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자식
시대가 바뀌면 인심도 변하고 풍습도 바뀐다. 시집살이를 실컷 한 어느 부인이, 자기도 이제 며느리를 보고 시어머니 노릇을 한번 해보려니, 세상이 변해서 할 수도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전통적인 효도 이제 많이 달라졌다. 자식은 무조건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부모는 늙으면 자식에게 의탁하던 풍습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늙고 병들면 양로원에 가는 것이 의당한 순리처럼 되어가는 것이 오늘의 세태다.
부모와 자녀 간에 재산으로 인한 분쟁이 점점 많아지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사회현상이다. 어느 유명한 연예인의 아버지가 금전 문제로 그의 아들을 때려 입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세간의 관심을 끈 일도 있었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가리켜 어느 노교수는, 오늘날의 배운 신세대 어머니들은 자신의 못 배운 무식한 어머니 세대보다 모정이 약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층구조에서만 본 것이지 심층구조까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든 효도 옛날과는 달라졌다. 부모의 생각도 바뀌고 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만 하지 말고, 노경에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 다 쓰고 죽으라는 말이 요즘 카톡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자식에게 기대고 효를 바라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크게 느낀 일이 있다.
TBC 방송국에서 펼치고 있는 프로그램 중에 ‘씽씽 고향별곡’이라는 것이 있다. 기웅이 아제가 나지막한 아가씨와 함께 오지의 농촌을 찾아가 그 마을 사람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다. 어느 날 우연히 그 프로를 본 일이 있다. 어느 마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외딴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댁을 방문하여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는 배추와 무며 참깨 등을 기르고 있었다. 기웅이 아제가 그 할머니께 물었다.
“어무이예, 연세도 높으신데 힘들여 이렇게 많이 농사를 왜 짓습니까?”
“아이고 이렇게 해서 아들도 주고 딸도 주는 그 재미로 이렇게 안 짓습니까.”
“그라마 아들 딸 들이 돈도 많이 주고 효도도 잘합니까?”
“아이고 그런 말 하지 마이소. 효도는 어릴 때 이미 다 받았지 않습니까? 보송보송하게 클 때 고것들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웠습니까? 나는 그때 효도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무슨 효도를 이야기합니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렇다. 어릴 때 자식들은 한없이 귀여움을 주었다.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했다. 방실방실 첫웃음을 지울 때, 애써 뒤집을 때, 앙금앙금 길 때, 말을 배울 때, 그리고 뽀뽀를 할 때에 그 얼마나 귀함을 선사했던가? 크면서 그들은 순간순간 우리를 얼마나 즐겁게 하였던가. 그보다 더 큰 효도가 또 어디 있을까.
저 할머니는 인생을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당나라 때의 문장가 한유(韓愈)는 그의 사설(師說)에서 ‘나보다 늦게 태어났거나 비록 천하더라도 나에게 가르침[道]을 주는 이면 그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그 할머니는 나에게 효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니 바로 진정한 나의 스승이다.
그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은 후 나는 자식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자식들에 대해 가졌던 지나친 욕구를 버렸다. 그리고 웬만한 서운함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릴 때 그리 큰 효도를 나에게 다했는데 뭘 또 그리 큰 것을 바라는가? 그런 생각을 하니 속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조금만 잘해도 꼭 칭찬하는 습관도 생겼다. 이를테면 병원에 나를 모셔다 진료를 받게 해 줘도 그전에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꼭 ‘오늘 참 애를 먹었다. 고맙다’는 말을 한다. 일전에는 아들이 사과를 보내왔는데, 알고보니 저희들은 하등품을 사고 우리에게는 상등품을 사 보내었다. 그래서 나는 당장 ‘아비야 너희는 하등품 사과를 사고, 우리에게는 상등품을 사 보냈다니 그 효심에 놀랐노라’라고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고 나는 한순간 행복감에 젖었다. 사람들이 흔히 행복, 행복 하는데 이런 것이 작은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행복을 생각하고 있으니, 곧이어 행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가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여 삶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 같은 소인배는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시쳇말로 불행이 없으면 그게 행복이란 말이 있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근자에 와서 나는 나름대로 최대의 불행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다. 인척 중에 세 살 위인 형과 다섯 살 위인 형이 있다. 그 두 사람이 다 최근에 자식을 잃었다. 다섯 살 위인 형은 아들을 잃고, 세 살 위인 형은 딸을 앞세웠다.
다섯 살 위의 형은 젊을 때 살림살이가 어려워 부부 둘이가 노동을 하여 자식을 키웠다. 다행히 아들은 공부를 잘하여 서울대학에 들어가 졸업 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하다가, 그 후 변호사가 되어 사무실 두 곳을 내어 운영을 하였다. 운영이 잘되어 부모에게 돈도 많이 부쳐주고 효도를 하였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세 살 위의 형은 맏딸을 잃었다. 딸은 혼자서 남매를 키우면서도 부모에게 수시로 입에 맞는 반찬을 해가지고 와서 대접하는 효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한말로 초죽음이 되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 가슴에 밤송이 같은 것이 박혀서 계속 찌르는 곳인가 싶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느 부모가 안 그럴까 싶다. 자식을 앞세우는 것보다 더 아프고 큰 불행은 없다.
그런 불행을 겪지 않는 사람은 다 행복하다.
그리고 자식은 큰 행복을 주기도 하고 큰 불행을 주기도 하는 그런 존재다.
첫댓글 박사님 요즘 시대에 맞는 풍습과 작은 행복, 큰 불행에, 관한 글
공감 입니다.
여러면의 표현력에 감동을 느끼며 부족한 댓글이나마 남깁니다.
늘 건행하십시요.
다은 선생님 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건승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