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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오전 9시 주일예배 설교문
신앙고백 (3)
찬송 36 주 예수 이름 높이어식)
대표기도 김정수 권사 (549)
성경 로마서 5:12~21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예수그리스도
찬송 487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새 가족 전영만(65) 선생
방제 (쥐덫) 소독업체 정기 방역 실시
독감 코로나 예방 접종 실시
광고 추수감사절 예배 후 직원총회 (박영숙, 박이순 권사 임직식)
가족 방문 황막례 권사 서울 딸, 김귀례 권사 막내아들, 이기남 집사 아들,
황막례 권사 구암교회 목사님 부부, 윤순희 권사 큰아들, 백춘자 권사 딸
찬송 200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잖아요
얼마 전 치매 보험에 가입했다
내가 누구요
머뭇머뭇거린다
더 다그쳐 물었다
내가 누구예요
그냥 말똥거린다
어제까지만도 나 없으면 못 산다던 당신
섭섭하다
얄밉기도
그러나 눈물이 난다
정말 나는 누구일까 / 침묵 48, 정원(시평 하단에)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절,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절,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우리 이기남 집사님은 젠틀 gentle합니다.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님을 닮은 우리 이선희 권사님도 제틀멘 gentleman입니다.
병원에 가실 경우는 가족이 오셔서 모시고 갑니다.
이것이 법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그렇지만 지난주에
손과 입에 떨림이 있어 목사님이 모시고 신경과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호자께서
우리 요양원에서 병원에 모시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업무상 간호사들 몫이기도 하지만 병원비, 가족 상담 등
법과 외적인 문제 때문에 거의 20년 동안 목사님이 담당해 왔습니다.
그래야 우리 권사님들도 재밌어하시고, 안심합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목사님 이 일을 기쁨으로 해 왔습니다.
우리 유수남 권사님도
9살 때부터 손발이 오그라졌으니 어찌 세상 구경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매월 기초연금 받는 날이면 모시고 나가 외식합니다.
엊그제도 휠체어를 지고 나가 함께 따끈따끈한 돌솥 추어탕을 먹었습니다
이것을 구실 삼아 드라이브도 하고 콧바람 쐬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기쁨입니다.
목사님은 이런 행함이 설교이고 예배라 생각합니다.
때론 점잖은 체,
그리고 때론 돼지 멱따듯 꽥꽥거리는 설교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 청년 78%가 무종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목회적 삶이 설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바울 기독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택이 세상을 바꿉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담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 속에 짙게 뿌리내렸습니다.
윤석열이란 한 사람의 탐욕 때문에
수많은 국민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습니까?
한 사람의 거짓말 때문에
20년 30년 쌓아 온 사랑과 신뢰가 파탄 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부모의 상처가 자녀에게 대물림되고,
세대의 미움과 고통이 자손들 마음속에 DNA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느냐고?
그래서 죽고 싶다고.
어제 우리 전영만 선생이(65) 누님 (전영순, 73) 따라오셨습니다.
보기에는 멀쩡했습니다.
말도 잘하고 바보 온달처럼 너무도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무 살에 트럭에 눌려 뇌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기억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살았습니다.
전영만 선생 눈망울에 씁쓸한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상담하는데 목사님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의 삶은 혼자가 아닙니다.
거미줄처럼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그러지 않습니까?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이
동시에 달나라에서도 같은 반응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 한 사람의 죄가 자녀들을 아프게 하고,
나 한 사람의 눈물이 또 다른 사람의 가슴을 무너뜨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복음이 존재합니다.
성경은 아담 한 사람의 죄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 한 분의 구원도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실패를 이야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파괴된 인류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못난 나조차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5장 14절은 아담을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정죄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의 순종은 의롭다 하심, 곧 인의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 노릇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은혜와 생명이 왕 노릇 합니다.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힘조차 없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숨기려 할 때,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시되 회개의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싶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은 이야기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신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20절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은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파괴합니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죄가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깊을 수는 없습니다.
사업 하나가 실패했다고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넘어졌다고 다시 일어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칠전팔기 七顚八起라 하지 않습니까?
과거에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남은 인생까지 반드시 잘 못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목사님도 한때는 정치를 한답시고 잘못된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나름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슬픔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지나간 잘못 때문에 밤마다 마음 아파하는 분이 계십니까?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크지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 생명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담의 길이 자기중심적인 불순종의 길이었다면,
그리스도의 길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과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지 죄 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뱉은 미움이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내민 화해의 손길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은혜가 나에게서 멈출 수도 있지만,
그 은혜가 용서와 섬김과 사랑을 통해 이웃에게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처를 단번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을 우리 힘으로 없앨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선택하는 순종 하나,
오늘 내가 실천하는 사랑 하나,
오늘 내가 건네는 용서의 말 한마디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왕은
아담의 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끝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늙음이 있고, 질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기도해도 고난이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아도 눈물을 흘려야 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님도 첫 목회지, 텅 빈 예배당에서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도 밤마다 골방에서 홀로 울며 기도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21절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사망이 고난이 슬픔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위협할 수는 있습니다.
죄가 우리의 삶에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이 마지막 왕은 아닙니다.
마지막 왕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용서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정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생명 평화 화합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절망이 아닙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이야기도
현재의 고난과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현실을 알지만 영생의 약속을 붙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죄에 붙들려 오늘의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상처가
여러분의 남은 삶 전체를 지배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거짓된 아담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가 왕 노릇 하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 합니다.
사망이 우리를 위협하지만, 영생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감사합니다.
*** 시평
선생님, 이번 시는 읽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집니다.
앞서 선생님께서 보여 주신 시가 비움의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면,
이번 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힌다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나 자신마저 흔들리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특히 눈여겨본 부분은 세 곳입니다.
1. 「얼마 전 치매 보험을 가입했다」
아주 일상적인 문장으로 시가 시작됩니다.
보험이라는 현실적인 소재가 뒤에 펼쳐질 비극을 미리 예고합니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담담하게 시작한 것이 좋습니다.
2. 「섭섭하다 / 얄밉기도 / 그러나 눈물이 난다」
저는 이 부분이 시의 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서운하고, 얄밉습니다.
머리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원망은 눈물로 바뀝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운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겠지요.
이 감정의 솔직함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3. 「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 마지막 질문이 참 좋습니다.
앞에서는 상대에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요.
그런데 시의 마지막에서는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말 나는 누구일까.
처음에는 상대방의 기억을 확인하는 질문이었는데,
끝에 가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함께 살아온 세월은 무엇이었는지,
나 자신은 누구인지까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 이 시의 가장 깊은 울림입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시는 감정을 더 보태거나 아름다운 표현을 덧붙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미 생활 속의 말들이 충분히 아프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주 작은 부분 하나는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이 행은 독자가 두 사람의 오랜 관계를 한순간에 상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행을 그대로 살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정말 나는 누구일까」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시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 시가 치매에 관한 시이면서
동시에 사랑받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지 못할 때 겪는 상실에 관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화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만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섭섭하고, 얄밉고, 눈물이 납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오히려 이 시를 살아 있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상대의 기억을 향해 던진 질문이면서,
어쩌면 함께 살아온 세월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이 시는 설명을 더하기보다 지금의 여백을 지켜 주고 싶습니다.
정원(圓), Circle.
선생님의 이름에는 둥근 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에서는 군더더기 없는 언어, 비움의 미학,
일상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진실,
마지막 한 줄에 오래 남는 질문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버리고 비워 텅 비어 있으니」에서는 비움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치매 보험으로 시작하는 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묻다가
끝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깊이를 보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시를 읽을 때는 앞으로도 세 가지를 마음에 두겠습니다.
선생님이 남겨 두신 여백을 함부로 채우지 않겠습니다.
좋은 점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아쉬운 점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을 덧붙이더라도 선생님의 원문과 제가 덧붙인 글을 분명히 구별하겠습니다.
시인은 때로 자신의 시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판단하기 전에 읽어 주고,
성급히 고치기 전에 그 안에 머물러 주는 벗이 필요할 때가 있겠지요.
선생님께 그런 대화의 자리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정원 선생님,
다음에 시를 가져오시면 그 시부터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