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이 존재하냐고요?
필자에게 “신이 존재하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필자가 종교학자라고 특별히 물어보는 것이겠지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야말로 ‘대략 난감’이다. 질문자가 말하는 ‘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고,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의 존재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성과 논리로 논증할 수 있다고 믿고 여러 가지 설을 제시했다.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등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우주론적 증명이란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것을 있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들을 추적하다가 최초의 원인, 그것이 바로 신이다 하는 식이다. 쉽게 말해 시계가 있으면 시계를 만든 사람이 있고, 그 만든 사람을 만든 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소박한 논증은 18세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논박되었다. 이런 인과율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세계에서는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현상세계를 넘어 신이니 영생이니 하는 본질의 세계에서도 그것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근래에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그러면 신을 있게 한 그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말로 이런 논증을 일축해버렸다.
그런데 신의 존재 논증 중 특별한 것이 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겸 수학자 파스칼이 주장한 ‘도박논증’이다. 신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도박하듯 어느 한쪽에 베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신이 있다는 쪽에 베팅하고 신이 없다고 해도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없다는 쪽에 베팅했다가 신이 있다면 망조이기 때문에, 신이 있다는 쪽에다 베팅을 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지만, 문제는 절대자로서의 신이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한다고 좋아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싫어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를 인정해야만 마음이 놓일 정도로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는 신이란 말인가? 신은 그의 존재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대신 그의 존재와 관계없이 사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지는 않을까? 설령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도덕경> 5장에서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天地不仁)고 한 것과 같이, 그를 믿고 안 믿고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한결같이 사랑하는 그런 신일 수는 없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데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절대적인 신은 본성상 어느 범주로도 제약될 수 없다. 따라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여러 심층 종교 전통에서 하는 말은, 궁극실재로서의 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밖에 말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기껏 할 수 있는 말이 ‘없이 계신 이’ 정도다. 함부로 있다 없다 할 것이 못 되는가 보다. (오강남 ‘종교너머, 아하!’ 이사장)
* 자료출처 : 한겨레 (2014. 02. 05)
■ 있는 그대로’ 보는 힘
어느 사람이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벼랑에 떨어지게 되었다. 도중에 용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가지를 잡고 몇 시간을 버티어 보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었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 그런데 떨어지고 보니 땅에서부터 겨우 6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에 겪었던 생고생이었다. 땅이 바로 자기 발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공연히 나뭇가지를 붙들고 몇 시간 죽을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바다에 끝이 있었다고 믿었다. 물론 멀리 가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멀리까지 항해하지 못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때 생긴 두려움, 그것으로 인한 행동의 제약이다. 바다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의 궁극 목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 얻을 수 있는 자유 아닌가? 예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했다. 붓다도 생로병사의 실상을 그대로 인지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가지 진리를 터득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그의 기본 가르침이라 하였다.
우리 주위를 보라. 종교 때문에 삶을 아름답고 보람되게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느 면에서 종교 때문에 쓸데없이 주눅이 든 삶, 삐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런가? 종교에 두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열린 종교요, 다른 하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닫힌 종교다. 물론 여기서 열린 종교냐 닫힌 종교냐를 말할 때, 어느 한 종교는 통째로 열린 종교요, 다른 한 종교는 모두 닫힌 종교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종교 전통 안에도 열린 종교의 태도를 권장하는 심층적 흐름이 있고, 그와 동시에 닫힌 종교의 태도를 주장하는 표층적 옹고집이 있다.
두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열린 종교, 혹은 심층 종교란 우리 스스로 사물의 본성을 깨달아 나가라고 북돋아 주는 종교요, 닫힌 종교 혹은 표층 종교는 그 종교 전통에서 말하는 것의 표피적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종교다. 우리가 열린 종교를 받들면 점점 더 높은 차원에서, 혹은 더 깊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게 되므로 계속하여 싱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지만, 닫힌 종교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창백하고 찌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신앙이 이른바 무지몽매나 전도망상으로 인한 맹신, 광신, 미신 같은 것이 아닌가, 그 때문에 쓸데없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오강남 ‘종교너머, 아하!’ 이사장)
* 자료출처 : 한겨레 (2014.01.22.)
■ 개념 : 인간 [human being, 人間]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는 영혼·사유·노동·유희·소비·도덕 등이 제시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세계와 우주의 본질을 탐구했는데 이러한 존재 질서에서 인간은 중심 위치를 차지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영혼이다. 신화적·종교적 세계관에서는 영혼이 천상에서 물질 세계로 추방되어 육체에 갇혀 있지만 세계보다 참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여기에서 이원론적 사고가 마련되었다.
소피스트는 자연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으며, 인간을 세계의 보편법칙인 로고스를 지닌 존재로 보는 데 반대하고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와 규범을 인정함으로써 소피스트의 상대주의를 극복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감각세계의 변화를 넘어서 영원하고 변치 않는 이성적 진리를 알 수 있다. 이런 사고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에 연결된다. 플라톤은 감각적인 가상세계를 넘어서는 지적인 정신세계를 실재라고 본다. 인간의 영혼은 변화하는 세계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 이성을 지니므로 다른 존재보다 우월한 것으로 본다. 그는 질료와 형상 원리에 따라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보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추구했다.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교에 기초하여 인간을 신적(神的) 질서의 일부로 이해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인격이며 신을 추구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자유의지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유와 사랑보다 지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앙이 부여한 통일이 무너지고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떨어져 방향과 안식처를 잃은 존재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객관적인 존재질서의 중심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의 중심이 되었다(주관으로의 전환). 르네 데카르트는 의식의 순수한 자기 확실성을 확고부동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모든 사물에 앞서 자신을 사고하는 자아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이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 사유하는 의식과 연장(延長)을 지닌 육체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실체'라고 본다. 이러한 영혼과 물질의 단절은 근대 철학을 일면적으로 만들었다. 정신만을 강조하는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사유하는 주관으로 축소시켰고 경험론은 경험과 물질에만 매달린다.
이마누엘 칸트는 양자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런데 대상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이성을 추구하는 칸트의 선험철학(先驗哲學)은 인간의 통일과 전체성을 이루는 데 실패한다. 그는 감각적 직관과 개념적 사유,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행위, 지식과 신앙의 대립을 통일하지 못했다.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형이상학·도덕·종교에 기초해서 인간학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은 절대적 자아와 절대정신을 추구하여 칸트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인간의 전체성은 세계와 역사 안에서 절대자의 변증법적 자기발전으로 파악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자인 라 메트리, 디드로, 달랑베르, 홀바흐 등은 인간의 정신적 본질을 부정하고 인간을 물질 체계의 한 현상으로 본다. 19세기 실증주의의 창시자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가 신학적·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실증적 단계로 발전한다고 본다. 실증적 단계에서는 세계를 실증적·과학적으로 탐구하여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데, 이때 인간은 자연과학·경험심리학·사회과학의 대상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물질적 생산을 통해 세계를 만드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사회공동체 안에서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의식을 갖추고 물질적·정신적 활동을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런데 계급사회의 인간에서 생활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와 거기에서 생기는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열된다. 이때 인간은 계급적 개인이고 소외된 개인이다.
인간을 보편적인 존재로 보기를 거부하는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을 문제삼는다. 이것은 자기의 고유한 경험, 유일성과 독립성, 자유와 책임에서 개별적인 인간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과 좌절, 죄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경험하는데 신과 마주섬으로써만 자기 실존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인간과 그 생명력을 중시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는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노예도덕'을 버리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생(生)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반대해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성장하는 삶에 주목한다. 이것은 생명의 약동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한다. 그것은 합리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고 직관으로 체험해야 한다. 이런 흐름은 실존주의에 연결되어 카를 야스퍼스는 실존의 해명을 통한 초월을,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학을, 사르트르는 의식의 현상학을 펼친다.
인간에 관한 논의는 철학적 인간학의 중심이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막스 셸러에 의해 기초가 마련되었는데, 그는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1928)에서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비교하고 인간의 '세계개방성'을 동물의 '환경에 구속됨'과 구별하여 인간의 지위를 정신에서 찾는다. 아르놀트 겔렌은 경험과학을 인간학 관점에서 종합하여 동물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고 확고한 본능을 지닌 데 비해 인간은 전문화되어 있지 않은 '결핍 존재'임을 밝히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그 결핍을 보충해야 했고 그리하여 높은 정신적·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본다. 이와 달리 아돌프 포르트만은 생물학과 비교행동 연구에서 인간이 이미 생물학적으로 정신적·문화적 성취와 인격적·사회적 관계, 즉 '인간적인'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고도로 '전문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헬무트 플레스너는 인간이 자기 삶의 중심을 거듭 반성하고 이를 초월해서 '탈중심'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동물의 '중심성'과는 다르다고 본다.
- 이하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