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20신]룰루랄라! 소파에 앉아서 하는 ‘세계여행’
사랑하는 당신에게.
해가 바뀐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난 일요일 오후네.
엊그제 폭설과 강추위를 혼자서 겪으며 더욱 외로웠겠지.
날씨든 마음이든 연말연초든 심란한 때에는
옆지기나 가족 생각이 더욱 간절한 법이거늘.
나 역시 1년이 넘고, 햇수로 3년이 됐으니 익숙할 만도 한데
요즘들어 당신과 애들 생각이 자꾸 새록새록 피어나네.
작년처럼 생소한 단어가 우리를 괴롭힌 적은 한번도 없었지.
방콕, 집콕, 비대면, 언택트, 코로나, 마스크, 자가격리….
참말로 “그것 참!”이네.
당신은 일로부터 쌓인 막중한 스트레스를,
국내든 해외든 여행旅行으로나마 풀어 숨을 돌려야 할 터인데,
그것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 지 짐작이 가네.
더구나, 오랫동안 준비한 이탈리아·오스트리아 35일간의 자유여행이
천재지변으로 무산되었으니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던가.
항공편과 호텔 예약 취소 등에 재정적 손해까지 감수해야 했으니.
그럴수록 2019년 3월 스위스·프랑스 28일 동안의 자유여행이
꿈같이 떠오르네. 단 둘이 손을 잡고 마테호른 등 알프스 정상의
은세계를 고독하게 하이킹하던 그때,
하루 평균 최소 2만보를 넘게 걸었지.
파리에서는 3만보를 넘는 날도 많았으니,
원없이 걸었던 봄날, 그해 그 여행이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되었네.
정말 미안하고 불행하게도, 여행기간 내내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당신을 흠뻑 여행의 정서에 빠지게 하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리네.
내 평생 한번도 겪지 않았던 ‘변비와 불면’이
하필이면 우리의 멋진 여정旅程을 사정없이 망쳐버렸지.
그때 왜 그랬는가 몰라? 귀국하자마자 멀쩡하던데 말이야.
아무튼, 요즘 내가 가장 애청하는 프로그램 이야기를 해야겠어.
KBS2에서 아침 6시 10분부터 7시까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재방영하고 있더군.
세계 각나라, 대표도시를 돌아다니는 PD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하네. 내레이션의 구수한 목소리와 감칠맛나는 해설에 쏙 빠졌네.
나는 당신만큼 여행을 좋아하지 않고,
여행서적들로 '대리만족'을 하는 편이지만,
시절이 이렇다보니(비행기여행을 마음놓고 할 수 없는),
더욱 간절해지는 게 신기하네.
예전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는 올 것인가,
싶기도 하니,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기도 하고.
특히 호주에 사는 둘째아들네 생각만 하면 우울이 더하지.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신세라니? 이산가족이 따로 없네.
지난 주에는 ‘싱가포르’와 ‘스리랑카’편을 보았네.
지지난 주에는 발칸의 ‘조지아’편을 보고.
‘으으’ 신음소리가 절로 나오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당신과 많이 다닐 걸 그랬지?
이렇게 세계여행에 목마른 것을 보면 말야. 흐흐.
하기야 국내여행도 만만찮아.
그래서 대안으로 올해엔 ‘지리산 둘레길 완주’를 목표로 했지만,
이것 달성도 쉽지 않을 것같아 걱정이야.
당신은 패키지여행은 세계 어디든 사양한다고 했지.
나는 편하게 인도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가이드 설명에 귀 기울리며
각국의 역사나 문화를 숙지하는 편이 좋은데 말이야.
하지만, 당신의 취향에 맞춰야지 어쩌겠어.
그럴려면 사전에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 성가셔 그렇지.
시간이든 목적지이든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여행의 장점이지.
독해나 좀 할 줄 알지, 회화에는 꿀먹은 벙어리인 나를 대신해
‘10분 전화영어’로 익힌 외국어로 소통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대견을 넘어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네. 흐흐.
그 프로그램을 애청하면서 느낀 것 하나를 말하려 편지를 쓰네.
여행 도중 PD가 관광객이나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잠깐잠깐 인터뷰를 하는데, 대상자들이 대부분 부부이거나 가족들이더군.
그래서 “여행은 가족이다Travel is family”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거야.
어때? 내가 만든 명제命題 멋지지 않아?
혹 몇몇은 솔로도 있고, 친구끼리 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 우리는 그동안 사는 데 있어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은 가족이 전부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같아.
프로를 보면 볼수록 두 아들네과 세 가족이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네.
전염병만 가시면 당신이 바로 ‘작전’을 한번 짜봐. 부탁이야.
먼저 호주로 날라가야겠지. 아들네집 들러 회포를 풀고나서
멜버른도 가고, 사막지대도 가보자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뉴질랜드 트래킹을 하면 금상첨화겠지.
이제 그때처럼 아프거나 하여 당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거야.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외로움도, 행복도
결국 가족끼리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안 느낌이야.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몇 번을 보아도 아주 좋은 프로야.
비슷한 프로로 교육방송의 <세계테마여행>이 있지만,
그 나라의 속살까지 맛보는 것은 <걸어서>가 훨 나은 것같아.
15년인가를 장수하는 프로라던가.
그러니 빅데이터가 얼마나 많겠어.
코로나 덕분에 소파에 앉아서 일주일 내내 세계 각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네.
세계사에 무식한 나도 무척 유식해질 것같아.
여행은 음식이라는 것도, 여행은 추억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
내가 많이 진일보進一步했지. 흐흐. 코로나 덕분이야.
당신과 마음 놓고 자유여행할 날이 빨리 오기만을 바랄 뿐이야.
금세 또 만날 것이지만, 너무 외로움 타지 말고 잘 지내셔.
고향에서 불민한 남편 씀
첫댓글 추억속에 남는건 여행뿐이라고
못다한 여행의 아쉬움이 이집에도 있구려.
나역시 막내가 호주에 있을때
5년여를 엄동설한의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다섯해 동안
보냈었지요.
젊은 시절엔 멀고 험준한 힘든 여행을 다니고
나이들어서는 가까운 나라의 쉽게 걸을수있는여행을 즐기려했는데 고놈의 코로나 땜시 집집마다 여행의 허전함을 안고 사는구만요.
기대는 하지만 쉽게 풀릴지ㆍ
답답합니다.
암튼 구구절절 애절한 표현을 남기는 친구는
멋진 남편이요.신랑이네요.
65살 먹은 난 아직도 부끄러워 여보 소리도 못하고 짜증을 앞세우는 아직도 철이 덜든 중늙은이지만 친구는 멋진 신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