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프키 생애
1840년 5월 7일. 캄스코 보트킨스트생 ? 1893년 11월 6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광산 감독관으로서 우랄지방의 광산촌을 전전하였으므로, 차이코프스키도 비야토카의 보트킨스크(카나 강가에 있기 때문에 캄스코 보보트스크라고 한다)라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에브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고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나 가정이 음악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재능을 알아챈 사람도 없었다. 5세때부터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가 그를 돌보았다. 그녀는 문학은 물론이고 모든 교양을 지니고 있는 부인이었으며, 음악적 소양도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7세가 되었을 때 그녀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1848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모스크바로 이사하고, 곧 또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여기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필리토프라는 교사에게 처음으로 정규의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다음 49년에는 또 아버지가 우랄지방에 파견되게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났기 때문에 그의 음악교육도 중단됐다. 당시 그의 양친은 그의 음악적 재능이 특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아들이 그토록 음악에 열중하여도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당시의 러시아에서는 모험이었으므로 오히려 관리로서 입신하는 길을 선택하게 하였다. 1850년 차이코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수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법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학교내의 코러스에 들어가서 로마킨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또 1855년부터 독일의 퀸딩거라고 하는 사람에게 피아노 이론을 본격적으로 교육받기 시작했는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작곡을 시도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작품으로 54년의 피아노곡 《왈츠》가 남아 있다.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법무성의 일등서기관으로 취직했다. 63년에 법무성을 그만두기까지의 그의 생활은 주로 소송사무의 취급이었고 한편 음악에 대한 정열은 끊을수가 없어 무미한 나날이 계속됐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전기(轉機)가 온 것은, 60년의 러시아음악협회의 음악교실 개설이었다. 당시 대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치던 안톤 루빈시타인은 동생 니콜라이와 함께 1859년 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음악협회를 설립하고, 러시아에 서부 유럽 음악의 전통을 이식하는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음악교실은 그 목적으로 자유롭게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는 제도였었다. 1861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가 독일·프랑스·벨기에·영국등에의 여행에서 돌아와 그는 곧 이 교실에 들어가 니콜라이 자렌바에게 이론을 배웠다. 다음해 이 교실이 승격하여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이 되자 그도 음악원 학생이 되고 1863년 법무성을 사임하였다.
음악원에서는 옛 스승인 자렌바에게 다시 배우는 한편, 직접 안톤 루빈시타인에게 사사하고, 이 위대한 음악가로부터 유럽음악의 전통적인 수법을 충분히 배울 수가 있었다. 음악원시대에 그는 종래의 딜레탕티즘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떄까지 햇빚을 보지 못했던 음악적 재능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전문적인 작곡가로서 입신할 자신을 얻었다. 그 당시의 동급생으로는, 뒤에 작곡가·평론가로서 알려지고 그의 평생의 벗이 된 게르만 라로슈가 있다.
음악원시대에 최초의 완전한 관현악 작품인 서곡 《폭풍우》를 발표했다. 이 곡은 오스트로프스키의 동명의 희곡에 의한 표제음악이지만, 이 곡에서 튜바·하프·잉글리시 혼을 사용한 것이 스승인 루빈시타인을 화나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관현악법은 그 무렵 신음악으로서 주목되던 리스트·바그너에의 접근을 보인 것이며, 또 러시아에서 음악원파에 대립하여 대두하기 시작한 발라키레프의 5인조와의 유사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일음악을 근간으로 한 A.루빈시타인의 전통적 음악이념에서 본다면 이단(異端)이었다. 1865년의 졸업작품, 실러의 시에 의한 칸타타 《환희에 부쳐-Ode to Joy》도 루빈시타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며, 졸업한 다음해 66년에는 A. 루빈시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64년에 개설한 모스크바의 음악교실에서 교편을 잡기로 결정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비하면 당시의 모스크바는 시골이었다. N. 루빈시타인은 형과 쌍벽을 이루는 피아니스트이며, 러시아음악협회의 모스크바 지부를 주재하는 등, 모스크바 악단의 중진이긴 했으나 차이코프스키는 수도의 음악생활에 미련이 있던 것 같다. 그가 부임한지 얼마 후에 이 음악교실은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개편되었다. 음악원에서 화성악을 담당했으며, 이론과 음악사를 가르치고 있었던 카시킨이나 첼리스트 알브레히트 등과 친교를 맺었다. 러시아의 음악출판업자로서 유명한 율겐손을 알게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최초의 중요한 작품은 《겨울날의 환상-Winter Daydream》이란 제목이 붙여진 교향곡 제1번(1866)이다. 러시아 민요를 토대로 한 국민적 색채가 강한 이곡의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이 계기가 되어서, 1868년 발라키레프의 그루프와 사귀게 되었다. 이 시기에 <5인조>의 멤버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그도 발라키레프의 권유로 리스트의 교향시풍의 발상의 《로미오와 줄리에트-Romeo and Juliet》 서곡(1870)을 작곡하여 발라키레프에게 바쳤다. 이어 현악4중주곡 제1번 D장조(1871), 교향곡 제2번 c단조(1872)는 모두 민요를 주제로한 국민주의적 작품이며 세익스피어에 의한 교향적 환상곡 《템피스트-The Tempest》(1873)가 <5인조>의 이론적 지도자 스타소프에게 헌정된 사실을 보아도 차이코프스키와 국민악파의 관계는 지극히 밀접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그의 작곡경향은 차차 국민주의로부터 이탈하여, 이른바 서유럽파로서의 입장을 확립하게 되어, 드디어 모스크바 음악원이 서유럽파의 아성으로 지목되게 되었다.
186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데지레 아르토라고하는 벨기에의 여자가수와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음악을 칭찬하고, 그는 손위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마음이 끌려 약혼까지 하였으나, 주위의 여러가지 사정에 걸려 망설이고 있는 동안 아르토는 스페인 가수와 결혼해버렸다. 내성적인 차이코프스키의 성격을 말해주는 사건이다. 1872년부터 그는 신문 《러시아 통신》의 음악 비평란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단속적이긴 하였으나 76년까지 계속된다. 74년에서 다음 해에 걸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새로운 한 시기를 구획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b단조의 작곡이 이루어졌다. 이 곡이 갖는 웅대한 구상과 러시아음악으로서의 충실감은, 스승 A. 루빈시타인이 그때까지 작곡한 4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완전히 능가한 것이였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개성을 뚜렷이 나타낸 것이었다. 이미 《로미오와 줄리에트》에서 차이코프스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독일의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가 완성된 해에 보스턴에서 초연한 이후 이 곡은 각지에서 연주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걸작이었다. 1875년에는 이밖에 교향곡 제3번 D장조를 작곡했으나, 이것은 그의 재능이 그다지 발휘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때까지 3곡의 오페라도 작곡했으나 모두 평판이 나쁘든가, 아니면 공연되지 않은 그대로였었다. 오페라의 제4작 《대장간의 바쿨라-Vakula the Smith》의 초연도 같은 해였으나 그다지 호평을 듣지 못했고, 그일에 혐오감을 느껴 그는 유럽으로 여행길을 떠났다.
1876년 처음으로 파리에서 비제의 《카르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여름에는 비시에서 정양하고, 다음에 바이로이트에 가서 역사적인 바그너 극장의 신축낙성을 축하하는 최초의 연주를 관람하게 되어 《니벨룽겔의 반지》의 초연을 들었다. 마침 이때 그는 환상적 서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Francesca da Rimini》를 작곡하는 도중이었다. 그해에 귀국하여 전년부터 볼쇼이 극장에서의 의뢰로 작곡을 진행하고 있었던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완성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작곡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폰 메크 부인과의 이상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도 이때이다. 철도 경영자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은 평소부터 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경제적 원조라는 형식으로 발전하여 6000루불의 연금을 주겠다고 제의해왔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 미망인의 원조는 13년동안 계속되었으며, 차이코프스키는 작품의 헌정과 편지 왕래로 부인과의 교제를 두텁게 했다. 그러나 두사람은 단 한번 우연히 만난 일 외에는 한평생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폰 메크부인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작곡한 최초의 대작이 교향곡 4번 f단조이다. 1877년 그는 충실된 기력으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여기에서도 그는 스승인 A. 루빈시타인의 교향곡과 그때까지의 자작 3곡을 능가하는 러시아 심포니즘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이해 봄에 《백조의 호수》의 초연이 있었으나, 나중에 얻은 명성과는 정반대로 아주 실패로 끝났다.
그 무렵부터 파리에서 전에 들었던 《카르멘》에 자극되어, 사실주의적 수법의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때에 그의 생애의 최대 불행이라고 할수 있는 결혼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는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라는 28세의 여성으로부터 열렬한 구혼을 받았는데,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37세 였으나, 너무나 똣밖의 일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의 순정에 빠져 7월에 결혼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없는 여자였다. 극도로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성품이며, 오직 음악에만 한결같이 정열을 쏟고있는 차이코프스키의 결혼생활은 순식간에 파탄을 일으키고, 심한 노이로제에 걸려 한때 자살을 기도한 일까지 있었다. 9월말의 어느날 갑자기 그는 아내를 버리고 친구를 따라 페테르부르크로 도망하여 결혼생활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때 그는 극도로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곧 전지요양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와서 겨우 그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제4교향곡을 작곡한외에 또 《에프게니 오네긴》의 작곡도 계속하였다.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코프스키는 새로운 창작의욕에 불타 바이올린협주곡을 작곡했다. 작곡에 전념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도 사임하고 그 뒤 겨울은 주로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이해가 다 갈 무렵부터 다음해에 걸친 유럽 여행중에는 실러의 극을 바탕으로하여 마이어베어풍의 그랜드 오페라 《오를레앙의 소녀-The maid of Orleans》가 작곡되었고, 1880년 이탈리아 체재중에 《이탈리아 카프리치오-Capriccio italien》와 피아노협주곡 제2번 G장조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해에는 《현악 세레나데》와 축전서곡 《1812년》도 작곡되었다. 전자는 그의 4곡의 관현악모음곡과 같이 고전파 음악, 특히 모짜르트에 대한 심취를 나타내고 있다. 1881년의 여행중에 경애하는 N. 루빈시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귀국했다가 이해부터 다음해에 걸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하여 스승의 죽음을 추도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작곡가로서의 지위는 이미 확고해져 러시아의 서유럽파를 대표하고 있었는데, 1880년대에는 이에 대립되는 발라키레프의 그루프는 이미 사라지고 있엇다. 1882년 우연한 일로 차이코프스키와 발라키레프의 교류가 재개되는데, 그는 발라키레프의 권유로 바이런에 의한 표제음악 《만드레드 교향곡》을 쓰기 시작하여 85년에 완성했다. 87년에는 구작 《대장간의 바쿨라》를 개작한 오페라 《귀여운 구두-Tcherevichky》의 초연을 지휘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 차이코프스키는 가끔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해외여행도 순회연주로 변모하여, 자작의 지휘를 많이 하게 되었다. 1888년 그의 걸작의 하나인 교향곡 제5번 e닺조가 쓰여지고, 다음해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를 완성하였다. 1890년의 피렌체 체재중에 이탈리아 양식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의 대부분의 작곡되고, 귀국 후 현악 6중주곡 《플로랜스의 추억-Souvenir de Florence》을 완성했다. 이 해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연금이 중단되었으나, 이미 2년 전부터 러시아 정부에서 3000루블의 연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1891년 오페라 《율란타-Iolanthe》와 발레음악 《호도까기 인형-The Nutcracker》의 작곡에 착수하고, 그 작업중에 미국 순회공연 길을 떠났다.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회는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밖의 연주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다.
귀국 후 《욜란타》를 완성하고, 다음해 《호도까기 인형》을 완성하여 초연했다. 이해 Eb장조의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못한채 초고로 끝났다(이 초고는 세미욘 발라키리에프에 의하여 오케스트레이션 되어 소련에서 제7교향곡으로서 1960년에 출판되었다.) 1893년에는 교향곡 제6번 b단조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해에도 그는 순회연주를 하여 8월에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했는데, 이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10월 28일 제6교향곡이 자신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그의 예술의 총결산이라고 할만한 이 교향곡을 일관하고 있는 페시미즘은 분명히 어떤 표제가 있어야했을 것이나 작곡자 자신은 "표제는 수수께끼로 남겨두어야한다. 각자의 추측에 맡긴다.."라는 암시적인 말밖에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초연하고 일주일 뒤에 그는 끓이지않은 냉수를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콜레라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무언가 숙명적인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의 죽음과 이 교향곡을 결부시켜 《비창》이라는 제목이 출판할 때 붙여졌다. 그것은 생전에 작곡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표제라고도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대한 공적은, 교향곡과 발레음악에 있어서 현저하다. 교향곡에 있어서는 스승인 루빈시타인의 독일 낭만파의 아류의 영역을 탈피하여 글린카 이래의 러시아 국민주의 밑바탕에다가 독특한 드라마틱한 내용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서부 유럽음악의 전통에 의하여 발전된 심포니즘의 러시아적 형상에 있어서 새로운 전개라고 볼 수가 있다. 또 발레음악에서는 아당이나 들리브와 같은 프랑스음악이 그의 모범이었다. 거기에는 국민악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된 서정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은 언제나 러시아의 흙냄새밖에 생각할 수 없는 센티멘털리즘이며, 그것은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시민문화의 일면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서유럽파라 불리면서도 결코 비러시아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가 원숙한 작품을 발표한 1880년대에 이미 <5인조>와 같은 딜레탕트적 국민주의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며, 국민주의와 서유럽파의 본질적 대립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관현악 작품 외에도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품, 가곡이나 합창곡등을 많이 남겼다. 그것들은 그의 대곡 걸작 사이에 끼여 있어서, 각기 독자적인 멋을 지는 것으로서 버릴 수 없는 주옥편들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저작으로서는 전기의 《러시아 통신》에 보낸 기고문 및 폰 메크 부인과의 서간문집, 그 밖의 사람들과의 서간이 남아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 대한 글은 홍지복 동문님의 요청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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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812년에 무슨일이 있었었죠?
나폴레온이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모스크바 침공했으나 러시아 사람들이 시내를 불태워 버렸습니다.그렇게 되자 프랑스 군대가 먹을 것을 조달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결국 굶주림을 견디가 못해 철수,전쟁은 러시아 승리로 끝나게 되지요.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작곡한 것입니다.
아- 그랬었죠. 캄사! 꾸벅-
차이콥스키음악을 좀더 이해할 것 같아요. 정성담긴 노력에 힘입어 더욱 좋은 감상하겠읍니다. 음악이 아직 제겐 안들리는데, 제컴을 좀 흔들어 봐야겠네요.공부많이 하고 있읍니다.
음악에 대해서 퍽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집니다. 명순선배님처럼, 영신님처럼, 희자님처럼, 최선배님처럼 저도 아는게 있었으면 .....모르는게 참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게, 나이가 들어 숙여지는 ....
아~ 깊은 감동과 함께 듣고 있습니다. 지복님이 간호대방에 최선배님께 차이코프스키 곡 부탁드렸다는 댓글 읽고 이리로 단숨에 달려왔답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미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어지는 독립기념일 축제에 해마다 등장하는 이곡... 독립기념일이면 여기 저기서 축제가 많지만 전 꼭 이곡을 들으려고 워싱턴에서 하는 축제만 보아 왔습니다. 음악이 끝나면서 16발의 실제 대포를 쏘는 것에 다시 감동하면서요. 러시아 전승 기념으로 작곡되었지만 미국에서는 1812년에 시작해 1814년에 끝낸 미영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날 연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tx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성 피터스버그 교향악단의 연주라 더 실감이 나고요. 최선배님 덕분에 고품격 러시아 여행을 하게 되나 봅니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이름 다음에 오는 백지같은 무지가 좀알고 싶다는 관심을 부른것 같아요. 마침 동문님들의 식견있는 음악올려주심에 수줍음 밀치며 부탁드렸는데 ,차이콥스키의 인생을 알게 되니 더친근감이 듭니다. 러시아여행길이 개인적으로도 퍽 개입된 여행으로 벌써 흐뭇해지네요. 이음악이 들리지는 않지만 희자님의 설명을 들으니 더친근해집니다. 역사적 배경이 있는 음악...어찌잊으리오....
이 동문님이 러시아 여행팀 대장이라고 들었어요.전 동문이 만나는 대장정이드구요 .축하해요
과찬의 말씀....
요즈음 올려주시는 좋은 음악 들 듣느라 행복합니다. 댓글은 자주 못 달아드려 얼마나 죄송한지요...워낙 서로 이해해 주고 격려해주고 해서 행복한 마음으로 총대 메고 있습니다
총대 매고 게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