안이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8대째라는 게 노무현의 둘째형 건평(健平.60)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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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산리 658번지 노무현의 생가 인근에 사는 건평씨는 "어머니가 무현이를 마흔셋에 낳아 난산이었다"며 "당시 읍내 남산병원장이 집에 와서 출산을 도왔는데 5년 전에 별세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남 강진 출생이란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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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농의 5남매 중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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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李씨(98년 작고)도 본산리 사람이다. 한의학에 밝았던 李씨의 부친이 판석(76년 작고)씨를 잘 봐 사윗감으로 골랐다고 한다. 판석씨는 일제 말기 3년 가량 일본에서 타이어 재생 공장에서 일하고 그 돈을 집으로 부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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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씨는 한문에 밝았다고 한다. 특히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노무현의 대창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소농(小農)으로 생활은 하류(下流)이나 교육열 많음'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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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열은 노무현의 큰형 영현(英鉉.73년 교통사고로 작고)씨의 경우에서도 입증된다. 부산대 법대를 다닌 영현씨는 동네 유일의 대학생이었다. 집안의 자랑이었고 판석씨 내외는 논을 팔아 장남의 학비를 댔다고 한다. 하지만 영현씨는 고시공부를 중도에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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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兒名)이 문현(文鉉)이었던 건평씨는 부친 판석씨에 대해 "내성적이고 욕심이 없었던 분"이라며 "경제적으로는 유능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일본에서 번 돈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날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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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어머니 李씨는 사리가 분명하고 생활력이 강했다고 한다. 건평씨는 "어머니는 미나리 장사도 하는 등 이를 악물고 살림을 챙기면서 5남매를 키워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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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94년)에서 "어머니는 한이 맺혀 있었다. 가난으로 인한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친척들의 박대, 일본인의 마름 노릇을 하다가 지주가 된 동네 유력자의 횡포, 그에 저항하다가 당한 수모 등,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한 맺힌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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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노무현은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건평씨는 "무현이가 6세 때 아버지에게 배운 천자문을 다 외워 주변에서 '盧천재'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봉화산 일대에 소풍나온 읍내 학생들이 집으로 찾아와 어린 노무현을 구경하고 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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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노무현은 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 평균 97점으로 1학년 2반 67명 가운데 2등을 한다. 대창초등학교는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孫命順)여사가 졸업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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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담임 박성윤 교사는 '각 과목 우수함. 특히 발표력이 있음'이라고 노무현을 평가했다. 노무현은 어릴 때부터 연설솜씨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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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2학년 2반에서는 62명 중 1등을 한다. 그는 6년 내내 우등상을 탔다. 2학년 담임 김정옥 교사는 '각 과목 우수하고 성격도 활발하나 잘 운다'고 했다. '공부 잘하고, 말을 잘하나, 자주 우는' 소년이 노무현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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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안 형편은 노무현의 학교생활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다. 소년 노무현은 1학년엔 32일, 2학년엔 38일을 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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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조력'(家事助力.집안일 돕기) 또는 '집과 학교의 거리가 멀어' 자주 결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명랑하며 통솔력이 있어 급우들에 앞서 노력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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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죽마고우였던 조용상(趙鏞相.56.울산 호계초등학교 교사)씨는 "어릴 때 동네에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 무현이는 툭하면 칼로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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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조각에 햇빛을 반사시켜 여선생님의 얼굴에 비춰 여선생님이 화를 내고 교실을 나갔던 일도 있다고 한다. 동시에 붓글씨는 '학급 중 제1인자'(5학년 담임 김왕겸 교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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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6학년 때는 담임이던 당시 신종생 교사의 권유로 전교회장 선거에 나간다. 키가 가장 작은 후보였던 그는 5백2표 가운데 3백2표를 얻어 당선된다. 노무현은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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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 허약해 결석 잦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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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무현에게 거는 어머니 李씨의 기대는 각별했다. 노무현의 작은누나 영옥(英玉.64)씨는 "어머니가 늘 '무현이는 봉화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낳을 때 굉장한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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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정타니까 얘기는 하지 않겠다. 너희는 그게 이뤄지는 것을 볼 거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李씨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의 성공을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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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탓일까. 4학년까지 건강하던 노무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염 또는 위궤양으로 보이는 소화불량증(배앓이)에 시달린다. 밤에 아버지가 업고 읍내까지 뛰어간 적도 몇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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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회비를 제때 못냈다는 이유로 벌을 서고 창피도 당해야 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교사들에게서 '두뇌가 예민하나… 활기가 없다'(4학년)거나, '학과성적이 대단히 좋으나 좀 게으르다'(5학년), '성인다운 행동을 하나 신체가 약하다'(6학년)는 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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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에게 가난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것 같다. 그는 누나에게서 물려받은 찌그러진 필통을 창피해했다. 4학년 때엔 좀 어수룩한 아이를 꼬셔 그 애의 반짝반짝하는 새 필통을 자신의 고물 필통과 맞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어떻게 급장이 그런 짓을 하느냐"고 비난해 노무현은 결국 필통을 되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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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털어놓는 부끄러운 기억 또 하나.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다니거나 퍼런 돛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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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고급가방이었다. 어느날 체육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랑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새 가방을 하나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면도칼로 그만 가방을 쭉 찢어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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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발칵 뒤집히고 담임선생님이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노무현은 끝내 자백하지 않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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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릴 적부터 한번 고집을 부리면 여간해선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 리더십이 있어 동네 아이들을 곧잘 끌고 다니면서 대장 노릇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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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학년이 되면서 잘 사는 읍내 출신과 가난뱅이 시골 출신으로 패가 갈리기도 했는데 나는 항상 시골 출신의 중심이 되곤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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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대통령 후보'를 자임하는 지금과 겹쳐지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식의 정치적 감각이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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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노무현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꼭 필요한 주머니칼과 물총을 사기 위해 '학교에서 보내는 책값 통지서의 글자를 위조'하고, '낮잠 자는 어머니 치마 안을 뒤져 3천원을 훔쳐 하모니카를 산'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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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형과 누나에게 혼이 나고 어머니에게서 "큰 도둑놈 될까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뒤 눈물로 반성한 일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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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자존심은 강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내 붓글씨 대회가 있었다. 그는 붓글씨 시험지를 바꿔주지 않는다는 말에 자신의 글씨가 미흡했음에도 그냥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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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옆반 선생님은 자신의 아들이 글씨를 잘못 썼다며 시험지를 바꿔 갔고, 결국 선생님의 아들이 1등을 했다. 노무현은 2등. "나는 참을 수 없어 2등상을 반납했다. 그게 화근이 됐다. 붓글씨 선생님에게 불려가 '건방진 놈'이라고 혼이 나고 뺨까지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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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무현에 대해 어머니 李씨는 생전에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남이 먹던 밥을 절대로 먹지 않았다. 숟가락도 자기 것만 썼다. 그 때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애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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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노무현은 첫사랑을 경험한다. 같은 마을에 살던 한 학년 밑의 '윤용녀'란 여학생이 그 대상이었다. 지금도 노무현의 친구들이 "동네에서 제일 예뻤다"고 얘기하는 윤용녀와 함께 노무현은 기차를 타고 인근 한림면까지 가서 다시 동네로 걸어오며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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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영옥씨는 노무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일기장을 몰래 들춰봤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 남매들이 돌려 보며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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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좋은 날이었다. 용녀가 나한테 웃음을 주었다. 그것이 애정인지 우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돌아서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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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무현의 첫사랑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자전 에세이에서 윤용녀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국민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여학생과 어떻게 사이가 틀어져 버린 이후 그것이 내 초라한 행색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중학교 내내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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