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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辯明)
이 병 주
《역사를 위한 변명 (辯明)》은 마르크 브르크의 미완의 저작이다. 먼저 나는
그 제목에 마음이 끌렸고 읽어선 그 내용에 감동했고 그의 생애의 대강을 알고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역사를 위한 변명》을 통해 마르크 브로크를 알게 된 것은 I966년 7월이다. 그 무렵, H신문이 ‘전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란 타이틀을 달고 2차 대전 중 일본의 군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 명단을 읽은 감상이 브로크를 읽은 감동과 얽혀 나는 내 스스로 역사를 위한 변명을 모색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허나 이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마르크 브로크란 인물을 이 기회에 소개해 놓고 싶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브로크는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抗獨運動)에 참가, 리용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쉬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
기록은 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44년 6월 I6일 27인의 불란서인들이 몽류크의 감옥으로부티 끌려 나와 리용 북방 50킬로의 상거에 있는 레 뤼세유란 곳으로 연행되었다. 일행 가운덴 발랄하고도 날카로운 눈초리의 은발의 노인이 한 사람 끼어 있었다. 그 노인 곁에 열여섯 살의 소년이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서 “아플까요?”하고 물었다. 은발의 그 노인은 소년의 손을 꼭 쥐곤 애정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프지 않다. 아플 까닭이 없다.” 그리고 그 노인은 제일 먼저 총을 맞고 “불란서 만세”를 외치면서 쓰러졌다. 이것이 독일군에 의해 총살당한, 불란서가 세계에 자랑으로 하는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브로크의 최후의 순간이다.
마르크 브로크는 자기의 저서를 “아버지,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는 어린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선 《변명》을 쓰게 된 동기와 이유를 설
명 한다.
끊임없는 위기 속에 있는 어지러운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할 적마다 그들은 과거를 거울로 삼은 것이 정당한 일이었던가, 또 충분히 과거를 참고로 했던가를 자문자답한다. 극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거짓이 없는 그 반향을 포착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I940년 6월의 일이다. 내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독일인이 파리에 입성한 바로 그날이 아니었을까 한다. 군대를 잃은 참모본부는 매일 무위(無爲) 속에서 나태하게 보내고 있었다. 풍광(風光) 아름다운 노르만디에서 우리들은 재난의 원인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며 마음 속에서 묻고 있었다. “역사가 우리를 기만했다고 생각해야 될 것인가.” 우리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원숙한 그 어른의 번민이 “역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한 어린이의 단순한 호기심과 겹처 내 앞에 문제로서 나타났다. 나는 그 어른의 고뇌와 그 소년의 호기심 쌍방에 답안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의 심정을 내 나름대로 풀이하면 이렇게 된다. 역사가 가능하자면, 아니 역사가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되려면 그것이 정의의 방향, 진리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 또한 역사가 인생에 유익한 것이 되자면 그 교훈이 살아, 보람있게 작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눈앞엔 패리(悖理) 의 상황이 펼쳐지고 불의의 경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지 않는가. 이것은 반드시 충격이 아닐 수 없고 그 충격이 그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역사에의 불신을 심고 역사에의 회의를 싹트게 한다. 마르크 브로크는 “그리나 그렇지 않다.”고 외치고 싶었고 그 외침 이 《역사를 위한 변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책에서 역사를 불신해선 안 된다는 안타까움을 읽을 수는 있어도 역사를 신뢰해야 한다는 그의 교훈에 설복될 수는 없었다. 역사를 위한 변명을 쓰고자 한 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설혹 그 책이 미완으로 끝나지 않고 완성을 보았다고 해도 그가 목적으로 한 변명은 무망한 것으로 느껴졌다.
“역사의 대상은 인간이다……. 풍경, 기계, 제도의 배후에 역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건 인간들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지만 마르크 브로크는 자기의 비극적 죽음을 예증으로 해서 역사를 위한 변명의 불모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만 셈이다. 인생의 원통함을 구제하지 못한 채 파악되는 인간이란 해부대에 놓인 시체일 뿐이다. 역사는 비정의 학문으로선 가능할진 몰라도 칼로 찌르면 선혈이 터져 나오는 인간이 그 변명을 써야할 성질의 학문은 못된다. 마르크 브로크의 죽음과 그와 유사한 죽음을 역사는 어떠한 설득력으로서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마르크 브로크의 책을 언제나 되풀이해 읽는 것은 그리나 그의 물음의 진지함에 있는 것이지 그의 논증이 훌륭한 탓은 아니다. 내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불신하면서도 역사를 외면하지 못하고 희의하면서도 역사 속에 담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지워버릴 수 없는 탓이며 “역사가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그와 더불어 나누고 있는 시간이 내겐 그지없이 소중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유언의 1절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생애를 통해 표현과 사상의 성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나는 선량한 불란서인으로서 살았으며 선량한 불란서인으로서 죽는다.
20년 만에 밝혀진 전몰자 명단을 읽으면서도 나는 그다지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가깝게 6.25동란의 쓰라린 기억이 있었고 20년이란 세월이 흐른 탓인지도 몰랐다. 다만 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 가능하자면 이들 전몰자들의, 그 죽음의 의미가 그들의 죽음을 보상할 수 있게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본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2차대천중, 동원된 한국인의 수는 22만, 그 가운데 2만 2천명 가량이 전사했다. 그 일부인 2천 3백 15명의 명단이 밝혀진 셈인데 그 유골은 일본 후생성(厚生省)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그날 나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군의 특수부대가 6.25 때 전사한 그들 동포의 유골, 또는 시체를 찾기 위해 이 나라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찾은 유골, 또는 시체를 일본 고꾸라, 요꼬하마 기지로 옮겨가서 정중하게 선별(選別) 납관한 뒤 성조기를 둘러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사자(死者)까질 존중해아 한다는 정성을 나는 거기서 배웠다. 일본은 십여 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써서 태평양 전역(全域)에 걸쳐 그들 전사자의 유골을 찾았다. 단 1구의 시체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남방의 정글을 수십 명의 조사원이 헤맸다는 기록을 나는 가지고 있다. 2차 대전 때 전몰한 동포의 수는 2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겨우 2천 수백 명의 명단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그 유골이 전쟁이 끝나고도 20년 동안 일본 후생성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살아 일제의 무자비한 마수에 번롱(飜弄) 당하고, 가혹한 운명 속에 죽어서 20년이란 장장한 세월 동안 창고의 먼지를 쓴 채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영혼들이다. 《예기(禮記)》에 ‘사이불황 (死而不荒)’이 란 말이 있는데 이들이야 말로 죽어도 죽을 수 없고 죽어 눈을 감을 수 없는 ‘사이불장(死以不葬)’의 망자(亡者)들이다…….” 일기는 이 정도로 끝내버렸지만 나의 감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렸다. 나는 다시금 명단(名單) 위에 눈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알듯말듯한 이름들이 시각과 뇌리 사이로 간혹 왕복했기 때문이다.
성명이 있고 본적이 있고 전사한 곳이 적혀져 있었는데 성은 일본식이고 이름은 한국식인 것이 눈에 거스르면서 야릇한 감회를 돋구기도 했다. 그런데 전사한 지명이 다양했다. 가장 빈번히 나다나는 지명이 필리핀과 유황도(硫黃島)였다. 그밖에, 영인, 트라크, 나울, 사이판, 파라오, 뉴기니어, 웨이크, 뉴브리텐, 인도네시아, 마카사르, 밭리, 셀레베스, 브라운, 마로에라프, 솔로몬, 말레이, 비스마르크 …… 등 태평양 전역의 도저 이름이 차례로 나타나 있었다. 나는 그 인명과 지명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태평양에 점재(點在)한 섬마다에 우리 동포의 핏자국이 있다는 느낌, 태평양 바다 깊이 물고기가 뜯어먹다 만 앙상한 뼉다귀가 깔려 있다는 느낌 ! 나는 선뜻 이러한 대화를 연상해 보았다. 그 대화란―
“이웃집 아저씨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셨는데 십 년이 넘도록 우리 아버지는
왜 돌아오질 않조?”
열 두세 살 되는 딸의 물음을 받고 어머니는 조용히 말한다.
“너의 아버지는 태평양 넓은 바다, 그 바다 밑을 걸어서 오시느라고 이렇게 늦단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연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이 그처럼 무의미한 죽음을 할 수 있을까. 인류를 위한 희생도 아니고 조국을 위한 봉사도 아니고 어떤 사상, 어떤 신념을 위한 순교도 아니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노예로서의 죽음일 뿐이다. 사람이라면 본의 아니게 전쟁에 끌려나가선 안 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라는 명분이 뚜렷하지 못할 땐 무기 따위를 들어선 결단코 안 된다. 이것이 사람으로서의 최소한도의 각오라야 한다. 이왕 죽어야 할 바엔 항거하다가 죽어야 옳다. 노예의 죽음보다 비참한 죽음은 다시없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다짐이 무력한 푸념밖엔 더 될 것이 없다는 걸 내 자신 잘 알고 있다. 나는 〈카이로선언〉이 있고 난 후에 일본군에 끌려간 비굴한 놈이다. 그런 까닭에 해롤드 래스키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비수로 우리의 심장을 에이는 내용으로 된다.
“전세계에 걸쳐 오늘날 청년들은 죽음의 문전에 서 있다. 몇 백만이란 청년들이 아직 성년에도 미달한 그 생명을 자유를 위해서 바지고 있다. 이 꿈을 위해서 이미 수백만의 청년이 죽어갔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엔 보다 더한 수의 청년이 죽어 있을 것이며 혹은 장님 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불구자가 되어 이 인생에 있어서의 아름다움과 완전히 격리된 채 그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전세계의 청년이 그 생명, 그 소유물 일체를 바치도록 요구당한 것은 우리들의 생애에 있어서 이번이 두번째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일으키지도 않은 전쟁속에 고투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걸과에 아마 대부분은 참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운명의 희생이며 자신들의 선택을 거부당한 운명의, 그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이다……. 그들의 과감한 투쟁을 볼 때 현대 청년 앞에 마음으로부터의 겸허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다.”
이것은 연합국의 청년들에게 대한 찬사다. 우리들은 그 연합국 청년들을 도살(屠殺)하고 세계를 정복하려고 서둔 흉악한 하수인들 편에 서서 총을 들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지금 이렇게 그 명단을 지켜보고 있는 나와, 이미 백골이 되어버린 그들과의 차위(差違)에 생각이 미쳤다. 어떤 사람은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와의 차이를 폭탄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과 그 곳을 살큼 피했다는 것과의 차밖엔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보다도 더욱 사소한 차라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 참모본부에 있는 어떤 장교의 연필끝의 장난일 뿐이다. 그 연필끝이 어떤 사람들은 태평양으로 보내고 나는 중국소주(蘇州)로 보냈다. 그 연필끝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르크 브로크는 그래도 역사를 위한 변명을 고집할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 브로크는 “있다”고 대탑한다. “서둘러선 안 돼. 역사는 변명돼야 해.” 그의 근엄한 소리가 들려오지만 변명되어야 한다는 것과 번명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때 H신문의 명단 발표는 일주일 동안의 연재 발표였다. 나는 매일처럼 그 명단을 살피고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단 한 사람, 본적도 전사지명도 밝히지 않고 일본식 성명이 아닌 한국식 그대로의 이름만으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이름이 탁인수(卓(二秀)였다.
탁인수! 나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심장의 경련을 느꼈다. 나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과연 바로 그 탁인수일까?’
1945년 8월 하순, 중국 소주의 하늘은 연일 화려하게 맑았다. 여름의 열기가 흥분된 내 마음에 서려 나의 회상 속에 나타나는 그 하늘의 푸르름은 거의 보라빛으로 아름답고 은빛을 언저리로 한 하얀 뭉게구름은 소년의 꿈처럼 황홀하기도 했다. 얼마간의 외포(畏怖)가 섞인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는 썩어가는 풀잎 내음에도 인생의 향기를 맡았고 구슬땀이 얼굴을 구르는 더위에도 생명력의 약동을 느꼈다. 일본의 항복, 조국의 해방이란 엄청난 사실이 역사라는 작용을 실감케 했고 일본의 용병(傭兵)이란 처지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뜻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치밀어올라 가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 일본의 군복을 입고 있을 망정 나의 마음은 이미 자유인이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꿈을 밤마다 꾸었다.
이러한 어느날 나는 부대장 부관(副官)인 야마사끼 중위의 부름을 받았다. 야마사끼는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공부한 간부 후보생 출신의 장교였다. 나와는 간혹 어울려 잡담을 하는 그런 사이였다. 화제에 38선 문제가 올랐다. 그리고 나서 야마사끼는 나더러 부대의 기밀문서를 소각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기밀문서는 거의 반트럭 이나 될 만큼한 부피였다. 부대원이 고작 4맥 명 안팎인데 웬 기밀문서는 이렇게 많으냐고 빈정댔더니 야마사끼는, “일본군대가 주로 페이퍼 플레이만 한다는 걸 이제사 알았나.”
하곤, 덧붙였다.
“한 장 남기지 않고 완전 소각을 해주게.”
나는 병정 세 사람을 시켜 그 문서의 더미를 제철공장(蹄鐵工場) 후면에 있는 방공호 근처로 옮겼다. 그 방공호는 미완성인 것이어서 지붕이 덮여 있지 않았다. 그 속에서 문서를 태우고 난 뒤 흙으로 방공호를 메워 버릴 작정을 세웠다.
기밀문서라고 했지만 대단한 건 아니었다. 일일명령철, 작전명령철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하드 커버로 장정된 전훈철(戰訓綴)이란 것이 십수 권 있었고 그밖엔 잡서류였다.
일일명령철이란 인사명령, 근무명령 등을 모은 것이고 작전명령 이래야 신편사단(新編師團)에의 병력 차출, 분견대의 배치, 출동에 관한 명령, 연습에 관한 명령 등으로 이곳 저곳 책장을 넘겨보아도 별반 흥미있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그 명령철과 잡서류를 먼지 태우라고 이르고 제철공장의 그늘에 앉아 천훈철을 뒤쳤다.
전훈이란 일본군대에 있어서의 관보(官報)다. 하사관 이상의 인사동정, 즉 승진과 보직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된 부분도 있고 대소 전투의 상황을 요령 있게 기록한 부분도 있었다. 그밖에 군사시설, 교육방법에 관한 지침 같은 것도 있었다. 가령 이런 따위의 기사도 있다. 유황도에서 철근 큰크리트의 토지카를 만들었는데 몇십 센티 이상의 두께를 가진 것은 직격탄에 의하지 않곤 파괴되지 않았고 그 이하의 것은 주변에 낙하된 폭탄의 폭풍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니 앞으로 만드는 토지카는 이러이러하게 만들도록 설계도와 재료표를 붙여 지시한다…….
대본영(大本營) 발표라고 해서 허무맹랑한 거짓 선전을 하고 있던 일본군도 이 전훈에서만은 거짓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 전훈철을 통해서 6개월 전 부대에서 출발한 주정중대(舟艇中隊)가 양자강 상류에서 전원 익사한 사실을 알았고 바로 몇 달 전, 소주로부터 얼마되지 않은 지점에서 제47부대가 신사군(新四軍)의 습격을 받고 대 손해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렇게 흥미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돌연 군법회의 기록이란 것이 눈에 띄었다. 얼핏 보니 거기 한국인의 이름이 나다나 있었다. 나는 읽다가 말고 병정들이 눈치채지 않게 그 부분을 뜯어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그런 것이 없는가 하고 바쁘게 전훈철을 뒤지고 있는데 병정들의 소리가 들렸다. 먼젓 것은 다 태웠으니 나머지를 태우자는 것이다. 나는 병정들을 보고 가져가라고 일렀다. 야무지게 장정되어 있는 것이 돼서 태우기가 힘들었다. 나는 한장한장 찢어서 불속으로 던져지는 전훈철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다시없는 역사의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제기랄! 이렇게 태워 없앨 걸 야무지게도 해 놨네.”
하고 하나의 병정이 투덜댔다.
“이처럼 앞을 못 보는 놈들 밑에 절절맸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군.”
다른 하나의 대꾸였다.
기밀문서 소각 작업은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작업이 끝나면 자기 방으로 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는 야마사끼의 청이 있었지만 나는 호주머니 속의 문서가 마음에 걸려 그것을 읽을 장소를 물색하기에 바빴다.
나는 전에 내가 맡아 있던 소모품 창고를 택했다. 나는 창고의 문을 잠그고 광선이 잘들어 오는 구석진 곳을 골라 앉아 그 서류를 꺼냈다.
제목은 “탁인수 군법회의 기록”이라고 되어 있었고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성명 탁인수. 본적 경북 ×군 ×면 × 리. 생년월일 대 (大正) 10년 ×월 ×일. 학력 동경 W대학 경제학부 졸. 이 者는 소화(昭和) I9년(I944년) 1월 20일 조선 용산부대를 거쳐 동년 2월 5일 중지(中支) 파견군 제70사단 제21부대에 입주 상주(常州)에서 초년병 교육을 마치고 동년 7월 진강 분견대에 파견되자 일주일 후인 7월 17일, 부대를 이탈 중국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으로 분적(奔敵) 황군(皇軍)의 기밀을 팔아 충구군참령〔少佐相當階級〕으로 임명되어 이적 행위를 거듭했음. 그러고는 소화 20년 (I945년) 1월, 조선인을 규합하여 충구군내에 조선인 부대를 만들 목적으로 상해에 잠입, 인원포섭괴 자금조달의 공작을 시작했음. 그동안 십수 명의 조선인을 포섭 (人名 省晷), 약간의 자금도 모았는데 이 동태를 찰지(察知) 한 상해 화성돈로(華盛頓路) × × 번에 거주하는 조선인 장병중(張剩中) 이 제보해 왔으므로 2월 5일 오전 7시 장강반점(長江飯店)에 투숙중인 것을 상해 헌병대가 체포했음.
이어 군법회장에서의 문답내용이 있었는데 그 가운덴 이런 응수가 있었다.
문= 탈출한 동기는 무엇 이 냐.
답= 나는 입대할 때부터 탈출할 기회만 노려 왔다.
문= 동기와 이유를 말하라니까.
답= 조선인이 일본의 병정노릇을 할 수 없다는 신념이 탈출의 동기이고 이유다.
문= 너는 조선인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실에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답= 나는 일본을 조국의 원수라고 생각한다.
문= 너는 조선독립이 가능하다고 부는가.
답= 가능하건 않건 꼭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 조선독립이 목적이면 조선독립을 위한 단체로 갈 것이지 왜 충의구국
군으로 갔느냐.
답= 중경은 멀어 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방편상 충의구국군에 편입을 했
다.
문 =충의구국군 따위의 잠군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가.
답= 독립운동은 우리가 할 일이지 충의구국군이 할 일이 아니다.
문= 네가 가담한 충의구국군의 본거는 어디에 있으며 사령관은 누구냐.
답= 답할 수 없다.
문= 왜 답할 수 없느냐.
답= 동맹군의 정보를 알릴 수 없다는 군인의 본분으로서 말할 수 없다.
문= 네가 포섭한 조선인의 이름을 대라.
답= 말할 수 없다.
문= 네가 순수히 본 법정이 묻는 말에 대답하고 반성하는 빛이 있으면 너는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편을 택할 것이냐.
답= 나는 죽음을 택하겠다.
문= 또 할 말이 없는가.
답=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도의를 안다면 나를 죄인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단 포로로 취급하라고 요구도 했겠지만 그런 도의가 있는 놈들 같지 않으니 할 말이 전연 없다.
문= 너는 가족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너의 불충 불효 불손한 행위가 너의 가족에게 미칠 화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답= 나의 불효는 장자 역사가 보상해 주리라고 믿는다.
적전(敵前)부대이탈, 분적, 이적 등의 죄명으로 판결은 사형. 1945년 6월 15일 상해 경비사령부에서 법무장교 입회하에 교수형 집행이란 대목으로서 그 문서는 끝나고 있었다.
나는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편편(片片)한 관념의 조각이 휘날릴 뿐 하나의 상념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탁인수란 이름이 뇌리에 꽉 차게 확대되기도 하고 장병중이란 이름이 그것에 겹쳐지기도 했다. 6월 15일이라면 그땐 나는 상숙(常熟)이란 곳에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진지 구축을 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불과 두 달 남짓한 시간, 그 시간만 용케 견딜 수 있었더라면 탁인수는 그가 그처럼 바라고 애썼던 조국의 해방을 보았을 것이었다. 나는 8월 15일 역사를 실감했다. 탁인수는 자기의 불행을 역사가 보상할 것으로 믿고 죽었다. 나는 내가 실감한 역사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감상이란 걸 알았다. 그 엄숙한 탁인수의 역사 속에 내가 기어들 자리는 없었다. 나는 한 마리의 버러지에 불과했다. 어둠이 챵고 안에 기어들자 나는 대강의 사항읕 수첩에 적어 놓고 그 문서를 가루가 되도록 찢어 마루청 틈서리에 버렸다.
창고에서 나와 노을이 짙은 영정(營庭)을 걸어가다가 나는 큰 실수를 지질렀다는 뉘우침을 깨달았다. 그 문서를 없애 버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문서를 한자 틀림없이 내 기억 속에서 재생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졌고 그것을 믿고 한 짓이었지만 내 기억만으로 대처할 수 없는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 이었다. 그 문서는 증거재료로서 보존했어야 옳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내가 읽은 내용을 경위 설명과 함께 친구들에게도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왜 그 문서를 없애 버렸느냐는 힐난이 있을 것이었다. 항복한 일본군대 내에서 그만한 부피의 문서를 간수하기란 어렵지 않았으니 명령이면 그대로 복종해야 하는, 어느덧 몸에 배버린 습성만으로 나의 실수를 설명 하기란 힘들었다.
이러한 가책이 커감에 따라 나는 하필이면 야마사끼 중위가 내게 왜 일을 시켰을까 하는 생각으로 번졌고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더라도 그 우연엔 나의 지각을 넘은 곳에 있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어졌다. 장병중이란 자를 찾아내서 그를 징벌하라는 섭리의 명령일지도 몰랐다. ‘나의 불효를 역사가 보상한다’고 탁인수는 그의 최후 진술에서 말했는데 역사가 그의 불행을 보상하기 위해선 나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으로서도 해석될 수 있었다.
H신문에 발표된 명단의 맨 끝에 있는 탁인수란 이름을 보고 심장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놀란 것은 이런 까닭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과연 그 탁인수일까?’
한가닥 의혹은 남았다.
1945년 9월 초, 나는 한국 출신의 학도병(學徒兵) 30여 명과 함께 소주에
서 현지 제대를 하고 상해로 갔다.
처음으로 보는 국제도시 상해의 경관(景觀)에도 그 이색적인 풍물에도 나의 마음은 끌리지 않았다. 장병중이란 이름이 가슴 한가운데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어떤 사람의 호의로 쟈포로[자浦路〕에 거치를 정했다. 상해의 지리에 익숙하길 기다려 소재를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뜻밖인 기회에 장과 대면하게 됐다.
서(徐) 라고 하는, 나와는 동향인 교포가 하릇밤 한국 요정인 금강주가(金剛酒家)에 나를 초청했다. 나는 두 사람의 친구를 데리고 그 장소에 갔다. 서는 세 사람의 손님을 동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보니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이 장이었다. 나는 전신이 경직(硬直)하는 듯했다. 서라는 동향인도 장과 한패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그 자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나 참아야 했다. 천재일우라고 할 수 있는 이 기회에 장이란 자의 거동을 냉철히 관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은 서른 대여섯으로 보였다. 회색 플란낼의 즈봉 위에 곤색 상의를 입고 격자무늬의 갈색 넥타이를 매었는데 사파이어 비슷한 넥타이핀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몸집은 약간 뚱뚱한 편이었다. 로이드 안경이 얼굴의 윤곽을 선명히 한 느낌이었고 얼굴의 빛은 반들반들 윤이 나있었다. 외관으로선 어느 모로 보나 빈틈없는 신사의 차림이었고 의젓한 태도였다. 동포의 애국 청년을 일본 헌명에게 팔아넘길 위인으론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보려는데 주고받는 얘기 가운데 화성돈로에 있다는 그의 집 얘기가 나왔다. 집을 팔아야겠는데 중국인들이 정세의 탓으로 값을 낮잡아 본다는 얘기였다. 나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고 한시라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이 거듭 솟구쳐 올랐지만 그 충동을 억제하기로 했다. 장병중은 국제정세와 국내정세에 대해서 제법 그의 견식을 놔시하려고 들었다. 그러면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에 정치자금을 대주었다는 자랑을 말 가운데 은근히 섞기도 했다.
“애국자가 상해에서 살기란 광대 줄타기보다 더 아슬아슬한 노릇이었읍니다. 독립운동을 도와야 하는데 일본놈들의 감시가 여간 심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숨은 애국자로서 고생이 많았다는 듯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장의 그런 포즈에 탁인수가 넘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운동자인 척하는 그 포즈를 믿고 탁인수는 사정을 통했을 것이다. 장은 그런 포즈를 미끼로 많은 애국청년을 유도해선 일본 헌병에게 넘기고 그 댓가로 풍족한 물질적 생활을 해 온 것이란 짐작도 들였다. 나는 보기 좋게 술잔으로 그 면상을 후려같겨 놓고 그의 죄상을 폭로할 수 있으면 얼마나 후련할까 하는 생각을 되뇌이면서도 그럴 용기가 없는 나 자신이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했다. 내가 만일 그런 태도로 나갔다간 생명이 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증거 없는 발언은 모함이라고 되잡힐 것이고, 상해의 그 무렵은 사람을 죽이기란 간단한 일이었다.
술자리가 익어 가자 장은 멋진 사교춤 가락을 보였다. 여자를 다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의 불효는 장차 역사가 보상할 것이다.” 탁인수의 말이 또렷또렷 뇌리에 새겨졌다. 그런데 그날이, 그 보상이 언제 이루어질 것일까. 동포의 애국청년을 죽음의 구렁텅 이에 몰아넣고 그 댓가로 사파이어의 넥다이 핀으로 지장하곤 멋진 춤가락을 보이며 여자들과 희희낙락하는 장병중의 거동을 보고 있으니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견딜 수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기분이 좋지 않으니 돌아가 쉬어야 되겠다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가 만류를 했다. 그 꼴마저 보기가 싫었다. 나는 친구들은 남게 하고 굳이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장이 문간에까지 따라나왔다. “앞으로 서로 협력해서 건국운동에 힘씁시다.” 진정 귀를 씻고 싶은 장의 말이었다. 장병중이 내 어깨에 손을 얹을 것 같아서 나는 질겁을 했다. 현기증이 심하다는 듯 표정을 꾸미고 장이 청해 온 악수를 가까스로 피하곤 강금주가를 뒤로 했다. 거리로 나와서야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었다.
초가을의 상해의 밤. 자동차와 인력거와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거리를 나는 혼자 걸어 브로드맨션 앞을 지나 가든 브리지에 섰다. 황포강(黃浦江) 어두운 수면에 상해의 불야성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에 떠오른 상념을 모조리 기억할 수는 없다. 다만 탁인수를 대신해서 장병중에게 보복할 책임이 내게 있다는 자각과 다짐을 굳힌 기억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든 브리지의 난간 이곳 저곳에 기대서서 고랑(姑娘)과 키스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이 보였다. 인력거에 인력거의 차부를 태우고 끌고가는 미군 병사의 장난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그날 밤 나는 백계로인(白系露人)의 할머니가 경영하는 술집을 찾아 보트카를 마셨다. ‘타챠나’라는 그집 손녀는 《죄와 벌》의 ‘소냐’처럼 가냘프고 아름답고 창백한 소녀였는데 내게 ‘오오젠 하라쇼’란 러시아어를 가르쳐 주었다.
“오오첸 하라쇼! 영어론 베리 굿이란 뜻예요. 메리 굿, 트레 비앙 보다 훨씬 이 말이 좋조? 오오첸 하라쇼!”
10월 중순, 중경으로부티 이연호(李然浩) 장군이 상해로 왔다. 이장군은 장개석 총통의 고문으로 계셨다. 그 본명은 이상천(李相天). 무인이며 문인인, 시인 이상화(李相和), 역사학자 이상백(李相白) 선생의 백형이다. 나와는 초대면이었으나 집 안의 어른을 대니 우리집 안 어른과는 친숙한 사이라고 했다. 그분에게만은 나는 집안의 어른에게 대하듯 어리광을 피울 수 있었다. 어느날 나는 탁인수의 사건을 얘기하고 창병중이 현재 상해에 있다는 사실도 알리고 나의 도의적인 책임같은 것도 말해 보았다. 이장군은 묵묵히 한 동안을 앉아 있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보복할 때가 아니고 지켜 볼 때다. 지금 보복이 시작되면 나라의 일은 뒤죽박죽이 된다. 왜놈의 밀정은 장병중 하나만이 아니다. 이 상해에는 왜놈의 밀정이 우굴거린 곳이다. 물론 도의적인 책임감을 포기해선 안 된다. 나는 자네보다 수십 배나 많은 밀정을 알고 있고 수십 건 증언해야 할 사건읕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해에서만은 그런 일을 잊고 지내도록 하자.”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보복이나 복수라는 건 사람의 힘으론 비겁한 노릇이다.”
나는 그와 비슷한 뜻의 말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권두에 있다면서 외어 보였다.
“복수는 내게 있다. 내가 갚을 것이다.”
“그런 게 있었지, 바로 그거다.”
이 장군은 호방하게 웃었다.
나는 당분간 탁인수의 사건과 장병중의 이름을 묻어두기로 했다. 그러나 때때로 그 사건과 그 이름은 나의 심상을 흐리게 하는 구름이 되었고 나의 양심을 찌르는 바늘끝이 되었다.
그 이듬해 2월 나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아득히 부산항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할 때 어쩌면 같은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탁인수를 생각했다. 같은 배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상해를 떠난 다른 배에 장병중이 타고 있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탁인수의 고향을 찾아가 볼 작정을 했지만 귀국 후에 뒤따른 황망한 나날 속에 그 작정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 장병중에게 대한 집념도 점차로 희석(稀釋)되어 갔다. 그랬는데 어느날 장 쪽에서 나를 찾았다. 그가 나를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소재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가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한다는 사실과 그 주소까지 알게 되고 보니 그가 나를 찾았다는 느낌으로 강세(强勢)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장병중의 소재를 알았다고 해서 어떻게 문제를 만들어 볼 방도가 없 었다.
그후, 수년이 지나 6.25동란 당시 나는 장과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그와 지나친 일이 있다. 내가 그를 아는 척할 까닭도 없었고 그가 내게 인사할 까닭도 없었다. 그지 지나친 정도였는데 여전히 형편은 좋은 모양으로 피난민이 우글거리고 있는 거리에선 눈에 띄게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4,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신문을 펴 들었더니 장병중이 K도의 D군에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나는 공연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지면 탁인수 사건에 대한 나의 도의적 책임을 다할 기회는 영영 없어질 것이란 짐작같은 것도 들었다. 생각하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우연은 연속되었다. 탁인수 사건의 문서를 보게 된 우연, 상해에 가자마자 장병중을 만나게 된 우연, 귀국하자 얼마 안 되어 그의 소재를 수월하게 알 수 있었던 우연, 6. 25’ 때 광복동에서 지나친 우연 그리고 이 신문 보도를, 수맥 명 입후보자에 섞여 깨알만하게 기재되어 있는 보도를 읽게 된 우연 ……. 다시 말하면 섭리는 집요하리만큼 우연을 만들어 나의 행동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나논 생각다 못해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일주일의 휴가원을 내놓고 K도의 D군으로 갔다. 거길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작정도 없었다. 그저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초조감에 강박당한 행동이었다.
K도의 D군은 아담한 산과 들과 강으로서 꾸며진 소박한 고장이었다. 나는 읍내의 중심에 있는 여관에 자리를 잡고 나름대로의 동정을 살폈다. 장병중 외 일곱의 입후보자가 있었는데 대체의 공기로선 지방의 명망가인 C씨라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우세했다. 그의 선친이 3·1운동 당시의 지사인데다가 본인도 부친의 유업을 맡아 일제시대를 무난히 살아온 사람이고 그 군이 선출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덕망과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한 이틀만엔가 읍내 국민학교에서 합동 정견발표회라는 것˙이 있었다. 가장 유망하다는 C씨의 연설은 그지 무난할 정도였는데 장병중이 연단에 서자 군중을 압도하는 듯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기가 얼마나 열렬하게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신파조 웅변조로서 지껄여댔다.
“누구나 말로는 애국한다고 한다. 그리나 애국자라면 실적이 있어야 한다. 실적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 나는 생명을 바치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다. 나는 그 댓가로서 여러분의 표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실적이 있기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일군이 되리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지지를 마란다.”
대강 이런 결론으로 맺어진 연설이었는데 그 연설이 있고부턴 읍내의 공기에 변동이 생긴 것 같았다. “장병중이 애국자다, 그리고 똑똑하다.” 이런 말이 술집 한구석에 앉아 있는 나의 귓전을 스쳐가기도 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탁인수 사건의 기록을 없애버린 나 자신을 뉘우쳤다. 그 기록만 있으면 그것을 복사해서 군내에 돌려 장의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 있을 것인데 싶으니 가슴이 무거워 터질 것만 같았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건 시장 한복판에 서서 장의 과거를 폭로해 볼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그리면서도 내겐 그런 용기가 없다는 것을 내 자신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생각한 끝에 나는 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범위에서 탁인수 사건의 기록을 우리 말로 재생해 보기로 했다. 그것을 재생해서 인쇄물로 만들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군내에 돌리기만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의논을 하기 위해 나는 서울에 가서 옛날 같이 일군(日軍)에 있었던 M이라는 친구를 찾았다. M에게만은 장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M군은 내 말을 듣자 집어치우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렇게 한 뒤의 법률 문제가 귀찮아서가 아니라 입후보한 놈들 가운데 장병중이 같은 놈이 어디 한두 사람 뿐인줄 아나? 일제 때 경찰 한 놈도 입후보하고 있고, 일제 때 헌병노릇 한 놈도 입후보하고 있고 일제에 아부해서 출세하려고 덤빈 별의별 놈들이 입후보하고 있는 판인데 자네가 장병중을 방해한다고 대한민국의 국회가 올바루 될줄 아나? 내버려 둬, 국회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소굴이 되건, 사기군의 집합소가 되건.”
나는 본래 굳은 각오를 하고 간 것이 아니라 M군으로부터 용기를 얻을 양으로 찾아간 형편이었고 보니 M군이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날 밤, 다동 어떤 술집에서 M군은 이런 말도 했다.
“보라구,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을 재건할 생각은 않고 시체에 똥파리 엉겨붙듯 이권에만 웅성대는 게 요즘 정지가들의 생리라네.”
그리고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 하고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언젠가 대전에서 J당대회가 있었지. 그것을 빈정댄 얘긴데 참 기가 막혀서. 서민들의 비판의식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생각했지. 얘기는 이랬어. 대전에서 후레자식들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누가 일등을 했는지 아나? 제 어미를 서방질해서 돈 안 벌어 온다고 호되게 두드려 팬 놈이 일등을 했다네.”
정치가나 정당이 그만큼 부패했고, 민심을 잃었다는 M군의 결론으로 나는 들었다.
나는 그길로 돌아와 버렸다. 선거 결과 장병중은 3위로 낙선하고 C씨가 당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써 반분이나 풀렸다논 기분으로 나는 장병중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그런데 탁인수가 과연 그 탁인수일까.’
나는 몇 번이고 그 명단을 되풀이해서 보고 또 보고 했으나 본적지도 전사지도 밝혀 놓지 않은 이름만의 활자가 명확한 답을 해줄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작년, 그러니까 1971년이 저물 무렵 일본 후생성 창고에 있는 2천여 주(柱)의 유골 봉환문제가 어느 일각에서 일어나더니 그 가운데의 일부분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서둘고 있는 J씨를 찾아가서 무슨 수단을 부려서도 탁인수의 유골만은 이번에 돌아오는 유골 가운데 끼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작년 11월 20일, 246 위의 유골이 돌아왔다. 다행하게도 탁인수의 유골이 그 속에 끼어 있었다.
그 유골이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탁인수가 바로 그 탁인수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일제에 항거한 탓으로 해방 두 달 전에 참살당한 그의 영혼이 26년 동안 이역에서 방황하다가 드디어 고산(故山)의 품에 묵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탁인수에겐 입대 전에 결혼한 부인이 탁인수의 유복자를 성인시키고 그냥 수절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그마하나마 26년 전 같은 운명에 묶였던 친구들의 정성으로 부산항을 굽어보는 양지바른 언덕에 순국열사로서의 그를 송덕하는 비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내게 과해진 문제가 낙착을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인과의 법칙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처럼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선인(善因)엔 선과(善果)가 있고 악인(惡因) 엔 악과(惡果)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섭리의 보람을 다하기 위해서 섭리는 우연이란 계기를 통해 필요로 한 사람을 소명(召命) 한다. 나는 탁인수에 관한 섭리를 위해 분명히 소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명의 명분을 다하지 못했고 나의 게으름과 나의 비겁함으로 인해서 섭리의 톰니바퀴를 어긋나게 비틀어 놓은 걸과가 되었다.
고발해야 할 일을 고발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겹타(怯惰)만으로서 끝나는 노릇이 아니고 인과의 섭리를 어긋나게 하는 범죄행위이며 증언해야 할 것을 회피하는 것은 섭리의 법정에서의 위증(僞證)행위가 된다고 볼 때 나는 천제 (天帝)의 심판 앞에서는 장병중과 공범이 되는 것이다. 인과의 섭리가 일월성신의 운행처럼 정연하지 못한 탓이 나 같은 인간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나는 부득이 마르크 브로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된다.
“브로크 교수, 당신이 나의 처지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하섰겠읍니까.”
“…….”
“섭리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결단적인 행동을 일으켜야 하논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리용에서 레지스탕스를 한 것처럼…….”
“…….”
“탁인수나 당신 같은 희생자를 한 세대에 수백만 명씩 생산하고 있는 상황 속에 앉아 역사의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브로크 교수!”
“…….”
“인과의 섭리가 행해지지 않고 악인(惡因)을 쌓은 인간들이 아직도 히틀러처럼, 무솔리니처럼 설치고 있다면, 그런 상황을 그대로 허용할 수밖에 없다면 역사를 위한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
“역사가 인생에게 유익할려면 악의 원인을 철저히 캐내어 그것을 근절하는 방법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읍니까.”
이때사 겨우 브로크 교수는 입을 연다.
“역사에 있어서의 유일한 원인의 탐구란 일종의 미신이며, 책임자를 가려내려고 하는 가지판단의 교활한 형식에 불과하다. 공죄가 어느 편에 있느냐고 재판관은 묻는다. 학자는 왜 ? 라고 묻고 그 답안이 단순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만족해 버린다. 원인의 일원론은 역사의 설명에 있어서 장애물일 따름이다. 역사는 원인의 파도를 파악해야 한다.
나는 이 브로크 교수의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로 한다.
“역사는 원인을 파도로서 파악해야 하는데 그 파도에 휘말려 익사할 경우도 있다고.”
동시에 이련 말도 들린다.
“섭리의 소명에 용감하게 응해야지만 섭리는 너를 소명한 것으로 작용을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규모로 보다 치밀하게 그물을 치고 작용한다. 그러나 섭리란 것을 나는 싫어한다. 섭리가 등장하면 역사는 퇴장해야 하니까.”
나는 초조하게 반박해 본다.
“역사를 위한 변명이 가능하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수밖엔 없을 텐데요.”
이때 마르크 브로크 교수는 내게 부드러운 웃음을 보내며 말한다.
“서둘지 말아라. 자네는 아직 젊다. 자네는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된다.”
“어디 역사뿐일까요 ? 인생 이 그 혹독한 불행 속에서도 슬기를 되찾고 살자면 문학의 힘을 빌릴 수밖엔 없을 텐데요.”
그러면 마르크 브로크의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다. 나도 문학을 외면한 어떤 인간 노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간혹 이렇게 마르크 브로크 교수를 비롯한 철학자와 문인들과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지만 탁인수의 죽음과 마르크 브로크의 죽음, 그리고 이와 유사한 죽음을 한 세대에 수백만 명씩 만들어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죽음이 세계 도처에 깔려 있을 것을 생각하면 역사를 위한 변명은 고사하고 인생을 위한 변명조차 성립할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뭣인가 변명에의 노력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생각에 따라서는 우리가 샅고 있는 하루하루가 변명에의 시도인 것이다.
가을의 밤이 깊었다.
나는 이제 막 써놓은 원고의 부피를 보면서 이것이 탁인수에게 대한 나의 변명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느덧 일기 시작한 가을의 밤바람이 창틀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가 쓸쓸하다. 그 바람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탄식이 있다.
秋墳鬼唱鮑家詩 恨血千年土中碧
“원한에 사무친 사람의 피는 천년이 가도 흙 속의 벽옥(碧玉) 처럼 완연하리라.”라는 아득히 1천 년의 지편에서 들려오는 이하(李賀)의 탄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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