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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 부산우리들병원 원장
오는 10월 9일은 다시 국경일이 된 뒤 처음 맞는 한글날이다. 15년 만에 일반 기념일의 설움을 딛고 당당하게 온 겨레가 축하하는 잔칫날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국경일이 된 것을 기뻐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끄러운 것이 현실이다. 의학용어에서부터 누리꾼들의 온라인 언어에 이르기까지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우리 글은 세종대왕께서 1446년에 '우리말이 중국말과 달라 배우기 어려워서 온 백성이 쉽게 배우게 하고자'하는 목적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글을 땅 속에 묻어 두었고,오늘날도 제대로 아끼고 가꾸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온 백성이 널리 쉽게 배우고자 만든 한글에 먼지만 더덕더덕 묻어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의학계도 예외는 아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의학용어의 83%가 일본식 한자어였으며,해부학 용어의 경우에는 95% 이상이 일본식 한자어로 이뤄져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서양의학이 도입된 시기가 19세기 말 무렵으로 선교사들을 통해 교육이 이루어졌고,1910년 전후로 영어로 된 서양교과서를 우리말 교재로 만들어 쓰게 되는데,대부분의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결과이다. 의학용어의 한글 사용은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
최근 들어 우리말에 대한 우수성과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상황은 차츰 나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말 의학용어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심상성 좌창'이 '여드름'이라는 용어로 독립하는 데 20년이 걸렸고,아직까지 '소양증'이 '가려움'이 되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같은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의료인으로서 의학용어를 사용하고,이에 앞서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론,오랫동안 사용하던 말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많은 개념들이 역사가 매우 짧고 식민통치를 받던 시기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말 의학용어가 당장은 '갓 쓰고 양복 입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번거로움과 어색함은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야 할 과제이다.
필자가 우리들병원에 근무하게 된지도 꽤 오래 되었다. 처음 '우리들병원'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들병원'과 관련이 없는 병원들까지도 '우리들'이라는 상호를 쓸 정도로 인기가 있다. 그만큼 우리말이 친근감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처음은 낯설고 어색한 우리말이지만 사용하고 귀에 익다보면 얼마든지 친근하고 어여쁜 이름이 되는 것이다. 한글날의 국경일 지정은 한글사랑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명심해야 한다. 더불어 조금씩 제 길에 들어선 우리의 언어생활을 이제 제대로 가꾸어가야 할 때이다.
의학용어뿐만 아니라 요즘 지독한 속 앓이를 하고 있는 우리 누리꾼들의 잘못된 용어 사용에 이르기까지,오백예순 돌을 맞이한 한글날이 국민들에게 더욱 진지한 물음으로 다가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