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에 황제에 올라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를 퇴보시킨 나폴레옹은, 1812년에 61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제국주의 군대에 의하여 무참히 침략을 당했던 러시아는 이제 영광스러운 ‘조국 전쟁’의 기억을 버리고, 우크라이나를 무도하게 침략한 침략자가 되어버렸다. 침공 개시를 명령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괴롭힘과 학살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나치즘으로부터 정화한다는 전쟁의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자신이 벌인 전쟁이 자유주의 가치를 전파하기에 스스로 숭고하다고 여긴 나폴레옹의 전쟁 명분과 매우 유사하다. 스스로 숭고하다고 여긴 전쟁이란 것이 한낱 개인의 권력욕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동안 수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서 무수히 증명되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통제하는 이슬람 급진주의 무장단체 하마스(Hamas)는 이스라엘에 전례 없는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인 1,400여 명을 살해하고 240여 명을 인질로 잡았다. 하마스가 벌인 학살의 현장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만행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하마스 격멸을 즉각 선포하고, 가자 지구에 무차별 보복 공습과 지상군 투입을 시행했다. 동시에 이 전쟁은 그동안 저강도 싸움을 벌인 헤즈볼라와의 전쟁을 촉발했다. 그 결과, 골란고원과 레바논 국경 근처의 헤즈볼라 진지는 물론, 레바논 곳곳에 있는 헤즈볼라 거점지역들이 무수히 공습을 당했다. 그런데, 아마 이란의 ‘저항의 축들’과의 이들 전쟁에 대해, 이스라엘 시민들은 자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방어 전쟁 혹은 생존을 위한 ‘정당한 전쟁’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전쟁이 실제로 그 과정에서 너무도 쉽게 정치적 이익을 위한 정복 전쟁으로 돌변해 버리는 것을 본다.
소위 ‘정당한 전쟁론’은,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 의해 제시되었고,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전쟁이 정당해지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즉, 전쟁을 벌이는 대의명분이 정당해야 하고, 전쟁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사라진 이후의 최후 방법이어야 하며, 적을 물리치기 위한 수단도 정당해야 하고, 전쟁이 평화적으로 종결되고 새로운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조건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칼 바르트(Karl Barth)도 한 나라의 독립을 빼앗기고 국민의 삶이 유린당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역시 평화주의자들이 현실을 도외시하며 인간 본성의 악함을 간과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더 무서운 악을 제거하기 위해 덜 무서운 악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을 오늘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첨단 기술 도구의 총체적 실현의 장이 되어버린 오늘의 전쟁 현장에서, ‘정당한 전쟁’의 조건들을 적용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현대 전쟁은 어떤 정당한 명분을 위해 의로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가설을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의 파괴를 초래하는 참혹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본질적으로 너무나도 권력자들에 의해 쉽게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당한 전쟁’에 대한 정의를 포기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주의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도 국가를 따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의 길을 따라야 하는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평화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미치광이나 흉악한 범죄자가 가족이나 이웃을 공격할 경우, 절대적인 평화주의의 길을 걸어갈 수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연속되는 질문들 앞에서, 결국 그리스도인도 죄악과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책임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정당한 전쟁론’을 무시하지 않게 된다. 죄 많은 세상에서, 평화 회복을 위한 최후 수단으로서의 폭력이나 전쟁이란 강제력을 허용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정당한 전쟁론’과 모든 종류의 폭력과 전쟁을 거부하는 ‘원칙적 평화주의’ 사이에서, 어느 하나도 무시하지 못하는 곤혹스러운 긴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전쟁은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큰 긴장과 자각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적을 죽이거나 혹은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 외에 전쟁에서 어떤 종류의 악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완전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을 죽이되 적에 대한 증오심 없이 전쟁에 가담해야 하고, 적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적에 대한 가혹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긴장은 꼭 전쟁상황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또 인간관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더욱 미리 결정되고 필연적인 사회적 논리 혹은 전쟁의 논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논리들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강제하려 덤벼든다. 이러한 정황에 놓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많은 갈등과 번민 앞에서, 결국은 법과 정책과 규정을 통해 전쟁과 갈등의 발생을 방지하고, 폭력 사용을 종결지으려는 ‘책임적 평화주의’의 길을 걸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