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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反骨)
뼈가 거꾸로 솟아 있다는 뜻으로, 권세나 권위에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는 기골을 이르는 말이다.
反 : 거꾸로 반(又/2)
骨 : 뼈 골(骨/0)
쉽게 사람을 따르지 않는 기질(氣質) 또는 일정한 세력(勢力)이나 권위(權威)에 순응하거나 굽히지 않고 거슬러 버티는 기골. 권력에 저항(抵抗)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뼈가 거꾸로 되어있다는 뜻으로, 쉽게 사람을 따르지 않는 기질 또는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을 말한다.
삼국지(三國志)의 촉서(蜀書) 위연전(魏延傳)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蜀나라에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위연(魏然)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용맹하고 호탕하며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탓으로 상대편을 깔보고 업신여기는 나쁜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그를 장수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여 한중(漢中)의 태수(太守)로 임명(任命)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장비(張飛)가 임용(任用)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劉備)는 위연(魏然)을 임명하게 된 까닭을 밝히기 위해 그 직무(職務)를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위연(魏然)은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조조(曹操)가 천하를 들어오려고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를 막기를 원합니다. 부장이 인솔하는 10만 병사를 이르게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소멸(消滅)시키기를 원합니다.”
유비(劉備)와 사람들은 위연(魏然)의 장엄(莊嚴)한 말에 감복(感服)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에게는 위연(魏然)이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위연(魏然)의 성품(性品)과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목덜미에 이상한 뼈가 거꾸로 솟아 있는 것을 보고 장래에 반드시 모반(謀反)을 도모(圖謀)할지도 모를 위험한 인물임을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연(魏然) 역시 제갈량(諸葛亮)을 겁쟁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才能)을 충분히 발휘(發揮)할 수 없음을 한탄(恨歎)했다.
어느 날 위연(魏然)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행군사마(行軍司馬) 조직(趙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 내 머리에 뿔(角) 두개 거꾸로 나 있는 꿈(夢)을 꾸었소. 이것을 해몽(解夢)해 주시오.”
조직(趙直)은 말했다. “기린(麒麟)의 머리에도 뿔이 있고, 청룡(靑龍)의 머리에도 뿔이 나 있습니다. 변(變)하여 하늘로 올라갈 상(相)으로 천하에 보기 드문 길몽(吉夢)입니다.”
조직(趙直)의 해몽(解夢)은 사실과 달랐다. 사실 뿔(角)은 칼 도(刀)자 를 사용한다. 용(用)자는 사용한다는 뜻이므로 꿈을 꾼 자의 목이 잘린다는 나쁜 꿈이었던 것이다.
위연(魏然)은 이 꿈(夢) 해석(解釋)을 믿고 모반(謀反)을 꾀하려고 했다. 그런데 위연(魏然)의 모반(謀反)을 미리 알아본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이 죽기 전에 이런 일을 대비(對備)하여 계략(計略)을 세워 두어 마대(馬岱)로 하여금 거짓 위연(魏然)을 따르게 한뒤 마대(馬岱)로 하여금 목을 치게 했다. 그리고 삼족(三族)도 멸(滅)하였다.
사실 위연(魏然)의 꿈(夢)에 등장한 뿔(角)은 칼(刀)을 사용(用)한다는 뜻으로, 길몽(吉夢)이 아닌 흉몽(凶夢)인 것이다. 원래는 위연(魏然)이 일으킨 모반(謀反)이라는 뜻이지만 삼국지(三國志)의 저자(著者) 진수(陳壽)는 위연(魏然)이 결코 촉(蜀)나라를 모반하려는 의도(意圖)는 없었다고 결론(結論)을 내려 오늘날에는 불의(不義)에 타협(妥協)하지 않는 긍정적(肯定的)인 뜻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나중에 위연(魏然)은 모반죄(謀叛罪)에 걸려 죽지만, 이 장면(場面)을 두고는 공명(孔明)이 용맹(勇猛),호방(豪放)한 위연(魏然)을 다잡기 위해 잔꾀를 부렸다고 보는 시각(視角)이 지배적(支配的)이다.
문제(問題)는 반골(反骨)을 배타(排他)하는 사회(社會)에 있다. 통제사회(統制社會)라면 이런 부류(部類)를 반골(反骨)로 찍어 거세(去勢)했겠지만, 지금(只今)은 오히려 반골(反骨)의 또 다른 발상(發想)에 주목(注目)하는 열린 세상(世上)이다.
뼈가 거꾸로 박혔다는 반골(反骨)의 골상학(骨相學)도 허무맹랑(虛無孟浪)하거니와, 역사적(歷史的)으로도 반골(反骨)인 사람은 대개(大槪)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자주적(自主的), 창의적(創意的)인 기질(氣質)을 가졌다. 집단(集團)의 고식성(姑息性)에 저항(抵抗)하거나 예속(隸屬)을 거부(拒否)한 사례(事例)가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이끌었던 수많은 선각(先覺)은 물론(勿論)이고 묘청(妙淸)과 만적(萬積), 화가(畵家) 장승업(張承業), 심지어(甚至於)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까지도 따지고 보면 시대(時代)와 불화(不和)한 반골(反骨) 아니겠는가.
한국(韓國) 영화계(映畵界)의 대표(代表) 반골(反骨)이라는 김기덕 감독(監督)이 얼마 전(前) 베를린 영화제(映畵祭)에서 우리 영화인(映畵人)으로는 처음으로 감독상(監督賞)을 받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반골(反骨)의 체취(體臭)가 새삼 향기(香氣)롭다.
[참고]
그러면 역사상의 위연(魏然)은 어떤가?
정사(正史)등의 사료(史料)를 보면, 그는 삼군(三軍)의 우두머리인 촉(蜀)나라의 맹장이며, 촉(蜀)에 충성(忠誠)을 다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漢中)을 공략한 후에 유비(劉備)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漢中) 수비의 대임(大任)을 위연(魏然)에게 주었다. 제갈량(諸葛亮)이 제1차 북벌(北伐)에서는 자오곡(子午谷)의 기습작전(奇襲作戰)을 헌상(獻上)하였다.
그의 계책(計策)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시종(始終) 분전(奮戰)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위연(魏然)의 죽음에 대하여 기술(記述)한 정사(正使)의 위연전(魏延傳)을 보면, 양의(楊儀)가 마대(馬岱)를 보내 위연(魏然)을 쫓고, 결국 붙잡아 죽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 이유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말하는 것처럼 역모(逆謀) 때문이었을까?
정사(正史)의 후주전(後主傳)과 위연전(魏延傳)의 주(註)에서 인용(引用)한 위략(偉略)에 의하면, 양의(楊儀)와 위연(魏然)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魏然)이 제갈량(諸葛亮)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楊儀)는 자신이 살해(殺害)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魏然)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魏)으로 투항(投降)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手下)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魏然)을 공격했다. 위연(魏然)은 원래 북으로 투항(投降)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殺害)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위연(魏然)에게는 원래 촉(蜀)에 반역(反逆)할 의지는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楊儀) 때문이었다. 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억센 기질(氣質)의 소유자(所有者)로 묘사(描寫)되었고, 반역(反逆)의 악명(惡名)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혐오(嫌惡)하게 되었다.
그럼 위연(魏然)은 억울한가?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할까? 현재의 많은 학자는 위연(魏然)의 죽음은 억울한 것으므로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량소(譚良嘯), 장대가(張大可)의 공동 저작인 삼국인물평전(三國人物評傳)의 위연평정(魏延評傳)과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 박물관(博物館)에서 펴낸 무후사대관(武侯祠大館)의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등에서도 모두 위연(魏然)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논자(論者)는 위연(魏然)을 촉(蜀)나라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人才)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蜀)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은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小說家)의 터무늬 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오곡(子午谷)의 계책(計策)은 북벌(北伐)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魏然)이 거병(擧兵)한 것은 양의(楊儀) 때문이었지 반역(反逆)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견해(見解)가 나왔다. 역사적 인물로서 위연(魏然)은 확실히 행실이 나쁜점이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總體的)으로 그는 풍운(風雲)을 질타(叱咤)한 촉(蜀)나라의 대장이었고, 촉한 정권을 위해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소한 못된짓을 꼬투리 잡아 꾸며진 문학적 이미지는 시종 악인이었지만, 이것은 역사상의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상의 이미지가 역사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역사상의 위연을 평가하는 경우라면 문학적 이미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대해서는 역사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성공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위연의 평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제갈량의 사후에 양의와 싸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위연의 큰 잘못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위연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소동을 벌인 것은 위에 투항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소동의 성질과 결과는 분명히 촉에 대한 역모이며 적대 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며, 억울한 죄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판정을 뒤엎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위연은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정사의 양의전(楊儀傳)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蔣琬)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털댔다.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비의가 깜짝놀라 이것을 후주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후에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쪽의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기술에서 적어도 두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역모의 생각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근 이 문제에 관하여 사천문물(四川文物)(1989년 제4기)에 도유지(陶喩之)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현재의 한중 석마파(石馬坡) 유적을 고증함으로써,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장완과 비의에 의하여 이미 억울함이 풀렸던 것과 역사상의 위연이 언제까지라도 억울한 죄를 쓴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도씨의 논문은 현재의 한중 북문 밖의 석마파 유적이야말로 위연의 억울함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석마파 유적 내에는 위연의 묘가 있고, 석마 한 마리는 파손되고 한 마리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석마의 모양과 풍격, 조각 기법은 후한 후기의 석각(石刻)과 일치한다. 석마는 현재 한중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도씨의 논문은 청의 건륭(乾隆) 연간에 왕행검(王行劍)이 펴낸 남정현지(南鄭縣志) 중의 석마유적이라는 대목을 인용하였다.
위연은 원래 노장(老將)으로 전공(戰功)이 있다. 말년에 함부로 날뛰어 자신도 죽고 가족도 몰살되었지만, 장완은 그 본의를 헤아려 양의를 죽이고자 하였을 뿐, 위연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에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여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석마의 유적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없는 것은 아니다.
위연은 억울하니 그 동안의 판결을 뒤엎어야만 할 것인가. 위연이 죽은 얼마후에 조정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그를 둘러싼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래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만약 한중의 석마 유적이 장완 등에 의한 시정의 움직임이며, 위연의 명예를 회복할 역사적 증거라고 한다면, 더욱 신뢰할수 있는 역사 기록을 찾아내서 이 견해를 보강해야만 한다.
둘째, 왕행검의 남정현지(南鄭縣志)에서는, 석마 유적을 장완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 준 증거로 삼았지만, 이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 反(돌이킬 반/돌아올 반, 어려울 번, 삼갈 판)은 ❶회의문자로 仮(반)과 동자(同字)이다. 又(우)는 손을, 厂(엄)은 언덕의 뜻으로 뒤엎는다 또는 반대(反對)를 뜻한다. 비탈진 지형은 정상이 아니므로 반대를 의미한다. 反(반)은 위에서 덮는데 대하여 밑으로부터도 뒤덮는 일, 그 양쪽을 합하면 반복이란 말이 된다. 또 손바닥을 뒤집다, 배반하다, 돌아오다, 돌아보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反자는 ‘되돌아오다’나 ‘뒤집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反자는 厂(기슭 엄)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厂자는 산기슭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상적인 물건으로 응용되었다. 갑골문에 나온 反자를 보면 손으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어떠한 물건을 손으로 뒤집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反자는 ‘뒤집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배반하다’나 ‘반역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反(반)은 변증법(辨證法)의 정(正), 반(反), 합(合)의 세 가지 계기 가운데에서 부정(否定)을 뜻하는 계기나 반립(反立)의 뜻으로 ①돌이키다 ②돌아오다, 되돌아가다 ③되풀이하다, 반복하다 ④뒤집다, 뒤엎다 ⑤배반하다 ⑥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어긋나다 ⑦반대하다 ⑧물러나다, 후퇴하다 ⑨보복하다, 앙갚음하다 ⑩되돌아보다, 반성하다 ⑪꾸짖다, 나무라다 ⑫보답하다, 되갚음하다 ⑬바꾸다, 고치다 ⑭죄를 가벼이 하다 ⑮휘다 ⑯구르다, 뒤척이다 ⑰기울다 ⑱튀기다 ⑲생각하다, 유추(類推)하다 ⑳대답하다 ㉑기인(起因)하다 ㉒모반(謀叛), 반역(反逆) ㉓번(횟수를 세는 단위) ㉔반대로, 도리어 ㉕더한층, 더욱더 그리고 ⓐ어렵다, 곤란하다(번) 그리고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조심하다(판) ㉡팔다(판)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정(正), 도울 찬(贊)이다. 용례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함을 반공(反共), 반대로 움직임을 반동(反動), 법칙이나 규칙 따위를 어김을 반칙(反則), 상대방의 말을 되받아 묻는 것을 반문(反問), 두 사물이 맞서 있는 상태 또는 어떤 의견이나 제안 등에 찬성하지 않음을 반대(反對), 반사로 비친 그림자를 반영(反影), 반사하여 비침을 반영(反映), 반대하거나 반항하여 품는 나쁜 감정을 반감(反感), 한 가지 일을 되풀이 함을 반복(反復), 자극이나 작용에 대응하여 일어남을 반응(反應), 전쟁을 반대함을 반전(反戰), 쳐들어 오는 적을 되받아 공격함을 반격(反擊), 상대방에 반대하여 대들음을 반항(反抗),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표시를 반기(反旗), 서로 미워함을 반목(反目), 잘못이나 허물이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반성(反省), 반대되는 뜻을 반의(反意),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반객위주(反客爲主),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반구제기(反求諸己),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눈으로 봄을 반목질시(反目嫉視),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반복무상(反覆無常), 도리어 처음 만 같지 못함이라는 반불여초(反不如初), 남에게 재앙이 가게 하려다가 도리어 재앙을 받음을 반수기앙(反受其殃),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해어진 초라한 모습으로 한데서 잠을 반수발사(反首拔舍),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반수불수(反水不收) 등에 쓰인다.
▶️ 骨(뼈 골)은 ❶회의문자로 月(월, 살)과 부수(部首)를 제외한 글자 冎(과)의 합자이다. 骨(골)은 살 속에 있는 뼈, 몸 속의 뼈, 한자의 부수로 되어 뼈에 관한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骨자는 ‘뼈’나 ‘골격’, ‘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서의 骨자는 뼈와 관절이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지만, 금문에서는 여기에 肉(고기 육)자가 더해져 뼈와 살을 함께 표현하게 되었다. 이처럼 骨자는 뼈와 살을 함께 그린 것이지만 단순히 ‘뼈’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骨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뼈’나 ‘신체’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骨(골)은 (1)뼈 (2)골품(骨品)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뼈 ②골격(骨格) ③기골(氣骨), 의기(義氣) ④사물(事物)의 중추(中樞), 중심(中心), 골수(骨髓) ⑤몸, 구간(軀幹; 머리와 사지를 제외한 몸통 부분) ⑥인품(人品), 됨됨이 ⑦골품(骨品) 제도(制度) ⑧문장(文章)의 체격(體格) ⑨굳다, 강직하다 ⑩글씨가 힘차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뼈 해(骸),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살가죽 기(肌), 가죽 피(皮)가 있다. 용례로는 일이나 말의 골갱이를 골자(骨子), 척추동물의 몸을 이루고 지탱하게 하는 여러 가지 뼈의 조직을 골격(骨格), 뼈가 부러짐을 골절(骨折), 건물의 주요 구조가 되는 뼈대를 골조(骨組), 몸이 파리하여 뼈가 앙상함을 골립(骨立), 고마움 또는 원한이 마음속 깊이 새겨짐을 각골(刻骨),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유골(遺骨), 살이 전부 썩은 사람의 머리뼈를 해골(骸骨), 죽은 사람의 살이 다 썩고 남은 뼈를 백골(白骨), 단단한 기질로 굽히지 아니하는 성품을 강골(强骨), 쉽게 사람을 따르지 않는 기질을 반골(反骨), 몸이 약한 골격 또는 그런 사람을 약골(弱骨), 오래되거나 늙어서 가치나 쓸모가 없게 된 물건을 골동품(骨董品), 뼈가 부러지는 부상 또는 그 상처를 골절상(骨折傷), 동물의 몸을 버티고 보호하며 힘살이 들러붙는 뼈로 된 조직을 골격계(骨格系), 뼈 조직에 석회 성분이 줄어들어 다공성을 나타내는 증세를 일컫는 말을 골다공증(骨多孔症), 가까운 혈족 사이의 사랑을 일컫는 말을 골육애(骨肉愛), 부자나 형제 또는 같은 민족 간에 서로 싸움을 일컫는 말을 골육상잔(骨肉相殘), 뼈와 살이 서로 다툼의 뜻으로 형제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툼을 뜻함을 일컫는 말을 골육상쟁(骨肉相爭), 뼈와 살을 같이 나눈 사이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족이란 뜻으로 부자와 형제 또는 그와 가까운 혈족을 지칭하는 말을 골육지친(骨肉之親),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듣기에 괴로운 직언을 하는 강직한 신하를 일컫는 말을 골경지신(骨骾之臣), 가까운 혈족 사이의 정분을 일컫는 말을 골육지정(骨肉之情)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