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16]대복고(戴復古)28, 조대(釣臺)
釣臺 [조대]
戴復古(南宋)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
조대(낚시터) / 대복고(남송)
세상만사 낚싯대 하나로 마음을 비우니
삼공의 벼슬도 이 강산과 바꾸지 않겠네
평생에 과오는 광무제와의 인연으로
헛된 이름만 온세상에 알려진 거라네
<초우譯>
*戴復古(1167~1248):남송의 학자,시인. 자 式之(식지), 호 石屛(석병).
江湖(강호)라는 이름으로 유명.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시 쓰는 것을 즐겼다.<위키백과>
*劉文叔(BC6~AD57):후한(後漢) 초대황제(광무제)의 자(字). 본명은 劉秀(유수).
시호 光武(광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으로
신(新)나라의 폭군 왕망(王莽)을 몰아내고 낙양에서 후한을 재건하였다.<지식백과>
*嚴子陵(BC39~AD41):이름 嚴光(엄광). 동한-후한시대의 은둔지사.
동한(東漢) 광무제(劉秀:유수)의 죽마고우로 유수를 도와 후한의 개국에 공을 세웠으나
유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富春山(부춘산:절강성 동려현)에 은거하였다.
칠리탄(七里灘,子陵灘)에서 낚시하며 광무제가 벼슬을 하사하고 불러도
평생 응하지 않았다.
*三公(삼공):周代의 태사 태부 태보, 東漢의 태위 사도 사공 등
삼정승에 해당하는 최고위 벼슬을 의미.
*識(식):알다.지식.친분.
*惹起(야기):무슨 일이나 사건 따위를 끌어 일어킴.
[출처] 대복고(戴復古):조대(釣臺)|작성자 현완직필 초우
釣臺 [조대]
戴復古대복고(南宋)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 만사무심일조간 삼공부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 惹起虛名滿世間 평생오식유문숙 야기허명만세간
세상사 다 잊고 낚싯대에 의지하니 삼공벼슬을 준다 해도 이 강산과 바꾸겠는가?
평생에 유문숙 그대를 잘못 알아 부질없는 이름 날려 온 세상에 펴졌구나
☆☆☆ 엄광(嚴光)은 본래 성이 장(莊)이었다. 후한 명제(明帝)의 이름인 장(莊)을 피해 엄(嚴)이라 하였다.
자는 자릉(子陵). 엄자릉(嚴子陵) 또는 줄여서 엄릉(嚴陵)이라 부른다. 절강(浙江)성 동려(桐廬)현 부춘산(富春山), 일명 엄릉산(嚴陵山) 서쪽에 있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劉秀, 유문숙)와 어릴 적 함께 뛰놀고 공부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산속에 숨었다.
광무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더니 양피 옷을 입고 못에서 낚시하고 있었다.
☆☆☆ 광무제는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광무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그는 예전 친구 사이처럼 대했고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 그의 무례함을 들어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광무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광무제와 함께 밤새 얘기를 나누다 함께 잠이 들었는데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태연히 자기도 했다.
☆☆☆ 다음 날 아침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간밤에 천상을 보았사온데 하나의 객성이 북극성을 범했습니다. 별일 없으십니까?"하고 광무제에게 물었다.
광무제는 웃으며 "나의 친구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이라 말했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슬을 내렸으나 엄광은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 엄광이 은둔한 곳의 지명(地名)을 엄릉산(嚴陵山), 그곳 여울을 엄릉뢰(嚴陵瀨) 또는 엄자뢰(嚴子瀨)라 한다.
동려현(桐廬)에서부터 오잠(於潛)까지 걸쳐 있는 16뢰(瀨) 가운데 두 번째 여울이다.
그가 낚시질하던 곳은 엄릉조대(嚴陵釣臺)라 부른다.
☆☆☆ 훗날 송나라 때 시인 대복고(戴復古)가 이런 엄광의 기상을 시로 읊으니 <조대(釣臺)>다.
대복고(戴復古)가 <조대(釣臺)>에서 그의 절개를 높이 칭송했지만 어찌 그뿐이겠는가.
절의(節義)를 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엄광(嚴光)을 으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일례로 명(明)나라 중기의 문인 나기(羅玘)는 그의 <서계어락설(西溪漁樂說)>에서
"순(舜)임금은 왕위에 오르기 전 뇌택(雷澤)에서, 주나라 때 여상(呂尙)은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까지 위수(渭水)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나오고 말았다. 큰일을 위하여 그 즐거움을 끝내 기리지 못했다.
최후까지 그 즐거움을 놓지 않은 채 순절한 사람은 고금에 꼭 한 사람 엄릉(嚴陵)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 그러나 명(明)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朱元璋/高皇帝)은 "내가 천하의 죄인을 살펴보건대 죄인으로서 엄광보다 더한 놈이 없다"며 그의 처신을 일축했다.
신하의 견지에서 본 엄광과, 황제의 관점에서 본 엄광이 천양지차(天壤之差)로 달랐던 모양이다.
☆☆☆ 앞서 언급한 대로 포의(布衣)를 고집한 엄광은 제왕에게 복종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고한 선비의 전형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광무제는 '방자한' 엄광을 관대히 대하고 도리어 크게 예우함으로써 도량이 넓고 현명한 군주라고 인상을 남겼다.
두 사람은 명성과 '제왕의 덕'이라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치를 동시에 얻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