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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축제를 통해 본 지역정치와 정체성: 전남 영암 영보마을 풍향제의 사례
홍 석 준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문화인류학전공) 1. 들어가는 글 어떤 축제가 특정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뚜렷한 근거를 갖고 다시 행해질 때 그것은 정당성이나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그 축제의 의미나 그것을 지속시키려는 사람들의 행위의 의미 역시 변화하기 마련이다(정은주 1993: 1-2). 따라서 축제를 비롯한 의례나 관습, 또는 민속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의도나 노력은 과거에 대한 향수나 종교적 신념, 또는 우리 것에 대한 애착 등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도덕적이고 심정적인 당위성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축제는 인간사회의 삶의 한 과정으로 집단 의례적 성격을 갖는다(장 뒤비뇨 1998). 축제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특정 시기에 특정의 상황에서 다시 재현되는가를 올바로 설명하기 위해선 그것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갖는 하나의 적응체계로서의 가치 또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문화적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Hall and Jefferson et al. 1988). 축제를 통해 전통적 가치가 현대적 맥락 속에서 생산 및 유포되는 과정에서 전통성은 현대성으로 재현되고(류정아 1998), 그럼으로써 집단간 세력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사회변동이 유발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축제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 인식한 집단 구성원들이 변화된 상황에 유리하게 대응하고자 하는 행위 과정의 결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지역축제를 특정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 강화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전통적 가치를 재현하는 일종의 문화적 자원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통해 지역의 정치구조 및 주민들의 정치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기술,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전남 영암의 영보마을을 연구대상으로, 풍향제라 불리는 지역축제가 어떠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창출되며, 또한 어떠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그 특징과 의미가 변화하는가를 다루고자 한다. 또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지역축제의 특성과 의미의 변화는 지역정치와 주민들의 정체성의 형성과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축제에 참여하는 주민들, 즉 문화적 주체들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축제가 정치적으로 수단화되는 과정을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그 안에서 상이한 이해관계가 어떻게 갈등으로 나타나며, 그 해결과정을 통해 정치적 자원이 전략으로 동원되는 과정의 의미를 포착하고자 한다. 축제를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정치화(politicization) 또는 정치적 수단화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축제가 정치적 자원화되며, 마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축제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마을정치의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축제가 이들에 의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이 글은 지역축제를 통해 영보마을 주민들의 사회적 분화의 양상과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은 지역정치의 차원에서 마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기능과 의미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일차적으로 풍향제를 통해 표출되는 마을 수준 정치의 역학과 문화적 특성은 무엇이며, 그러한 고유한 독자적 마을 정치문화를 형성, 유지, 발전시키는 데 풍향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마을정치의 역동적 측면을 사회문화적 맥락 내에서 이해하기 위해 풍향제를 사회변동의 관점에서 마을 내부의 사회적 분화와 지방정치의 특색을 만들어내는 주요 동인으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풍향제는 하나의 정치적 자원일 뿐만 아니라 정치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종의 문화적 구성물(cultural construct)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고 본다. II. 기존 연구의 검토 축제를 ‘정태적이고 고정 불변의 놀이 형태’로 규정하는 시각이나 태도에 대한 비판은 문화인류학 내의 오랜 전통에 속한다. 축제는 합리적인 용도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효과적인 적응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리노프스키(Malinowski)는 현실 세계에서 축제로 표현되는 신화와 전통에 대한 관념과 실재가 일종의 사회적 헌장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용도를 가지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것은 축제를 통한 전통과 전설의 표출이 “모든 위대한 성과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나 그의 후손 도는 전체 공동체의 명예에 이바지하고, 따라서 (축제라는 문화적 형태로 표출되는) 전통은 자신의 선조를 영광되게 하려는 이들의 야망에 의해 살아남기 때문”(Malinowski 1948: 107)이라고 보았다. 종교와 가족 및 친족과 마찬가지로 축제가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로서 사회통합과 문화적 유대 및 경제발전에 기여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이미 많은 인류학자들이 공통으로 내세운 것이다. 코헨은 축제와 같은 전통문화의 상징들이 정치적 제휴를 표방하는 메커니즘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코헨 1986). 코헨을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이 지역사회의 전통문화를 표방한 지역축제가 지역엘리트들이 보다 큰 체계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주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활용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이더(Sider 1986)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전통축제의 역동성을 계급 간 상호관계와 연관지어 파악하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연구는 축제로 대표되는 전통 관습이나 문화는, 한편으로는 착취의 가능성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는 국가 및 생산의 장과 사람들의 일상생활 사이에서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주민들이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필요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적절하게 적응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지배와 전유에 대항하는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민족지적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 국내의 축제의 문화인류학에 관련된 연구들 중에도 지역축제가 특정의 사회문화적 맥락 내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분석적으로 고찰한 것들이 있다. 류정아(1989)는 안동 하회마을을 대상으로 하회 탈놀이라는 민속놀이가 단절되었다가 역사적, 사회문화적 상황이 변화하고 연행의 주체가 바뀌게 되면서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고찰했으며, 정은주(1993)는 강릉단오제를 대상으로 향토축제를 통해 전통의 의미가 현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를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축제를 형성하고 유통시킴으로써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주체들(cultural agents)이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지위에 따라 축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심에 있어서 매우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서로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연구들로부터 축제는 하나의 정치적 자원이며,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집단간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도출해내기는 어렵다. 축제의 의미는 그 형성에서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 결코 ‘완결된 형태’ 또는 ‘고정 불변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의 의도와 전략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구현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어떤 집단의 물적, 경제적 토대를 박탈함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제는 정치적 세력의 분화와 통합 그리고 그들의 사회문화적 역동성을 시험하는 정치적 무대 또는 ‘정치적 드라마’(political drama)의 공연장이기도 한 것이다(김광억 1989, 1993; Turner 1969, 1974, 1986). 한편, 지역사회는 장소의 공유와 과거에 대한 기억의 공유를 통해 자신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이미지와 정체성을 형성, 유지시킨다. 문화적 차이와 특수성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시공간적으로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형성, 지속시켜 온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나 고유한 문화적 특성에 따른 경험과 실천양식을 통해 나름대로의 삶의 총체성을 구현해낸다. 각 개인은 자아 정체성을 갖는다. 현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한 자아 정체성은 자신은 누구이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어떤 것이며,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을 규정하는 행위이자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버만, M. 1993; 래쉬․프리드만 편 1998). 정체성은 자신과 타인들, 그리고 자연과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이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사고해야 하는지를 이끌어 주는 인식틀로서, 자신을 이해 가능한 질서 속에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이다(이정덕 1999: 192-193)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개인의 자아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 역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 역시 시대적, 상황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 소멸한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적 요구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실체이다(홍석준 1993, 1997). 지역사회를 포함한 특정 집단의 정체성은 이것이 주민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삶의 측면에 각인되어 경험과 실천의 모티브로 작동할 때 실체가 된다. 따라서 정체성이란 특정의 지역이나 장소를 공유하는 것과 상관없이 삶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구체적인 방식이자 실천(Ashworth and Voogd 1990: 77, 홍성흡 2001: 2에서 재인용)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지역사회의 정체성은 주민들의 행위와 관념양식 속에 체계적으로 내재되어 그들로 하여금 그들답게 만드는 인식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어떤 사회적 행동이나 행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지역 정체성을 상황이나 조건의 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문화에 근거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거나 재해석한다(장-피에르 바르니에 2000). 따라서 지역정체성의 재구성과 재해석은 결국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 강화와 불가분의 상호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문화적 정체성이 정치적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정체성 문제는 상이한 정치적 권력관계에 따라 동원되는 정치적 조작 또는 변형의 대상이 된다(Cartens 1986). 이런 점에서 지역사회는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해관계가 다른 여러 집단들이 상이한 권력관계에 따라 다양한 상징적 전략과 사회적 관계망을 동원하는 정치적 장인 동시에 상이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 반목, 굴절을 일으키며 중층적으로 교직하는 권력 재현의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체성은 고정되거나 다른 사회적 관계와 분리된 독립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치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 변화되는 유동적인 흐름이라고 정의될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역주민들이 지역의 상징과 정체성을 어떻게 동원하고 활용하는가는 지역정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된다. 하나의 전략으로서 지역사회의 역사와 기억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상징과 지역정체성이 동원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들은 그것을 누가, 어떻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왜 동원해야 하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조작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닌다. 이 때 상징과 정체성은 정치적 자원이 된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이 형성되는 장소로서의 지역은 다양한 주체들이 경쟁적으로 상징과 정체성을 동원함으로써 형성, 변화시켜 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는 다양한 역학관계와 정치적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지역이라는 공간은 다른 지역과의 차별화를 통해 형성되는 지역 정체성으로 표출되고,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조건과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복잡한 문화적 유형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정근식 1997: 307-308, 홍성흡 2001: 3에서 재인용)은 설득력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여 지역정체성이 어떻게 형성, 구현되고 있으며, 이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며,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되는가를 지역축제를 통해 표출되는 지역정치와 정체성간의 상호관계를 기술, 분석한다. 이는 지역축제를 통해 지역정치의 역학이 어떻게 표출되며, 그것이 지역의 정체성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학술적 작업이다. 이를 위해 지역 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동원되는 상징은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특정의 맥락에서 정치화, 즉 정치적 수단화되는 과정과 의미 역시 주요한 분석대상이 된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상징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전통과 역사, 과거의 기억 등의 문화적 의미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상징적 자원 중에서, 축제는 이러한 과정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되는 사회문화적 장(sociocultural field)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지역정치의 특성과 의미, 그리고 지역정치와 정체성간의 상호작용을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선 축제 자체의 기술과 분석보다는 그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III. 영보마을의 민족지적 배경 영보마을의 공식적인 행정구역 상 명칭은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이다. 영암군은 1개 읍과 10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보마을은 본래 영암읍 내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명 북일시(덕진)면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청암도 찰방에 달린 영보역이 있었던 까닭에 영보역, 역촌, 역몰, 영보촌, 또는 영보라 불렸다. 1914년 4월 1일 군과 면에 대한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보리로 개편, 관할되었다. 그 후 1929년에는 덕진면이라는 행정구역으로 통합, 편입되었다. 동쪽으로는 금정면, 남쪽으로는 영암읍과 군서면, 서쪽으로는 도포면, 북쪽으로는 도포면과 신북면에 닿아 있다(영암군 1988 영암군지편찬위원회 1999 참조). 전주 최씨 가문의 영암 입향은 연촌 최덕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주 최씨 시조인 문성공 최아의 5세손 연촌 최덕지는 고려 우왕 10년 전주에서 출생하여 조선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사직하여 1445년경 영암 영보촌(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으로 옮겨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이때 그는 형제봉 아래에 존양루를 짓고 존심양성의 정신으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후 1450년(문종원년) 다시 홍문관 직제학 겸 춘추관 기주관에 제수되어 이듬해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신들의 작폐가 심하여 노령을 이유로 사직하고 영암 영보촌으로 다시 귀향하였다(김경옥 1991: 20-21; <전주최씨연천공파세보>; 제보자 C씨와의 인터뷰 자료 등을 종합하여 재구성). 영보촌에 이주, 정착한 전주 최씨는 이후 인척관계를 통해 서서히 친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데, 전주 최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면서 새롭게 영암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는 가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거창 신씨와 남평 문씨였다(김경옥 1991: 21).
마을 중앙에 위치한 영보정은 영보마을의 주요 상징 중 하나로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유교문화뿐 아니라 동계를 비롯한 사회조직의 원리와 가치가 현대적 맥락에서 실천되고 있는 문화적 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영보정은 영보마을의 동계 조직의 원리와 가치가 실천된 역사문화적 장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이해준 1988, 2001). 영보정의 역사와 문화는 다양한 측면에서 마을주민들의 정체성 형성과 유지 및 강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보정은 연촌과 그의 외손 거창신씨 문중의 협력 하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연촌의 생가와 그의 딸의 생가는 영암군에서 전통가옥으로 지정해서 보수작업을 할 정도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초가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마을내의 문중조직 간의 협조가 이루어진다. 아들과 딸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원칙이 적용되던 시절에 연촌은 전주 최씨 가문과 그의 외손인 거창 신씨 집안의 화목과 유학 계승을 위해 영보정을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영보정은 친손과 외손을 같은 집안 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이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상적 규범과 원칙을 계승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영보마을의 관내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보마을에는 행정구역 상 영보리 1구, 2구, 노송리 1구, 2구, 운암리 1구, 2구가 포함된다. 영보마을의 총 세대수는 271세대이며, 총인구는 633명이다. 이 중 전주 최씨는 55세대(20.3%), 거창 신씨는 61세대(22.5%)를 차지하고 있다(2002년 1월 7일 현재). 이들 양성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남평 문씨, 함안 조씨, 창녕 조씨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마을 내의 대표적인 문중조직으로는 영암종중회가 있는데, 최씨와 신씨 문중 대표들의 주된 활동무대이다. 양성 문중은 마을을 대표하는 지배세력에 속하는 친족집단이다. 영암종중회의 핵심 임원은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총무라고 할 수 있다. 문중의 제반 업무는 주로 총무의 권한으로 되어 있는데, 문중강당을 사무 공간으로 활용하여 문중 사람들과 군청이나 면사무소 직원들과의 교류관련 사무를 맡아서 처리한다. 문중회의를 주관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한다. 마을 내의 최씨들은 최씨문중 강당에서 문중의 주요 업무에 관한 회의를 개최한다. 사무실은 풍향제와 10월 시제 때 주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연촌 최덕지를 비롯한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은 판각(版閣)이라는 불린다. ‘최덕지 영정과 유지초본’이 소장되어 있다. 영보정은 마을의 보물로 인식되고 있다. 문중 유사가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주민들의 경제적 여건은 전반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마을에서 부자소리를 듣기 위해선 소를 100마리 정도 키우는 가구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현재 소 한 마리 가격이 500만원 정도에 달하기 때문에 총 자산이 5억 정도 되면 최고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부자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빈곤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농사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농가는 거의 없다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을 정도로 마을경제의 수준은 열악한 편이라고 평가된다. IV. 풍향제의 일반적 특징 풍향제는 1979년 5월 5일 제1회 행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지속되어, 2003년 제25회 행사를 거행하였다. 1978년부터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문중의 대표자들이 모여 논의를 시작하여 1년간의 합의과정을 거친 후에, 이듬해 5월 5일 창립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영보마을의 전통문화 계승과 발달을 위해 ‘예향회’를 만들면서 출범하였다. 풍향제의 전신인 예향회는 마을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된 동호인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그 후 이 행사를 보다 조직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상태에서 명칭을 풍향제로 바꾸고, 마을축제로 발전시켰다”. 2003년에 제25회가 열릴 정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풍향제가 거행되었다. 이 축제는 격년행사로 한해는 대행사를 치르고 다음 한 해는 소행사를 치르는 형태로 지속되어 왔다. 풍향제는 1970년대 말에 급격한 산업화 현상으로 농촌의 도시로의 이농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는 사람의 수가 급증하여 농촌의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마을축제이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던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문중의 대표가 합의하에 영보마을 출신 고향사람들의 모임을 정례화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본 후에, 마을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외지로 나간 사람들(마을에서는 출향인또는 객지사람이라고 부른다)이 최소한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고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형식을 지닌 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영보의 날’을 정하고, 후에 풍향제로 개명하여 동향 출신끼리 영보정에 모여 잔치를 벌임으로써 동향인으로서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고,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다. 풍향제의 재정과 운영은 초기에는 마을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자체 회비와 기금만으로 시작되었다. 창립 이후 3년 동안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풍향제가 ‘전국 KBS 100대 행사’로 지정되면서 제3회 행사 때부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규모가 확대되고 홍보 효과가 배가되면서 지역문화의 창달과 전통문화의 계승을 표방하는 지역축제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풍향제의 재정관리를 비롯한 경제적 업무는 거의 풍향제추진위원회(이하 풍추위)가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다. 회장은 임기가 2년이며, 최씨 문중과 신씨 문중에서 윤번제로 임무를 맡아 수행하고 있다. 한 번에 걸쳐 연임할 수 있다. 현 회장은 신씨 문중 출신으로 연임되어 4년째 임무를 수행 중이다. 회장직을 수행하는 일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최근의 주된 경향이다. 현 회장이 이장과 조합장의 직함을 겸하고 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나 법적으로는 법인체 명의를 해서 대표이사의 직분을 형식적으로 만들어 군청에 신고해 놓고 풍향제의 실제적인 업무는 풍추위 위원장과 총무 및 감사들이 맡아 추진하고 있다. 전임 위원장들은 당연직 이사가 되고, 그 중 가장 연장자가 대표이사가 된다. 현재 대표이사를 포함하여 부회장 3명, 감사 2명, 이사 2명, 이상 출신 위원 12명 등 총 20명의 임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풍향제는 군청에서 500만원, 한국문예진흥원에서 200~300만원, 동향 출신 스폰서의 기부금 500만원, 기타 풍추위 예산 등의 자금 지원으로 행사를 치르고 있다. 소행사의 경우, 총 예산은 800만원, 대행사의 경우, 2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같은 수준의 예산을 군청과 한국문예진흥원 및 기부금 등으로 충당한 후, 소행사에서 남은 예산을 대행사 비용으로 전환하여 운용하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제 실시와 더불어 각종 지역축제가 남발하기 때문에 군청의 입장에서는 유명한 축제가 아니면 마을 단위 또는 마을 수준의 지역축제 행사를 지원하기가 곤란한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을 수준의 대부분의 행사가 격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풍추위의 위원장 겸 이사들은 축제 행사 기간 중 제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검은 굴건과 검은 제복을 착용하고 제사에 임한다. 상차림 또는 진설이 제대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풍향제에는 최씨 문중과 신씨 문중의 종손 2명이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다. 축제 전반을 관장하는 집사는 행사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데, 20명의 집사가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사를 행할 때, 원칙적으로 집사들이 모두 부복을 해야 하지만, 대체로 8명의 제관과 집사 중 3명이 다른 집사들을 대표하여 부복을 한다. 이는 의례의 간소화를 위한 것이다. 초혼관은 문중을 대표하여 제사를 위한 축수와 복축을 행한다. 휘장은 녹색, 흰색, 적색, 청색, 황색의 순으로 배열되며, 이는 각각 문중의 특징을 나타낼 뿐 지위의 측면에서는 서로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풍향제는 제사를 시작으로 진행된다. 제사상에는 썰지 않은 상태의 생무와 생배추, 그리고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돼지머리가 진설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제상에는 날 것을 진설하지 않으며, 고사용 돼지머리의 경우 정면을 바라보게 진열하는 것과는 생소하고 이질적인 형식이다. 그 이유를 영보마을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영보마을에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말 중에 “‘사육신들은 생으로 논다”는 말이 있다. 사육신의 왕을 향한 충성심과 절개, 그리고 지조를 이어받았다는 마을의 전통에 따라 생무와 생배추를 진설한 것이고, 불의에 항거하는 의미에서 돼지머리는 정면이 아니라 후면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영보마을사람들이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영보마을의 전통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제사의 목적은 영보마을의 풍년과 주민들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제관의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헌관, 즉 초헌관, 아헌관, 그리고 종헌관의 역할이다. 일반적으로 군수가 초헌관, 유도회장이 아헌관, 풍향제 추진위원장이 종헌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제1회 행사 때부터 영암군수가 초헌관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풍향제는 특정의 문중이나 씨족과 관계없이 마을 대소사에 관심을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다. 출신 문중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와는 별반 상관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풍향제가 문중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 있다기보다는 문중간의 조화와 통합을 구축하는 상징적, 실제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제사의 주체로서의 제관의 역할 역시 최씨 문중과 신씨 문중에서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초헌관의 제문 낭송으로 시작된다. “단기 4325년 5월 5일 영암군수 아무개는 유서 깊은 영보 낭주골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고자 천지신명께 삼가 아뢰옵니다. (중략). 이를 풍향제라 이름하여 청하오니 영보열두마을 모두가 하나같이 평안과 복락을 누리도록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영보마을사람들의 애향과 애족 정신을 함양하고 가정마다 화목과 단란함이 넘칠 수 있도록 해마다 매월 5월 5일 제를 올리고 빌고 비옵나이다. 연연세세 풍년을 구가하기를 소원하오니 부디 강림하셔서 음향하시옵소서.” 풍향제는 풍향제 봉향(제사), 국민의례, 시상, 회장인사, 축사, 격려사, 폐회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사는 소지로 마무리 되었는데, 소지의 재는 피박그릇에 담아 물에 재어 놓는데. 이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 형식과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피박그릇에 담긴 물과 소지의 재는 풍요롭고 기름진 농사에 대한 희원을 상징한다. 음식준비는 행사 전날부터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행사 전날에 장을 보고, 당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참가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전날 도살한 돼지고기를 제상에 진상했는데, 요즘은 동네 정육점에서 구입하여 사용한다. 김치는 하루 전에 여성들이 모여 함께 담근다. 음식 장만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오랜 기간 동안 이 일을 전문적으로 행해 왔기 때문이다. 자금이 부족하여 행사를 크게 치르지 못할 경우에는, 일감이 많지 않은 편이라 협조가 순조롭고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행사를 크게 치르는 경우에는 광주와 서울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고 풍향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기 때문에 마을 전체의 문중회의를 개최하여 합의하에 음식을 장만하는 등 음식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주관할 사람들을 조직한다. 음식 장만은 예전부터 여성의 일로 인식되고 있다. 주로 50대 이상의 여성들이 주관한다. 음식을 장만하는 일은 여성들의 일이지만, 행사 전체를 주관하는 일은 남성들의 몫이다. 남녀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은 풍향제가 유교적 의례의 특성을 보유한 축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상좌에는 오른쪽에 7명, 왼쪽 뒷면에 3명이 배치되어 앉아 있으며, 그들은 마을의 유지들로 지역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행사는 제례의 엄숙함이 아니라 형식적인 의례를 행한 후에 축제를 즐기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약 120명 정도가 참여한 소행사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가자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 최종적으로 540명으로 집계되었다. 큰행사의 경우, 이러한 규모의 인원이 참가한다. 하지만 소행사의 경우에는 규모가 대폭 줄어들어 180명 정도가 참가한다. 이 경우 제사와 경로잔치만 행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소행사 풍향제는 마을내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반면, 큰행사 풍향제는 전국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향인들과 내외귀빈들이 다수 참가하여 동향인의 유대와 결속을 확인하고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큰행사 풍향제라고 말할 수 있다. 풍향제를 위한 제반 준비사항은 풍추위에서 관장한다. 추진위원의 수는 문중 임원 10명 내외 및 이사장 40명을 포함하여 총 50여명에 달한다. 큰행사 풍향제의 경우, 약 2,200만원의 경비가 소요된다. 상좌에는 전직 국회위원, 전 전남도지사, 전국 규모 공영방송국 임원 등이 대외 귀빈의 자격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번외 행사로 열린 게이트볼 대회에는 약 150명의 게이트볼동호인회 회원들이 참석하여 경기를 즐기고 있다. 행사 당일 외지에서 고향을 찾아 방문한 동향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영보마을 주민들이 다수 행사에 참가했다. 특별한 사유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주민이 참여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는 외지의 동향인들을 초대한 상태에서 마을주민들의 참석률이 저조한 것은 예의가 아니며 ‘영보 인심’에도 위배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지의 동향인들이 풍향제에 참가하는 주된 이유는 이 행사가 고향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풍향제는 고향을 재현하고 창조해낸다고 할 수 있다.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 평소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적은 그들에게 풍향제는 고향을 찾고 부모를 비롯한 가족을 방문할 구실을 제공해 준다. 고향이라는 관념 또는 이미지는 축제에의 참가와 더불어 재현되는 동시에 부활된다. 축제를 통한 ‘고향 이미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풍향제 기간 중에 고향을 방문한 외지의 동향인 모두가 풍향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고향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풍향제 행사에 참여한다기보다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가족들과 함께 축제를 즐긴다는 관념이 강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풍향제를 통해서 고향 이미지를 떠올리기보다는 가족과의 만남, 특히 부모와의 만남이라는 실질적인 목적을 위해 풍향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풍향제의 전통의 유지와 현대적 변화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전통의 유지를 찬성하는 입장과 현대적 맥락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별된다. 풍향제의 전통성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입장은 다음과 같은 제보자의 말로 대변된다. “현재의 풍향제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으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에 한 제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모습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나는 풍향제의 지금 모습이 좋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풍향제가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한 정체성이 계속 유지되고, 그래서 출향한 젊은 사람들이 이 기회에 영보마을의 전통과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많이 방문해주길 바란다. 풍향제는 영보마을이 자기 고향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행사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지되는 한 영보마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풍향제의 원래 취지와 창립목적이 부모에 대한 효와 주민들의 풍요로운 삶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들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한다. 바뀌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풍향제의 특징을 자연스러움에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특히 이 점이 인근 구림마을의 왕인문화축제와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구림마을의 왕인문화축제와 비교하여 풍향제는 인위적이거나 강제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양 문중의 합의하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구림의 축제는 다분히 상업적이고, 마을사람들이 앞장서서 일부러 더 외형을 장식하는 데 치중하고, 대대적인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동원하여 이를 하나의 거대한 관광이벤트로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들은 풍향제는 행사 참가자의 숫자나 예산의 규모 면에서 구림보다는 못하지만 상품화된 이벤트가 아니라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풍향제가 영보마을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공동체적 질서와 가치를 상징적으로 구축함으로써”(Cohen 1987) 영보마을 특유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구림의 왕인문화축제와 구별되며, 이것이 구림과의 차별화를 통해 영보마을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영보마을 정체성의 구축 방안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특정 축제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보여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풍향제는 지역 정체성을 통해 세계성을 구현하는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구성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과는 달리 풍향제의 형식과 내용이 다양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풍향제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제보자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풍향제 프로그램을 창립초기와 똑같이 하는 것보다는 좀 더 다양하게 하여 각개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식으로 했으면 한다. 변화해야 만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본다. 처음 시작할 때는 출향인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한 번 참석하고는 매번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는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지금은 참석률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편이다. 출향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다. 그들이 고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번 행사에서 처음 구경한 국악공연 같은 것은 새로운 시도로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마을사람들뿐만 아니라 출향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런 새로운 프로그램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풍향제는 현재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선정한 전국 100대 예술제 행사이다. 이런 점에서 영보마을 주민들은 풍향제가 전국 각지에서 향토의 전통과 문화를 지역의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후죽순으로 ‘창조’ 또는 ‘날조’되고 있는(Hobsbawm and Ranger et al. 1983) 다른 지역의 축제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주로 전주 최씨 위주로 되어 있다. 주민들은 참여자들의 혈통이 양반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주 최씨가 양반 가문이라는 점은 전주 최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된 혈통적 기반이다. 거창 신씨들과의 조화를 통해 양반 전통 또는 양반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풍향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반상대우’라고 해서 조상 중에 학자나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면 대우를 해 준다”는 표현은 영보마을에서 양반 가문이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짐작케 한다. 2001년부터 풍향제는 영보마을 주민들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행사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마을주민의 수가 해가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는 한국 농촌의 일반적 현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점점 외지의 도시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주민들의 참여를 촉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마을축제에의 참여뿐만 아니라 축제의 성격 자체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주민들이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마을 내의 청년회나 부녀회와 같은 사회조직의 도움을 받아 주민들 간의 참여와 단결을 고취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으면 풍향제의 존속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V. 풍향제를 통해 본 지역정치와 정체성 1. 정치적 갈등의 표출과 해결과정 현재 영보마을에서는 월율선(대신~영보간) 농어촌도로 확․포장 공사가 시행되고 있다. 영암군 영암읍 대신리에서부터 영보마을까지 총 길이 3,090미터, 폭 8미터에 달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공사의 목적은 대신에서 영보까지의 농어촌 도로로서 기존의 협소한 도로를 확․포장함은 물론 선형을 개량하여 교통소통의 원활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지역발전 및 주민의 소득 증대와 편익을 도모하고자 도로를 확장 및 포장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영보마을가 추진하고 있는 전통문화 관련 사업으로 2002년부터 소위 ‘정주권사업’이있다. 이것은 영보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문화보전프로그램이다. 총 45억 규모의 예산 중 영보마을에 배정된 예산은 약 1억 4,000만원 정도였다. 마을 정면의 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고, 예전에 바닥이 돌로 되어 있던 마을 앞 작은 하천의 바닥을 콘크리트로 매몰하는 공사를 시행하였다. 영암군의 재정 지원받아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을 둘러싸고 관과 주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결국 마을 내 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는 공사로 일단락이 되었던 이 사업은 군수와 면장 등 관 쪽과 문중집단 쪽 사이의 정치적, 경제적 긴장과 갈등으로 확산, 비화됨으로써 상호간의 불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문중 측에서는 “정주권사업이 기본적으로 마을을 살리기 위해 기획된 것인데, 문중 쪽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관에서 일방적으로 시행해서는 안 된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마을 앞에 영산강에서부터 마을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있는데 정부의 투자 자금을 투입하여 이를 정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또 문중 건물 앞에 있는 수로도 현재 흙으로 담을 쌓아 놓아 미관상 좋지 않으니 시멘트 포장이라도 하는 등 현대식으로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반면 관 측에서는 “마을사람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누구의 입장을 따라야 할지 정해지지 않았다. 의견이 분분하여 정책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의견이 조정될 때까지 기다리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상부에서는 조속히 시행하라는 지침이 하달된다. 이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일이 마을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일을 하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 사업의 선정과 시행 과정에서 표출된 집단간 갈등은 관과 민 사이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민 내부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로 갈등이 표출된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갈등의 측면은 이장과 마을 주민 사이의 갈등이다. 이장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이 사업을 추진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장이 귀찮게 생각해서 선뜻 나서지 않은 일을 마을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종용하였기 때문에 이장이 할 수 없이 나서서 일을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결과에 대한 평가의 측면에서도 양측의 입장은 확연하게 나뉘어진다. 이장은 돌로 되어 있던 하천 바닥의 오물을 제거하여 콘크리트로 설비한 결과 하천의 청결과 위생상태가 호전되었다고 주장한 반면, 마을사람들은 마을 전체를 위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며 이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장의 이러한 표현은 마을 내의 이장과 같은 지역 엘리트집단과 주민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이 양 집단간의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마을에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젊은 사람들이 한 5명 정도만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고 일을 추진했어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나 혼자 일을 도맡아 하려고 하니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장 혼자서 모든 일을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현재 마을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어쩔 수가 없다. 마을에 젊은이들이 너무 없다. 모두 다 떠났고 지금 남아 있는 몇 명 안 되는 젊은이들마저 기회만 되면 모두들 떠나려고 한다. 이것이 현재 마을의 실정이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일전에 영암군에서 ‘녹색농촌체험시범마을’ 사업 신청을 접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예산 규모가 10억 정도에 달했기 때문에 문중사람들이 문중에서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종용하였는데, 문중에서 적극적으로 일하고자 나선 사람이 없어서 결국 문중에서 이장에게 전권을 이양함으로써 사업을 성사시킨 예도 있다. 원래 이 사업은 영암군 내에서 영보정과 같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역사와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실질적인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영암군청에서 관련 세미나와 발표회를 개최하고, 농림부 관계자들에게 사업계획 발표회를 갖는 등의 노력을 한 결과 선정되었다. 현재 이 사업은 마을 대표 7명의 명의로 추진되고 있다. 현재 마을 입구의 공터에 36평 정도의 ‘방문자센터`라는 이름의 건물을 신축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결과 ’방문자센터‘ 내부에 최씨종친회와 신씨종친회 사무실 공간을 배정받았으며, 마을 업무를 관장하는 사무실 및 외부 손님의 접대와 숙박을 겸용할 수 있는 강당과 응접실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전주에서 열리는 2003년도 문중 사업의 상반기 결산과 예산안 회의에 연촌공파를 대표하는 영암 대의원을 선출하는 회의를 위한 특별모임이 열렸다. 회의 안건은 연촌공파 영암 대의원 선출과 영보정 및 여운사 제사와 관련된 사항이었다. 영암 대의원은 모두 11명으로 다른 지방 전주 최씨 문중에 비해 많은 편이다. 임기는 2년으로 되어 있지만, 연임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부분 문중 일에 관심을 갖고 업무를 추진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는 과도하게 문중 일에 무관심한 사람을 임명함으로써 문중 일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목적으로 인해 임명된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 이러한 일은 문중 어르신들의 역할에 속하는 것이다. 문중 종회장 선출은 문중 문관과 문중 상임고문간의 의견 충돌로 이어졌다. 문중 고문이 문관을 종회장으로 추천하자 이를 고사하는 과정에서 문관이 고문의 종회장 겸임을 제안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자간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으나, 분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문중 직책에 대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영보정과 여운사 제사를 둘러한 상이한 의견이 조정되는 과정은 전통문화에 대한 담론이 정치적 통합의 기제로 작동함으로써 주민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영보리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독립기념비를 건립할 장소 선정문제를 둘러싸고 문중 회의가 열렸다. 독립기념비를 영보정 앞에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과 만세봉 정상에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안되었다. 영보정 앞에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한 사람들은 만세봉 정상에 독립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3.1만세 운동을 할 때 만세봉 정상에서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세운동을 위해 처음 집결한 곳이 영보정 앞이기 때문에 영보정에 건립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만세봉 정상에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가장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펼친 곳이 만세봉 정상이므로 취지에 맞게 그 곳에 세우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영보정 앞에 건립하는 의견이 다수의 의견이라는 이유로 채택되었다. 영보마을에 위치한 여운사라는 절의 땅 매각을 둘러싼 소문의 진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의견이 상충한 사례도 있다. 여운사의 땅은 문중에 속한 것이지만, 건물은 절의 소유로 되어 있다. 절에 사는 사람들이 여운사를 팔려고 내 놓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문중 사람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한동안 문중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녹동서원의 조상숭배제사와 연촌 최덕지의 제사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전주 최씨 문중 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문중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사실 거창 신씨 문중의 어르신들의 반대로 제사를 축소하고자 하는 의견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문제는 어르신 중에 한 분이라도 반대를 하면 쉽게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최근 워크아웃이나 구조조정을 외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을 강조하고 있는데 땅값도 턱없이 오르고 임금도 턱없이 오르고 있는 현 실정에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제사를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결국 제사를 현행으로 유지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더라도 제사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문중 사이의, 또는 문중 구성원 사이에 의견의 충돌이 발생한다는 것은 전통 또는 전통적 가치에 대한 이들 사이의 인식 차이를 반영한다. 결국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의견의 조정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상이하고 이질적인 의견 차이의 조정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권력관계의 역학을 작동시키게 마련이다. 문중 대표자들의 의견이 중시되고 그것이 실제로 반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권력관계의 역학에 따라 좁히기 어려울 것 같은 이해관계의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는 것이다. 전통이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현재에도 전해지고 계속 살아 움직이며, 그것을 받아들여 다음 세대로 전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Shils 1980). 문화는 정체성 현상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정체성이란 어떤 사람에게 일정한 사회집단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에 동화하도록 하는 행동, 언어, 문화의 집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은 단지 탄생이나 주체에 의한 선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관계로 이루어진 정치무대에서 각 집단은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정체성은 어떤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식별해 내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정체성은 불가피하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풍향제는 영보마을에서 전통문화를 드러내는 자원이다. 그것은 주민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며, 이는 다른 집단 또는 개인들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임과 동시에 주민들이 서로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처한 각기 다른 환경에 대해 가지는 방향을 지시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풍향제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된 영보마을의 전통을 통해 주민들에게 전달된다. 2. 지역정체성과 ‘정체성 만들기’ 마을 회의에서 영보정 앞에 독립기념비를 세우고자 하는 의견이 대두된 적이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주민들 사이의 의견이 크게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영보정 자체가 영보마을의 중요한 전통인데, 굳이 독립기념비를 그 앞에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립기념비를 영보정 앞에 건립하는 것은 영보마을의 전통이 현대까지 지속되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선례를 만든다는 점에서 찬동하는 의견이었다. 결국 후자가 최종 의견으로 결정되었다. 그 후 마을 내에서는 독립기념비를 영보정 전방 어느 위치에 세워야 할 것인가 라든지 비석의 종류는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비석 뒤에 새겨 넣을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독립기념비 건립을 녹색마을사업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한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문중 사이에 이견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이장을 비롯한 지역 엘리트들의 막후교섭을 통한 의견 조율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역정치에서 엘리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과 전통문화 또는 전통의 문화적 가치가 재현되는 과정에서 친족관계에서 중요한 지위와 권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주민들은 사실상 논의과정에서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영보정 앞의 용솔나무에 주사약 투여 문제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2003년 1월부터 영보마을은 군에서 정한 문화마을조성사업 대상지구로 최종 확정되어 본격적인 ‘문화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영암군에 따르면 올해 기본계획 용역을 실시하고 2003년부터 총 13억원의 예산을 투자, 마을 안길 정비를 비롯하여 상․하수도 정비, 복지회관 신축, 마을주변 환경정비 등을 위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다. 이 사업에는 영보마을 내에 문화유산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 이 지역을 친환경 농촌문화마을로 조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현재 70여세대가 거주하는 영보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594호인 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이 봉인된 사당을 비롯하여 국가지정문화재이며 주요 민속자료인 최성호씨 가옥, 전라남도 문화재인 영보정 등을 보유하고 있다(영암신문 2002년 11월 1일자.). 방문자센터의 건설을 둘러싼 문제는 영보마을 주민들의 ‘정체성 만들기’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방문자센터는 주민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시설 중 하나다. 방문자센터를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시안이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마을 내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여의치 않아, 외부에서 방문객들이 숙박을 원할 경우에는 마을주민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는 하지만,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방문객센터는 마을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소득증대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설이다. 건립위치는 마을 입구 육묘사업소 근처의 건물 3동을 허물고 신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방문자센터는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건물로 건립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방문자센터에 포함되는 기능은 숙박과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판매공간, 그리고 마을에 대한 안내 및 주변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안내센터의 역할 및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 내부적으로는 수세식 화장실, 냉난방 시설 등을 완비하여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부속공간으로는 샤워실, 화장실 등을 하나의 건물 내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규모는 좀더 논의과정을 거쳐야 하나, 마을 경관에 어울릴 수 있도록 외형은 전통적인 형태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부분적으로 현대양식과 전통양식을 절충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을의 전통적인 경관을 고려하여 완전한 현대건축 양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방문자센터를 통해서 마을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마을 내 활동과 숙박/체험/교육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며, 동시에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올 경우에는 동선과 방문목적에 따라 동선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기능을 해서 방문객들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한다. 기존에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관광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외래방문객들은 방문자센터를 통해서 마을 내 관광 및 체험과 마을 주민과 방문객간의 농산물 교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내부에는 체험프로그램 소개 및 마을 안내, 주변의 관광지와의 연계를 위하여 각종 정보화기기(컴퓨터, 프린터, 팩스, 전화 등)와 관광홍보물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영보정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곧장 영보정이나 마을로 들어가고 있기에 방문자센터가 설치될 경우 면밀한 검토를 통하여 방문객을 효과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동선계획 및 방문자센터로 유도할 수 있는 안내표지 설치 위치 등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풍향제는 영보마을 출신 고향사람들을 구별짓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풍향제를 통해 영보사람들은 ‘영보사람과 출향인’으로 구분된다. 소위 ‘구별짓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부인들에게 마을의 어르신들은 “영보마을은 양반 동네”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영보마을은 “시골 중에서도 유독 인심이 좋은 동네”라는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를 지속시키기 위한 주민들의 실천은 ‘정체성 만들기’의 실제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양반으로서의 정체성은 풍향제에의 참석이라는 경계짓기 또는 구별짓기를 통해 양반/상놈, 참석자/비참석자, 관심 있는 자/무관심한 자,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전통 유지 또는 지속에 무관심한 자 등의 구분을 만들어낸다. 풍향제 자체가 마을주민을 외 지역주민과 외부인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풍향제는 영보마을에서 사회적 장(field)을 구성하는 주요 계기를 제공한다. 한 제보자는 풍향제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풍향제에 별 반 관심이 없어. 사실 풍향제는 별로 볼 것도 없어. 그냥 마을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하루 동안 놀고먹는 행사라고 할 수 있지. 나는 별로 관심이 없어.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놀면서 즐기는 거지. 별 특별한 것은 없어.” 또한 풍향제는 인근 마을사람들을 비롯한 외부인과 영보사람들을 구분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는 풍향제를 영암군내 군서면에 위치한 구림마을의 왕인축제와의 구분짓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구림마을은 왕인축제로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영보마을 사람들에게 구림마을은 일본인들의 방문을 통해 더 많이 알려지고 유명해졌다고 인식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왕인박사 유적지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제보자의 말은 영보마을 사람들에게 구림의 왕인축제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왕인이란 분이 일본에서 아주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하드만. 그런데 구림 뒤쪽에 태봉산이라고 있다고 하는데. 그곳에 왕인박사의 탯줄이 묻혀있다고 하던데, 그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다 거짓말이여. 내 생각엔 왕인박사가 잠깐 들였다가 갔는데 사람들이 장사하려고 이상하게 소문을 퍼트린 거야.” 이 표현 속에는 왕인축제에 대한 영보사람들의 인식뿐만 아니라 자신을 구림사람들과 구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왕인축제가 역사의 날조와 변형 및 조작을 통해 양적 성장한 결과라는 인식과 이에 대한 반대를 엿볼 수 있다. 영보마을에는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온 ‘영보 인심’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영보마을은 임진왜란의 의병, 일제시대의 항일투쟁, 6.25 등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마을과 한국민을 위해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수호해 온 전통을 보전해 왔다. 이는 ‘양반으로서의 정통성’을 보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보의 정체성’은 곧 ‘양반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인식된다. ‘양반 정체성’은 ‘영보 인심’의 핵심을 구성하며, 영보마을 사람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전통 또는 전통적 가치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보마을의 정체성의 기반은 ‘양반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형식을 띤 것이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축제의 상품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인축제는 풍향제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영보마을 사람들은 풍향제의 역사와 연륜이 더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인축제가 일반인들에게는 더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축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뭔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왕인축제는 왕인과 관련된 역사와 전설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만들기’를 시도한 사례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왕인을 내세워 마을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왕인을 내세웠는데, 여기에는 허구와 조작의 기술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마을 단위뿐 아니라 군, 나아가 전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양적 확대를 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반해 영보마을의 풍향제는 전적으로 마을 행사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제보자는 구림마을의 왕인문화축제는 “원래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며, 일단 만들어지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유명해졌을 뿐이다. 내용은 별반 쓸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풍향제 역시 ‘역사 만들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그 형식은 ‘고향 만들기’ 또는 ‘정체성 만들기’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역사 만들기’의 과정은 자기 집단에 대한 의미부여, 상징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집단 정체성을 축제와 같은 의례를 통해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 만들기’는 실제로 존재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해당 사회의 일상성 속에서 서서히 키워져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평상시의 사회에 어떠한 가치나 상징이 구축되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주민들의 인식이나 행동을 규정하여 정신세계 내부에 깊이 각인되어 왔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이 지역에서 지역의 역사가 어떻게 의미를 부여받아 표상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축제를 주도하는 측에 어떠한 역할이 부여되어, 그 마땅한 역할이나 모습이나 가치가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표상되고 있는가 라는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역사 만들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역사 자체라기보다는 역사를 누가 무슨 목적에서 조작하는가 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역사의 생성과정에는 누군가가 주체가 되어 참여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상징적 자원을 동원하여 마치 그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여러 장치와 태도들이 일상화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말하면서 과거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현재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끈질기게 탐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향이라는 이미지는 풍향제가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활용하는 효과적인 문화적 자원이다. 풍향제를 통해 영보마을 주민들은 ‘고향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영보마을 정체성의 형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2002년도에 영보마을은 전라남도에서 녹색시범마을로 지정되어 이미 2억의 예산을 지원받아 사업에 착수한 상태이다. 또한 2003년도에는 문화마을로 지정되어 약 12억원의 자금을 추가로 지원받았다. “이런 상황을 잘 활용하면 영보마을 역시 구림마을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풍향제는 왕인축제에 비해 규모는 적지만 마을 단위의 지역축제로서의 의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양자간의 차이점 및 공통점이 발견된다. 풍향제는 주민들 사이에서 “아무리 출향을 했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자는 돌아보는 고향 일년에 한번씩은 고향에 와서 고향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행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제 1회 풍향제는 광주 MBC에서 30분간 방영을 했을 정도로 큰 행사였다. 왕인축제가 생기기도 전의 일이다. 전국적으로 축제 자체가 매우 드문 상황이었다. 풍향제의 장점은 처음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왕인축제는 규모가 크다는 점이고, 왕인박사유적지라는 가치를 부여하여 정부에서 대규모 예산을 배정하여 유적지를 조성해 놓고 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의 차이가 있다”라는 제보자의 말은 풍향제와 왕인축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풍향제가 현재의 규모보다 양적으로 확대될 전망은 불투명하지만,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대다수의 주민들과 출향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위해서 주민들은 출향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및 협조를 요구할 것이다. 풍향제의 특성은 ‘고향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 있다고 하겠다. 일종의 ‘고향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풍향제는 영보마을의 공동체적 성격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정체성을 형성,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보마을 주민들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개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특정의 틀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풍향제는 영보마을의 지역정체성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마을사람들은 축제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또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지를 배우고 익힘으로써 자신의 세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한다. 축제를 총체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을 생산하고, 유포하며 소비하는 주체들의 문화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풍향제를 총체적으로 보면 영보마을의 정체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통적 가치, 예컨대 고향에 대한 향수나 전통적 이미지와 같은 가치를 재현하는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정근식 편 1999). 풍향제는 영보마을 사람들의 생활이면서 곧 관광을 위한 문화적 자원이다. 따라서 풍향제는 일상생활로부터의 일탈이나 탈주를 통해 잊혀진 고향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상이라는 무대 뒤편에 숨겨진 문화 만들기의 제작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풍향제를 통해 마을의 문화적 이미지가 재현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같은 집단에 속한다는 공속의식에 기초한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특정 지역의 집단이나 개인은 종교와 언어를 통해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고자 애쓰는 경향이 있다(앤더슨 2002). 하지만 토박이와 출향인 사이의 이질적이고 상이한 지역성과 역사성은 지역사회의 엘리트들이 축제와 같은 문화적 자원을 자기 이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배분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토박이와 출향인 사이의 단절과 괴리가 발생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기존의 권력관계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혼다 1999, 2000). 이것이 풍향제의 기능과 역할의 의미를 배가한다. 단절과 괴리를 회복하기 위한 장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영보마을 사람들과 출향인의 거리감은 풍향제를 통해 연속되고 통합된다.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풍향제가 양자간의 문화적 단절을 상징적으로 결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풍향제는 지역주민의 공속의식과 동향의식, 사회적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의례의 방식으로 ‘떠나온’ 혹은 ‘잠시 잊고 지냈던’ 고향 또는 공동체로서의 마을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정은주 1993; Cohen 1985 참조). 영보마을에서 풍향제는 특정의 시간에 거행되지만 일상적 사건을 통해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 그것은 일상적 사건 속에 매몰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구조나 행위에 잔존하여 계승되는 것이다. 풍향제는 이를 다시 불러내어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풍향제는 마을사람들이 개별적으로 특정한 목표를 정하지 않은 채 행하는 일종의 연기라고 볼 수 있다(Turner 1978 참조). VI. 맺는 글 최근에 들어 풍향제를 관광산업과 연관시켜 대대적인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서서히 일고 있다. 구림마을의 사례에서처럼 영보마을도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적극 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영보마을의 축제문화는 일제 때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관광산업에 의해 크게 변화되었다. 관광산업은 풍향제의 성격과 의미를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우선, 유교적 질서와 문종조직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이제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교적 제사의 형식과 내용, 의례, 문화적 가치, 규범, 전통의 의미 등을 영보마을에서 찾아보기란 그다지 쉽지 않게 되었다. 풍향제의 유교문화적 의미는 제사의 형식화, 의례화를 통해 퇴색, 변질되었다.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지역경제의 발전계획은 영보마을의 관광산업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영보마을의 관광산업에 대한 관심은 급증하였다. 전통적 가치의 재현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관광은 이제 영보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관광산업이 영보마을의 경제적 수준과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있다. 풍향제의 기능과 의미는 변화되고 있다. 영보마을 출신으로 외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향인들이 풍향제가 추구하는 ‘고향 이미지 구축’의 목적에 얼마나 부합할 것인지는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 풍향제는 마을주민들과 고향을 찾은 동향인들이 스스로 참가하고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지역축제로 거듭나야 한다.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기초할 때, 풍향제는 지역 정체성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지로부터 마을을 찾는 관광객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역축제의 본연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주민들과 외지인들이 함께 어울려 즐기는 ‘대동의 한마당’을 구현해 내는 작업이다. 풍향제는 올해로 제25회를 맞이했다. 주민들 사이에 단순히 관광을 위한 이벤트에서 벗어나 ‘고향의 이미지 구축’을 통한 지역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는 지역축제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영보마을 주민들의 자기 출신 지역의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이란 단지 과거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에 의해 발굴되어 재현됨으로써 항상 새롭게 재창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Shils 1981; Hobsbawm and Ranger et al. 1983). 이런 의미에서 풍향제는 영보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발명된 전통’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역축제란 국가와 대립적으로 상정된 세력에 의해 전통문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응용된 하나의 사회극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축제를 통해 지역사회의 전통 또는 전통적 요소가 현실 속에서 재현된다고 할 때 누가, 어떻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축제를 이용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판이하게 달라지게 마련이다(김광억 1989, 1992 참조). 지역축제와 관련된 일련의 문화적 행위, 특히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와 실천은 일반적으로 ‘내 고장 살리기’ 또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와 같은 담론이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마을’, ‘우리 마을의 뿌리 찾기’ 등과 같이 전통적인 요소를 매개로 하여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다. 또한 그것에 대한 관심은 주로 6.25나 IMF 사태와 같은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이른바 ‘전통의 발명’(invention of tradition)이라는 형태(Hobsbawm and Ranger et al. 1983)로 증폭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축제를 둘러싼 일련의 행위 과정은 단순한 개인적, 집단적 동작을 넘어선 하나의 상징적인 제스처로서, 지역성을 표출하는 심층적인 의미구조(기어츠 1998: 15)이며, 그 자체가 그러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지역문화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역축제는 전통을 재현하는 역할을 하며, 이는 ‘역사 만들기’ 또는 ‘정체성 만들기’의 정치적 역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보마을의 전통 또는 전통적 가치, 그리고 ‘고향의 이미지’는 풍향제를 통해 재현된다. 또한 그것은 영보마을의 ‘정체성 만들기’를 위한 이데올로기 생산과 그 실천을 통해 상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역사회의 지배집단(예컨대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은 자신의 정치세력의 확대를 위해 지역축제를 통해 자기 집단 또는 가문의 ‘전통을 창출해냄으로써’ 나름대로의 역사와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과거 속에 잠재해 있던 기억과 향수를 불러내어 의례적 행위를 통해 현실화하는 것이다. 풍향제의 경우, 이농으로 인한 객지 생활과 번거롭고 바쁜 도시 생활로 인해 잊혀져 가는 ‘고향의 이미지’를 축제를 통해 현실에 불러냄으로써 공통의 경험과 기억을 같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기 위해 동원된 문화적 자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은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순수한 그 무엇이 아니라 특정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실체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전통문화라는 것이 탈구조적 사회체계, 또는 후기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문화적 매개물(cultural media)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거나 재생된다. 축제는 이러한 전통 또는 전통적 가치를 의례적 형식을 통해 역동적으로 재현한다. 이를 위해 개인적, 집단적 수준에서 다양한 정치적 전략이 동원됨으로써 의미를 변형 또는 조작하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지역축제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전통 또는 전통의 창출이나 부활, 재생에 대한 관심에 머물지 않고 ‘정체성 만들기’와 같은 현실의 변형과 조작에 대한 관심을 유도해 낸다고 할 수 있다. 영보마을에서 주민들이 풍향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담론에 담긴 의미는 현실 세계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나 자원에 대한 통로가 제한된 마을구성원들이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기억과 역사의식을 의례 또는 예술의 형식을 차용하여 이를 조작적으로 재현, 또는 활용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다(김광억 1993; Thompson 1977; Bloch 1989).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욕망의 문화학이며,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문화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풍향제와 관련된 전통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국가 수준이나 전라남도 또는 영암군의 정책과 이에 대한 영보마을 주민들의 반응간의 변증법적 역학 관계를 통해 풍향제를 둘러싸고 축제에 대한 국가 또는 도, 군 단위의 정책과 영보리 주민 사이에 생겨나는 갈등과 대립의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축제와 관련된 논의를 영보리라는 마을 단위의 미시적 수준으로부터 보다 넓고 큰 체계와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풍향제가 전국 또는 전라남도 또는 영암군의 정책에 의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영보리 주민들의 반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정책과 주민들의 반응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을 내부의 갈등과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현상은 영보마을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축제에 대한 정책에 의해 유도된 이념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과정에서 때로 정책이나 이념에 저항적이거나 순치되지 않은 반응을 보임으로써 스스로에게 부과된 이념적, 구조적 통제에 대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특정의 시책으로 연출되는 ‘정치적 드라마'에 대해 주민들은 방관자적 자세를 가지고 단순히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인 조작적 행동을 통해 그러한 ‘정치적 드라마’의 정체를 밝혀내는 작업을 시도할 수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김광억 1989; 류웰린 1998; Aronoff 1980 참조). 따라서 역사와 문화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 만들기’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해 가는 영보마을 주민들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독특한 문화적 상황에서 형성된, 보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해석은 영보마을 내부의 정치적 세력 분화뿐만 아니라 보다 큰 체계 속에서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분화를 초래하는 정치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귀중한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참고문헌】 김경옥 1991 “조선 후기 영암사족과 서원: 전주 최씨 가문의 성장과 녹동서원의 건 립 사례”, 호남문화연구 20. 김광억 1989 “정치적 담론기제로서의 민중문화운동: 사회극으로서의 마당극”, 한국문화인류학 21. 한국문화인류학회. 1992 “저항문화와 무속의례”, 한국문화인류학 23. 한국문화인류학회. 1993 "현대 중국의 민속부활과 사회주의 정신문명화 운동“, 비교문화연구 1.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류웰린(한경구, 임봉길 공역) 1998 정치인류학 제 2판, 일조각. 류정아 1989 “하회탈놀이의 의미 변화: 마을 <의례>에서 지역 <표상>으로”, 서울대 인 류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 전통성의 현대적 발견: 남프랑스 마을의 축제문화, 서울대출판부. 버만, M., 윤호병 역 1993 현대성의 경험, 현대미학사. 베네딕트 앤더슨(윤형숙 역) 2002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 스코트 래쉬․조나단 프리드만 편(윤호병 외 역) 1998 현대성과 정체성, 현대미학사. 애브너 코헨(윤승용 역) 1982 이차원적 인간 서울: 한벗. 영암군 1988 마을유래지, 영암군. 영암군지편찬위원회 1999 영암군지, 영암군. 영암신문 2002. 11. 1 “영보 문화마을 조성사업지구 확정 친환경 농촌문화마을 조성” 이정덕 1999 “지역축제와 지역 정체성: 풍남제와 춘향제의 사례를 통해”, 정근식 편저, 축제, 민주주의, 지역활성화, pp. 191-215. 이해준 1988 “조선 후기 영암지방 동계의 성립배경과 성격”, 호남문화연구 17. 2001 지역사와 지역문화론, 문화닷컴. 장 뒤비뇨(류정아 역) 1998 축제와 문명, 한길사. 장-피에르 바르니에(주형일 역) 2000 문화의 세계화, 한울. 정근식 1997 “지역정체성과 도시상징 연구를 위하여”, 지역사회 연구방법의 모색, 전 남대학교출판부. 2001 “지역사회의 장기구조사의 구상: 구림을 중심으로”, 호남문화연구 28. 정근식 편저 1999 축제, 민주주의, 지역활성화, 새길. 정은주 1993 “향토 축제와 ‘전통’의 현대적 의미”, 서울대 인류학과 석사학위논문. 클리퍼드 기어츠(문옥표 역) 1998 문화의 해석, 까치. 하세가와 히로꼬 2000 “의례로서의 성폭력: 정쟁 중 강간의 의미에 대하여”, 국가주의를 넘어 서, 삼인. 호남대학교 관광교통연구소 2002 “녹색농촌체험시범마을계획서(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마을)”, 호남대 학교 광교통연구소. 혼다 히로시(本田 洋) 1999 “읍내 토박이와 그들의 결사체: 전라북도 남원의 사례”, 서울대학교 사회 과학연구원 비교문화연구소 집담회 발표문. 2000 “읍내 토박이 집단에 대한 일 고찰: 남원 지역의 사례를 통하여”, 제 187 차 한국문화인류학회 월례발표회 발표문. 홍석준 1993 “현대 말레이시아의 말레이 민족정체성의 문화적 의미”, 『지역연구』 2(4): 101-122.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1997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종족성 연구를 위한 시론”, 홍석준 외 저, 동남아 의 사회와 문화. pp. 79-117. 도서출판 오름. 홍성흡 2001 “역사마을 만들기와 지역정치”, 호남문화연구 28. Aronoff, M. J. (ed.) 1980 Political Anthropology Yearbook I. Ideology and Interest: The Dialectics of Politics, Transaction Books. Bloch, M. 1989 Ritual, History and Power, London: Athlone Press. Cartens, Sharon A. (ed.) 1986 Cultural Identity in Northern Peninsular Malaysia, Ohio University Center for International Studies Center for Southeast Asian Studies. Cohen, A. P. 1985 The Symbolic Construction of Community, London: Tavistock. Hall, S. and Jefferson, T. (eds.) 1976 Resistance through Rituals, The 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University of Birmingham. Hobsbawm, E. and Ranger, T. (eds.) 1983 The Invention of Tradi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linowski, B. 1948 Magic, Science and Religion and Other Essays,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Shils, E. 1981 Traditi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Sider, G. M. 1986 Culture and Class in Anthropology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Thompson, E. P. 1977 “Folklore, Anthropology and Social History,” Indian Historical Review 3(2). Turner, V. W. 1969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 Aidine. 1974 Drama, Fields and Metaphors: Symbolic Action in Human Society,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 The Anthropology of Performance, PAJ Publication. |
첫댓글 대단해요!!!!!!!
그렇군요. 자세히 알게 해 주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