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독일의 가장 큰 변화는 “ 빌리 브란트 ”의 등장이었다.
1913년생인 그는 나치 시대에 망명을 해야 하였지만 1969년에 독일의 사회민주당의 당수로서 서독 최초의 좌파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아데나워의 보수 정책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고 학생의 요구를 반영하였다. 제일 큰 그의 공적은 통일의 초석을 쌓은 일이었다.
아데나워를 중심으로한 그전 정권은 우리 나라가 북한을 그렇게 대하듯이 동독 국가란 존재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오직 서독만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정권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아니하였다. 이와 더불어 폴란드에 넘어간 단치히 근처나 예전에 쾨니히스베르크가 소련의 킬라닌그라드로 변한 영토를 여전히 독일의 영토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브란트는 동독과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비롯하여 동유럽의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단치히( 현재의 그단스크 )나 쾨니히스베르크( 현재의 킬라닌그라드 )도 선선히 이미 독일의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하였고 그의 노선은 1972년 선거의 결과로 인정을 받았다.
본인은 나치에 박해를 받았지만 폴란드를 찾아가 나치가 벌린 만행을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였다.
( 미국은 베트남에게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게 스탈린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게 드골은 알제리에게 제대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
이런 노력은 20년 이상 이끌었고 미국을 비롯하여 서유럽의 국가들은 서독이 이제 국가가 부강해졌지만 예전의 나치와 같은 야심이 없다는 것을 인정받았기에 독일의 통일을 동서 유럽의 모두에게 흔쾌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통일은 1989년 헝가리의 국경의 개방으로부터 극적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브란트 이하 사민당의 끝없는 노력 덕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 총리인 헬무트 콜은 그런 통일 직전의 상태를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고도 현명하게 대응하였다.
마침내 40년만에 서독은 독일에 통합되었다.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조건이 다르지만 독일의 통일은 충분히 참고할만하다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의 경우는 2차대전 패전 한번이었지 다른 별다른 위기가 있었는가 생각하지만 재러드의 생각은 다르다. 1945년 패전 이후에 1990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위기가 중첩이 되었다고 본다.
일단 1045년 항복과 1961년에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세울 때이고 마지막이 1968년의 학생 시위이었다.
witpo
빌리 브란트
사생아 출신이면서도 대단한 골초이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SPD) 소속의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정치인. 서독의 제4대 총리를 지냈다.
독일연방공화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내 제2당 당 대표로서 연정을 통해 총리로 등극한 사례가 되었다. 재임기간 동안 동독, 소련, 동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동방정책'을 추구하여 통일의 초석을 놓았다.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의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적도 있었고 1987년에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을 주도했다. 마침내 2000년에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