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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인선
01-03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이상과 현실
색채의 폭발 : 아를 시절 1888~1889
이제 남부의 유혹이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이래 북유럽의 화가들은 지웅해로 가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과 회화를 위해, 그리고 역사적으로 풍요로운 토양을 밟으면서 지중해를 보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떠났다. 많은 예술가들이 온화한 기후와 눈부신 태양이 비추는 지중해에 매혹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이런 ‘예술적 순례’의 반향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트 위의 색들은 더 다채로워졌고, 채식은 더 밝아졌으며 주제는 점점 더 고대의 것에 가까워졌다. 튀니지를 여행하고 돌아온 파울 클레는 그 여행은 “색채의 발견”이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지금 나는 바다를 보고 있다. 남프랑스에서 머물면서 극단적인 느낌에 이르도록 색을 사용해보는 일이 내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이곳은 내가 오랫동안 가기를 원해왔던 아프리카에서도 그리 멀리 않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왜 아를을 택했을까? 아를은 드가가 이미 여름 한철을 보낸 곳이었다. 또 파리의 화가들과 오랜 논쟁을 벌이면서 두껍게 덧칠한 꽃의 정물을 그렸던 인물이며, 고흐가 숨은 실력자로 생각했던 아돌프 몽티셀리도 아를 근처 마르세유에 살았다. 에밀 졸라도 같은 지역 출신이고, 세잔은 오래전부터 엑상프로방스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아를 여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도 있었다. 고흐는 그의 선택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월에 아를로 떠난 것으로 보아 파리의 음울한 겨울을 피해 떠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아를에 도착한 직후 빈센트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를에서는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붙잡기만 하면 될 뿐, 굳이 일본 미술을 참조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이런 생각으 확인이라도 하듯, 아를의 초기 작품에선 가장 일본적인 요소들로 이뤄진 모티브를 취했다. 1888년 5워레 그린 《꽃이 핀 복숭아》가 그 구체적인 예다. 꽃이 핀 나무를 보면서 고흐는 봄을 맞이하는 기쁨을 넘어, 문을 열기만 하면 바로 극동의 풍경과 비슷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파리에서는 히로시게의 판화를 보며 감탄해야 했지만, 이곳에서는 눈앞의 현실 속에서 일본적인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웅해의 미스트랄이 불러오는 울타리 안에서 꽃을 피운 나무는 고흐의 낙관주의를 드러내며 그의 희망과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
하루에 5프랑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고흐는 따로 화실로 쓸 만한 공간이 없이 지붕 아래 방에서 거주했다. 모델이 되어줄 사람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를의 나무와 언덕, 다리, 어부의 집 같은 것을 그렸다. 19세기에도 여전히 경작지로 개발이 안 된 론 강 유역의 늪지대인 카마르그 지방, 밀밭과 포도밭, 순례지인 생트마리드라메르 해안은 그가 대도시에서 살았던 2년 동안 접하지 못한 자연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었다. 먼 거리를 산책하면서, 고흐는 제대로 먹지는 못하면서 술과 담배를 많이 한 탓에 나빠진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랐다.
조국인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 속에 살면서, 그는 자주 아를의 남쪽에 있는 운하를 따라 걸으며 다리와 그 주변 풍경을 크로키했다. 두 가지 변형된 형태로 ‘랑글루아 다리’를 그린 것도 1888년 3월에서 5월 사이이다. 차분한 분위기의 모티브, 넓게 펼쳐진 하늘과 바다, 약간의 오브제만 사용하면서 고흐는 색에 대한 실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의 주제는 색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 그린 그림이 좀 더 신중하다. 시선은 둑길을 따라 가다가 넓은 하늘에서 잠시 멈춘 뒤 좁다란 폭의 물을 따라간다. 다리 위에 있는 사람은 역광을 받으며 어두운 윤곽을 드러내고, 주위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흰색을 넓게 칠했다. 이 모든 것이 고흐가 받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처음에 그린 것응 아주 다르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강기슭에 서서 높은 하늘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데,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단히 활력으로 하늘을 향해 있다. 그림에서 사용된 모든 색에 섞인 붉은색은 마치 빛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시선은 완벽하게 현실의 사물을 향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고흐가 아를에서 조금씩 발전시킬 기법이기도 하다.
고흐는 색채의 자율성을 이용해서 그의 스승 역할을 했던 들라크루아의 방식을 극복하고 차츰 다른 뉘앙스를 지닌 회화를 창조해간다. 그림의 배색 효과는 색조의 미묘한 차이에 근거를 두었지만 그림에 나타난 붓자국은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풍요로운 노랑, 빛나는 빨강은 이제 더 이상 외양을 그리는 차원이 아니다. 색은 현실에 대한 화가의 인간적 표형이고, 그 자체만으로 화가 개인을 드러내는 수단인 것이다. 빛과 그림자, 색의 반사와 굴절이 의도적으로 부드럽게 표현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실제의 지각 작용과 연결되어 그림에 나타난다. 어떤 색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의 색과 똑같아서가 아니라 표현의 강렬함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건강할 때에는 빵 한 조각을 먹고 약간의 술과 담배를 피우면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지, 그리고 저 높은 곳에 있는 별들과 무한을 느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누가 뭐라고 해도, 꿈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여기에 살면서 태양을 ale지 않는 사람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강렬한 표현의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한 설명을 구할 수 없다. 1888년 6월에 그린 《수확기의 풍경》같은 작품은 사물의 외양에 대한 관심으로 보인다. 여기서 고흐는 배경의 부드러운 푸른빛으로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강렬한 색을 사용해서 현실의 이미지에 따르는 사실적이고 전통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고흐는 카페의 위층의 값산 방에서 지내다가 조금씩 살림살이를 갖추어 5월에는 유명한 ‘노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에는 화실을 내고 아를에서 그린 작품을 둘 만한 공간이 충분했다. 이 시기까지 고흐는 여전히 낙관주의자였다.
1년에 한 번, 5월 24일에는 유럽의 집사들이 그들의 수호성녀인 사라를 기리기 위해 생트마리드라메르의 어촌으로 모여든다. 이때는 두려움과 호기심에 이끌린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이 지역 전체가 소란스러워진다. 고흐도 여기에 자극을 받아 지중해 해안을 여행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를 주변을 돌아다니는 일은 끝내게 된다. 1888년 6월 초에 그린 《바닷가의 어선》은 ‘해안 풍경’이라는 창작 초기의 주제를 한층 풍요롭게 해서 다시 그린 것이다. 바다는 그림 가장자리까지 넘쳐나고 하늘과 가까스로 분리된 수평선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데, 그림의 사물은 사진 같은 정확성을 보여준다. 빈센트는 작은 배의 흔들림이나 돛대가 복잡하게 기울어진 모습 같은 흔한 모티브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질의 특성을 인식해낸다. 자신이 인식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파노라마처럼 만들기 위해서, 배, 꽃병, 의자, 구두 같은 일상의 물건을 제시하는 그의 태도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고 할 정도이다.
색의 자율성이 형태의 자율성과 보조를 맞추는 것은 아니다. 고흐는 언제나 사물의 윤곽과 칩체감, 표면의 조직 같은 것은 현실과 관련해서 구성했다. 그런 사실은 고흐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도 밝히고 있다. “내가 스케치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어떤 색을 사용할지 결정할 때 나는 완전히 자연에서 등을 돌리고 과장과 생략의 과정을 거친다네, 하지만, 형태라면 다르지, 나는 내가 그린 형태가 정확하지 못해 실제와 다를까봐 겁이 난다네.”이어 그는 “내가 작품 전체를 창조한다고는 할 수 없지. 그보다는 오히려 완결되어 있는 사물 자체를 발견하는 것인데, 다만 그것을 철저히 분석해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지”라고 쓰고 있다. 고흐는 나중에 그림에 쓰게 될 사물을 접했을 때 대강 스케치하지 않고 정확하게 드로잉 했다. 구체적인 모티브는 처음 그대로의 형태로 남아 있었고, 그는 작품 안에 나타날 효과를 고려해서 선택한 색을 그 위에 제2의 피부처럼 칠했다. 그렇게 해서 대상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이 기묘한 사람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직업 없이 화가로 살았다. 그의 성(姓)인 고흐는 발음이 어려워서 그림에 서명을 할 때에도 빈센트라는 세례명만을 재빨리 쓸 뿐이었다. 그런 고흐였기에 낯선 곳에서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초상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을 알게 되는 데는 거의 6개월이 걸렸다. 초상을 그리는 일은 그의 삶에서 그토록 자주 거부당하곤 했던 우정과 사랑에 대한 예술적 대면을 뜻했다. 그는 초상화에 대해 말하면서 “내 안의 가장 선하고 심오한 것을 끄집어내도록 해준다.”고 했다. 색은 이런 특성을 구체화하는 수단이었고,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별개로 자율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가 초상을 그린 인물들은 dEjs 의미로는 모두 고흐처럼 사회의 주변인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파리에 사는 동안에도 동생의 초상은 그린 일이 없다.
“언덕 꼭대기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포도밭과 수확기의 밀밭이 보이는 이 지방을 무한히 넓고 평평하다. 여기의 모든 것은 바다의 표면이 수평선에 닿아 있듯 무한으로 뻗어 있는데, 그 경계에는 자갈로 덮인 언덕들이 있다.”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6월 말경에 그린 《주아브병 밀리에》는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보병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탕기 영감》이후 첫 번째 초상이다. 아프리카에서 휴가를 맞아 아를에 온 군인을 보고 고흐는 드디어 ‘모델’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름이 밀리에인 이 모델은 고흐에 대해서 “이 사람은 드로잉에는 재능도 있고 안목도 있는데, 붓만 들면 그림이 이상해진다”고 말했는데,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초상화도 주문에 의한 것이 아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의상을 입고 있는 이국적인 군인의 모습이, 드가가 모로코에서 만났던 원주민 모델을 연상시켜서 그리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공간과 평면의 독특한 대비가 특징이다.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얼굴선은 옷의 장식적 모티브를 바탕으로 더 두드러지며 덧칠한 배경의 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타일로 된 바닥은 그림의 전면의 빠져나오는 것 같은데, 이 때문에 모델의 앉은 자세가 불안정해 보인다.
“생트마리의 해안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해변은 아주 평평한 모래밭인데 초록, 빨강, 파랑의 작은 배들이 있어 배들의 모습과 빛깔이 얼마나 예쁜지 꼭 꽃을 보는 것 같다. 그 배엔 단 한 사람만이 탈 수 있어서 먼 바다로는 가지 못해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떠났다가 바람이 세게 불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오고는 했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가 그린 인물들은 그가 예술적 방법을 고수하기 위해 만들어낸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돈을 받고 초상화를 그릴 수가 없었다. 고흐는 자신만이 포착할 수 있는 얼굴의 특징을 선으로 응축시켜 인물을 그린다. 반대로, 그들의 포즈와 옷차림, 색의 사용과 그림의 구조는 개인적 표현이기보다는 색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장식적 효과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고흐는 인물을 그릴 때 붓을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쇠는 달궈져 있을 때 두드려야 한다”고 쓰기도 했는데, 이런 주제는 오노레 도미에 같은 풍자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감한 작업 방식을 연상시킨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배경과 인물의 신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옷 색깔의 변화는 빠르게 작업을 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침내 모델을 찾아냈다. 그는 알제리 출신의 보병으로 황소처럼 굵고 강한 목과 호랑이 눈을 가진 조그만 사내다. 나는 그의 초상을 하나 그렸고, 다시 두 번째 것에 착수했다. 제복은 에나멜 그릇 같은 푸른색이고, 거기 달린 줄과 가슴 위에 단 두 개의 별은 바랜 듯한 주황색이 담도는 붉은색이다. 칙칙한 느낌의 푸른색을 정확히 그려내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여름에는 《일본 소녀》와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을 연달아 그렸다. 고흐의 설명에 따르면, 프로방스 출신으로 열두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인 일본 소녀와 ‘소크라테스를 닮은’조제프 룰랭은 둘 다 노란 집의 같은 의자에 앉았다고 한다. 소녀에게 의자가 너무 커서 버들가지로 엮은 커다란 등받이가 소녀의 가녀림을 부각한다. 반대로 등을 꼿꼿이 세운 우편배달부는 다소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 비좁은 의자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보인다. 소녀의 치마와 우편배달부의 제목은 의복이라는 기능보다는 하나의 채색된 장식물의 기능을 한다. 반면 그들의 얼굴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흐는 수줍고 예민한 시선을 지닌 소녀와 화난 듯 부어오른 얼굴을 한 우편배달부에게서 친숙한 이웃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초상에서 우리는 작품 활동을 하던 초기 때부터 고흐를 매혹했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주위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초상이었고, 고흐는 화가의 시선을 지니고 그들에게 다가서려고 모색하면서 연대감을 표현한다.
그해 여름 내내 고흐는 수백 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것은 밤의 풍경을 그릴 때, 어둠을 표현해내기 위해 어떤 색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빛이 있어야 보게 되는 색으로 어떻게 그 반대어인 어둠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흐는 밤에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이 문제에 다가설 핵심적인 체험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하늘은 밝지도 않고 음산하지도 않고,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다.”라고 그 감동을 글로 썼다. 그는 어두워진 수평선 위로 흩어진 빛이 간직한 분위기를 그려내기를 원했다.
인공 조명에서 작업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고흐는 1888년 9월에 《밤의 카페》를 그렸다 그는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서, 며칠 동안 낮에 잠을 자고 밤에는 나른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술에 취해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 당구 치는 사람들, 구석에서 껴안고 있는 연인들의 이미지는 희망 없는 세상이라는 인상을 준다.
빈세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빨강과 초록으로 인간의 끔찍스러운 고통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밤은 흐릿한 노란빛이 도는 핏빛 빨강이고, 그림의 가운데에는 초록의 당구대가 있고, 레몬빛 램프에서는 초록 반점이 있는 오렌지색 불빛이 퍼녀 나온다. 빨강과 초록의 대조, 야행성의 사람들, 음울하게 비어 있는 공간, 파랑과 보라, 어디에나 싸움과 대립의 흔적이 있다.”이어 그는 “나는 카페가 사람을 타락시키고 악행을 저지르게 만드는 광기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해보려고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고흐의 그림에서 모티브 자체가 삶에 대한 비극적 견해를 드러내는 드문 예이다. 사실 인생의 마지막 2년 동안 고흐 자신도 ‘사람을 타락’시키는 이곳에 자주 드나들면서 지나치게 술을 마셨고 마지막 남은 돈까지 다 써버림으로써 몰락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래서 밤의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풍경 자체보다는 절망과 고통에 연결된 고독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램프 주위에 나타나는 후광만이 밤에 그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밤의 카페》는 밤의 느낌과 인상을 그리기 위해 거쳐가는 시기의 그림일 뿐이다.
얼마 후, 고흐는 아예 밖으로 나가서 《밤의 카페 테라스》라는 그림을 그린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환하게 불이 켜진 카페 테라스의 붉은빛이 감도는 노랑과 밤의 짙은 푸른색은 보색 대비를 이룬다. 그림 중앙의 어두운 부분은 카페 입구의 윗부분과 지붕의 평행한 선에 의해 강조되어, 카페의 불빛을 돋보이게 한다. 점점이 빛나는 하늘의 별들은 카페의 희미한 불빛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밝게 표현하면서 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19세기의 유산이지만, 인공 조명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미 바로크 시대에 기분 전환을 즐기려는 화가들이 조아하던 방식이다. 그런데 고흐는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두 가지 방식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는 예리한 관찰을 통해 어둠의 요소를 파악할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그림을 인상주의의 명료함과 구별해내려고 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면서어스름한 대기의 변화에 감탄해 “밤은 낮보다 훨씬 생생하고 다앙한 색을 가졌다”고 확언하기도 했다. 알아보기 힘든 사물의 외관은 정확하고 환상적인 묘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동안 고흐는 특히 밤의 풍경을 연이어 그렸는데,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별이 빛나는 밤》일 것이다.
1888년 9월에 그린 《노란 집》은 밤이 배경은 아니자만 색조는 《별이 빛나는 밤》과 똑같다. 5월에 집을 세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흐는 노란색으로 집을 칠한다. 노랑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 의미를 지닌 색이다. 가구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집안에는 빈 공간이 많았다.
동생 테오가 3백프랑을 대주어 몇 점의 가구를 사들이고 완전히 이사를 한 것은 9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았으며 이런 충족감은 그에게 자유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그가 오래전부터 꿈꾸어왔던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도 갖게 된 것이다. 기쁨에 넘쳐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집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마치 그 집들이 모두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동안 노란 집은 고흐에게 소중한 모든 것의 상징이었고, 그의 행복을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고흐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를 하나의 정신자세로 이해했고, 개인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특히 고갱과의 접촉을 통해 그것을 체험했다. 상징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에두아르 뒤자르댕은 1889년에 이 시기 젋은 예술가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던 양식에 대해 글을 썼다. “회화와 문학의 고유한 수단을 가지고 사물에 감정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회화와 문학의 목표다. 표현해야 하는 것은 이미작 아니라 바로 이런 특성이다. 사진처럼 단순 복제를 하는 모방을 피하면서 선택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밤샘을 하는 카페의 테이블에서, 나는 카페가 사람을 타락시키고 악행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광기의 장소라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밝은 분홍과 선홍색, 그리고 어두운 빨강이 대조되고, 루이 15세 시대에 유행했고 베로네세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초록은 진한 황록색과 청록색의 대조된다. 여기의 모든 것이 마치 지옥의 불처럼 창백한 유황색의 분위기를 띤다. 나는 카페의 어두운 힘을 그리고 싶었다.”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8월에 그린 고흐의 《꽃병에 꽂혀 있는 열두 송이 해바리기》 같은 작품은 정확히 이런 본질을 추구한 것이다. 꽃은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 있지만, 덧칠해진 색, 어지럽게 날리는 꽃잎, 꽃부리를 비추는 빛과 밝은 파란색 배경으로 인해 그림은 단순한 꽃의 이미지를 넘어서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이 해바라기들은 화가의 상상력으로 인해 독창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고흐는 꽃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심오한 표현의 힘을 보여준다. 『산도스의 편지』를 쓴 시인 호프만스탈은 상상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물뿌리개, 밭에 두고 온 쇠스랑, 태양 아래 있는 개, 교회의 보기 흉한 뜰, 이 모든 것이 계시에 적합하다. 여느 때 같으면 무심하게 지나쳤을 이 모든 것이, 예상치 못했던 한순간에 숭고하고 감동적인 형상을 띠고 나타난다.”
가장 진부해 보이는 세계 속에서 내적 성찰을 하려는 욕망을 지녔던 것은 고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협죽도가 꽂혀 있는 마욜리카 꽃병》에서 볼수 있는 식물의 황홀한 떨림은 사물 뒤에 있는 세상에 대한 의지적인 탐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뒤자르댕이나 호프만스탈이 강조했던 상징주의 예술은, 예술적 천재와 예술가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종류의 환상이 가진 우월성을 의식하고 있는 예이기도 하다. 반면 고흐의 상상력은 진정으로 내면에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과도한 감정과 격렬한 의지는 그의 정신병을 예고하고 있다. 상징주의자들이 높게 평가했던 이국주의나 의미의 난해함에 비교해 볼 때, 그의 그림은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주며 이해도 쉽다. 그런 면에서 고흐는 순수한 탐미주의자는 아니었다.
“저녁마다 밖에서 카페를 본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커다랗고 노란 등이 테라스와 건물 앞면과 인도를 밝게 비추고, 보랏빛으로 물든 거리를 비춘다. 별이 빛나는 푸른 하늘 아래 뻗어 있는 도로를 향해 나 있는 집들은 어두운 파랑이거나 보라색이다. 집 앞에는 초록의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거기에는 오직 아름다운 파랑과 보라, 초록만이 있을 뿐, 검정색을 쓰지 않은 밤 풍경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이 켜진 카페는 창백한 유황색과 싱싱한 레몬빛을 띤다.” - 빈센트 반 고흐
상징주의 미술은 윤곽선을 가지고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부각한다. 이런 방식은 각 오브제의 고유한 특성을 표현해서 예술가의 상상력을 끓어오르게 하고 사물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데, 사물의 상징을 만들어내면서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는 하나의 양식을 구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뒤자르댕은 이런 회화 양식을 ‘클루아조니슴’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중세의 세공술과 더불어 당시 유행하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88년 11월에 그린 고흐의 《아를 여인》은 아를 역에 있는 카페의 주인이기도 했던 마담 지누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 의자의 등받이, 테이블의 면, 인물의 둘레를 윤곽선으로 강조한 클루아조니슴의 전형적인 예이다. 고흐는 이 그림의 내부를 대조적인 색으로 채워 넣었다. 묘사는 대단히 단조롭고, 채색된 선으로 그려진 세부 묘사만이 활기를 띠고 있다. 고흐는 자신의 클루아조니슴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윤곽선은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언제나 느껴지는 것인데, 이 기법은 윤곽선이 둘러진 그림의 표면을 단순화된 색으로 메우는 것이다.”
클루아조니슴은 고갱이 주도하던 퐁타방파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갱은 거의 독단적이라고 할 만큼 현실의 모방으 거부한 채 사물의 표면에 윤곽선을 그렸다. 고흐는 그와 달리 보다 유연한 방식으로 전체를 보았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색의 변화를 준 윤곽선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했는데, 그 필요를 정하는 것은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그림 전체에서 드러나는 효과였다. 바로 그 지점이 고흐와 고갱이 충돌하는 부분으로, 고갱은 고흐가 엄밀한 정확성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바람 한 점 없이 뜨거운 여름이다. 내겐 딱 좋은 날씨다. 노랑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태양과 햇빛, 창백한 유황색, 부드럽고 눈부신 황금 빛,아! 얼마나 아름다운 노랑인가.” - 빈센트 반 고흐
1888년 10월에 그린 《트랭크타유 다리》를 보면 고흐는 거의 아무런 색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그림 왼쪽의 복잡한 선과 오른쪽의 차분하고 커다란 면적의 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론 강 위에 있는 다리인데 강은 그리고 있지 않다. 그림의 단조로운 색은 네덜란드 시절을, 모티브는 파리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공간을 극도로 왜곡한 것과 원근법이 무시된 관점은 생애 마지막 몇 년의 창작활동과 연결된다. 그림의 전경에 있는 계단은 지하 통로가 설치된 틈새로 사라지면서 언제라도 끊어져버릴 것처럼 약해 보이는 강철 구조물과 대조를 이룬다. 이 평온 상태, 언제라도 깨지기 쉬운 균형을 ‘표현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흐를 최초의 ‘표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가? 공간을 다루는 그의 방식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집의 외부는 버터빛 노랑으로 칠했고 겉창은 진하 초록으로 칠했다. 집은 광장으로 나 있는데 거기에는 플라타너스와 협죽도, 아카시아 등 초록의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이 하나 있다. 집의 내부는 모두 흰색으로 칠했고 바닥엔 붉은 타일을 깔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는 눈부시게 푸른 하늘이 있다. 이 집에서 나는 진실로 살 수 있고, 숨쉬고, 생각하고, 그릴 수가 있는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가 색을 다루는 방식을 보아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색은 본질적으로 표현에 대한 그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각가 1888년 6월과 11월에 그린 두 종류의 《씨 뿌리는 사람》은 강렬하고 과감한 색채와, 당시로선 균형을 잃었다고 볼 만큼 붓자국을 드러낸다. 두껍게 덧칠한 ‘거대한 레몬색 원반’같은 태양이 그림 후면의 진노란색 하늘에 잠겨 있는 것을 보여준다. 전경에는 흐릿한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 대지가 있는데 이것은 실제의 색과는 정반대이다. 노랑이 아닌 파란 밀밭, 파랑이 아닌 노란 하늘, 여기에서 유일하게 고려하는 것은 색의 대비로 얻어지는 효과이다.
“당신이 아를 여인의 초상화를 맘에 들어 해서 정말 기뻤습니다. 내가 그려놓은 드로잉에 충실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색을 칠할 때에도 드로잉의 단순한 특성과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조심하면서도 자유롭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를 여인을 요약한 것이지요. 아를 여인들에 관한 그런 초상화는 드문 것이므로, 이것을 우리가 여러 달 동안 함께 일한 결과로, 즉 우리의 공동작품으로 여겨주기 바랍니다. 나는 이 작품 때문에 한달이나 앓아야 했지만, 이 그림이야말로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처럼 그림에 사로잡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고 싶어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알게 될 것입니다.”(폴 고생에게 보내는 편지) - 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그림은 조금도 추상적이지 않다. 두 그림에서 화가의 표현 수단으로 쓰이는 색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현실이다. 바로 그 점에 고흐의 진정한 ‘표현성’이 있는 것이다. 고흐는 색채와 구도를 통해 나날이 삶에서 추려낸 것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 현실의 외관과 대조를 이루는 그의 해석은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하며 강한 표현 의지를 보여준다. 순수하게 주관적이며 예술로 승화된 새로운 현실이 실제의 현실을 대체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장인 계급을 변호하는 글에서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에 온 힘과 마음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그가 비록 빈약한 기술을 가진 장인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존속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고흐 역시 화폭 위에서 손을 움직여 그림을 그릴 때만 작품 전체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한 기법을 따르려 하기보다 러스킨이 강조했던 것처럼 개인의 표현을 변형하여 드러낼 줄 알았던 최초의 화가이다. 그는 스스로를 이론가나 의식적인 해설자로 여기지 않았고, 붓과 그림을 가지고 나날의 삶에서 얻어진 것을 그려내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러스킨과 고흐는 각기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대단히 도덕적이고 진지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 창조성을 지닌 개인의 존엄을 변호하고자 했다. 그런데 예술적 행위의 자유로움이 요구되는 표현은 의미를 전달하기 어려웠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의 냉담함을 뚫고 길을 내야 했다.
고흐가 일생동안 부닥쳤던 주위의 냉담함은 아를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던 것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풍경이나 초상처럼 마음을 들뜨게 했던 주제들도 이미 오래전에 바닥났다. 게다가 시골에서는 파리에서처럼 다른 예술가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주변의 현실이 그의 작품 활동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어 왔는데 그런 외부의 시험과 도전이 점점 사라졌다. 그 결과 고흐는 예술이 그에게 남겨준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게 되었다. 자유롭고 자족적인 화가들의 공동체는 그의 오랜 꿈이었다. 이런 공동체는 오래전 고갱이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 고흐는 고갱과 함께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는 베르나르와 쇠라, 그리고 시냐크와 협력해서 작품을 만들어갈 기관을 세우려 했다. 이것은 아를에서 주고받은 편지들에서 나타난 유일하고도 주된 관심이었다. 고흐가 그해 여름부터 그린 모든 그림에 이런 기대감이 담겨 있다. 함께 살면서 공동의 화실인 노란 집을 꾸미고 예술에 대한 풍요로운 토론을 나누게 되리라는 기대감이다. 고갱은 실제로 왔다. 이렇게 해서 고흐의 우울증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 ‘아를의 비극’이 시작된다. 고갱과 함께 하는 생활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 시작은 이렇다. 고흐가 파리를 떠난 것과 거의 동시에 고갱도 파리를 떠났다. 그러나 고갱은 남프랑스가 아닌 브르타뉴로 갔는데, 그의 생각에는 그곳에 더 원시적이고 돈이 덜 들렀으며 풍경도 한결 장엄했던 것이다. 고갱은 계속 빚을 지는 생활을 했고, 이따금 친구들이 찾아오는 가운데 퐁타방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고갱은 자신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천재라 생각했고, 고흐와 마찬가지로 화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화가들의 모임에는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포함되어 있었지만 고흐는 없었다. 고갱의 더 원대하 목표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르티니크로 떠나서 열대의 풍경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럴 돈이 없었다.
고갱은 테오 반 고흐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고, 빚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테오의 경제적 도움에 의존했다. 테오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아를에 있는 빈센트도 마찬가지였다. 빈센트는 고갱이 가난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가 아를로 오도록 설득해달라고 동생 테오에게 요청했다.
고흐의 마음속에선 이미 고갱과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고갱은 여전히 고흐를 기이한 사람이라 여기고 화가로서 재능이 부족하다고 의심하면서 아를로 오기를 망설였다. 게다가 그는 테오도 불신했다. 1888년 10월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테오가 이일에 관하여는 진짜 이유는 상업적 술책일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테오가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단지 나에 대한 호의로 남프랑스에서 사는데 필요한 돈을 대주리라 생각하진 않네. 네덜란드인다운 냉정함으로 상황을 검토하고, 독점적인 방식으로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의도인 거야.”
고갱의 이런 거부감은 고흐의 화를 돋우었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집이 고갱을 만족시킬 만큼 매력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은 가장 작은 방에 허름한 침대로 만족하면서, 고갱을 위해서 비싸고 안락한 가구를 사들였다. 이 시기에 고흐의 그림은 고갱의 도착을 기대하는 흔적들을 담고 있는데, 특히 노란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해바리기’연작이 그렇다. 이 당시 고흐의 그림이 지니는 장식적 효과는 이 그림들이 미술 작품이 아닌 장식품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 그림들은 고갱과 협력하기 위해 출발점이 되면서, 고흐의 예술적 재능을 증명해준다.
고갱은 대단한 화가라 평가했던 고흐는 5월 말경부터 흥분 상태에서 작업을 해나간다. 이 시기에 그는 “고갱이 하는 모든 일에는 부드럽고 아늑하고 감동적인 면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진정한 시인들이 그렇듯이 그도 작품이 팔리지 않아 고통 받는다.”라고 썼다. 고갱을 기리기 위해 고흐는 아를의 공원을 그린 그림에 《시인의 정원》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이 그림을 손님으로 올 고갱의 방 한가운데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고갱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번번이 도착 날짜를 연기했고, 편지에서는 이런 머뭇거림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듯 경제적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마침내 테오가 고갱의 모든 빚을 갚아주자, 10월 23일 아침에 아를에 도착했다.
이제 파국에 이르게 된다. 빈센트는 마침내 자신의 꿈이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고갱을 스승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이 배워온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학생처럼 굴었다. 그들은 함께 수많은 주제들을 연구했고,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고 예술에 대해 토론했다. 신중한 책략가이자 합리주의자였던 고갱과 비교할 때, 고흐는 충동적이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자기 환상에 갇혀 있었다. 그해 12월에 고갱은 불만에 사로잡혀 말했다. “고흐는 낭만주의자이지만 나는 원시적인 것이 더 좋다. 그는 우연을 기대하여 색을 덧칠하지만, 나는 무질서한 작업을 혐오한다.” 고흐는 그림의 표면에 윤곽선을 두르고, 자연을 모방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면서 잠시 고갱의 이론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 파리에서 했던 것처럼 다른 작품들을 열심히 베껴 그렸고, ‘머리로 만들어낸 그림’인 추상에 빠져들었다.
“이 사람은 미쳐버리거나 혹은 우리를 훨씬 앞질러 갈 것이다.” - 까미유 피사로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추상은 나를 유혹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받은 천국이었고 이내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것은 고흐가 테오에게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쓴 글이었다. 고갱의 방법이 그대로 고흐의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협력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고갱은 자신이 고흐 형제의 음모에 희생되었다고 느꼈고, 심지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고갱을 따르고 배우려 했던 고흐 역시 실망했다. 처음에는 예술과 관련된 갈등이 생겼지만, 곧 서로의 불평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성격이 너무 달라서 내가 떠나야만 한다.”
“트랭크타유 다리와 계단은 어느 흐린 날 아침에 그린 것이다. 석조와 아스팔트와 자갈길,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흐릿한 푸른 하늘 아래 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갔고, 구석에는 노랗게 시든 잎을 단 작은 나무가 하나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은 그의 꿈,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겠다던 꿈이 고갱과 잠시 지내는 사이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고흐가 그해 12월에 그린 고갱의 의자와 그 자신의 의자에는 그런 고독감이 잘 나타나 있다. 예전에는 둘이 앉아 함께 이야기하던 의자였는데 이제는 모두 비어 있다. 그것은 부재의 은유이다. 나무로 된 고흐의 의자가 좀 더 소박한데, 위에는 본래 그의 물건인 것 같은 파이프 담배와 쌈지가 놓여 있다. 반면에 고갱의 의자는 더 세련된 팔걸이가 달려 있는데, 그의 열정과 지식을 보여주듯 촛불과 책이 놓여 있다. 고흐가 자신의 의자에 칠한 노랑과 보라는 이미 《노란 집》을 그릴 때도 썼던 색으로 밝은 대낮과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반대로 빨강과 초록을 칠한 고갱의 의자는 밤의 카페와 어둠과 잃어버린 희망을 떠오르게 한다. 낮과 밤이라는 이 두 예술가들의 대조는 그들 미래의 대안이기도 했다. 그림은 고갱이 고흐의 밤을 밝혀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갱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를을 떠나려고 할 무렵 고흐의 태도는 너무 이상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고흐가 ‘그러니까 당신은 곧 가겠다는 거지요?’하고 물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살인자가 도망쳤다’라고 쓰인 신문의 한쪽을 찢어와 내게 내밀었다.”그들 사이에 있던 희망과 신뢰를 저버렸기에 고흐에게 고갱은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고흐는 미쳐가고 있었다. 밤이면 종종 잠에서 깨어 고갱이 있는지를 보려고 슬며시 고갱의 침실로 들어가고는 했다. 고갱이 아를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고흐의 병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기 했지만 아프고 고통 받으면서 나를 필요로 하는 착한 사내를 떠날 수는 없었다.”
“신이 없었다면 나는 인생도 그림도 아주 잘 꾸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고통 받는 존재는 나를 뛰어넘는 위대한 무엇이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내게 인생 전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인 힘이다‥‥.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 전에는 후광을 영원의 상징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빛과 색채의 떨림으로 영원을 그려 낸다‥‥. 사랑하는 남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색을 대조하거나 섞고 비슷한 색조들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한다. 정신적인 것은 이마 위에 밝은 빛으로 표현을 하고, 희망은 별로 그려 보인다. 인간의 정열은 빛을 뿜으며 지는 해를 통해 표현한다.” - 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12월 23일 저녁에 위협적인 상황이 들이닥쳤다. 고갱이 밤산책을 나섰는데, 늘 그렇듯이 의심 많은 고흐가 그를 뒤따랐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고갱이 들아보니 고흐가 일그러진 얼굴로 면도칼을 들고 있었다. 고갱이 다가가 거듭 설득을 하자 고흐는 집으로 돌아갔다. 몹시 불안해진 고갱은 여관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노란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아를 전체가 충격에 떨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환상ㅇ 짓눌리고 억제할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힌 고흐가, 고갱이 전날 밤 보았던 바로 그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이다. 고흐는 겨우 피가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한 다음 잘린 귀를 손수건에 싸서 사창가으 한 창녀에게 줬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경찰이 신고를 받고 와서 그를 찾아내 병원에 데려갔다.
이런 중에 고갱은 은밀히 떠났다. 나중에 고갱은 자서전에서 고흐가 칼로 자신을 협박했다고 변명하며 양심의 가책을 달랬다. 하지만 12월 23일 사건 직후에 베르나르에게 보낸 고갱의 편지에는 그런 언급이 조금도 없었다. 그날 밤 고흐는 자신의 원망을 드러내려고 했을 뿐, 고갱을 해칠 의도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고갱에게는 이 사건이, 바라던 대로 아를을 떠나는 빌미가 되었으므로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고흐를 한 번도 만자지 않고 떠난 것이나,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나려고 취한 태도로 인해 고갱은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결말이다. 빈센트는 병원에서 2주일을 보냈다. 그는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을 통해 이 사건의 결말을 보여준다. 머리의 오른쪽을 덮고 있는 커다란 붕대가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흐의 왼쪽에 있는 일본 판화의 경쾌한 채색은 상처를 감고 있는 붕대의 흰색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 판화는 《탕기 염감의 초상》을 연상시키지만, 그는 더 이상 그때처럼 자유롭고 정상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고갱과 같이 보낸 시간은 고흐에게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만든 드문 체험이었다.
고흐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고독을, 오랜 꿈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 여길 수 있었다. 1889년 2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긴 이상 다른 화가들에게 와서 함께 지내자고 말할 수 없다. 나처럼, 그 사람들도 그럴 마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일 년을 고립된 채 보내는데,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강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병원에서 나온 지 한 달 후에 고흐는 다시 입원해야 했다. 누군가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는 피해망상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를 주민들의 서명과 탄원으로 고흐는 병원에 수용되었다. 고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네덜란드를 떠나와야 했던 것이나 파리에서 잘 지내지 못했던 것도 그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데, 이제는 어떤 개인적인 접촉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였다. 한 명으 의사와 사제의 감독 아래 고흐는 그해 5월까지 환자이자 수용자 노릇을 하며 아를의 병원에서 지냈다. 게다가 동생이 곧 결혼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다시 한번 그는 그림에서 도피처를 찾으려고 했다. 갇혀 지내는 동안에도 《아를 풍경》과《아를 병원의 뜰》을 그렸다. 1889년 그린 이 두 그림은, 이 시기 그의 절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대신 일상에서 일어난 진부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밀실공포증을 보여주고 있다. 병원의 좁은 뜰에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기는 하지만 시야는 막혀 있다.
그림의 전경에 옹색하게 늘어선 포플러 나무는 감옥의 창살처럼 시야를 가리면서 화가가 서 있는 지점과 도시의 자유에 대한 화가의 꿈을 분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넘지 못할 경계처럼 보인다. 고흐는 자신의 상태를 아주 빠르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그렇게도 매달렸던 세상은, 그의 신앙과 정치적 참여와 예술적 행위를 모두 무시한 채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도 더 이상 그것을 쫒지 않았다. 동생이 반대하는데도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생각에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다시 화실을 열려는 생각에 빠져들어, 거기에 매달렸다가 이제 내게 돌아온 창작 의욕을 잃게 될까 두렵다. 그래서 잠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병원에 있어보려고 한다.”빈센트가 생레미로 떠난 날은 1889년 5월 8일이었다.
“그것은 아랍 건물들처럼 아치형 통로가 있고 흰 석회칠을 했다. 뜰 가운데에는 분수가 있는 오래된 정원이 있는데 여덟 개의 구역으로 나뉜 정원에는 물망초, 원산초, 미나리아재비, 노란 무꽃, 마거리트 등이 피어 있다. 또 아치형 통로 아래에는 오랜지 나무와 협죽도가 있다. 그러니까 다양한 꽃들과 봄의 초록이 피어난 그림이다.”- 빈센트 반 고흐
꽃병에 꽂혀 있는 열두 송이 해바라기(Twelve Sunflowers in a Vase 아를 1888년 8월)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마차가 있는 도개교(Drawgridge with Carriage 1888년) 오테를로, 국립 크륄러뮐러 미술관
꽃이 핀 복숭아 나무(Peach Tree in Bloom 1888년) 오테를로, 국립 크뢸러뮐러 미술관
수확기 풍경(Harvest Landscape 1888년)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바닷가의 어선(Fishing Boats on the Beach 1888년)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주아브병 밀리에(Zouave Milliet Seated 1888년) 개인 소장
의자에 앉아 있는 일본 소녀(La Mousme Seated in a Cane Chair 1888년)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앉아 있는 우편배달부 조제프 룰랭(Postman Joseph Roulin Seated in a Cane Chair 1888년) 보스턴 미술관
밤의 카페(The All-Night Cafe 1888년) 뉴헤이번, 예일대 미술관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at Night 1888년) 오테를로, 국립 크륄러뮐러 미술관
노란 집(The Yellow House 1888년)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아를여인:마담 지누와 책(L'Arle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188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협죽도가 꽂혀 있는 마욜리카 꽃병(Majolica jar with Branches of Oleander 188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공원의 남과 여(Park with a Couple and a Blue Fir Tree 1888년) 개인 소장
씨 뿌리는 사람(Sower with Setting Sun 1888년 밀레 모방) 취리히, 뷔를레 미술관
뿌리는 사람(Sower with Setting Sun 1888년 밀레 모방) 오테를로, 국립 크뢸러뮐러 미술관
트랭크타유 다리(Trinquetaille Bridge by Vincent van Gogh 1888년)
취리히 쿤스트하우스(대여 소장)
파이프가 놓인 빈센트의 의자(Vincent's Chair with Pipe 188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좌) /
책과 양초가 놓인 고갱의 의자(Gauguin's Chair with Books and Candle 1888년) 암스테르담, 국립 반 고흐 미술관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년) 런던, 코톨드 미술관
를풍경(꽃이 피어 있는 과수원, 전경에는 포플러 나무) View of Arles(Orchard in Bloom with Poplars in the Forefront) 1889년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
아를 병원의 뜰(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in Arles 1889년)
빈터투어,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
오베르 교회(The Church in Auvers 189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