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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7. 부활절 둘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42편 1-8절
찬송 / 316장 · 목마른 자들아
성서 / 창세기 26장 12-22절, 요한복음 4장 3-14절
말씀 / 그 사람 속에서 샘물이 될 것이다
이삭이 거기에서 옮겨서,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 때에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 하면서,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였다.(창세기 26장 22절)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한복음 4장 14절)
김윤식 목사
Ⅰ
“먹이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돼지로 대하는 것이고, 좋아하면서도 공경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짐승으로 기르는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중요하지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맹자는 먹이기는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공경하지 않는 것도 비판합니다. 먹는 일이 중요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람을 사랑하는 일, 더 나아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공경하는 일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건 바로 먹이는 일과 사랑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공경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공경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잠언 14장 27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경외의 마음을 생명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이란 하늘이 높은 줄 아는 만큼, 우리가 얼마나 낮은 지도 잘 아는 마음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공손히 경외하는 마음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의 한계를 아는 겸허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공경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며, 나와 이웃을 살리는 마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배려할 줄 모르는 배타와 폭력을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만만하게 여기겠습니까?
지난 금요일부터 사전 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다가오는 수요일에는 본 투표를 하게 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공경하는 겸손한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서로를 공경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바른 선택을 통해서, 우리로부터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 말씀으로 이삭에 대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처음 자리에 있는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조인 족장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겨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야곱에 비해서, 이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본문은 바로 오늘 함께 26장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짧은 분량의 이삭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 사이에서 정말 중요하고 절묘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남과 북 왕국으로 분단되어 갈등과 전쟁을 일삼게 되지요. 그런데 남왕국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최고의 선조로 여겼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을 최고의 선조로 생각했습니다. 남왕국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의 시온이고, 아브라함이 남쪽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야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가 북이스라엘의 벧엘을 중심지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같은 조상을 지녔으면서도, 저마다 따르는 조상을 나누어 섬기며 다투게 된 셈입니다. 이 갈등은 예수님 시대까지도 더욱 지독하게 이어졌지요. 때로 작은 갈등이 점차 커져 서로에 대한 혐오와 전쟁과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남쪽도 북쪽도 어느 쪽에 속하는 조상은 아닙니다. 다만 이삭의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남과 북의 갈등의 경계에서 전쟁과 반목이 아닌, 민족 간의 갈등이 아닌 소소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구약 본문에서 이삭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근으로 인해 블레셋의 그랄이라는 도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물이 없으니,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떠돌다가 블레셋의 한 도시에 정착한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지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되었고, 양 떼와 소 떼도, 여러 종들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시기를 넘어 이삭의 무리가 지내지 못하도록,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 놓은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블레셋의 왕은 노골적으로 이삭에게 당신이 우리보다 강하니 우리를 떠나가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그랄을 떠나는 듯하다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우물을 파던 중에 물이 솟아나는 샘줄기를 다시 찾았지요. 그런데 그 지방의 목자들이 그 샘줄기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의 종들은 그 우물을 두고 다른 우물을 팠지요. 그러자 그 지방 목자들이 다시금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삭은 다시금 거기서 다른 우물을 팝니다. 드디어 그 누구의 방해도, 위협도 받지 않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갈 곳을 넓히셨다고 고백하며,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물이 있는 곳, 샘물이 콸콸 솟는 우물을 가진 것이야말로 부족의 안정과 번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근이 온 땅에 가득한 시대에, 물이 없는 곳에서 우물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우물은 분명히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우물이 있어야 짐승도 초목도 사람도 살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우물이 있다는 건 단순히 갈한 목을 축이는 공간이 있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전쟁이 없이, 다툼이 없이,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우물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평화였지요. 그러니 우물을 지키는 것, 빼앗기더라도 다시 새로운 우물을 파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그 생명의 근원을 경외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물을 파는 일도 우물을 지키는 일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렇게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이삭의 이야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일하는 방식입니다. 국가가 형성되는 시대에는 전쟁을 통해 다른 부족의 것을 빼앗고, 승리한 부족의 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은 전쟁의 신이요, 전쟁을 위한 신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삭이 경험한 하나님, 이삭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다만 이삭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전쟁과 전혀 관련 없는 방식으로 이삭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지요. 하나님은 다만 새로운 우물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뿐입니다. 믿음의 사람 이삭은 단지 척박한 땅에서, 메마른 땅에서 우물을 파는 사람입니다. 척박한 곳을 샘이 솟아나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 소중한 일상과 생명을 겸허하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가득한 곳을 평화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하신 일이며, 믿음의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Ⅲ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예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남쪽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지요. 갈릴리는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북쪽의 변두리 지방이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의 이스라엘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된 이후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게 푸대접과 혐오를 받았지요. 이방인에게 침략당했던 땅, 피가 섞인 오염된 땅이라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피해 그 길을 돌아가던 당시 유대인들과 달리 그 경계를 거침없이 건너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길을 가다가 피로하셔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지요.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대답이었습니다. 본문은 당시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은 상종하지 않았다고 부연하고 있지요.
이어서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답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청하였을 것이고, 내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예수께는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이 그리 중요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인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냐고 묻는 여인에게 오히려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리고 나에게 물을 요청했더라면, 나는 너에게 물을 주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당연히 당신이 나에게 물을 요청했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물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여인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고도 모호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물을 달라고 요청하던 유대 사람이 갑자기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생수를 건네주겠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째는 당신에게는 물을 길을 도구도 없고 물이 깊다는 질문이었고, 둘째는 우리 조상인 물을 구하기 위해서 이 우물을 팠지만, 당신은 어디서 생수를 구할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조상 야곱도 물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 우물을 팠는데, 그러한 노력 없이 물을 구할 수 있다면 당신이 야곱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말입니까?” 하고 여인은 묻고 있습니다.
이 두 질문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너희가 야곱이 판 우물을 마시며 살고 있지만, 계속해서 억압당하고 핍박당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해결되지 않는 타는 목마름 가운데 살고 있지 않느냐? 이 우물이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너희의 진정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의 속에서 샘물이 나올 것이다. 당신이 너 스스로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샘물이 될 것이다. 바로 당신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생수가 나오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는 놀라운 말씀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여인에 대한 진심과 공경! 이 따스한 마음이 무너진 여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시 살게 하는, 새롭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 가운데 있는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샘이 여인의 속에서 나올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샘이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샘이 말라버린 세상 같습니다. 한 마디로 우물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하늘에 대한 경외도 생명에 대한 경외도 없으니, 누구든 그저 자기의 목만을 축이려는 이기적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우물을 소유한 사람이 다른 이의 작은 우물도 빼앗고, 내가 마시지 못하는 우물은 막아버리는 세상이 되었지요. 물 한 모금 간절히 찾는 이에게 독이 든 우물을 가르쳐 주는 세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 일수록 큰 강과 바다도 작은 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제 아무리 큰 어른도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는 것을 생각합니다. 작은 실개천이 개울이 되고, 작은 강이 큰 강이 되어 이윽고 바다로 흘러가지요. 그러니 어려운 때일수록 작은 샘을 찾는 것, 작은 샘을 지키는 것, 나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공경하며, 우리의 작은 아이들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태초의 낙원인 에덴에서는 커다란 네 개의 강이 흘러나왔지요. 에덴은 생명의 샘이며, 물의 근원이었습니다. 오래전 에스겔도 새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가득 차오르는 물이 흘러나와 세상을 살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보았지요.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가 온 세상을 치료하는 약이 되는 꿈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강과 바다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도 그 물줄기가 시작되는 시원지가 있습니다. 시작은 작은 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속에서 그 샘이 시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Ⅵ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온 생명을 경외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삭처럼 믿음으로 막힌 우물을 다시 파는 사람들, 척박한 곳에서도, 새로운 곳에서도 다시금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척박한 땅, 메마른 땅에서도 우물을 파는 사람이요, 가는 곳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서 생수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는 분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바로 그 샘으로 부르시는 소명을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온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샘을 발견하게 하시고, 우리의 작은 샘에서도 은총의 생수가, 평화와 생명의 생수가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샘과 우물에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샘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서로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온 생명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로부터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이 땅을 생명과 평화를 살리는 샘으로, 생명의 샘으로 세워주시고 지켜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