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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사진을 보시려면 보도자료 번호:1164 또는 게재일자: 2003.7.22을 참고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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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指導委員會議資料》
慶州 芬皇寺遺蹟 -第7次年度 發掘調査- 2003. 7. 2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1. 調査遺蹟名 : 경주 분황사유적
2. 調査期間 : 2003. 3. 10 - 7월 24일 현재
3. 調査面積 : 2000여평
4. 調査機關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5. 調査目的 : 분황사 제6차년도 조사지역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여, 향후 분황사 및 주변의 정비·복원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데 목적을 둠.
6. 調査槪要
가. 調査經過
1) 第1次~第5次年度 調査의 主要內容
1990년부터 1995년까지 5차년도에 걸친 조사는 芬皇寺 寺域中心으로 진행되어, 현 寶光殿 주변과 模塼石塔 동북, 요사채 남편, 동편담장외곽에서 창건가람과 관련된 다수의 건물지가 노출되었다. 金堂은 創建이후 3차례의 重建이 이루어졌다. 創建時는 一塔三金堂式이었고, 1次重建時에는 三金堂이 大形金堂으로 통합되어 一塔一金堂式으로 바뀐다. 2次重建時는 金堂의 면적이 1/5로 축소되고 方向도 南向에서 西向으로 변화되었으며, 3次重建時에는 현 寶光殿을 조성하면서 면적을 1/3로 다시 축소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차중건시까지 유지되던 일반적인 가람의 定型性이 2차중건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분황사의 사회경제적 위치의 변화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講堂은 가람배치상 金堂과 寺域南北中心軸線上의 북편에 위치하게 마련인데, 강당지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자북기준 약 20같》 틀어진 大形建物址가 조사되었다. 이 건물지는 6~7차년도 조사에서 밝혀진 통일신라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건물지들과 동일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어 분황사 창건시기에는 강당이 없었거나, 혹은 이후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사역남북중심축에서 동으로 약 39m지점에서 單廊構造의 東回廊址가 확인되었으나 시기적으로 다소 늦은 유구로 보고된 바 있다. 또한 模塼石塔 南側基壇에서 남으로 5.1m지점에서 한 변 1.85m의 地臺石을 갖춘 石燈址가 조사되었다.
2) 第6次~第7次年度 調査內容
조사지역은 芬皇寺의 北東便에 위치하며, 북편은 千軍路와 北川에 맞대고 있다. 남편은 芬皇寺의 東西小路를 격해 皇龍寺址와 王京調査區域과 마주하며, 동편은 최근 조사중인 皇龍寺址 展示館 敷地 遺蹟과 연결된다. 南高北低形의 조사지역 地形은 남쪽에 西北-東南向으로 黃褐色砂質粘土인 生土層이 분포하고, 그 북편으로는 약 1m이상의 레벨차를 보이면서 河床堆積層이 매우 넓게 형성되어 있다. 생토층을 제외한 하상퇴적층의 상면에서 확인된 유구들은 대부분 잔돌과 와편, 사질점토가 섞인 敷地造成土를 약 25~30㎝두께로 깔고 난 후 축조되어 있었으며, 磁北기준으로 약 20걍ㅅ 건물방향이 틀어져 있었다.
또한 조사지역의 서남편일대는 폭 7m내외의 강한 물길이 지나가면서 일부 담장과 건물지가 유실되었다. 7차년도 조사대상은 2001년도와 동일하며 당시 노출된 유구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유구의 성격과 구조적 특징, 그리고 유구간 중복관계, 그리고 선행유구에 대한 탐색에 중점을 두었다.
사진 1. 조사지역 전경
나. 調査內容
유구별 조사내용은 2001년도에 발표된 바 있어 본고에서는 정밀조사를 통해 새로 발견되거나 추가조사된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6차년도 조사에서는 建物址, 담장, 排水路, 步道, 燒土遺構, 石造遺構, 우물, 그리고 築臺 등이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새로 瓦窯址 1기, 築臺 1기, 石造遺構 3기, 石板橋가 발견되었으며, 일부 담장과 보도의 미조사부분이 추가로 확인됨에 따라 조사지역의 전체적인 규모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 제1축대 전경(동 )
1) 第1築臺
西北-東南向이며 확인된 길이는 약 33m이다. 생토인 황갈색사질점토층의 일부를 깎아 낸 후 축대벽석을 쌓고, 굵은 강돌로 뒷채움하였다. 面北向하는 이 유구의 殘高는 약 130㎝이며, 5-6단으로 축조되었다. 最下段石은 30-45㎝내외의 강돌을 사용한 반면, 上段石은 상대적으로 작은 강돌을 사용하여 축대의 안정성을 기하였다.
현존유구에서 제1축대의 조성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제1축대 前面에서 노출되는 유구들이 제1축대의 舊地表를 강돌로 메워 조성한 부지상면에 축조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 제2축대 전경(서 )
2) 第2築臺
제1축대 前面 약 4-5m정도를 매립하고 구축한 축대로서 잔존규모는 높이 120cm, 4-5단정도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길이는 36m이며 매립층의 높이는 제1축대의 최상단에 맞춰 놓았다. 축대를 견고히 하기 위해 직경 40-65㎝내외의 강돌로 최하단을 구축하고, 그 상단부터는 30-50㎝의 강돌로 쌓았다. 축대전면 약 1.5m지점에서 축대의 보축석렬이 축대하단석과 같은 레벨에서 노출되었다. 조성방법과 구조는 제1축대와 비슷한 양상이나 제2암거와 접하는 부분에서 약 1.2m정도의 굴절부가 노출되었다.
3) 第3築臺
제2축대에서 북으로 약 10m정도의 지점에서 제3축대가 동서로 약 50m가 확인되었다. 이 축대는 동편에 위치한 건물지의 기단과 원지배수로의 남벽으로 기능하던 석렬이 서편으로 오면서 원지배수로와 갈라져 진다. 잔존규모는 높이 약 55㎝, 2단가량이다.
4) 제1담장
사진 4. 제1담장 전경(남 )
空間分割을 위한 외곽담장으로서 東·西·南便區間이 조사되었다. 비록 구간별로 축조기법이 다르게 적용되고 유실구간이 많지만 軸線上 일치하고 있어 일단 단일유구로 파악하고자
한다. 남편구간은 폭 70㎝내외로서 담장 양편에 강돌을 조밀하게 깔아 놓은 폭 75㎝의 補築石列을 시설하였으나 내측은 유실이 심한 편이다. 이 구간은 中庭址의 南壁으로도 기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門址 1기가 확인되었다. 동편구간은 폭이 100㎝내외로 비교적 넓은 편에 속한다. 남쪽이 잔존상태가 양호하며, 전체적인 구조는 남편구간과 비슷하다. 補築시설은 윤곽이 불분명하지만, 원래는 남편구간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구간은 개축하여 강돌을 일렬로 세워 담장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中庭址의 東壁으로 기능하는 구간에서 石確이 놓여 있고 일부 적심이 관찰되는 推定 門址 2기가 발견되었다.
서편구간은 일부 유실구간을 포함하여 총길이 약 45m가 확인되었으며, 폭은 65-69㎝내외로 조사되었다. 담장의 양단은 비교적 큰 강돌을 사용하였고, 그 사이에 작은 강돌로 채운 형태로서 이 구간의 남쪽에서는 큰 강돌을 사용하여 改補修한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서편구간과 남편구간이 접하는 서남모서리가 내측으로 약 2m가량 내물려 축조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일부 잔존하는 담장석을 볼 때 原形은 直角形態였다가 후대에 개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담장의 양측에는 폭 88-108㎝정도의 보축시설이 담장과 평행하게 시설되어 있었으며, 담장과 보축석렬사이의 공간은 별다른 시설없이 사질점토만으로 처리하였다. 담장의 補築施設의 用途는 담장보호 뿐만 아니라 南北步道와 제1담장의 서편구간 보축시설을 연결하는 東西步道의 존재에서 步道로서도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제2담장
남북보도 서편에서 남북향으로 노출된 이 유구의 평면구조는 제1담장 서편구간과 동일하지만 규모는 약간 크다. 담장의 폭은 90㎝내외이며 보축시설은 동쪽이 95㎝, 서쪽이 100㎝의 폭을 가진다. 조사구간의 남단에서는 폭 30㎝의 배수로가 발견되었다. 남북보도에서 서편으로 연장되는 동서보도가 확인된 바 있어 이 유구의 동쪽 보축시설이 보행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建物址
제1건물지는 제6차년도 조사에서 원지배수로 남편 매립층 상부에서 정면 10칸, 측면사진 5. 제2담장 전경(남 )
4칸의 건물로 추정된 바 있으나 일부가 유실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잔존 적심
거리는 약 2.5m내외로 실측되었고, 건물기단 일부가 잔존하고 있다.
제2건물지는 제1건물지 서편에서 확인되었으며,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역시 제3축대의 매립층 상부에 축조되었는데 주칸거리는 일정치 않고 적심의 축선도 불안정하다. 정면 주칸거리(동에서)는 3.5m, 2.5m, 측면은 남에서 1.5m, 3.5m로 각각 실측되었다.
사진 6. 제3건물지 전경
제3건물지는 제1담장 동쪽공간의 前面에서 확인되었다. 동남편 적심 1기가 유실되었으나 잔존 적심으로 추정하면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주칸거리는 모두 5.5m로 실측되었다. 이 건물지의 앞에 위치한 중정지의 서편담장과 연결되는 동서담장에서 문지 1기가 확인
되었다. 제4건물지는 제3건물지의 후면에 위치하며 잔존규모는 소형으로 정면2칸, 측면 1칸이다.
7) 南北步道
사진 7. 남북보도 전경(남 )
제1담장 서편구간의 서쪽에서 남북향인 보도가 약 40m가량이 확인되었다. 85㎝의 폭으로 側石의 兩面을 정연하게 맞추고 그 사이에 비슷한 크기의 강돌을 채워 축조한 형태로서 표면을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이 남북보도에서 제1담장으로 진입하는 폭 1.1m의 동서보도가 확인됨에 따라 제1담장 외측보축시설의 용도가 보행로로서의 기능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북보도에서 서편으로 연장되는 동서보도 일부가 확인되어 이 구역이 분황사에서 동편과 북편의 건물지로 진입하는 주통로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石板橋를 중심으로 남쪽 일부 조사구간이 개축되어 북쪽구간보다 작은 강돌을 사용하여 다소 거칠게 처리되어 있었다.
8) 石板橋
사진 8. 석판교 전경(서북 )
南北步道와 苑池排水路의 交叉地點에서 발견된 이 유구는 石材 1枚를 다듬어 제작된 것으로 상면과 측면은 모두 정다듬한 반면에 후면은 거친 편이다. 길이 158㎝, 너비 78㎝, 두께 15-25㎝의 크기로 별다른 橋臺施設없이 苑池排水路의 남벽과 북벽에 얹어 놓은 형태로 설치되어 있었다. 사찰방향으로 연장되는 남북보도를 볼 때, 사찰과 주변건물지의 왕래를 위해 시설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9) 苑池排水路
사진 9. 원지배수로 전경(동 )
皇龍寺址 展示館 敷地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苑池의 排水路가 이번 조사지역을 東西로 관통하면서 서북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은 제6차년도 발굴조사에 서 확인된 바 있다.
이번에는 배수로의 서편연장구간을 주로 조사한 결과 2단, 혹은 3단으로 깊이 약 70㎝내외, 폭 85㎝정도의 규모로 확인되었다. 벽석은 30-40㎝ 크기의 강돌을 주로 사용하였다.
사진 10. 북편배수로 전경
10) 北便排水路
東南-西北向으로 조사지역의 최북단에서 노출되었으며, 2차례이상의 改·補築이 있었다. 현존 배수로의 폭은 약 180㎝이며, 허튼층 쌓기로 축조된 상·하단 벽석의 크기는 30~50㎝정도로 최대2단이 남아 있다. 내부바닥면은 자연층을 이용하였으며, 다량의 와편과 강돌이 내부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 배수로의 남편에서 배수로와 동일방향인 面北向의 석렬 2기가 노출되었다. 모두 현존배수로의 벽석보다 상대적으로 큰 직경 60~70㎝, 심지어는 직경 100㎝의 강돌을 세우고, 벽석사이의 틈은 작은 돌로 채워 보강하여 축조하였다. 내부는 강돌과 와편, 그리고 흑황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었으며, 바닥면은 현존배수로와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남편에서는 잔돌이 폭 150㎝내외로 깔려 있었으며, 두 석렬의 상부에서 담장열이 조사되었다. 이들 면북향의 남편 석렬과 대면하는 석렬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배수로의 남북벽을 모두 신축하기 보다는 당시의 필요에 의해 남벽을 북쪽으로 옮겨 개축하면서 현재의 상태로 좁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상면에서 발견된 담장은 배수로의 물길로부터 남쪽 생활공간을 방어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 暗渠
사진 11. 제3암거 전경(남 )
제1담장 내부에서 1기(제1암거), 원지배수로 남편에서 2기(제2·3암거)가 각각 확인되었다. 南北間墻 북단에서 노출된 제1암거는 강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고, 내부에 암키와의 단부를
북향으로 낙차지게 연결하여 시설하여 놓았다. 제2암거는 남북향이며 확인된 길이는 약 19.5m로서 작은 강돌을 세워 폭 25㎝내외의 수로를 만들고 그 상면에 큰 강돌을 얹어 놓았다. 바닥면에서 인공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1·2·3축대의 상면에 축조된 사실과 원지배수로와 직접 연결된 점에서 대략적인 시기적 선후관계는 파악될 수 있다. 제3암거는 제2암거의 서편에서 발견되었으며, 구조는 제2암거와 유사하나 바닥돌이 정연하게 시설되어 있었다. 제3축대를 가로지르면서 원지배수로와 연결된 점을 보면 제2암거와 거의 동시기로 판단된다.
사진 12. 우물전경
12) 우물
조사지역의 건물지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며 모두 5기가 확인되었다. 직경 70㎝내외이며, 깊이는 조사상의 어려움으로 실측되진 못하였고, 단면은 단지형태로 추정된다. 직경 30㎝크기의 강돌을 엇갈려 쌓아 매우 견고하다. 제1우물은 둘레를 폭 100㎝내외로 작은 강돌을 돌려 보호한 반면, 제2·3·4·5우물에서는 특별한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13. 석조유구 전경(남 )
13) 石造遺構
모두 8기가 조사되었으며, 원지배수로 남편의 생토층을 굴광하고 축조한 제6·7·8석조유구는 모두 길이 87㎝, 폭 40㎝, 깊이 50㎝내외로 동일한 반면 제1담장 내부에서 발견된 제2·3석조유구는 길이가 3m가 넘는 비교적 큰 규모로 확인되었다. 강돌을 3~5단으로 면내향하게 맞춰 놓은 장방형 구조이며, 바닥은 원지반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4) 瓦窯址
원지배수로 북벽의 상면에서 발견되었으며, 규모는 동서길이 3.7m, 남북폭 1.78m이다. 燃燒室과 燒成室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나 煙道部는 파손되어 분명치 않다.
사진 14. 와요지 전경(서 )
平面 長 圓形의 燃燒室은 直徑 178㎝이며 燒成室과는 높이 60㎝내외의 레벨차를 두고 있다. 역시 平面 長 圓形의 燒成室은 내부에 적색암키와편이 중첩되어 있었고, 最上段에서
는 未燒成된 기와들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燃燒室과 灰園사이에서 方形石材 3枚로 구성된 아궁이가 발견되었으며, 灰園部는 직경 180㎝로 확인되었다. 유구간 중복관계로 볼 때, 조사지역의 유구중 가장 늦은 시기로 판단하고 있다.
사진 15. 요지 전경(서 )
15) 窯址
사진 16. 동로 세부
平面 逆三角形인 窯址로서 소성실은 길이 1.72m, 최대너비 2m, 깊이 0.37m의 규모이다. 벽면은 점토가 소결되어 단단하고, 바닥면은 소토가 부분적으로 잔존하여 있었다. 일부 벽면이 외측으로 벌어져 煙道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할석을 양편에 세운 아궁이의 외곽에는 목탄층이 灰園部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회원부에서 椽木瓦와 鬼目紋
시문된 막새가 출토되고, 주변유구의 구지표를 굴광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늦은 시기의 요
지로 추정된다.
16) 銅爐
조사지역 가장 서쪽에서 발견되었으며, 평면 원형으로 내부에서 숯과 동슬래그가 확인되어 동제련로로 추정된다. 노의 내경은 27㎝, 노벽은 6~8㎝, 깊이는 7~8㎝이며, 주변에서 일부 숯층이 발견된 이외에 관련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17) 土層調査
사진 17. 남북둑 서벽토층
분황사 사역과 조사지역의 제1축대 남쪽은 황갈색사질토층(생토)이 형성되어 있고, 그 북편으로는 하상퇴적토가 전면에 걸쳐 퇴적되어 있다. 따라서 제1축대 남쪽에서 발견된 유구들은 생토층을 굴토하여 조성된 반면 그 북편일대는 30㎝내외의 두께로 부지조성토를 깔고 건물을 조성하였다. 이들 상층은 사질점토가 네 층 정도 퇴적되었으나 후대층으로서 유
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는다.
7. 出土遺物
사진 18. 출토유물
芬皇寺址 7차년도 조사에서는 6차년도 조사에서와 같이 암·수막새, 암·수키와, 塼, 판기와
등의 와전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전체 출토유물의 약 2/3 가량을 차지하는 수막새는 古新羅時代의 것으로 편년되는 8葉單瓣蓮花紋 막새가 芬皇寺 模塼石塔의 部材인 安山巖이 다량 수습된 第2築臺 前面의 埋立層 및 와무지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그 北便의 建物址群에서는 細瓣인 20+20葉의 重辦蓮花紋 막새가 第1石築排水路와 담장 사이의 공간에서 다수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蓮花紋 막새 외에도 雙鳥紋과 複合紋 및 寶相花紋, 草花紋 막새, 그리고 고려시대의 것으로 편년되는 鬼目文과 蓮花文이 결합된 막새 또한 수습되어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암막새는 수막새에 비해 출토량이 극히 적은 편이며, 花鳥紋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암키와로는 등면에 꺧膺旭 ' 銘이 새겨진 銘文瓦가 수습되었고, 수키와는 중판길이의 縱線紋을 타날한 토수기와와 미구가 짧고 重弧紋을 타날한 미구기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塼도 다양한 형식이 수습되었다. 장방형의 無紋塼 외에도 화려한 蓮花紋과 唐草紋을 함께 시문한 紋樣塼, 그리고 가장자리에 홈을 파 놓은 結構形 塼도 발견되었다. 판기와는 출토량이 극히 적으며, 아직 그 용도도 불분명한 상태인데, 四·五·六角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외에도 鬼面瓦와 尾도 출토되어 본 유적이 번성했을 당시 건물의 格이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芬皇寺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瓦塼類가 출토되고 있으나 유구의 중복과 후대교란으로 편년설정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정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막새의 경우는 유구의 상대연대 설정에 어느 정도 기여하리라 판단된다.
土器類는 주로 建物址에서 수습되며, 燈盞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다. 이외에 엇빗금 點列紋이 시문된 臺附 과, 가는 줄무늬와 葡萄紋·小花瓣紋을 각각 시문한 甁類 등의 印花紋土器, 구연 일부에 그을음이 고착된 鉢, 그리고 器身이 껚?字形인 蓋 등이 수습되었다.
기타로는 砥石과 滑石製 容器 등의 石製類와 鐵釘 등의 金屬類도 수습되었다.
특히 출토량은 많지 않으나 中國 越州窯에서 생산된 靑磁 類가 출토되어 주목되며, 이후 유적의 성격파악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이번 芬皇寺址 7次年度 調査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으며, 그 연대는 古新羅時代부터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高麗時代까지 걸쳐지지만 유물에 대한 기존연구와 출토수량을 고려할 때 그 중심은 8~10세기로 추정된다.
8. 調査成果
이번 조사지역은 芬皇寺와 苑池 중간에 위치하는 建築物의 성격을 파악하여 유구간의 역사적 상호관련성을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고 진행되었다. 유구의 대부분이 제6차년도 발굴에서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번 조사는 구조파악을 위한 斷面調査 및 先行遺構의 存在與否에 집중하였다. 일부 구간이 결실되고 區間別 築造方式이 다르게 적용되는 제1담장의 내부공간을 먼저 살펴보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는 있으나 일정한 配置上의 特徵이 나타난다.
담장내부는 南北間墻을 중심으로 東·西 두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다. 동쪽공간은 第3建物址를 中央에 놓고 四面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推定中庭址가 前面에 위치하고 있다. 後面에는 지그재그형태의 步道, 小形建物, 暗渠形 瓦列, 竪穴遺構 등 여러 施設物이 다시 間墻으로 空間分割이 이루어진 좁은 공간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쪽공간은 그 南便에 長臺石基壇을 사용한 建物址가 남아 있으며, 北便에는 第4建物址와 石造遺構 등이 잔존한다. 동쪽공간과 같이 북편은 공간을 세분하기 위한 間墻들이 발견되어 동서 두 공간이 유사한 配置構造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건물지나 담장의 흔적이 여러 지점에서 관찰되고 있으나 훼손이 심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제1담장 외곽의 서편에서 노출된 南北步道는 조사지역 전체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즉, 南北步道가 苑池排水路와의 교차지점에 石板橋를 설치하여 芬皇寺로 연장되고, 南北步道에서 分岐된 東西步道를 시설하여 제1담장과 제2담장의 補築施設로 연결되는 사실은 이 구역이 분황사로부터 주변의 생활공간으로 진입하는 主通路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남북보도를 기준으로 동서 양쪽에 보축시설을 갖춘 담장이 마주하고 있는 건물배치는 보다 큰 공간분할이 이루어져 운영되었음을 아울러 시사하고 있다. 아직 北川의 流路變更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형편이지만 본 조사지역을 포함하여 분황사 역시 河川氾濫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조사지역에 퇴적된 河床堆積層과 流失區間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 안정적인 생활공간 유지를 위해 원지로부터 연장된 배수로, 북편배수로, 암거, 우물, 건물지 주변의 소배수로 등을 시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지역내의 유구간 時期的 先後關係는 대체로 3기로 구분될 수 있다. 第1期는 芬皇寺 造成時期로서, 당시 閼川의 범람에 노출되었을 敷地의 北端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第1築臺가 築造된 時期이다. 第2期는 第1築臺 舊地表에 강돌과 와편, 사질점토가 섞인 埋立土를 유구의 基壇土로 사용한 시기이다. 조사결과, 유구 대부분이 第2築臺와 同時代, 혹은 共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第3期는 瓦窯址와 일부 중복된 담장 등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芬皇寺의 社會經濟的 位置變化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芬皇寺 金堂의 重建過程을 보면 三金堂式의 創建期와 이를 통합하여 大形金堂을 조성한 1次重建期까지는 분황사의 社會影響力과 經濟力이 國刹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던 시기로 본다면, 河床堆積土가 쌓여 있던 寺刹의 東便과 北便의 河岸일대를 매립하면서 부지를 조성하여 분황사의 영역을 확장한 제2기와 시기적으로 대략 일치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후 金堂 2次重建期이후 衰落하는 芬皇寺의 寺勢로 볼 때, 제3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또다른 의미에서 역사적 관련성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조사에서 분황사 남편의 동서도로가 부분적으로 확인된 바 있고, 황룡사지 전시관 부지 조사에서는 원지 동편일대에서 남북도로가 조사된 바 있다. 이들 모두가 新羅王京에 적용된 方里制의 도로들로 추정하기에는 추후 정밀조사가 필요하지만, 芬皇寺 東便 回廊址, 그리고 이번에 조사된 北便排水路를 포함하여 대략적인 동서남북의 경계선으로 삼는다면 원지를 포괄한 분황사 동편일대는 동서와 남북길이 모두 600唐尺(180m)으로 추산된다. 이는 또한 新羅王京地區 S1E1의 조사결과 동서 167.5m, 남북 172.5m의 규모로 밝혀진 한 坊의 규모와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는 있으나 이번 조사지역과 원지주변일대가 신라왕경의 도시구획에서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9. 討議事項
가. 분황사와 주변 유적간의 역사적 관련성 및 공간분할
나. 조사지역 보존방안
다. 향후 조사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