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역사소설(Alternative History)’이란 문학 장르가 있다.
역사가 달리 전개되었다는 가정하에
전혀 다른 가상의 역사,
즉 기존의 역사를 대체하는 시간선(timeline)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하였으며
대중소설 영역에서 판타지와 함께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체역사소설은
대체로 조선말기, 대한제국 시기,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었더라면?’이라는 질문에
독자들이나 작가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체역사소설이
당당히 주류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고, 유명한 작가도 많다.
수많은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작가 중에서
최고의 거장(巨匠)이라 하면
단연 해리 터틀도브(Harry Turtledove)를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획득한 학자인 그는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비잔티움에서 온 첩자(Agent of Byzantium)],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 [치욕의 나날들(Days of Infamy)],
그리고 지구인과 외계인의 전쟁을 그린 [세계전쟁(Worldwars)] 등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대작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를 가능케 한 터틀더브의 최고 역작(力作)은
다름아닌 14권 분량의 [남부승리 (Southern Victory)]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첫 권인 [산 자가 없도다(How Few Remain)]로 시작하여
[최후의 순간(In at the Death)]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1860년대의 남북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하여
미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1945년 다시 남부가 멸망하기까지
약 80년간의 대체역사를 그리고 있다.
미국 최고의 대체역사소설가가
남북 전쟁을 그의 대작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미국의 독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바로 남북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다면
향후 미국 역사의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뀌었을 것임을 의미한다.
대체역사를 차치하고라도
남북 전쟁이 미국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북 전쟁은 미국의 정치ㆍ문화ㆍ사회 등 모든 분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서 전환점이라 함은
남북 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미국의 역사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미국의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여기서 ‘States’는
흔히 ‘주(州)’로 번역되며
현재 우리나라의 도(道)와 비슷한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지만,
원래 State는 정치학적으로 해당 영역 안에서
행정, 치안, 징세 등의 행위에 있어 독점적인 권리를 가진 정치체를 뜻한다.
즉 State는 하나의 ‘국가’이다.
원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
미국의 소위 국부(國父, Founding Fathers)들 대부분은,
일정 권한을 연방정부에 이양하기는 하지만
각 주들이 상당한 권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 등
연방정부가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가지기를 원했던
연방주의자 (federalist)들은 이것이 항상 불만이었고,
주의 권한 유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republicans)들에 맞섰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미국 초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미합중국 권력 행사의 주체가
연방정부냐 아니면 주정부이냐는
논란의 연장선상에 남북 전쟁이 있다.
미국의 주들이 자치적인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했던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1826) 등의 의도와 달리
초기 이후 미국정치는 연방정부의 권력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초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1819년 대법원에서의
맥컬럭 대 메릴렌드주(McCulloch vs. Maryland) 사건 판례였다.
미국 의회는
1816년에 제 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을 법인화하면서
필라델피아에 본점을 설립한 후,
1817년에는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에 지점을 설립하게 된다.
제 2은행 볼티모어 지점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화폐와 어음을 발행하고 각종 금융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메릴랜드 주 의회는
1818년 2월에 주 의회의 사전 승인을 받지않은 금융기관이
메릴랜드주 안에서 화폐를 발행하고 금융 상품을 취급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를 위반할 시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제 2은행 볼티모어 지점장이었던 제임스 맥컬럭은 이에 불복하였고
결국 메릴랜드주 항소법원에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다.
메릴랜드 항소법원은
헌법상 미국 제 2은행의 설립은 위헌(違憲)이라며
메릴랜드주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연방정부가 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미합중국 연방헌법에 명시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이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은
결국 대법원에서 가리게 되었는데
당시 대법원장 존 마셜 (John Marshall, 1755~1835)은
연방의회가 그 헌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법안을 제정할 수 있게 하는
연방헌법 제1조 제8항 제18절의
‘필요적절조항(Necessary and Proper Clause)’을 들어
제 2은행의 설립 역시 의회의 헌법적인 기능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제2 은행의 설립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에 메릴랜드주는 연방정부가 주 정부들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았으니
주 정부에 주권행사의 최종 권한이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그러나 대법원은 연방헌법을 승인한 것은
주 정부들이 아니라 국민들임을 분명히 했다.
주 정부의 최종 권한(Ultimate sovereignty)을 부인하고
사실상 국민들에 의하여 승인된 연방헌법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주 정부와 연방정부의 권한과 더불어
당시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문제는
바로 노예제도였다.
원래 남북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노예제를 남북 전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수정론자들은
정작 노예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으며
남북 전쟁은 미합중국의 분리를 막고
남부 세력을 영구적으로 눌러두기 위한
링컨과 연방정부의 마키아벨리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일부 계급론자들은
심지어 북부 공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가들이 주동하여
흑인 노동력을 독점하고 있는 남부의 지주계급을 쳐부순 전쟁이었다는 논리를 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예제 때문에 남북 전쟁이 일어난 것이 옳다.
북부의 위정자들이 노예상태에 있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사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여러 해 전부터
미국은 노예제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노예제를 두고 미국민들이 찬반으로 양분되고
그로 인한 정치적ㆍ물리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경제생산에 있어 노예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남부에서는
소위 주의 권리(States’ Rights) 문제와 맞물려
분리주의 여론까지 강하게 나타났다.
결국 남북 전쟁은
노예제 때문에 불거진 갈등이
위에서 언급한 연방정부 – 주정부 사이의 갈등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 국가들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본국에서의 이민만으로는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었다.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가장 쉽게 조달하는 방법은
바로 노예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필요성과 맞물려
노예 거래는 대서양을 무대로 한 무역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거대한 사업이 되었다.
새로운 사업으로 등장한 노예 거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프리카 서부의 흑인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가장 큰 수혜자도 역시 흑인들이었다.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일부 군장사회들은
스스로 노예사냥 집단이 되어
내륙의 흑인들을 잡아다가 배를 타고 오는 백인 노예상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이들은 노예 거래로
부를 축적하여
군장사회 단계에서 벗어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같은 흑인들에게 잡혀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뱃길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었고
뱃간에 글자 그대로 화물처럼 처박혔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미국 초기 식민사회 노동력의 대부분은
계약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현대의 노동자 같은 대우를 기대할 수는 없었고
과거의 농노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대접을 받았지만,
이들 계약 노동자들은 일정 기간 동안 일한 후
자유인이 되어 자기의 상점을 열거나
식민지 변경지역의 황무지를 사서 땅을 일굴 수가 있었다.
이러한 계약 노동자 중에는 흑인들도 상당수였고
이들 역시 일정 기간 일한 후에 자유민이 되었다.
북미 식민사회에 흑인 노예들이 대량 유입되기 전,
이미 미국 땅에는 많은 수의 흑인 자유민이 있었고
이 자유민들은 흑인 노예들과 공존했다.
예를 들어 1770년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촉발한 원인이 된
흑인 노예들의 미국 유입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170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 원인은 역시 노동력 부족이다.
1600년대에 초기의 백인들과 함께 들어온 흑인들은
계약 노동자가 많았고
원주민과의 전쟁과 질병들의 이유로 사망률도 높은 편이라
노동력 부족은 만성적인 현상이었다.
아울러 흑인 여자와 백인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혼혈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지위도 법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흑백 혼혈이었던 엘리자벳 키(Elizabeth Key)란 여성은
1656년에 자신의 남편이 잉글랜드 국민이기 때문에
자신과 아들이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청원을 법원에 제출하였고
자유민 신분을 얻었다.
이를 시작으로 노예 신분으로 지내고 있던 많은 흑인들이
법원에 소(訴)를 제기하여 자유민 신분을 얻게 된다.
이에 1662년에 버지니아 의회는
‘partus sequitur ventrem(자식의 지위는 어미를 따른다)’라는
로마시대 법률을 근거로
어머니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가 된다는 종모법(從母法)을 통과시킨다.
혼혈인들이 노예 신분을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종모법과 함께 노예 수의 급증을 불러온 것은
1705년 버지니아 식민의회에서 통과시킨 노예 규약이다.
이 규약은 노예의 지위를 명시하고 있는데 그 규정문은 다음과 같다.
“이 규약의 통과 이후 이 영지(領地: 버지니아) 내의 모든 법원과
기타 지역에서 모든 흑인과 물라토,
그리고 인디언(원주민) 노예들은 모두 종(從)이 아닌
재산으로 판단되고 간주될 것이다.”
That from and after the passing of this act, all negro, mulatto, and Indian slaves,in all courts of judicature, and other places, within this dominion,
shall be held, taken, and adjudged, to be real estate (and not chattels)
아울러 이 규약에는
기독교 국가 출신의 백인들을 제외한 모든 지역 출신들의 노예화를
가능케 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노예제도 대사전(Dictionary of American Slavery)]이란 책에 의하면
1620년에서 1700년까지 80년 동안에
미국으로 수입된 노예의 수는 21,000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1701년부터 1760년까지 60년 동안에는
무려 18만 9000명의 노예가 미국으로 팔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미국 독립 전쟁을 전후한 혼란으로 일시적으로 줄었다가
신생 미합중국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 다시 급증하기 시작하여
1801년에서 1810년 사이에는 12만 4천 명이 미국으로 끌려온다.
더군다나 초창기 미국의 헌법도
1조 2항을 통해
노예를 ‘그러한 사람들(such persons)’이라 부르며
그 수입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고,
4조 2항에는 노예 지역에서 도망친 노예는
도망친 주의 권한으로 추포(追捕)하여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합중국이 생겨나던 당시,
노예 문제는 건국 인사들 간에 격론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러한 격론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 초기 헌법은
노예제도를 불법화하지 못했다.
건국 세력 중에는
남부에서 큰 농장과 장원을 경영하고 있는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비호하에 미국의 노예제도는 계속 존속되었다.
심지어 계몽주의와 휴머니즘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는 토머스 제퍼슨도
많은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였고,
이 때문에 노예제도를 적극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폐지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사실 워싱턴이 1789년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약 72년의 기간 중 50년은
어떤 형태로든 노예를 거느린 인사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남부에서 노예제도의 존속을 부추긴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는
미국 남부에 목화가 전해진 것이었다.
초기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섬유산업이었다.
목화는 기후적인 이유로 인하여 미국 남부에서 재배가 잘 되었고,
미국 남부는 북부와 타국 섬유 공장들에 면화를 공급하는 주요 공급처가 되었다.
면화는 원료로서 수출하기 전에
일단 재배를 하고 씨를 빼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씨를 빼내는 작업은 엘리 휘트니
(Eli Whitney, 1765~1825)의 코튼-진(Cotton gin)의 발명으로 수월해졌지만
수많은 면화를 재배하는 작업은 여전히 손으로 해야만 했다.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의 비중이 적은 북부에서는
건국 이후 노예제도가 빠르게 사라졌다.
1804년까지 현재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주의 경계선인
메이슨-딕슨 라인(Mason-Dixon Line) 이북의 주들은
모두 노예제도를 폐지하였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욕, 뉴저지,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등이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곳이었다.
이후 새로이 연방에 편입된 주 중에서
오하이오강 이북의 주들은 모두 주 헌법을 통해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비하여 오하이오강 이남의 주들은
대체로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
(예외적으로 이후 북군에 가담하게 되는 켄터키와 메릴랜드주는 노예제도를 인정하였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후 미국이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하면서 이 갈등은 증폭되었다.
남부 출신 의원들과 북부 출신 의원들은 1820년 미주리 협정
그러나 협정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였을 뿐,
이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텍사스의 합중국 편입과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에 편입된 영토를 둘러싸고 다시 불거졌다.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로 이주한 미국계 백인들은
노예제를 불법으로 규정한 멕시코 정부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미국의 개입을 불러와 미국-멕시코 전쟁을 촉발시킨다.
결국 멕시코는 미국에 패하여
지금의 텍사스로부터 캘리포니아, 오리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긴다.
이 와중에 텍사스의 영역 중
36도 30분 이북의 지역이 문제가 되었는데,
1820년의 미주리 협정에 의하면 이곳은 노예제를 유지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아울러 36도 30분이라는 기준을 태평양까지 그대로 연결하는 문제도 관건이었다.
이 때문에 1850년에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스티븐 더글러스(Stephen Arnold Douglas) 주도하에
새로운 협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캘리포니아는
36도 30분 선(線)과는 관계없이 자유주로 편입이 되며
새로이 합중국의 수도가 된 워싱턴 DC 경내에서는
노예 매매가 불법화되었다.
아울러 새로이 미국 영토로 편입된 뉴멕시코에서는 노예제를 주민 투표에 붙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도망노예법
타협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북부와 기타 지역의 노예 폐지론자들(Abolitionists)의 활동은
노예 지지론자들의 눈엣가시였다.
이들은 남부로부터 도망치는 노예들을 숨겨주는 것은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자유를 주장하는 전직 노예들의 법적인 변호까지 맡았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례는
1857년의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Dred Scott vs Sanford) 사건이다.
버지니아 출신의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은
원래의 주인에 의해 미주리주로 옮겨 살다가
군의관인 존 에머슨이 그를 사면서
일리노이주와 위스콘신 테리토리(현 미네소타주)으로 이사,
다시 남부 루이지에나주로 옮겼다.
이 와중에 스콧은 위스콘신에서 결혼을 하였고
1843년 에머슨의 사망 후
그의 아내인 일라이자 샌포드에게 자신과 가족의 자유를 ‘사겠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도움을 받아
1850년 미주리주 법원에 소를 제기한다.
주인이 자신과 그 가족을 데리고
노예제가 불법인 주에서 거주하였으니
이미 그 순간부터 자유인이었다는 논리였다.
결국 주 법원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대법원에서는 그가 ‘열등한’ 흑인이기 때문에 소를 제기할 자격조차 없다는 결정과 함께
스콧의 패소를 선언하였다.
대법원은 아울러 미주리 협정에 대한 법적인 결정을 내리면서
북위 36도 30분 선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이후 테리토리에서 주(州)가 되려는 지역은 노예제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당시 대법원장인 로저 테이니(Roger Taney)는 자신의 결정을
일종의 정치적 타협안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남부 노예주들에게 유리한 판결이었다.
남부 노예주들은 당연히 환영하였지만 북부 자유주의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고,
특히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이를 무기삼아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섰다.
이미 판결이 나기 전에 노예지역과 자유지역의 경계선 같은 캔자스(Kansas)에서는
노예론자들과 폐지론자들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향후 이러한 충돌이 전국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져갔다.
1856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노예론자인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브룩스(Preston Brooks) 의원이
메사추세츠의 섬너(Charles Sumner)의원을
의사당 내에서 구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섬너는 중상을 입고 3년간 의정활동을 중지해야만 했다.
아울러 1852년에 스토우 부인(Harriet Beecher Stowe, 1811~1896)의 소설
- 김성남,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