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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컴퓨터 탄생하다!
1975년,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사가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 컴퓨터 알테어 8800(Altair 8800)을 개발했다. 당시 홈브루 클럽(컴퓨터를 정부나 대기업, 대학 및 개인에게까지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컴퓨터 매니아들의 모임)을 통해 소개된 알테어 8800은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최초의 개인용 마이크로 컴퓨터로서 제작된 알테어 8800은 인텔의 제3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을 이용해 일반인들도 쉽게 조립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1975년 Popular Electronics 1월호에 소개되며 돌풍을 일으켰다.
주문자가 조립해 사용하는 이 컴퓨터는 그러나 기능면에서 그다지 쓸모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용량도 250바이트에 불과했으며 키보드나 모니터도(당시에는 제품 자체가 없었지만) 장착하지 않은 것이었다.
알테어 8800을 작동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본체에 부착된 8개의 스위치를 누르는 것뿐이었으며 각각의 스위치는 디지틀 상의 "예" 나 "아니오"의 신호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 컴퓨터가 가진 유일한 프로그램은 컴퓨터 전면에 부착된 라이트를 깜박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잡지에 알테어 8800에 대한 소개가 나간 후 전국의 컴퓨터매니아들은 앞다투어 이 컴퓨터를 주문했으며, MITS사에서는 물량이 동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알테어 8800의 출현으로 많은 프로그래머와 제작자들이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뜨거운 경쟁을 벌였다.
당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알테어 8800에 대항하기 위해 베이직을 만들고 있었으며, 잡스 역시 우즈가 완성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알테어 8800보다 작고 우수한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차고에 마련된 연구실에서 며칠에 걸친 철야작업 끝에 두 사람은 드디어 알테어 8800을 능가할만한 그들만의 컴퓨터 "애플Ⅰ"을 완성했다.
잡스와 우즈는 곧바로 "애플Ⅰ"을 들고 HP를 찾았다. 그러나 HP는 그들의 컴퓨터가 시장성이 없고 기능이 열악하다고 평가절하하며 생산의뢰를 거절했다.그렇다고 두 사람은 멈출 수 없었다. 잡스는 곧 아끼던 차를, 우즈는 고가의 HP계산기까지 팔아가며 자체생산에 들어갔다. 이윽고, 홈브루 클럽에 당당히 선보인 그들의 "애플Ⅰ"은 알테어 8800보다 훨씬 작은 크기와 뛰어난 성능 덕분에 많은 매니아들을 열광시켰다. 곧 666달러 66센트의 저가에 판매가 이루어졌으며 무려 175대를 팔아 두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 더 넓은 세상으로 - 애플 설립
"애플Ⅰ"의 성공 후 잡스는 "애플Ⅱ"제작을 위한 기획에 몰두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아타리에서 후원을 거절했기 때문에 잡스의 계획은 큰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텔에 후원을 부탁하러 들렀던 잡스는 당시 인텔의 대변인이자 언론 홍부부문의 일인자였던 레지스 맥키너를 만나게 된다. 레지스 맥키너를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결국 잡스와 우즈의 초라한 차고 개발실에서 거의 완성된 "애플Ⅱ"를 직접 보고서야 레지스 맥키너는 그들의 홍보를 자처하게 된다.
인텔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던 마쿨라를 소개받은 두 사람은 애플의 설립을 기획하게 되고 그에게 애플 주식의 1/3을 주는 조건으로 경영진에 참여시켰다. 마쿨라는 곧 잡스가 도안한 사과 로고를 바탕으로 매키너를 통해 잡지사에 광고를 부탁하는 한편, 벤처 캐피털리스트(유망한 벤처기업을 발굴하고 벤처 캐피털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기업을 키워내는 벤처 투자 전문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당시 페어차일드사와 인텔에 대한 투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아서 록을 찾아가 애플에 대한 투자를 유치했다.
명망 높은 아서 록이 투자를 결정하자 다른 투자자들도 줄을 이어 투자를 약속했다. 애플은 드디어 차고에서 벗어나 쿠퍼티노에 번듯한 건물을 마련하고 진정한 컴퓨터 회사로서 출발을 시작했다.
1977년, 잡스와 우즈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마쿨라와 함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 마침내 소비자를 상대로 꿈과 희망을 판매하는 사업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1977년, 드디어 스티브 워즈니악, 마쿨라와 손잡고 애플을 설립한 잡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과 식을줄 모르는 그의 열정이 고아로 태어나 초라한 차고에서 작업에 매달리던 가난한 청년을 반듯한 첨단기업의 오너로 만들어 주었다. 애플이 설립과 동시에 컴퓨터산업의 선두주자로서 승승장구하자, 처음에는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투자를 약속했다. 잡스는 이것을 기반으로 더 작고 더 빠르며 더 나은 성능을 가진 컴퓨터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애플 I을 발표하면서 컴퓨터산업의 미래를 연 그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야심을 세운 것이다.
@ 애플, 꿈의 세계를 열다.
1977년 4월 16일, 제 1회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전시회를 통해 애플 I을 능가하는 강력한 성능의 애플 II가 발표되었다. 당시 전시회장에 마련된 애플부스는 애플 II의 뛰어난 성능과 화려한 컬러모니터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IBM과 같은 메이저급 제조회사에서조차 당시 컬러모니터를 개발할 능력이 없었으며, 단지 연구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스티브 잡스가 이끄는 애플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알 수 있다. 개인용 컴퓨터 즉 PC(Personal Computer)라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았던 당시, 잡스와 우즈(스티브 워즈니악)가 표방한 것이 "우리는 우수한 컴퓨터를 개발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연다" 였기 때문에 애플은 이 부문에 대한 연구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애플 II는 이러한 애플의 기업이념을 고스란히 담은 진정한 의미의 첫 작품이었다. 강력한 성능과 작은 크기, 화려한 컬러모니터로 무장한 애플 II는 웨스트코스트 컴퓨터 전시회장을 찾은 13,000여명의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당시로서는 예쁜 디자인의 플라스틱 바디를 갖췄던 애플 II는 무게가 12파운드(약 5.4kg)에 불과했다. 키보드와 동력공급장치, 외장형 FDD(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했으며 컬러 그래픽을 연출할 수 있는 진보적인 컴퓨터였다. 애플 I은 컴퓨터를 작게 만드는 것에만 치우친 나머지 나무로 만든 사과상자에 기계부품을 담은 조악한 디자인에 그쳤지만, 애플 II는 완벽하게 조립되어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게다가 애플 II는 프로그래밍이 더 쉬워져 당시 전문가나 과학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컴퓨터를 일반인들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당시 애플 II의 성공과 함께 화제를 모은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깜찍한 애플의 사과 모양 로고였다. 애플의 로고는 마치 유행처럼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번져 셔츠나 스티커, 노트 등이 제작되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우스갯소리지만 왜 잡스와 우즈가 그들의 컴퓨터와 회사 이름을 애플(Apple)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설들이 많다. 첫번째로 그들이 애플 I을 만들던 당시 주변에 과수원이 많아서 애플이라고 이름붙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중에 나온 "매킨토시(Macintosh)"도 사과의 한 종(種)이니까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다. 또, 당시 잡스와 우즈가 애플 I을 완성한 후 가장 먹고 싶었던 과일이 애플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아타리보다 전화번호부에 먼저 기재되기 위해 애플("A"가 끼어 있으므로)을 선택했다는 설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이 잡스와 우즈의 영원한 우상이었던 비틀즈의 음반회사 명칭이 당시 애플레코드사였다는 것이다.
(Devil.Genius 의 부연설명 : 사실 Apple 이 왜 사명을 APPLE(사과) 로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루머가 있다. 성경의 '지식의 나무' 에서 얻는 '사과(지식)' 과 문다는 bite 라는 동사가 Byte 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2차대전 암호해독을 위해 세계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했던 과학자 앨런 튜링 이 말년에 청산가리에 독을 주입하고 한입 베어먹고 자살했기 때문에 이를 기리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훗날 BeOS 를 개발하는(망했음.-_-) 장릭고세는
"나에게 한가지 오래된 수수께기가 있는데, 바로 우리의 로고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욕구와 지식의 상징인 사과- 한입 배어먹힌-에 무지개 색이 칠해져 있다. 그것도 잘못된 순서로. 아마도 이 이상 적절한 상징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다. 욕구, 지식, 희망 그리고 무질서( Lust, Knowlege, Hope, and Anarchy )”
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외에 알파벳순으로 정리되는 경우 회사의 이름을 위쪽에 올리기 위해 Apple 로 정했다는 루머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이 입을 다무는 한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것이다. 스티브잡스와 개인적으로는 꽤 친하다고 하는 MS 의 빌게이츠도 자신의 저서에서 Apple Computer 와 Steve Jobs 를 몇번 언급하지만 로고에 대해선 별 이야기가 없는걸 보면 게이츠도 모르는것 같다..)
어쨌든 전시회에서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드디어 애플 II는 1,298달러의 가격표를 달고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갔고, 그 판매고는 놀랄 만큼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이로 인해 애플은 큰 돈을 벌어들였고 그야말로 성장가도를 내달려 미국은 물론 유럽에까지 개인용 컴퓨터를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애플 II의 성공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계속한 애플은 1978년 초, 회사를 설립한지 불과 1년만에 손익 분기점을 넘어 2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판매망을 확충해 더 많은 매장을 통해 자사의 컴퓨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당시 경제 전문지 포보스가 선정한 세계 400대 거물에 가장 어린 나이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애플 II로 인해 애플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가는 당시 대형 컴퓨터가 주류를 이루던 상황에서 일반 소비자를 상대로 개인용 컴퓨터 광고를 일반 잡지에 처음 싣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실 애플의 성공은 애플 II의 강력한 성능 덕분이기도 했지만, 잡스의 기발한 경영법도 애플의 성공에 한 몫 단단히 했다.
첫번째는 회사내에서 인력과 돈을 들여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애플 외의 제작자를 끌어들여 애플 II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78년 6월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디스크Ⅱ라는 FDD였다. 새롭게 등장한 이 저장장치는 케이블로 본체와 간단히 연결되는 외부기억장치였다.(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이와 같은 외장형 FDD가 많았다)당시 이러한 외장형 드라이브를 채용했던 PC는 탠디라디오사 제품과 애플Ⅱ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당시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에게 큰 인기가 있던 프로그래밍언어인 파스칼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애플의 전략은 곧 커다란 효과를 나타냈다.
비지칼크 이외에도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 스타", 데이타베이스 프로그램인 "d Base Ⅱ"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뒤를 이어 탄생했고 이같은 훌륭한 소프트웨어의 힘으로 애플 II는 더 많은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두번째는 학생들에게 자사의 컴퓨터를 이용한 교육 시스템을 장기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애플은 그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아이들은 못참아"라고 명명된 캠페인을 펼쳐 캘리포니아주의 각 학교에 한 대씩의 애플Ⅱ를 기증했다. 애플의 이러한 전략들은 결국 장기적으로 회사에 직접적인 자산이 되었다.
버클리공대 대학원생이었던 앤디 헤르츠펠드를 애플의 빅팬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쉐어웨어를 주로 개발하던 그는 애플을 만나자마자 곧 애플의 직업프로그래머로 변신했다. 그의 첫 작품은 당시 대문자만 나오던 애플Ⅱ의 단점을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매킨토시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애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1979년엔 기존의 애플 II를 개량한 애플 II+가 발표되기었다. 사실 애플 II+는 한국에도 많이 보급되었던 기종이다. 1980년대 "컴퓨터 학습"이라는 제목의 잡지가 있었는데, 광고면만 보더라도 당시에 보급된 많은 애플 컴퓨터를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비록 MSX가 강세였지만 한국의 세운상가에서도 조립된 애플 II+ 호환 기종들이 많이 판매되었다. 애플 II+의 RAM용량은 48KB였고 초창기에 탑재되었던 애플의 Integer Basic은 애플 Soft Basic으로 교체되었으며 베이직 상태에서의 텍스트 에디트 기능이 향상되었다. 애플 II에 비해 기능면에서 많이 향상된 Apple II+의 가격은 1,195달러였다.
또한 같은 해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캘크가 등장하였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생 단 브리클린과 프로그래머 밥 프랭스턴이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 - 눈으로 볼 수 있는 계산기라는 의미의 합성어)는 애플 컴퓨터를 사용하여 각종 계산표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비지캘크는 애플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비지캘크로 말미암아 애플의 컴퓨터는 갑자기 "업무용 컴퓨터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즉, 개인용 컴퓨터로서 아주 작게 만들어진 애플 컴퓨터가 기업의 재무관리 등 업무용으로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길을 비지캘크가 열어준 것이다.
아주 인기가 많은 게임타이틀을 즐기기 위해 하드웨어를 구입하는 오늘날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당시 비지캘크는 애플 II+기종의 폭발적인 판매를 이끌게 된다. 애플 II+ 기종은 1983년에 애플 IIe가 나오기까지 컴퓨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8비트 컴퓨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 라이벌들의 출현과 애플 IIe의 대히트
애플 II가 큰 히트를 기록하며 시장의 강자로 부상하던 그 무렵,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과 코모도어, 라디오색의 3강구도를 보이고 있었다. 애플 II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코모도어의 PET는 애플과 같은 완제품 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니터와 카세트 레코더를 포함해 598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색의 TRS-80이나 애플 II처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1977년 8월에 발매된 라이오색의 TRS-80는 개인 사용자를 타깃으로 삼았던 애플 II와 달리 업무용으로 개발된 개인용 컴퓨터였다. 최초의 모델은 Z80 CPU와 각각 4KB의 RAM과 ROM롬을 탑재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애플보다 앞서서 단면 83KB 용량의 플로피디스크를 탑재하여 실용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또한 CP/M모델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DOS(Disk Operating System; TRS-DOS)를 운영체제로서 탑재한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컴퓨터 제조사가 뜨거운 시장쟁탈전을 벌이던 그 시기에 코모도어는 "Commodore64"라는 모델을 발매하여 애플 II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한다. 오늘날 컴퓨터 전문가들이 흔히 "8비트 시대를 대표하는 컴퓨터를 꼽으라"면 애플 II와 TRS-80, Commodore64를 들 정도로 성공한 기종이다. 하지만 Commodore64는 업무용이라기 보다는 가정용 컴퓨터에 가까운 기종이었다. 애플 II보다도 월등한 해상도를 자랑했고 다양한 컬러를 지원한데다 64KB나 되는 메모리를 탑재했으며 SID라고 불리우는 사운드 칩을 최초로 채용하여 게임이나 그래픽 작업에 가장 적합한 컴퓨터로 평가받았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였고 소프트웨어도 다양하게 출시되어 당시 애플 II 못지않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렇게 수많은 기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부각되었다. 각 기종들간의 호환성이 나빠 다른 기종과 소프트웨어는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용자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작업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개발자들은 하나의 표준을 세우고 각 기종간의 호환성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MSX 프로젝트는 이런 취지에서 탄생되었다. 최초로 MSX를 주장한 것은 그 유명한 일본의 아스키(ASCII)였으며 미국의 MS와 손잡고 마침내 MSX기종을 발표했다.(하드웨어는 아스키가, 소프트웨어는 MS가 담당) MSX의 취지는 매우 원대했다. 일본의 캐논, 샤프, 파나소닉(마쓰시타), 카시오, 미쓰비시, 소니, 후지쯔, 히타치, 산요, 도시바, JVC, NTT, 야마하, 파이오니어 등 대형 메이커가 대거 제작에 참여해 독자 상표를 단 MSX기종을 발표했으며 네덜란드의 필립스, 구소련의 야시카도 제작에 참가했다.
1984년부터 본격적인 발매가 시작된 MSX(MSX1, 2포맷)는 미국에서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지역, 브라질이나 칠레같은 남미, 네델란드와 같은 유럽지역, 구소련 등에서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우전자가 "IQ1000(DPC200, MSX1)", "IQ2000(CPC300, MSX2)", "IQ2000X-2(CPC400S, MSX2)"등 세 기종을 발표해 가장 많은 인기를 끌며 한국 컴퓨터 시장의 지평을 열었고, 삼성전자와 금성전자도 MSX제작에 뛰어들어 각각 "SPC800A, 1000, 1100, 1500A"와 "FC80, 100, 150, 200"을 내놓았다.
(Devil.Genius 가 가장 처음 사용한 컴퓨터가 바로 MSX 였다. 당시 6살.. -_- 1987 년 정도의 일이다. 세월 참 빠르다. 이 컴퓨터는 13 살 경에 110V 로 설정된 상태에서 220V 에 연결되어 기판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걸 계속 보관했으면 먼 훗날 경매에서 고액에 낙찰될 수도 있었는데..에잉!)
한편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애플 II의 새로운 시리즈는 발표되지 않았다. 당시 애플은 "애플" 시리즈를 이어갈 "매킨토시" 시리즈의 개발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1980년, 애플 II의 큰 성공에 힘입어 애플 III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기는 했다. 애플 III는 128KB의 메모리(최대 256KB)에 143k 5.25" 플로피 디스크를 컴퓨터 본체에 집어넣은 최초의 모델이었다. 처리 속도도 빠른 편이었고 확장 슬롯도 4개나 장착하는 등 애플 II를 여러 부분에서 보완한 제품으로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종종 동작이 멈추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으며 애플 II와 전혀 호환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가격도 무척 비싸 사용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1981년 사양과 가격을 낮춘 애플 III+가 발매되었으나 이마저 외면을 받으면서 애플 III는 "실패작"으로 인식되어 1985년까지만 생산되었다.
1981년에는 한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IBM이 드디어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IBM은 다른 제조사들과 달리 자사가 개발한 시스템을 공개하여 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수적으로 우세한 IBM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잠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물량이나 규모 면에서 애플보다 우세했던 IBM의 시장참여에 많은 제조사들은 긴장했다. 그러나 애플은 달랐다. 잡스는 광고를 통해 "애플은 새로운 경쟁자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라는 문구를 내보내며 도전자들의 경쟁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표시했다.
그러다가 1983년 1월,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별개로 애플 IIe가 발매되었다. MOS Technology/SynerTek 6502 1MHz의 고성능 프로세서를 장착한 애플 IIe는 애플이 내놓은 가장 성공한 기종 중의 하나였다. (국내에서도 1980년대에 Apple II/IIe 호환기종이 많이 사용되었다) 애플 IIe는 80컬럼 디스플레이 기능과 소문자 표시 기능을 제공했으며, 기본 64KB 램에 뱅크 개념을 도입하여 128KB까지 램을 확장할 수 있었다(확장슬롯 1개 부착). 또한 오픈 애플과 클로즈 애플키 등을 처음 제공했고 보조슬롯(auxiliary slot)을 지원했다. 키보드 역시 촉감이 좋은 키보드로 교체되었다. 애플 IIe는 한 달에 6~7만대 가량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애플 II+의 판매량에 비해 두 배나 많은 것이었다. 또한 경쟁기종으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던 IBM PC jr가 히트하지 못하면서 애플 IIe는 1983년부터 1993년까지 10년간 꾸준히 판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