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석양
게이조의 병원은 아사히가와 시 교외에 있었다. 양조장을 경영하던 할아버지가 값이 아주 쌀 때 땅을 3천여 평 정도 사 놓았었다. 그 덕택에 병원은 사치스러울 만큼 넓은 대지에 들어서 있었다. 병원 현관은 정문에서 50미터나 들어가 있었다.
언젠가 다카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쓰지구치의 아버지는 환자에게는 더없이 불친절한 병원을 세웠단 말이야. 이제 겨우 병원 정문까지 왔구나 했는데, 현관까지 또 십리나 떨어져 있지 않겠어? 환자들은 걷는 게 한 걸음이 새로운데 말이야.”
지친 몸으로 귀가할 때면 게이조도 다카기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이가 2미터 가량이나 되는 견고한 화강암 문기둥에는 파출소의 간판처럼 커다란 판자에 먹으로 ‘쓰지구치 병원’이라는 퇴색한 글씨가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도 그가 사는 집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주목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전에는 정문 앞에 서면 병원이라기보다는 박물관과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것은 둥치가 굵은 느릅나무와 뿌리 근처에서 셋으로 갈라진 키 큰 참나무가 넓은 잔디밭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름다운 잔디도 여기저기 파헤쳐져 밭으로 일구어져 있어 박물관이라고는 말하기 여럽지만, 그래도 여전히 넓고 푸른 대지는 시내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느릅나무도 참나무도 마가목도 물론 일부러 심은 것이 아니라 베다 만 것 들이었다.
게이조는 어렸을 때,
“여기 곰이 기어올라가 씹어 놓은 흔적이 남아 있단다.”
하고 병원의 누군가가 허풍을 떨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곤 했다. 그 무렵에 이곳은 뜰이라기보다는 숲과 같았던 것으로 게이조는 기억하고 있었다.
평원은 工자형으로 지어져 있었다. 게이조의 아버지는 원래 외과 의사였으나 환자들이 부탁하면 무슨 질환이든 가리지 않고 다 보아주곤 했다. 그래서 1930년 이곳으로 병원을 옮겼을 때 외과에다 내과, 안과, 이비인후과를 병설하여 새 병원을 경영하게 되었다.
‘빠르기도 하군. 루리코가 죽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어.’
게이조는 석양이 밝게 비치는 병원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약국 앞을 지나칠 때였다.
“아, 죄송해요.”
하며 안에서 뛰쳐나오다 게이조에게 부딪친 것은 사무원인 마쓰사키 유카코(松岐由香子)였다. 자그마한 키, 새까맣고 둥근 눈에 작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뭔가 필사적인 표정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게이조 앞을 스쳐 지나갔다. 게이조는 어리둥절하여 사무실 쪽으로 바비 사라지는 유카코의 귀여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나?’
방금 유카코가 뛰쳐나온 문틈으로 갈색 병들이 즐비하게 놓인 약품 선반이 보였다. 게이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서 있던 무라이가 흰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게이조를 보고 엷은 웃음을 지었다.
무라이의 엷은 웃음과 방금 이 방에서 뛰쳐나간 마쓰사키 유카코의 필사적인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게이조는 너무도 불쾌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쓰에와 무라이가 자기 입 응접실에서 단둘이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 녀석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을까?’
게이조는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마침 잘 오셨어요.”
무라이의 얼굴에서는 엷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잘 왔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요?”
게이조는 일부러 얼빠진 듯한 대답을 했다. 무라이는 가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나서 말했다.
“원장님께 의논할 일이 있어요…..”
“의논할 일이라고요?”
게이조는 조금 전에 느꼈던 불쾌감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태연스럽게 되물었다.
무라이가 이 병원에 온 지도 2년이 지났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개인적인 의논을 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논이라니 대체 뭘까?’
게이조는 웬지 불안해졌다.
“여기서는 좀 그러니 내 방으로 가지 않겠소?”
하고 게이조는 앞장서서 복도로 나왔다.
“바쁘지 않습니까?”
무라이는 게이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무라이 쪽이 키가 5센티가량 더 컸다.
“별로 바쁠 것 없어요. 괜찮아요.”
게이조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싫은 놈에게는 싫다는 투로 말하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창 너머로 저녁 햇살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높다란 포플러나무가 보였다. 그 밑의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자 입원 환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원장실 문을 열자 저녁 햇살을 받은 실내는 건조한 냄새를 풍겼다. 원장실이라고는 하지만 다섯 평 가량 되는 아담한 방으로, 창문에는 흰 커튼이 한쪽으로 쳐져 있었다.
창가에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타이프라이터와 현미경, 버너 등이 게이조의 성격을 말해주듯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면 가득 걸려 있는 아사쿠라 리키오(朝倉力男)의 어두운 눈 전경 그림이 원장실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퇴원하셨나 본데, 이제 완쾌되셨어요?”
무라이는 길다란 다리를 뻗어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딘지 피로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저녁 햇볕이 제법 뜨거웠다. 게이조는,
“덕분에요.”
하고 커튼을 치면서
‘뭐가 덕분이라는 거야?’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커튼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다.
“원장님, 사무원인 마쓰사키 유카코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라이는 넓은 이마에 늘어진 머리칼을 길다란 손가락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다니…..?”
게이조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러나 무라이가 의논하려는 내용이 마쓰사키 유카코에 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래서,
“꽤 괜찮은 아가씨 같더군요.”
하고 얼른 대답했다.
“괜, 찮, 은, 아가씨라고요?”
무라이는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하며 히죽 웃었다. 그 바람에 게이조는 약간 당황했다. 마쓰사키 유카코는 ‘괜찮은 아가씨’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여가가 결코 아니었다.
유카코는 평소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등에 길게 늘어뜨리고 천천히 걷곤했다. 병원 복도나 사무실, 공원 할 것 없이 늘 산책하는 듯한 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었다. 오늘처럼 복도를 뛰어다니는 일은 절대로 없는 아가씨였다. 그리고,
“원장님, 이 환자의 입원비 말씀인데요.”
하고 카드를 손에 들고 게이조에게 바짝 다가서는 경우도 있었다.
복도를 걸어갈 때는 거의 기대다시피 몸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게이조는 가끔 흠칫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유카코 자신은 그런 것을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는 듯 같은 여자끼리는 물론 나이가 지긋한 사무장에게도 그런 식으로 바짝 붙어 걸어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혹시 그녀는 선천적인 요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화장기 없는 유카코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갓 세수를 하고 난 듯한 청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자코 있는 게이조를 보고 무라이는 다시 히죽 웃었다.
“그 아가씨는 원장님께 반해 있어요.”
무라이의 말에 게이조는 마음속으로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고!’
하고 생각하면서도 점잖게 말했다.
“그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이 아니던가요?”
“그 아가씨와 결혼을요? 제가요?”
무라이는 입술을 약간 실룩거리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설마…..전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마쓰사키는……?”
“글쎄요, 그 아가씨와 전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아가씨는 사실 원장님의 팬이거든요.”
게이조에게는 무라이가 몹시 불성실하게 느껴졌다.
“의논할 게 있다는 것이 마쓰사키에 관한 게 아니었던가요?”
“아아뇨, 제 몸에 관한 겁니다.”
“몸이라니요?”
게이조는 깜짝 놀라 직업의식을 담은 눈초리로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무라이는 갑자기 쓸쓸한 눈빛으로 게이조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원장님, 제가 결핵을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결핵이라고요?”
게이조는 문득 요즘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안과 대합실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무라이에게는 이상할 만큼 환자들이 몰렸다. 요즘 와서 특히 그랬다. 이유는 미남인데다가 붙임성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그의 손재주는 천재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수술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그가 2년 동안 일한 성과가 요즘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무라이가 쉬게 되면 병원을 꾸려 나가는 데 적잖이 지장이 있을 텐데.’
게이조는 무라이의 몸보다도 병원을 먼저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했다.
“폐(肺) 쪽이지요?”
“네. 올 봄부터 이따금 밤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어요.미열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단치는 않아요. 근데 약간 각혈을 했어요.”
“각혈을요!”
마음속으로 ‘꼴 좋다!’하고 외치고 싶은 잔인한 생각이 들었다.
“조금요. 잇몸에서 나는 피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쓸개를 검사해 보았더니 가프키 2호더군요.”
‘공동(空洞)이 생겼구나!’
순간 게이조의 등줄기에 싸늘한 기운이 스쳐갔다. 1946년 당시의 의학 상식으로는 공동이 있는 결핵은 죽음이 바짝 다가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무라이가 어딘지 자포자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 것은 폐결핵 발병으로 인한 쇼크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가프키 2호라면 더 이상 근무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시 한번 사진을 찍어 보기로 하지요.”
게이조는 핏기 없는 무라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과 의사인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래서 말이죠, 병원도 한창 바쁠 때라 죄송하지만 도야(洞爺) 방면으로 가서 요양을 했으면 하는데요.”
‘멀리 떨어진 도야로 간다면 당분간 나쓰에와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게이조는 이렇게 생각하자 무라이의 발병이 오히려 고마웠다. 그러나 병원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저만한 타격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요즈음 의사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안과는 당분간 문을 받아야겠군. 입원 환자도 내보내야겠지. 그러나 이 작자가 제 발로 아사히가와에서 떠나 준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런 착잡한 생각 속에서 게이조는 무라이가 받은 타격을 헤아려볼 수는 있어도 동정할 수는 없었다. 게이조에게 있어 무라이는 루리코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또 다른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공범자는 아내인 나쓰에였다.
“도야로 가는 것은 사무장에게 수속을 밟게 하지요. 이곳 병원에서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테고, 더구나 아사히가와 시는 추워서 요양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테니까요.”
말만은 친절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