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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를 세계에 알리자는 영화제 마라톤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바보야! 이젠 문화야”라는 말이 실감나듯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가 9월 30일 스타트 라인에 선다.
물론 몇 년간의 리허설이 있었고, 2015년엔 마지막으로 프레영화제를 열어 출진 준비를 끝냈다.
이번 영화제 경쟁 부문엔 예상보다 많은 작품이 출품되어 사무국을 고무시켰다.
그가 온다. 개막식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가 첫 인사를 한다.
영남알프스를 군의 울타리로 자리한 울주군은 지난 5년간 산악영화제를 진행해왔다.
신불산자락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가 바로 그 현장. 울주군은 유서 깊은 밴프산악영화제 출품 수상작을 골라 상영하며
차근차근 경쟁영화제를 준비해왔다. 5년간 집요한 집중과 사무국 요원의 땀과 노력으로 울주산악영화제는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
등산인구 천육백만이라는 하드웨어에 등산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접목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제는 이미 울주를 떠나 한국을 대표하는 중요 축제로 발돋음하고 있다.
올 9월 30일, 드디어 경쟁부문까지 아우르는 [제1회 울주 세계 산악영화제] 서막이 열린다.
영남알프스 신불산 자락의 복합웰컴센터에서 30일 대망의 전야제가 열리는 것. 8월 현재 42개국에서
180편이 넘는 작품이 출품된 상황이며, 개막일 까지 출품작은 더 늘어 날 것으로 보인다.
울주 산악영화제는 이미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받고 있음을 증명했다.
30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10월 4일까지 산악영화제가 진행되는 것이다.
아시아 최대의 산악영화제로 거듭나는 개막식엔 여러 이벤트가 있다.
전야제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세계산악계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라인홀트 메스너(72·Reinhold Messner)일 것이다.
드디어 그가 온다. 첫 방한 첫 방문으로 영남알프스의 산악영화제를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그 사람이 그렇게 위대한 인물인지 몰랐습니다.
지난해 이탈리아 트렌토 영화제를 찾아갔을 때, 영화제 인사의 소개로 라인홀트 메스너 박물관을 방문했어요.
그래서 만났는데 아우! 알고 보니 굉장한 사람이더군요.
이탈리아 정부가 유서 깊은 고성(古城) 몇 개를 주며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메스너 방문을 성사시킨 신장열 울주군수가 들려 준 말이다.
당연히 산악계에서는 전설이지만 군수에게는 다소 생소했을 것이다.
알프스자락 돌로미테 볼자노가 고향인 메스너는 박물관 운영과 산악문화를 위한 재단(MMM)을 운영하고 있다.
울주산악영화제 박재동 추진위원장이 즉석에서 메스너의 캐리커쳐를 그려 주며 분위기를 잡았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진행되며 신장열 울주군수가 메스너를 정식으로 초청했다.
그후 실무진의 조율 끝에 어렵게 그의 이번 방한이 결정되었다.
울주군이 심혈을 기우려 추진하고 있는 산악영화제에 그가 참석하므로 개막식은 한층 빛나게 되었다.
60권이 넘는 저서를 가진다는 건 전문 작가들에게도 힘든 경우일 텐데 메스너는 산 관련만으로 그 방대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누구인가. 1978년 그는 인류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올랐다.
그리고 1986년 4위봉 로체 역시 산소 없이 오르며 살아 있는 전설로 등극했다. 히말라야 8천m급 14좌를
모조리 오른 인류 최초의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모두 무산소 등정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라인홀트 메스너를
철인 중의 철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산등반가들은 다른 의미에서 메스너를 평가한다.
14좌를 무산소로 오른 업적도 훌륭하지만 1970년,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의
루팔 남벽을 동생 귄터와 함께 오른 기록에 주목하는 것이다.
낭가파르바트는 높이가 8,125미터.
그 산의 루팔 남벽은 수직으로 3,500m로 솟은 히말라야 3대 남벽 중 하나이다.
이 산은 히말라야 8,000미터 급 봉우리를 향한 인류 최초의 도전이 시작된 산이기도 하다.
독인인들로부터였다. 독일 사람들은 이 산을 ‘운명의 산’이라고 부른다.
1934년 9명의 원정대원의 사망, 1937년 눈사태로 4캠프에서 7명의 포터와 7명의 대원이 몰사한 산이다.
1953년 첫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58년간 무려 31명의 산악인 목숨을 앗아간 비극 산. 때문에
낭가파르바트는 ‘마(魔)의 산’ ‘킬러 마운틴’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우리나라의 고미영도 이 산에서 조난사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34, 37년 독일의 대참사는 루팔 남벽에 비해 비교적 쉬운 루트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는 동생 권터 메스너와 함께 독일원정대 대장 헤를리히코퍼 박사 부름을 받는다.
당시 직업은 메스너가 중학교 교사, 동생은 은행원이었다.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계 이탈이아인인 메스너는 돌로미테라는 알프스 산자락에서 산을 타며 성장했다.
동생은 자일파트너. 두 형제가 도전했던 그 당시에도 낭가파르바트는 매우 위험한 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어려운 루팔 남벽에 라인홀트 메스너는 동생과 함께 도전한다.
그리고 그 가파른 남벽을 돌파하며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등정한다.
유능한 독인인이 아닌 티롤 남부의 알려지지 않은 산악인 메스너가 성공한 것이다.
그건 메스너에게 처음으로 8,000m급 등정이었다.
위험한 낭가파르바트에서도 최악의 코스를 첫 시도에서 최초로 등정한 놀라운 능력.
낭가파르바트를 단독으로 오르고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메스너 재단 제공)
그러나 메스너 형제의 이 도전 대가는 혹독했다.
천신만고 끝에 루팔 벽을 통하여 정상에 오른 형제는 오른 암벽으로는 철수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산의 반대편 쪽 디아미르 벽으로 하산하던 중에 귄터가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된다.
메스너는 눈앞에서 동생이 사라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설선 아래로 내려 온 그를
원주민이 발견하여 구조가 되었지만 메스너는 동상에 걸린 발가락 6개를 잘라 냈다.
불운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메스너 형제들과 연락이 두절됐던 원정대는 메스너가
정상등정 기록을 위해 귄터를 무리하게 몰고 갔다며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메스너가 “나는 결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절규를 했어도 한 동안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긴 침묵 속에 책을 쓴다. 그 책은 2004년에 출간되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에도 번역된 [벌거벗은 산]이다.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드어로 ‘벌거벗은 산’이란 뜻이다.
눈도 붙어 있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낭가파르바트 산이기에 벌거벗은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메스너가 죽음 직전 발견된 디아미르 계곡의 디아미르는 ‘산중의 왕’이라는 뜻.
1970년 낭가파르바트 원정에서 사라진 동생 권터의 죽음과 자신의 생환에 대해, 메스너는
원정대의 발표와 세간의 시선을 [벌거벗은 산] 책으로 대답하고 하고 있다.
자신의 명성을 위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을 초월하여
죽음과 고통이 혼재된 절체절명의 순간을 벌거벗고 속속들이 그려 낸 자전적 기록.
메스너는 이 책 속에서 아우를 잃은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등반과정과 진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1978년 8월 9일 메스너는 동생을 잃은 후 두 번째로 단독등반을 하여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섰다(메스너 재단 제공)
그렇지만 이후로도 메스너는 귄터를 잃은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10형제 중 바로 아래 동생인 권터와 메스너는 서로 신뢰하는 자일 파트너이기도 했다.
1973년에 메스너는 귄터를 찾기 위해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그 등반에서 메스너는 정신적인 각성을 한다.
등반 중 그에게 다가 선 것이 ‘검은 고독 흰 고독’이었다. 나중에 그가 쓸 책 제목을 그 등반에서 얻었다.
그 책에서 메스너는 이렇게 말한다. 눈 속에서 한밤중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고독’과
‘온 몸을 휘감는 공포’ 앞에서 나는 무너져 내렸고 결국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한다.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아내와 이혼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라인홀트 메스너는 고산등반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히말라야 14좌를 오르기 시작한다. 동생을 잃은 후
16년간 끊임없이 도전을 계속해서 1986년에 로체를 마지막으로 올라 인류 최초로 8,000미터 14좌를 모두 오른 기록을 만든다.
메스너가 무서운 점은 그 높은 고봉들을 모두 무산소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산소 없이 성층권 가까운 8,000미터를 오른다는 건 죽음을 담보해야 하는 모험이다.
그래서 메스너 비판자들은 그를 ‘미치광이’ ‘자살미수자’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산소통 같은 보조도구 없이 순수하게 인간의 능력으로 8,000미터를 오를 수 없다는 게 그 시대의 정설이었다.
과학적으로도 8,000미터가 넘어가면 산소가 해수면의 30%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었으니까.
메스너가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오르겠다는 기자회견을 했을 때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했다.
유명해지려고 생명을 담보하는 미친 짓이라고 혹평을 했다.
설사 메스너가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더라도
산소 부족으로 무사히 하산을 할 수 없을 것이란 진단도 내놓았다.
하지만 메스너는 등정 후 무사히 하산까지 마쳐, 히말라야 등반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미래의 꿈나무에게도 라인홀트 메스너는 우상이었을까. 둘의 대화가 진지해 보인다.
비판자들의 악평대로 ‘자살미수자’의 업적은 이제 세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메스너의 위대한 행위를 기리기 위해 콧대 높은 올림픽 IOC위원회가 은메달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였다.
세계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그와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에게 올림픽 메달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자,
메스너는 이를 단박에 거절한다. 메스너는 수상을 거부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반에서는 싸우는 상대도 없고, 심판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메달을 받는다는 것은 등반이 경쟁임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수영이나 스키 등은 경기지만 산을 오르는 것은 경기가 아니다. 그리고 산을 오른다 해도 루트가 각기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나. 이것이 내가 수상을 거부했던 이유이다.”
요즈음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국산악계를 관통하고 있던 올곧은 정신은, 등산에는 경쟁이 없다는 일갈이었다.
한국산악회 백자선서에도 순위와 기록에 초월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가 등산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제 그런 순수가 퇴색되고 있으나 메스너는 이미 그 점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런 부분에서 그는 산악계의 진정한 영웅인 것이다.
메스너는 자신의 고향 돌로미테 알프스에서 배운 알파인 스타일을 히말라야에 적용한 최초의 인물로도 분류된다.
메스너 마운틴 뮤지엄의 이니셜을 딴 MMM 재단은 현재 6개의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한 메스너는
불과 몇 주후에 또 다시 단독으로 동생이 묻혀 있는 낭가파르바트로 떠난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끝낸 후 불과 6주 후 다시 등반에 나선 것이다.
그것도 단독으로. 시신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사실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정체모를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다시 낭가파르바트를 선택하였는지도 모른다.
에베레스트 초등국가인 영국에서조차 ‘진정한 의미에서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라는 찬사를 받은 메스너.
세상을 놀라게 한 장본인이었으나 그의 마음 한쪽엔 언제나 검은 고독이 도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1978년 8월 9일 16시. 라인홀트 메스너는 드디어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에 연이어 이뤄 낸 낭가파르바트 무산소로 단독 등정. 세상은 깜짝 놀랐다.
이로부터 메스너는 진정한 의미의 철인이자 세계적인 산악영웅이 된다.
영욕이 점철된 낭가파르바트를 두번째 오른 메스너 느낌은 어땠을까.
그때의 마음을 그는 책에서 밝힌다. 불과 6주 전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과는 사뭇 다르게
고요하기만 했다고 고백한다. 정상이라는 무생물의 하얀 정상에 고립되어 혼자 서 있는 기분이아서 그런 것일까.
마침 내 메스너는 정상에서 ‘흰 고독’과 조우한다.
“나는 그저 그곳에 앉아서 그 감정 속에 내가 녹는 대로 놔두는 길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이 이해되고 의심이 생기지 않았다. 지평선 위에 가물거리는 희미한 빛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돌로미테 산군 속 작은 도시인 볼자노 시가 성에서는 한눈에 들어 왔다.
그가 낭가파르바트 단독등반에 성공한 후 쓴 책 제목이 그래서 [검은 고독 흰 고독]이 되는 것이다.
책에서 메스너는 ‘이 고독감을 그곳에 묻어 버리든지, 아니면 고독감이 나를 쓰러뜨리든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낭가파르바트를 올랐다는 고백도 한다.
검은 고독과 흰 고독이라... 검은 고독은 평생을 옥죄어 온 동생 권터에 대한 추억은 아니었을까.
대개 메스너의 책은 고독과 내면이 강조된다. 그가 표현하는 히말라야의 백색 세계 이미지는 대체로 어둡고 우울한 편이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피로가 쌓였다.
헐떡거리며 숨을 쉬면 침이 흘러 턱수염에 얼어붙었다. 피켈에 기댄 이마가 뜨거웠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정신없이 쭈그려 앉았다. 귓전을 울리는 허파 소리와 점점 빨라지는 심장 고동 소리가
한꺼번에 머리를 울려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다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올라갈 수 있을 뿐이고 또 올라가야만 한다.”
오래된 고성은 히말라야를 테마로 하는 3번째 박물관이자
자신의 거처인데 등 뒤로 네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네쉬 신상이 보인다.
그의 글은 실황을 옮기므로 실존적이면서도 비애적인 느낌을 준다.
메스너가 등반 중 경험하는 고독은 무척 다층적이다. 그것을 정확히 글로 표현할 수 없기에
철학적 깊이로도 연결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시시각각 감정의 변화와 고독의 다양한 변주를 상상해 본다.
이 책을 읽다보면 죽음을 초월하는 고독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메스너 생애를 옥죄던 동생 귄터의 시신은 2005년에 디아미르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실종 35년 만이다.
빙하가 위로부터 내려오며 시신도 밀려 내려왔고 메스너를 구했던 디아미르 계곡 원주민들이 그 사체를 발견한 것이다.
연락을 받고 달려간 메스너는 시신이 신고 있는 눈에 익은 가죽등산화를 확인하고 동생 귄터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메스너는 귄터를 낭가파르바트 산자락에서 화장하여 히말라야 바람 속에 날렸다고 발표했다.
메스너는 산악작가 영화연출자 방송진행자 박물관장 등 산악문화에 열성적으로 기여하며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메스너가 디아미르 계곡에 만든 학교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당시 오은선과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에서 경쟁적으로 등반을 하던 때였다.
그 취재를 위해 베이스캠프로 가는 중이었다. 메스너가 자신을 구조해 준 원주민에게
고마움으로 만들어 기증한 목재학교는 산간오지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집이기도 했다.
그때도 메스너의 책을 읽으며 언제고 한 번은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두 여성 산악인 취재는 성공적이었으나 그게 고미영의 마지막 인터뷰가 될 줄은 그녀도 또 나도 몰랐다.
귀국하여 끈질기게 메스너 비서와 이 메일을 주고받았다.
유럽에서는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그는 인터뷰조차도 잡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비서 루치씨에게서 시간을 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즉시 이탈리아 티롤 볼자노 시로 날아간 2014년, 잡지로서는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메스너가 여성알피니즘 컴퍼런스에 초대된 오은선 대장을 인도하며 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볼자노 역에서 택시에 올라 “라인홀트 메스너”라고 한마디 하자 운전사가 싱긋 웃었다.
얼굴 누런 동양인이 이 먼 곳을 찾아왔을 때는 한 가지 목적 밖에 더 있겠냐는 듯이. 그만큼 그는 유명 인사였다.
시의 남서쪽 작은 산 정상에 서있는 카스텔로 피르미아노 성(Castello Firmiano Castle)이 그의 거주지이자 3번째 박물관이었다.
고풍스럽게 서 있는 피르미아노 성은 메스너가 만든 6개의 산악박물관 중 하나였다.
그와 첫 번째 인터뷰를 하며 돌아 본 박물관은 주제별로 나뉘어 있었다.
성의 구조를 따라 방대한 전시물이 있었다. 오랜 등산 장비보다는 산악문화에 더 초점을 맞춘 전시품이 많았다.
여성알피니즘에 대한 컨퍼런스는 메스너 박물관에서 열렸다.
히말라야 자락에서 흔하게 만나는 힌두교 가네쉬 상과 티베트 불교의 상징 오색 룽다, 그리고 부처상이 곳곳에 보였다.
철 계단을 따라 가장 높은 성탑으로 오르자 볼자노 시가지가 한눈에 든다. 멀리 눈 덮인 알프스 산맥 파노라마가
고풍스러운 성곽과 잘 어울렸다. 탑 정상엔 동굴이 있었고 그곳에도 각종 테라코타를 전시해 놓고 있었다.
메스너가 히말라야를 오갈 때 모았거나 기증을 받은 수장품들일 것이다. 박물관 탐방을 마치고 비서의 안내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메스너가 반긴다. 사자의 갈기처럼 회색 머리칼과 수염이 인상적인 메스너의 깊은 눈에 호기심에 차있었다.
“한국이라면 참 멀리서 왔다.”, “이게 우리 잡지인데 선물이다.” 내가 가지고 간 본지를 건네자 그걸 받은 메스너가 놀랐다.
“무게가 1킬로그램은 넘을 것 같다. 이렇게 두꺼운 책이 매달 나오는가?”, “그렇다” 알피니즘의 발상지 유럽이지만,
산악전문지 두께는 주간지처럼 가벼운 분량이다.
“메스너, 당신은 2010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한국의 오은선을 만났다.
나는 그 당시 오은선의 안나푸르나 생방송 해설위원으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다. 거기서 당신 비서 루치씨 연락을 받았다.
가능하다면 5월 카트만두에서 당신이 오은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샤머니에 주재하는
본지 이진기 기자의 그런 메일을 받고 내가 주선한 인연이 있다.”
메스너 박물관에 오은선이 기증한 피켈에는 여성 최초 14좌 완등 때 사용된 것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카트만두에서 둘은 만났고 그게 인연이 되어 오은선은 두 번이나 메스너 행사에 초대를 받고 유럽을 방문했다.
2014년 62회 트렌토산악영화제 부설행사로 메스너 박물관에서는 ‘여성 알피니즘’에 대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그때 초대받은 오은선은 메스너 산악박물관에 자신의 픽켈을 기증했다.
히말라야 소개관 입구에 오은선이 14좌 마지막 안나푸르나에서 사용했던 피켈이 전시되어 있다.
작은 소개판에는 “오은선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고 쓴 소개 문구도 있다.
박물관 6개를 운영할 만큼 메스너는 산악문화에 관심이 많다.
영국 BBC와 산악다큐 작업도하고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일도 한다.
그는 자신의 [벌거벗은 산]이 영화가 된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의 원작자로
영화감수까지 한 산악문화 전도사이기도 하다. 그때, 볼자노에서의 메스너 인터뷰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어졌다.
메스너가 자신의 등반철학에 대하여 사자후를 토로할 때마다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던 기억.
한 마디로 자신의 의지로 위험과 어려움 등 온갖 난관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야 등반가라는 말이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티베트 불교의 룽따가 휘날리고 수호신처럼 싱아(상상속 동물)가 좌우로 버티고 있다.
그때의 만남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메스너 딸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짧게 물었고 “그렇다. 너무.” 간단히 메스너가 대답했다.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있다.” 울었다는 메스너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 울었는가?”
내 질문의 요지는 극한적 등반 중 고통 때문에 흘린 눈물이거나
동생 권터에 대한 그리움일거로 생각해서였는데 대답이 엉뚱하다.
“나는 4남매를 키우고 있는데 그 중 늦둥이 11살짜리 딸이 있다.
지난 주 그 애와 스키장에 갔다. 행복해 하는 딸의 천사 같은 모습을 보니 공연히 눈물이 나왔다.”
딸 바보 아버지는 이탈리아나 한국이 똑같았다.
낭가파르바트 악몽이후 이혼한 메스너는 재혼하여 딸을 낳았다.
늦둥이 딸과 나이 차이가 무려 58년. 이러니 더 애틋한 부성애일 것이다.
메스너는 수 개 국어에 능통하다. 그리고 티롤 출신 오스트리안이라거나 혹은 독일인이라는 말도 있다.
“국적이 어느 나라인가?”,
“내 고향 이곳 남부 티롤지역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의 영토가 된 곳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계통의 주민이 많다. 내 국적은 이탈리아다.
독일어와 이탈리어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영어도 한다.”,
“당신은 아직 한국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한국방문 계획은 있는가?”, “없다”
필자는 메스너의 책을 통하여 산악문학을 더 깊이 이해하였으므로 꼭 만나고 싶었던 소망이 이루어졌다.
그를 인터뷰한 인연으로 메스너의 이번 방한기간 동안 인천공항부터 그와 동선을 함께할 예정이다.
이번 기회에 영남알프를 비롯 한국의 산을 알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메스너는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고
풋 프린팅과 팬들과 함께 간월산 등산과 강연회도 가질 예정이다. 라인홀트 메스너 방한은 의미가 깊다.
그의 최초 방한은 한국산악계의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그의 산악활동을 상기해 보면,
양적 팽창으로 부풀려진 한국 산악운동이 산악문화 쪽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
산악박물관이 그렇고 그가 감수한 산악영화와 TV 다큐물이 그렇다.
울주산악영화제 추진위원장 박제동화백이 메스너 캐리커쳐를 그리고 있다.
메스너는 수십 권의 산악관련 저술을 가지고 있는 왕성한 작가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벌거벗은 산’ 등 5권의 번역서가 있고 이번 그의 방한에 맞추어 두 권이 더 상재될 예정이다.
이번 방한 기간 중에 김영도씨가 번역하고 있는 메스너의 인생론, 가칭 [나의 생애]와 [마터호른 대참사]의 사인회가 기획되고 있다.
한 번 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그의 위대한 업적은 산악활동에 미친 영향과 산악문화가 나아갈 방향 제시일 것이다.
그를 벤치마킹하여 한국적 산악문화로 승화시킨 다면 큰 자산이 될 건 분명하다.
박재동화백이 즉석에서 그려 준 캐리커쳐에 환한 웃음을 짓는 메스너.
그가 창조해 낸 새로운 등반스타일은 이미 표준이 된 지 오래다.
메스너의 위대성은 고전적 답습은 단연코 거부하며 창조적 등반을 한다는 점이다.
끊임 없이 새로운 발상을 떠 올리고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힘. 무산소. 단독, 고산에서의 알파인 스타일 등반,
자이언트 봉 연속 오르기 등 메스너만의 창조적 등반은 실로 눈부셨다.
이제 그의 후배들은 그를 딛고 더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내야만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그러고도 늘 한 발 앞서가는 메스너에게서 배워야 한다. 히말라야 등반은 위대한 도전인 동시에
깊은 의미가 있는 산악문화의 원천임을 그는 지금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등반은 즐거움이며 문화인 동시에 철학이라는 걸 그는 산악관련 저서를 통하여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신장열 울주군수가 메스너 박물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메스너는 9월 30일 9시 30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기자회견을 가진 후 12시 10분 공항에서 울산행 KTX로 울산광역시 울주군으로 이동하여
전야제에 참석하는 것. 메스너의 이번 울주세계영화제 방문은 울주군의 행사를 세계에 홍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국내에서도 산악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주요 외빈으로는 이탈리아 트렌토 영화제의 로베르토 데 마틴 집행위원장과
밴프 산악영화제 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산악저술가 버나데트 맥도날드도 온다.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밴프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영화제를 국제적 행사로 키운 그는,
이번 울주세계산악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 자격으로 방한하는 것이다.
2014년 8월 트렌토 산악영화제에 참석한 메스너가 연설을 하고 있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측은 산악계의 국제적인 인사들의 방한으로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울주군은 세계산악영화제의 양대 산맥인, 유럽 이탈리아 트렌토 영화제, 북미 캐나다 밴프영화제와 함께
울주산악영화제를 아시아 대표적인 영화제로 키워나갈 계획이다.
앞선 두 국제영화제도 마라톤 같은 긴 여정을 달려와 성공한 것이다. 울주군도 이제 스타트라인에 섰다.
확실하게 자리잡을 때까지 마라톤처럼 긴 달리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 우둑한 산악영화제가 만들어 질 때까지.
티베트 카일라스 산을 형상화했다는 조각품 곁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
본지 7월호에서 라인홀트 메스너 방한 결정소식을 토픽으로 알리자 본사에는 산악단체에서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본지는 영화제 기간 동안 대규모 취재팀을 구성하여 제1회 세계산악영화제를 특집으로 다루기로 했다.
많은 외빈 중 라인홀트 메스너가 가장 비중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히말라야 고산군을 비롯해 남극과 북극 등 극지 탐험,
몽골 고비사막 횡단까지 모험을 멈추지 않는 라이홀트 메스너. 산을 오르는 이유에 대해 메스너는 이렇게 말한다.
“탐구해야 할 것은 산이 아니고 인간이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고 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자연의 최고 지점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
이런 말을 그로부터 직접 듣고 싶다.
오롯한 산악인의 정신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를 통한 울주군 영남알프스 자락에서 만나는 거인.
전야제 참석과 더불어 라인홀트 메스너의 특별강연을 경청하려는 산악인들은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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