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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3일 토요일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라고 지시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며,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하신다(복음).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6,13-16 사랑하는 그대여,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복음서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비유의 뜻이 명료해서 사람들은 씨앗이 떨어진 네 곳, 곧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가운데 나는 어떤 처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흔히 묻곤 합니다. 이 복음을 읽는 신자 대부분은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보다는 뿌리가 내리지 못하는 ‘바위’나 인생 걱정과 재물과 쾌락의 덫에 걸린 ‘가시덤불’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비유는 제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와 훈계 말씀이지만, 복음을 듣는 지금의 내 처지에 대한 자괴감이나 죄스러움에 빠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쉐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과 신뢰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들의 율법 규정의 배타적 잣대로 이방인들과 소외된 계층들을 함부로 단죄했던 유다인들의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시며,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처음 하느님께 부름받았던 이집트 탈출의 해방과 광야에서의 수련,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아는 것과 정말로 성경의 말씀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읽고 필사하고 외운다고 말씀이 저절로 내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닙니다. 내 영혼 안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내 영혼의 밭이 선한 의지와 기쁨, 자비와 인내, 겸손과 희생의 거름들로 잘 가꾸어져 있어야 합니다. 나는 좋은 땅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열정과 상처의 성인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 흔히 우리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통상적이고 인간적인 경향들로부터 완전히 이탈해야하며 타고났던 성격적 결함들도 철저히 배제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미 성인이 되신 분들 가운데서 어떤 분들은 아주 과격하고 조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평생토록 자신이 안고 있던 심각한 결함들을 극복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런 결핍들은 애써 감추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오해하기도 했고 성인품에 올리는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강한 자기 통제력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열정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 역시 성덕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전환된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악습과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정,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욕구들과 에너지들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아주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피에트릴치나(Pietrelcina: Pietra-돌-이란 단어의 애칭, '작은 돌'이란 의미)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말마디 그대로 쓸모없는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농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비오 신부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큰 영적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런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으셨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간혹 부끄러움에 죄를 숨기거나 축소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던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입술만 나불거리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느님을 얕본단 말입니까?” 윤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그릇된 생활을 고치려는 의지가 아주 약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더러운 놈!” 며칠 후, 그토록 모질게 쫓겨난 그 사람이 울면서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그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활짝 팔을 벌리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격려했습니다. “그것 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한 가지 >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생긴 지 막 3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 산소가 하나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묘지 위에 세워진 학교였는데 그 산소 주인만이 학교가 제시한 금액에 협의를 해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이장하여 깎아서 운동장을 만들었는데 단 하나의 산소만이 운동장 위에 불뚝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위를 돌며 공을 찼고 가끔은 산소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열 받아서 산소를 차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그 자손들을 욕하기도 하였습니다. 돈이 좋기야 좋지만 조상의 묘자리를 빌미로 과연 그렇게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높이 있는 산소는 평상시에도 잘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풀이 우거질 것인데 항상 짧게 잘려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산소를 정돈하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몰래 와서 묘를 잘 단장하는 것이 조상이 기뻐하는 일일까요? 사실 그들의 노력은 조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상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봉헌을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선교를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등 많은 일들을 하느님께 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하느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이상에는 무슨 일을 하던지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땅에서 씨앗이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부활의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서 나온 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분이기에 하늘에 계신 분과 닮으려면 땅에서 난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신들을 죽이고 그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각 개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의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죽지 않으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해야 했던 일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땅의 인간을 묻어 하늘의 인간으로 조금씩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삶의 의미란 뜻입니다. 애벌레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죽어서 고치가 되어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시간을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으로 된 육체적인 우리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인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노력들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 또한 새로 태어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합니다. 미리 공부도 하고 옷도 마련하고 신발도 편한 것을 삽니다. 미리 걷는 연습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황당한 경우는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일 것입니다. 저는 유학할 때 그런 경험이 있어서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꼭 필요한 한 가지만을 먼저 챙깁니다. 나머지는 면세점이나 그 나라에 가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꼭 챙겨야 하는 그 단 한 가지는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노력들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매일 자아를 죽이고 그분을 나의 참 주인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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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성 비오(Pius)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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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체험과 순명으로 밫나는
언제나 주님 기쁨의 일꾼으로 남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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