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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SEVENTEEN MECCA
메카
The pilgrimage to Mecca, known as Hajj, is a religious obligation that every orthodox Muslim
fulfills, if humanly able, at least once in his or her lifetime.
The Holy Quran says it, "Pilgrimage to the Ka'ba is a duty men owe to God; those who are able,
make the journey."
Allah said: "And proclaim the pilgrimage among men; they will come to you on foot and upon
each lean camel, they will come from every deep ravine."
하지로 알려진 메카 성지순례는 종교적 의무로 모든 정통 무슬림은 가능하다면 최소한 평생 한 번은 수행해야 한다.
꾸란은 말한다. “카바 신전으로의 성지순례는 사람이 신께 행해야할 의무이다. 할 수 있는 자는 순례를 하라.”
알라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성지순례를 선포하라. 그들은 걷고 낙타를 타고 너에게 올 것이다. 그들은 모든 깊은 골짜기(방방곡곡?)에서 올 것이다.”
* 메카에 있는 이슬람교 신전
At one or another college or university, usually in the informal gatherings after I had spoken,
perhaps a dozen generally white-complexioned people would come up to me, identifying
themselves as Arabian, Middle Eastern or North African Muslims who happened to be visiting,
studying, or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hey had said to me that, my white-indicting statements
notwithstanding, they felt that I was sincere in considering myself a Muslim-and they felt if I was
exposed to what they always called "true Islam," I would "understand it, and embrace it."
Automatically, as a follower of Elijah Muhammad, I had bridled whenever this was said.
여러 대학에서, 주로 비공식 모임에서 내가 연설을 한 후 아마도 10여 명의, 보통은 백인 외모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들은 자신이 미국에 방문, 유학, 거주하는 아랍인, 중동 또는 북아프리카 무슬림임을 밝혔다. 나의 백인 비난 발언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슬림으로 자신에게 신실한 것 같다고, 만약 내가 그들이 늘 말했던 “진정한 이슬람”이라는 것에 노출된다면, 나는 “이해하고 포용할 것”같다고 내게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엘리야 무하마드의 추종자로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정을 억눌렀다.
But in the privacy of my own thoughts after several of these experiences, I did question myself: if
one was sincere in professing a religion, why should he balk at broadening his knowledge of that
religion?
Once in a conversation I broached this with Wallace Muhammad, Elijah Muhammad's son. He
said that yes, certainly, a Muslim should seek to learn all that he could about Islam. I had always
had a high opinion of Wallace Muhammad's opinion.
그러나 여러 번의 경험 후 나만의 개인적인 생각에서, 나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한 사람이 어떤 종교를 신실하게 믿는다면, 왜 그 종교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데 주저해야 하는가? 한 번은 대화 중에 엘리야 무하마드의 아들인 월러스 무하마드에게 이것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그는 말했다. 네 물론입니다. 무슬림은 이슬람에 대해 최선을 다해 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는 늘 월러스 무하마드의 의견을 높이 평가했다.
Those orthodox Muslims whom I had met, one after another, had urged me to meet and talk with a
Dr. Manmoud Youssef Shawarbi. He was described to me as an eminent, learned Muslim, a
University of Cairo graduate, a University of London Ph.D., a lecturer on Islam, a United Nations
advisor and the author of many books. He was a full professor of the University of Cairo, on leave
from there to be in New York as the Director of the Federation of Islamic Association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Several times, driving in that part of town, I had resisted the impulse
to drop in at the F.I.A. building, a brown-stone at 1 Riverside Drive. Then one day Dr. Shawarbi
and I were introduced by a newspaperman.
만났던 그들 정통 무슬림들마다 내게 맨무드 요세프 샤와르비 박사를 만나서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는 저명하고 학식있는 무슬림으로, 카이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슬람에 대한 강사, UN의 고문, 많은 책들의 저자로 설명되었다. 그는 카이로 대학교의 정교수였는데 휴가를 내고 미국과 캐나다의 이슬람 연맹(FIA)의 의장으로서 뉴욕에 있었다. 나는 몇 차례나 마을로 운전해서 1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갈색 돌로 된 FIA 건물에 들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그 후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샤와르비 박사와 나를 소개시켰다.
He was cordial. He said he had followed me in the press; I said I had been told of him, and we
talked for fifteen or twenty minutes. We both had to leave to make appointments we had, when he
dropped on me something whose logic never would get out of my head. He said, "No man has
believed perfectly until he wishes for his brother what he wishes for himself."
그는 진심어린 사람이었다. 언론을 통해 나를 쭉 봐왔다고 했다. 나도 그에 대해 들어왔다고 했고 우리는 15분에서 20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우리 둘 다 선약 때문에 떠나야 했다. 그 때 그는 내게 무언가를 던져 놓고 갔는데 그의 논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자기 형제를 위한 것으로 할 때까지는 너희 중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믿지 말라.”
* 코란의 구절
Then, there was my sister Ella herself. I couldn't get over what she had done. I've said before,
this is a strong , big, black, Georgia-born woman. Her domineering ways had gotten her put out
of the Nation of Islam's Boston Mosque Eleven; they took her back, then she left on her own. Ella
had started studying under Boston orthodox Muslims, then she founded a school where Arabic
was taught! _She_ couldn't speak it, she hired teachers who did. That's Ella! She deals in real
estate, and _she_ was saving up to make the pilgrimage. Nearly all night, we talked in her living
room.
그리고, 엘라 누나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해 놓은 걸 넘어설 수가 없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누나는 강하고, 크고, 검은 조지아 출신 여자이다. 그녀는 폭군같은 태도 때문에 이슬람국가 보스턴 모스크 11에서 나가게 됐다. 그들은 그녀를 다시 받아들였다. 그 후 그녀는 스스로 떠났다. 엘라는 보스턴 정통 무슬림 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아랍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랍어를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선생들을 고용했다. 그게 엘라다! 그녀는 부동산 매매를 했고, 성지순례를 가기 위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거의 밤새도록 우리는 그녀의 거실에서 이야기했다.
She told me there was no question about it; it was more important that I go. I thought about
Ella the whole flight back to New York. A_strong_ woman. She had broken the spirits of three
husbands, more driving and dynamic than all of them combined. She had played a very
significant role in my life. No other woman ever was strong enough to point me in directions; I
pointed women in directions. I had brought Ella into Islam, and now she was financing me to
Mecca.
그녀는 내가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 내내 엘라에 대해 생각했다. 강한 여자다. 그녀는 세 남편의 정신력을 거덜냈다. 세 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추진력있고 역동적이었다. 어떤 다른 여자도 나에게 방향을 지시할 만큼 강하진 못했다. 나는 여자들에게 방향을 지시했다. 나는 엘라를 이슬람에 데리고 들어왔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나를 메카로 가도록 재정을 지원하고 있었다.
Allah always gives you signs, when you are with Him, that He is with you.
When I applied for a visa to Mecca at the Saudi Arabian Consulate, the Saudi Ambassador told
me that no Muslim converted in America could have a visa for the Hajj pilgrimage without the
signed approval of Dr. Manmoud Shawarbi. But that was only the beginning of the sign from
Allah. When I telephoned Dr. Shawarbi, he registered astonishment. "I was just going to get in
touch with you," he said, "by all means come right over."
당신이 알라와 함께 할 때 알라는 당신과 함께 있다는 신호를 항상 주신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사관에 메카행 비자를 신청했을 때, 사우디 대사는 미국의 개종한 무슬림 어느 누구도 만무드 샤와르비 박사가 서명한 승인서 없이는 하지 성지순례를 위한 비자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알라가 보낸 신호의 시작이었다. 샤와르비 박사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막 당신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소.” 그가 말했다 “꼭 오시오.”
When I got to his office, Dr. Shawarbi handed me the signed letter approving me to make the Hajj
in Mecca, and then a book. It was The Eternal Message of Muhammad_ by Abd-AI-Rahman
Azzam.
The author had just sent the copy of the book to be given to me, Dr. Shawarbi said, and he
explained that this author was an Egyptian-born Saudi citizen, an international statesman, and
one of the closest advisors of Prince Faisal, the ruler of Arabia. "He has followed you in the press
very closely." It was hard for me to believe.
그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샤와르비 박사는 내게 메카로 하지 성지순례를 승인하는 서명된 서류를 건넸다. 그리고 책 한 권을 건넸다. 압드 아이 라만 아잠이 쓴 <무하마드의 영원한 메시지>였다. 저자는 내게 주라고 책 한 부를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저자는 이집트 출신 사우디 국민이자 국제 정치가, 그리고 아라비아의 통치자인 파이살 왕자의 최측근 고문 중 하나라고 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당신을 매우 가깝게 추종해왔습니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Dr. Shawarbi gave me the telephone number of his son, Muhammad Shawarbi, a student in
Cairo, and also the number of the author's son, Omar Azzam, who lived in Jedda, "your last stop
before Mecca. Call them both, by all means."
샤와르비 박사는 카이로에서 공부하는 아들 무하마드 샤와르비와 저자의 아들, 제다에서 살고 있는 오마르 아잠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메카 전의 마지막 기착지요. 꼭 두 사람에게 전화하시오.”
I left New York quietly (little realizing that I was going to return noisily). Few people were told I
was leaving at all. I didn't want some State Department or other roadblocks put in my path at the
last minute. Only my wife, Betty, and my three girls and a few close associates came with me to
Kennedy International Airport. When the Lufthansa Airlines jet had taken off, my two seat row
mates and I introduced ourselves. Another sign! Both were Muslims, one was bound for Cairo, as
I was, and the other was bound for Jedda, where I would be in a few days.
나는 조용히 뉴욕을 떠났다(시끌벅적하게 돌아올 줄은 알지 못했다). 내가 떠나는 걸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국무부나 다른 장애물이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오직 아내 베티와 세 딸과 몇몇 가까운 관계자만이 케네디 국제 공항에 함께 왔다. 루프트한자 항공 여객기가 이륙했을 때, 나와 두 명의 옆자리 승객들은 자기를 소개했다. 또 다른 신호였다!. 둘 다 무슬림이었다. 한 명은 나처럼 카이로 행이었고 다른 사람은 내가 며칠간 머무를 제다 행이었다.
All the way to Frankfurt, Germany, my seatmates and I talked, or I read the book I had been
given. When we landed in Frankfurt, the brother bound for Jedda said his warm good-bye to me
and the Cairo-bound brother. We had a few hours' layover before we would take another plane to
Cairo. We decided to go sightseeing in Frankfurt.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내내, 나는 옆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받은 책을 읽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착륙하고 제다로 가는 형제는 나와 카이로 행 형제에게 따뜻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카이로행 비행기로 갈아타기전에 몇 시간동안 기착했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를 관광하기로 했다.
In the men's room there at the airport, I met the first American abroad who recognized me, a
white student from Rhode Island. He kept eyeing me, then he came over. "Are you X?" I laughed
and said I was, I hadn't ever heard it that way. He exclaimed, "You can't be! Boy, I know no one
will believe me when I tell them this!" He was attending school, he said, in France.
공항 화장실에서 나를 알아보는 미국인을 처음으로 만났다. 로드 아일랜드에서 온 백인이었다. 그는 나를 주시하다가 다가왔다. “X 인가요?”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그는 외쳤다. “이럴 수가, 세상에,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그는 프랑스에서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The brother Muslim and I both were struck by the cordial hospitality of the people in Frankfurt. We
went into a lot of shops and stores, looking more than intending to buy anything. We'd walk in,
any store, every store, and it would be Hello! People who never saw you before, and knew you
were strangers. And the same cordiality when we left, without buying anything. In America, you
walk in a store and spend a hundred dollars, and leave, and you're still a stranger. Both you and
the clerks act as though you're doing each other a favor. Europeans act more human, or humane,
whichever the right word is. My brother Muslim, who could speak enough German to get by,
would explain that we were Muslims, and I saw something I had already experienced when I was
looked upon as a Muslim and not as a Negro, right in America.
무슬림 형제와 나는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에 감명받았다. 우리는 많은 상점을 다니며 물건을 사기보다는 구경을 더 많이 했다. 우리는 어떤 가게든 모든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고 인사를 받았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이방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갈 때에도 똑같이 친절했다. 미국에서는 가게에 들어가 백 달러를 쓰고 나가도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다. 당신과 점원들 모두 서로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한다. 유럽인들은 더 인간적, 또는 인정 많게 행동한다, 어떤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무슬림 형제는 그럭저럭 독일어를 잘 했는데 우리는 무슬림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미국에서 흑인이 아닌 무슬림으로 존중받았을 때 이미 경험했었던 무언가를 보았다.
People seeing you as a Muslim
saw you as a human being and they had a different look, different talk, everything. In one
Frankfurt store-a little shop, actually-the storekeeper leaned over his counter to us and waved his
hand, indicating the German people passing by: "This way one day, that way another day-" My
Muslim brother explained to me that what he meant was that the Germans would rise again.
Back at the Frankfurt airport, we took a United Arab Airlines plane on to Cairo. Throngs of
people, obviously Muslims from everywhere, bound on the pilgrimage, were hugging and
embracing. They were of all complexions, the whole atmosphere was of warmth and friendliness.
The feeling hit me that there really wasn't any color problem here. The effect was as though I had
just stepped out of a prison.
당신을 무슬림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신을 인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외모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달랐다. 프랑크푸르트의 실제로 작은 한 가게에서 점원이 카운터를 넘어 기대어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지나가는 독일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하루, 저렇게 또 하루”라고 했다. 무슬림 형제는 내게 설명하길 그 말 뜻은 독일인들이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이라 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카이로 행 아랍연합항공기를 탔다. 순례중인 도처에서 모인 분명한 무슬림의 무리가 서로 포옹하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색은 제각각이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따뜻했고 우호적이었다. 그 느낌은 내게 놀라웠다. 이곳엔 어떤 피부색 문제도 실제로 없었다. 내가 감옥에서 막 나온 것 같이 감격적이었다.
I had told my brother Muslim friend that I wanted to be a tourist in Cairo for a couple of days
before continuing to Jedda. He gave me his number and asked me to call him, as he wanted to
put me with a party of his friends, who could speak English, and would be going on the
pilgrimage, and would be happy to look out for me.
나는 형제 무슬림 친구에게 제다로 가기 전에 카이로에서 며칠 여행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는 내게 전화번호를 주었고 전화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나와 친구의 파티에 가길 원했다. 그의 친구는 영어를 할 수 있었고 순례를 중이었는데 나를 보면 좋겠다고 했다.
So I spent two happy days sightseeing in Cairo. I was impressed by the modern schools, housing
developments for the masses, and the highways and the industrialization that I saw. I had read
and heard that President Nasser's administration had built up one of the most highly
industrialized countries on the African continent. I believe what most surprised me was that in
Cairo, automobiles were being manufactured, and also buses.
그래서 카이로에서 이틀간 관광을 하며 즐겁게 보냈다. 근대식 학교, 대중을 위한 주택단지, 그리고 고속도로와 공업화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나세르 대통령 정부가 최첨단의 공업 국가를 건설해 왔다는 것을 읽고 들어왔다. 가장 놀랐던 것은 카이로에서 자동차가 그리고 버스도 제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I had a good visit with Dr. Shawarbi's son, Muhammad Shawarbi, a nineteen-year-old, who was
studying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at Cairo University. He told me that his father's dream
was to build a University of Islam in the United States.
나는 샤와르비 박사의 아들인 무하마드 샤와르비를 기분좋게 방문했다. 그는 19살이고 카이로 대학교에서 정치경제과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꿈은 미국에 이슬람 대학교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The friendly people I met were astounded when they learned I was a Muslim-from America! They
included an Egyptian scientist and his wife, also on their way to Mecca for the Hajj, who insisted I
go with them to dinner in a restaurant in Heliopolis, a suburb of Cairo. They were an extremely
well-informed and intelligent couple. Egypt's rising industrialization was one of the reasons why
the Western powers were so anti-Egypt, it was showing otherAfrican countries what they should
do, the scientist said. His wife asked me, "Why are people in the world starving when America
has so much surplus food? What do they do, dump it in the ocean?"
내가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은 내가 미국 출신의 무슬림이란 걸 알고는 크게 놀랐다! 한 이집트 과학자와 그의 아내가 속한 그들도 메카로 하지 순례 중이었다. 그들은 카이로 외곽 헬리폴리스의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러 가자고 고집했다. 그들은 무척이나 박식하고 똑똑한 부부였다. 이집트의 발전하는 공업화는 왜 서구열강이 반이집트인지 보여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해야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과학자는 말했다. 그의 아내가 물었다 “미국은 음식이 그렇게 남아도는데 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죠? 그들은 뭐하는 거죠? 바다에 버리나요?”
I told her, "Yes, but they put
some of it in the holds of surplus ships, and in subsidized granaries and refrigerated space and
let it stay there, with a small army of caretakers, until it's unfit to eat. Then another army of
disposal people get rid of it to make space for the next surplus batch." She looked at me in
something like disbelief. Probably she thought I was kidding. But the American taxpayer knows
it's the truth. I didn't go on to tell her that right in the United States, there are hungry people.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는 배의 선창과 보조받는 곡창과 냉장공간에 음식을 두고, 관리자로 소규모 부대를 배치하고 먹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곳에 보관합니다. 그 다음에 처리반 부대가 다음 잉여분을 쌓아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치워버립니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아마도 내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납세자들은 이게 진실임을 알고 있다. 나는 바로 미국에서도 배고픈 사람들이 있다고 말을 계속하지는 않았다.
I telephoned my Muslim friend, as he had asked, and the Hajj party of his friends was waiting for
me. I made it eight of us, and they included a judge and an official of the Ministry of Education.
They spoke English beautifully, and accepted me like a brother. I considered it another of Allah's
signs, that wherever I turned, someone was there to help me, to guide me.
나는 전화를 달라고 한 무슬림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의 친구들의 하지 순례 파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 8명과 갔는데, 그들 중에는 판사와 교육부 관료도 있었다. 그들은 영어를 아름답게 구사했고 나를 형제로 받아주었다. 나는 이 또한 알라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가는 곳마다 누군가 나를 돕고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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