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康津)은 도강(道康)과 탐진(耽津)의 합병으로 양지명 차자(次字)를 합성한 이름이다.
강진에서 고려청자와 다산 정약용(1762~1836) 및 영랑 김윤식을 빼면 내세울 것이 무엇일까.
아마, 강진 홍보 책자가 무척 가벼워지고 말 것이다.
해남(옥천)에서 강진(도암)으로 가려면 병치(兵峙:아래 그림1)를 넘어야 한다.
높지는 않으나 임진, 정유 왜란때 이 지역의 의병들과 왜군, 피아간 많은 희생자를 낸 고개다.
고개 직전 해남쪽의 만의총도 병치전투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兵峙'라는 이름의 역사는 난리 이전일까 이후일까.
이전이라면 공교롭고 이후라면 역사의 함축이다.
18년 유배생활의 인연으로 강진의 이미지 홍보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 있다.
이 일대는 다산 특수(特需)지역이다.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초당, 동암,서암, 천일각, 다산사경(四景) 등 '茶山'과 관련된 일체가 특수의
주체들이다.
18년의 강진 유배중 10여년을 보냈다는 다산초당(아래 그림2)은 본래 단산정(慱山亭)이었단다.
한데, 해남 윤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 처사 윤단(處士尹慱)이 자기의 이 산정을 유배온 다산에게
제공했다는 것.
인척(윤두서가 다산의 외증조부니까)인데다 아들 규로(奎魯) 삼형제와 조카들로 하여금 다산의
가르침을 받게 할 목적으로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다산은 윤단의 호의로 구차하지 않은 유배 생활을 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그 밖의 600여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함으로서
실학을 집대성했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학자인데도 나는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그랬을까.
초당 앞에서 몹시 불만스러운 채 백련사로 넘어가버렸으니까.
그렇다.
나는 다산에게 불만이 있다.
내가 비호의적이라는 고산(孤山), 다산의 외가 쪽 한참 어른인 윤선도(다산의 외증조부인 공재의
증조부니까 외8대조?)도 많은 우리 글 시조를 지었다.
팽배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을 극복하고 천더기인 언문으로 시조 짓기가 어찌 편한 일이었겠는가.
이 선구적 업적이 그를 국문학의 비조(鼻祖)로 받들게 한다.
다산이 일심으로 섬겼으며 자기를 총애한 정조의 생모 혜경궁도 우리 글로 한중록을 썼다.
하물며, 천주교까지 받아들인 대실학자의 그 많은 저작 속에 한글이 전무한데 어찌 불만이 없다
하겠는가.
다산초당과 백련사(白蓮寺:아래 그림2)를 잇는 800여m 오솔길.(아래 그림1)
다산과 백련사 혜장스님(惠藏禪師)과의 교우길이기도 했단다.
지금은 '아름다운 도보여행, 호남길'로 선정되었고.
만덕산 중턱에 있다 하여 만덕사(萬德寺)였는데 백련사로 바뀌게 된 내력은 분명치 않다.
다만,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서민불교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이 사찰을 중창한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1245)가 '백련결사운동'을 주창함으로서 백련사가 전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단다.
이 때, 백련사로 바뀌게 되지 않았을까.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 151호다.(위 그림)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는 7천여 그루의 동백림이 장관이다.
통일운동가로 알려진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자락에서 부활중인가.
'늦봄 문익확 학교'로.(아래 그림1, 2)
도하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운영한다는 대안학교다.
실학의 산실 다산초당, 민중불교의 본거지 백련사, 그리고 통일운동가 문익환의 대안학교가
만덕산 품에서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부디 성공하기를 빈다.
대학교수시절에도 '문이 쾅'하고 닫히면 아무도 열 수 없는 고집불통으로 소문났던 분이다.
박정희 정부가 유신통치 실현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이른 바 정치교수들을 대학에서
강제 추방했다.
그 때, 문 목사도 그 대열에 끼었다.
그를 통일운동가로 변신하게 한 원인(遠因)이다.
예언서를 전공한 제대로 된 구약학교수에게는 당연히 권력을 질타하던 옛 예언자들의 피가
흐를 것이다.(그는 구약 예언서 전공 교수였다)
그리고 목사는 목양(牧羊)의 사명도 이행해야 한다.
그는 평양으로 날아가 임수경을 데리고 휴전선을 걸어서 넘어왔다.
소위 임수경 사건은 근인(近因)이라 하겠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 찬란한 슬픔의 봄을>
순수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永郞金允植1903~1950)의 시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이 배어 있다.
이즈음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무수한 유명 문인들의 친일 행적이 회자되고 있지만 영랑은 창씨
개명, 삭발, 신사참배 등의 거부는 물론, 친일 글을 단 한편도 쓰지 않은 대표적 독립운동문인, 민족시인
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우리 말을 다루는 언어감각에서 소월(素月) 이후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는 평가도.
강진땅에'영랑'이 포함된 상호가 적지 않다는 것은 영랑이 강진의 자긍심이 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 영랑의 생가(강진읍 남성리:아래 그림1, 2, 3)를 군(郡)에서
매입하여 원형으로 복원, 관리할 만도 하겠다.
옛 농가의 도구들.
은행(銀杏)나무 (1938년 9월호 朝光에 실린 영랑의 글)
9월에 감이나 동백만이 열매이오니까. 오곡백과지요. 뜰 앞에 은행나무는 우리 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지 17, 8년인데
한 아름이나 되어야만 은행을 볼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더니 천만 의외, 이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
뼘으로 셋하고 반,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은행 세알인데 전 가족이 이렇게 기쁠 때가 없소이다. 의논성이 그리
자자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라 서로 맞대고 기쁜 체는 않지만 아버지도 기뻐합니다. 아들도 기뻐합니다. 엄마가 계
시더면 고놈 세알을 큰 섬에 넣어가지고 머슴들을 불러대어 가장 무거운 듯이 왼 마당을 끌고 다니시는 것을.
봄에 은행잎은 송아지 첫 뿔 나듯이 뾰족하니 돋기 시작하여 차차 나팔같이 벌어지고, 한 여름은 동백잎에 못지 않게
강렬히도 태양에게 도전하고, 이 가을 들어선 바람 한 번에 푸름이 가시고, 바람 한 번에 온통 노래지고, 바람 한 번에
아주 흩어지는데 다른 단풍 같지 않고 순전히 노란 빛이 한잎, 두잎 맑은 허공을 나는 것은 어떻다 말씀할 수 없습니다.
노령이신 아버지라 말씀이 없고, 괴벽한 아들이라 말이 없고, 50 생남쯤 되는 이 열매를 처음 보고도 서로가 은연히 기
뻐할 뿐이외다. 어린 놈이 "그 은행 익으면 조부님 제상에 놀래요" 하는 데는 파흥(破興) 아니 할 수 없나이다.
70년 남짓 세월에 많이도 자랐다.
내 집 앞마당의 감나무에 얽힌 가족의 분위기와 흡사하여 거듭 읽혀진다.
도성을 떠난 다산은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흑산도로 귀양가는 형 약전과 이별하고 강진으로 내려갔다.
강진땅에서 처음 4년을 보낸 곳이 강진읍 동성리 동문밖 주막(東門賣飯家).
이 집 뒷방을 빌려 사의재(四宜齋:아래 그림)라 명명하고 기거했다.
"생각과 용모, 언어와 동작 등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아래 그림은 강진군이 고증을 거쳐 복원한 사의재)
이후에 남성리 고성사(高聲寺) 경내에 초당 보은산방(報恩山房)을 짓고 2년간 기거했으며, 묵리 이학래의
집에서 2년을 더 머물다가 귤동 다산초당으로 이거하여 10년 등, 강진 유배생활이 18년이었다.
일제가 옛길 해남대로(삼남대로)를 따라 신작로를 만들며 영암까지 내려갔다.
그렇다면, 영암에서 월출산 누릿재를 넘어 잠시 강진땅(성전면)을 밟은 후 해남 우수영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상식을 거부하고 영암에서 불티재(현 풀치터널 위)를 넘어 강진 병영쪽으로 틀었다.
확증은 없지만, 이는 울돌목(鳴梁)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전라남북도와 제주도의 53주 6진을 총괄한 호남 최대의 전라병영성(兵營城)은 이조 태종 17년(1417)에
축조되었다.
동남편에 위치한 천혜의 수인산(아래 그림2)을 비롯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 형태의 요새다.
1894년의 동학농민항쟁중에 소실된 데다, 갑오경장의 신제도로 폐영될 때까지 근 500년간에 걸쳐 남도
육군 의 총 지휘부였다.
지금은 국가사적 제 397호 '전라병영성지'(兵營城址:아래 그림1, 2)로 복원중이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네델란드)이 탄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제주도에 표착했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으로 타이완(臺灣)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항해하던 중에.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에 일어난 일이다.
하멜 일행은 제주와 서울, 강진, 여수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13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그중 강진의 전라병영성 억류기간은 7년(1656~1663).
이 기간에 하멜을 통해서 서양의 문화, 생활 등이 소개되었고,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제출한 '하멜보고서'
(The report of Hamel)는 우리나라가 서양에 소개된 효시가 되었다.
비록, 조선 억류기간에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해 소속사(동인도회사)에 제출하는 문서였지만.
한데, 선하심후하심인가.
침공한 것도 아니고, 단지 불의의 표착이었을 뿐인데 13년이나 억류했다.
선선히 보내준 것도 아니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는 타원형 전시관, 망망대해에 표류중인 스페르베르호를 상징하는 사각형 건물
등, 기념관을 짓고(아래 그림1) 하멜동상(아래 그림2)을 세우는 등 호들갑이니 말이다.
병영성 설영으로 취락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골목은 자연 발생적인데 하도 크고 길어서(당시의 느낌으로는)'한골목'이라 했단다.
배진강에 개설되었다 하여 일명 '배진강다리'인 병영성홍교(虹橋:무지개다리)
보존상태가 완벽한 병영의 명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129호다.
강진 월출산 일몰
병영성지를 떠나 강진읍으로 가는 노을길이었다.
작천에 도착할 무렵 하도 황홀하여 카메라를 꺼냈으나 배터리가 죽었다.
교환하느라 부지런을 떨었으나 그 새 저 해가 기다려 주겠는가.
마지막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