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풍교(無風橋)를 지난다. 탁 트인 하늘이 시원하다. 연노란 바위 사이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닮았다.
세속의 번뇌가 씻겨가는 것일까? 마음이 절로 개운해 진다. 지난 밤 한을 풀어내듯이 줄기차게 쏟아진 비 덕분에 숲은 더욱 짙고 깊다. 가지를 흐드러지게 펼치고 선 노송 사이사이에 밤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숲 가운데로 난 파래빛 길을 따라 밀짚모자를 쓴 스님 한 분이 걸어간다. 속이 허전한 바랑이 스님의 어깨에 삐뚜름히 걸쳐져 있다. 탁발이라도 나섰음직한 그 발걸음이 여유롭다.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언뜻 뇌리를 스치지만, ‘그도 아무나 하나’. 실없는 생각인 듯 하여 서둘러 지워버린다.
멀리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가 보인다. 커다란 세 개의 아치 위에 반월 모양으로 휘어진 돌다리이다. 불교의 상징인 ‘마음 심(心)’ 자를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속속들이 세속에 물든 나는 언뜻 견우와 직녀를 떠올린다. 시리도록 가슴이 아픈 연인들이 만나는 다리. 그 아름다움이 지나쳐 애절하기까지 하다.
인도의 산 이름에서 따온 ‘영취산’
푸른색 수초가 점점이 모자이크 된 널찍한 자갈길을 훨씬 풍부해진 물살이 바위 사이를 비집으며 흐르고 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냇물 흐르는 소리를 ‘소살소살’이라고 표현했던가. 정말 물길은 소살소살 끊임없이 속삭이며 흘러간다.
산내에 가득한 향기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통도사(通度寺)의 일주문과 불이문이다.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지는 1 천 300 여 년의 신비와 마주할 터이다.
취서산, 영축산이라고도 하는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의 동쪽 산맥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해발 1 천 50 미터의 산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듯한 형상으로, 병풍처럼 길게 뻗은 바위산이다. 영취산의 지명은 중인도의 마가다(Magadha) 국 동북쪽에 있던 그리드라(Gridhra) 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드라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으로, 신선(靈)과 독수리(鷲)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한다.
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풍교(無風橋)를 지난다. 탁 트인 하늘이 시원하다. 연노란 바위 사이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닮았다.
세속의 번뇌가 씻겨가는 것일까? 마음이 절로 개운해 진다. 지난 밤 한을 풀어내듯이 줄기차게 쏟아진 비 덕분에 숲은 더욱 짙고 깊다. 가지를 흐드러지게 펼치고 선 노송 사이사이에 밤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숲 가운데로 난 파래빛 길을 따라 밀짚모자를 쓴 스님 한 분이 걸어간다. 속이 허전한 바랑이 스님의 어깨에 삐뚜름히 걸쳐져 있다. 탁발이라도 나섰음직한 그 발걸음이 여유롭다.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언뜻 뇌리를 스치지만, ‘그도 아무나 하나’. 실없는 생각인 듯 하여 서둘러 지워버린다.
멀리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가 보인다. 커다란 세 개의 아치 위에 반월 모양으로 휘어진 돌다리이다. 불교의 상징인 ‘마음 심(心)’ 자를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속속들이 세속에 물든 나는 언뜻 견우와 직녀를 떠올린다. 시리도록 가슴이 아픈 연인들이 만나는 다리. 그 아름다움이 지나쳐 애절하기까지 하다.
인도의 산 이름에서 따온 ‘영취산’
푸른색 수초가 점점이 모자이크 된 널찍한 자갈길을 훨씬 풍부해진 물살이 바위 사이를 비집으며 흐르고 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냇물 흐르는 소리를 ‘소살소살’이라고 표현했던가. 정말 물길은 소살소살 끊임없이 속삭이며 흘러간다.
산내에 가득한 향기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통도사(通度寺)의 일주문과 불이문이다.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지는 1 천 300 여 년의 신비와 마주할 터이다.
취서산, 영축산이라고도 하는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의 동쪽 산맥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해발 1 천 50 미터의 산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듯한 형상으로, 병풍처럼 길게 뻗은 바위산이다. 영취산의 지명은 중인도의 마가다(Magadha) 국 동북쪽에 있던 그리드라(Gridhra) 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드라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으로, 신선(靈)과 독수리(鷲)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한다.
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풍교(無風橋)를 지난다. 탁 트인 하늘이 시원하다. 연노란 바위 사이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닮았다.
세속의 번뇌가 씻겨가는 것일까? 마음이 절로 개운해 진다. 지난 밤 한을 풀어내듯이 줄기차게 쏟아진 비 덕분에 숲은 더욱 짙고 깊다. 가지를 흐드러지게 펼치고 선 노송 사이사이에 밤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숲 가운데로 난 파래빛 길을 따라 밀짚모자를 쓴 스님 한 분이 걸어간다. 속이 허전한 바랑이 스님의 어깨에 삐뚜름히 걸쳐져 있다. 탁발이라도 나섰음직한 그 발걸음이 여유롭다.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언뜻 뇌리를 스치지만, ‘그도 아무나 하나’. 실없는 생각인 듯 하여 서둘러 지워버린다.
멀리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가 보인다. 커다란 세 개의 아치 위에 반월 모양으로 휘어진 돌다리이다. 불교의 상징인 ‘마음 심(心)’ 자를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속속들이 세속에 물든 나는 언뜻 견우와 직녀를 떠올린다. 시리도록 가슴이 아픈 연인들이 만나는 다리. 그 아름다움이 지나쳐 애절하기까지 하다.
인도의 산 이름에서 따온 ‘영취산’
푸른색 수초가 점점이 모자이크 된 널찍한 자갈길을 훨씬 풍부해진 물살이 바위 사이를 비집으며 흐르고 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냇물 흐르는 소리를 ‘소살소살’이라고 표현했던가. 정말 물길은 소살소살 끊임없이 속삭이며 흘러간다.
산내에 가득한 향기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통도사(通度寺)의 일주문과 불이문이다.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지는 1 천 300 여 년의 신비와 마주할 터이다.
취서산, 영축산이라고도 하는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의 동쪽 산맥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해발 1 천 50 미터의 산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듯한 형상으로, 병풍처럼 길게 뻗은 바위산이다. 영취산의 지명은 중인도의 마가다(Magadha) 국 동북쪽에 있던 그리드라(Gridhra) 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드라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으로, 신선(靈)과 독수리(鷲)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한다.
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무풍교(無風橋)를 지난다. 탁 트인 하늘이 시원하다. 연노란 바위 사이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닮았다.
세속의 번뇌가 씻겨가는 것일까? 마음이 절로 개운해 진다. 지난 밤 한을 풀어내듯이 줄기차게 쏟아진 비 덕분에 숲은 더욱 짙고 깊다. 가지를 흐드러지게 펼치고 선 노송 사이사이에 밤나무, 느티나무, 자작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숲 가운데로 난 파래빛 길을 따라 밀짚모자를 쓴 스님 한 분이 걸어간다. 속이 허전한 바랑이 스님의 어깨에 삐뚜름히 걸쳐져 있다. 탁발이라도 나섰음직한 그 발걸음이 여유롭다.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언뜻 뇌리를 스치지만, ‘그도 아무나 하나’. 실없는 생각인 듯 하여 서둘러 지워버린다.
멀리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가 보인다. 커다란 세 개의 아치 위에 반월 모양으로 휘어진 돌다리이다. 불교의 상징인 ‘마음 심(心)’ 자를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속속들이 세속에 물든 나는 언뜻 견우와 직녀를 떠올린다. 시리도록 가슴이 아픈 연인들이 만나는 다리. 그 아름다움이 지나쳐 애절하기까지 하다.
인도의 산 이름에서 따온 ‘영취산’
푸른색 수초가 점점이 모자이크 된 널찍한 자갈길을 훨씬 풍부해진 물살이 바위 사이를 비집으며 흐르고 있다.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냇물 흐르는 소리를 ‘소살소살’이라고 표현했던가. 정말 물길은 소살소살 끊임없이 속삭이며 흘러간다.
산내에 가득한 향기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통도사(通度寺)의 일주문과 불이문이다. 이제 곧 눈 앞에 펼쳐지는 1 천 300 여 년의 신비와 마주할 터이다.
취서산, 영축산이라고도 하는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의 동쪽 산맥 낙동정맥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해발 1 천 50 미터의 산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앉은 듯한 형상으로, 병풍처럼 길게 뻗은 바위산이다. 영취산의 지명은 중인도의 마가다(Magadha) 국 동북쪽에 있던 그리드라(Gridhra) 산에서 유래하였다. 그리드라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곳으로, 신선(靈)과 독수리(鷲)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한다.
영취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 년(64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의 탄생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원효와 의상보다는 연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진골 출신으로 이름이 선종랑(善宗郞)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총명했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일찍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앞에 두고 백골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련을 닦는다. 그는 온몸을 가시덤불로 둘러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찔리게끔 해놓고 좌선을 했다. 참으로 무서운 기세였다. 하기야 정신을 다잡아 올곧게 정진한다면 인생사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재간과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다. 이에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응하였다 한다.
자장은 선덕여왕 5 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얻어와 땅에 묻고 절을 지으니 그 것이 통도사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한 마디로 고색창연하다. 부처님의 사리 중에서도 정수리에서 나온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신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낡았고 소박하다. 원색의 단청 대신에 허옇게 바랜 물감들이 벽이나 기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호사스럽지도 현란하지도 않은 그 목조건물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한다. 장엄함과 우아함이 거기에 있다.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압도해 오는 천년의 신비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부처의 眞身舍利 모신 최고의 성지
통도사 대웅전엔 불상이 없다.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마땅히 부처님이 모셔졌어야 할 곳은 커다란 창으로 훤히 뚫려있다. 특이하다. 아니 특이하다 못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계시지 않음을 깨달은 어린아이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것은 바로 그 건너, 그러니까 휑하니 뚫린 창 너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 곳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는데, 여기야말로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으뜸인 통도사 최상의 성지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이다.
통도사가 창건되기 전 그 땅엔 큰 연못이 있었다.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연못이었다. 그러던 것을 자장이 메워 계단을 쌓고 부처님 사리를 모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삼재(三災)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
통도사 말사인 자장암에는 사람들로부터 절을 받는 개구리가 있다. 이름하여 금와보살(金蛙菩薩)이다. 이 금개구리가 사는 곳은 깎아지른 암벽에 뚫린 작은 암혈이다. 물도 흙도 마다하고 굳이 삭막한 바위 속에 은거해 있는 이 개구리의 몸은 청색이 도는 바위 색깔인데, 눈과 입가는 황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을 가졌다 한다.
금개구리의 전설 얽힌 자장암
금와보살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고, 벌과 나비가 되기도 하는 등 그 변화와 이적이 무쌍하다고 전해온다. 이 금개구리는 자장율사가 이 암벽에 구멍을 뚫어 살게 하였다 하니 그 나이가 가히 1 천 400 살에 이를 터이다.
금와보살은 도무지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 때 어떤 관리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다 도중에 열어보니 개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자라는 것이니, 지금도 불심이 지극한 불자에게만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개구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속셈으로 구멍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서너 명의 불자들이 너부죽이 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출타로 비어 있는 집조차도 인간들로부터 큰 절을 받는 개구리.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인간들의 신심은 끝이 없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면 혹시 개구리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세계라는 증거는 아닐까?
다시 소살거리는 개울물을 따라 걸었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길을 뒤통수로 받으며 사바세계로 떠밀리듯 내려왔다. 통도사 계곡의 무풍한송(無風寒松)은 여전히 날 반겼고 돌다리 아래로는 천 년을 흘러왔을 옥빛 물길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통도사 경내를 벗어나 신평 마을의 무수한 간판들과 사람들, 차량들을 대하는 순간 발길이 또 다시 허청거리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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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같은 글을 세번씩이나 올리는 것은 좀 거시기 허다. ㅎㅎ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