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02
1월11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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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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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xDjHX2Dd1Y
(홍찬호 모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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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
물 건너오신 명강사를 모시고 피정강의를 잘 듣고 있습니다. 매일 당일 복음으로 렉시오 디비나(聖讀)을 지도받고 있는데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강사 신부님께서는 매일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노력을 해보라고 초대하셨습니다.
①복음 구절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니다.
②발견한 예수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③예수님 안에 거룩한 휴식(sacred sleep)을 취하십시오.
④예수님이 되십시오.
⑤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이어서 두 가지 성찰작업을 추가로 부탁하셨습니다.
①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이 어떤 것인지 묵상하십시오.
②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려주신 지침에 따라 복음을 묵상하니 결실이 참으로 풍요롭고 새롭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마침 회당 안에는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은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령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악령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복음 1장 24절)
악령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악령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악령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악령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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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RhECACueP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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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하느님처럼 되어야 악령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초기에 어떠한 권위로 가르침을 이어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자기를 들어 높이는 행위이고 그리스도를 자신과 한편이라고 말하며 그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하시며 악령을 당신 권위로 누르십니다. 사람들을 이것을 보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에 대한 권위가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악령을 장난감 다루듯이 하십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할까요? 당연히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령도 하나의 영이기에 영은 영에만 반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원죄로 성령을 거부하였기에 쉽사리 악령의 노예가 됩니다. 악령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전능한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교만으로 유혹하는 악령 앞에서 언제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의 저자 ‘이시이 마레히사’에게 웹 디자이너 ‘도츠’라는 남성이 상담하러 찾아왔습니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쿠라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도츠는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집에 있으며 그녀를 맞이해야 한다고 합니다. 도츠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이 있어 자신이 들어왔을 때 남자친구가 없으면 사쿠라이는 견딜 수 없어 하고 끊임없이 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도츠를 범죄자 취급하며 심하게 몰아세웁니다. 도츠는 사쿠라이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시간이나 사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도츠가 회사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울렸고 그래서 받지 않았습니다. 계속 전화가 울려서 전화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회의실 사무직 여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오더니 “저기…. 혹시 도츠씨 계신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츠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여자친구가 사무실로 몇 번이나 전화해서 바꿔 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츠는 어쩔 수 없이 전화해야 했고 흥분하여 막무가내인 그녀 때문에 회의를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로 도츠는 회사에서도 조금씩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습니다.
도츠의 노력으로 사쿠라이가 변할 수 있을까요? 사쿠라이는 왜 도츠를 ‘지배’하려 드는 것일까요? 도츠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쿠라이의 도츠를 통제하려는 마음은 바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쿠라이의 문제는 도츠가 아닌 자신의 어릴 적 상처 때문입니다.
사쿠라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을 관찰하는 여름방학 숙제를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와 동물원에 가기로 된 날입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사쿠라이에게 아버지는 미소 띤 얼굴로 “잠깐만 기다려. 꼭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고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집을 나간 아버지가 계속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쿠라이는 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내가 숙제를 함께 하자고 하도 부탁해서 아버지가 그게 싫어서 집을 나가신 거야!”
몇 년 동안 후회와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자가 있었고 그날 그 여자와 도망치기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듣고는 이젠 자책이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제일 의지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기에 아버지도 싫고 그렇게 버려지는 존재인 자신은 더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도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렇게 병처럼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은 이렇게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쉽게 스며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육체와 정신과 심지어 마음마저 점령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엔 마귀 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쿠라이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보다 전능해져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부모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공부도, 힘도, 키도, 사랑하는 마음도 부모를 넘어서면 그 아이는 비로소 ‘겸손’의 길로 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부모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관계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넘어서서 전능한 존재가 되어보지 못하면 그 아이는 성장해서도 끊임없이 일단은 부모를 넘어서려 합니다. 한 번은 전능해져야 합니다. 그러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결국 악령의 힘까지 빌리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교만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악령에 휘둘리는 약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CCC, 460 참조)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느님처럼 되었다면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던 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령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마치 자신이 그렇게 고백해 주어서 예수님이 이득을 보는 것처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덕이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음을 알기에 더는 악령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악령을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넘어섰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하느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아의 욕심은 완전히 하느님처럼 되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능해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전능해지지 않으면 전능해지라는 사탄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믿지 못할 때, 사탄은 돈과 쾌락과 명예로 하느님처럼 만들어주겠다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는 이에게는 그 유혹이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이 악령을 이기는 가르침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는 이는 그 모든 것이 주님 덕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로주 주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 가르침으로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처럼 성령으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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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b-28 :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사도들이 호수를 버리고,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의 악습을 버렸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갔다고 한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란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던 것이다.
마귀들도 아드님을 뵙고 이렇게 외친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 뵈었지만 믿음이 없었다. 성경 말씀을 증거로 들이 대어도 믿지 않고 예수 아기를 죽이려 했던 헤로데는 마귀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8,29)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라고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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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여기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강론과 설교를 할 때, 남의 말을 인용해서 지식을 자랑하기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하느님이신 분’이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느끼게 되자 크게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마르 1,23-26)
‘더러운 영’이(마귀가) 들린 사람이 어떻게 회당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이것은, 마귀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음을(마귀로부터 안전한 곳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쫓아내시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선제공격을 합니다. 여기서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당신은 나에게 아무 권한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권한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입니다.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을 멸망시키고 사람들을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는 말은,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고, 당신보다 위에 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이 말도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한낱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는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교묘한 거짓말입니다. 이 말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으로는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다.”인데, 지금 예수님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려는 의도로 한 말이기 때문에, 이 말에는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도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마귀는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들은 진실을(진리를) 말하는 척 하면서, 진실을(진리를) 교묘하게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처음에 하와에게 접근할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귀의 말에 잘 속는 것은,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식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마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위장해서 나타납니다.(2코린 11,14) 가장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는 식구들을 통해서, 또는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접근할 때도 많습니다. 마귀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좋은 말 같아도, 또 진리인 것 같아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믿음을 흔들어 놓는 말이라면, 또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미움과 갈등을 부추기는 말이라면, 그것은 마귀의 말입니다.>
“조용히 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귀의 발언 자체를 막는 명령입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마귀의 말’에는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진리가 아닌 말은 듣지도, 대답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복종하기가 싫어서 마지막까지 반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7-28)
여기서 ‘가르침’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하신 명령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기만 합니다. 여기서 ‘새롭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입니다. ‘권위 있다.’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다.’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라는 말은, 사람들이 놀라기만 하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라는 말은,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예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체험하게 되면, 놀라지 않고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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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5년 신학생 때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답사의 목적은 교사들의 단합을 위한 것이었고, 시설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조립식 건물이 있었고, 부족한 잠자리는 텐트를 치기로 했습니다. 체력 단련장, 화장실, 세면장을 둘러보았습니다. 답사 첫날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비가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머물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짐을 옮기는 것이 귀찮기도 했습니다. 비가 더 올 것 같으니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에 모두 저를 보았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니 결정을 내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가까이 있고, 머물기 좋지만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할 수도 있는 지금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힘은 들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산행의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저에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제가 ‘신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힘이 들지만 안전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했고, 모두들 저의 의견을 따라 주었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제가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사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처럼 지혜가 충만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온 ‘한나’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힘든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목의 경험과 연륜이 쌓인 사제였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젊은 열정만 있었습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큰 허물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사제의 결정 때문에 갈등과 아픔이 생기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어렵게 일구어 놓은 것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꿔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가 힘을 모아 마련한 작품을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옮겨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작가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모조품을 갖다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제직이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직이 교만을 만나면, 사제직이 시기를 만나면, 사제직이 위선을 만나면 그 권위는 권위주의가 되고 맙니다. 그런 권위주의가 예수님을 재판에 넘겼고, 그런 권위주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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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던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첫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된 그들과 함께 항해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과 내일 복음은 이 항해의 첫날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 무대는 카파르나움입니다.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서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항해는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합니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에 기록된 첫 기적이기도 합니다. 이 기적은 오로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이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 말씀에 복종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오늘 복음은 더러운 영을 통하여 그분의 정체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밝힙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 하느님께 속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왔기에 더러운 영을 몰아내는 힘을 지닙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입니다.(마르 1,15 참조)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 속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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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의 차이>
오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지만, 예수님께서로부터 쫓겨 나갑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통해 앎과 믿음, 그리고 사랑의 관계를 묵상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머리로 아는 것은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나는 진정 주님을 알고자 하는가?' '나는 진정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가?' 반성하면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도록 합시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제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신이 먼저 있었나요? 아니면 신을 생각한 인간의 뇌가 먼저 있었나요?” 이 청년의 질문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뇌가, 인간의 이성이 하느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당연히 하느님이 먼저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론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제외하고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면 왠지 인간이 자기 위안을 얻거나 인간의 한계를 채우기 위해 오래 전부터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 믿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어 일으키게 됩니다.
저 역시 청년 시절, 신의 존재와 죽음, 고통의 원인과 하느님의 방관에 대해 많은 시간 고민을 해 봤었기 때문에, 그 청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렴, 그럼 하느님이 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거야.”
사실 그 청년의 질문은 과일 가게에서 생선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앎은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앎에 집착할 때 진정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우리의 이성을 넘어 우리를 압도하시는 하느님 현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그분의 섭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새로운 영역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면서 동시에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지만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며,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파악할 수 없는 더 크신 분이시라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회당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라워하며 그분을 훌륭한 스승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고 그분을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그분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멸망시키실 분으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앎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고백할 수는 있게도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데에는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서 더 많이 사랑할 때 더 많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전에 어느 형제님께서 어린 딸에게 들려 준 사랑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떠 오릅니다.
어린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왜 나를 낳았어?”
그러자 아버지가 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엄마 아빠가 너무도 사랑해서 그 사랑을 가장 소중한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너를 낳았단다. 너는 엄마 아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다.”
이 아버지의 답변처럼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너무도 서로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주 보는 사랑은 사랑의 충만이 아닙니다. 자신만 바라보기를 바라는 마주 보는 사랑이 아니라 같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누는 나눔의 사랑이 더 큰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함께 나누시고자 우리를 매일 매일 당신의 곁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뽑으시어, “당신 곁에 머물게” 하셨습니다(마르 3,14). 우리가 주님 곁에서 당신의 큰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사랑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하신 말씀 안에 그 열쇠가 있는 듯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을 ‘이성과 앎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떠들고 다니지 말고 조용히 하여라. 조용히 내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교만의 영을 나가게 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여라’는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조용히,
겸손히,
묵묵히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묵상하며,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나누며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의 영이 온 누리에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해 오시는 듯 합니다.
“내가 너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 사랑을 너와 나누고 싶어서
내가 너를 낳았단다.
매일 내 곁에 조용히 머물거라.
매일 나의 마음으로 조용히 사랑하거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돌보겠다.
사랑한다 너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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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황지원 안드레아 신부님]
손과 발로 고백해야 할 분 수도자이면서 사제로 살아가다 보니 말할 기회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말하는 것이 너무 조심스러워 과연 제가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타협하게 되고 '비록 내가 다 살아가지 못한다 해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라며 합리화합니다. 그런 제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면,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어떻게 사람들에게 더 재미있게 말할까 고민은 하지만, 더 이상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마음은 더 탁해지고 말만 늘어난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문학적 특색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는 군중에게 숨겨진 채 공생활이 이루어지고, 제자들에게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정체가 군중 앞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니고 그분께 믿음을 고백하는 장면도 아닌 '더러운 영'의 입에서 발설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하느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영'이 입으로는 말을 더 잘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입으로 고백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로 고백해야 하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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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회 김태오 디모테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본다. 예수께서는 사회적으로는 보통 사람이었고, 종교적으로는 사제나 종교 지도자가 아닌 평신도였으나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부터는 위대한 라삐로서 아주 특별한 권위를 드러내셨다.
오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시는데, 예수님의 권위는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보여지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이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들으러 회당에 모였을 때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가르치심은 정말 놀라웠고 권위가 있어서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매료되었다. 보통 회당에서 가르치고 토라를 해석하는 것은 율법학자들이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악령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한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한편 예수님의 권위는 그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방법이 다른 이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규정된 예식대로 틀에 박힌 말과 행위로 구마행위를 하였는데,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를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에 대해서 질문해 본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특별한 권위가 있는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성령으로 특별한 권위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실행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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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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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1,22)
<새로운 권위!>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에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고, 그곳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정확하게 알아본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새로운 권위'는 어떤 권위일까?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4,18)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권위'입니다. 곧 '성령의 힘'이며, 이 힘에서 나오는 권위가 바로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움직여지는 존재입니다.
나는 어떤 영의 움직임에 내맡겨져 있는가? 깨끗한 영인가? 아니면 더러운 영인가? 성령인가? 아니면 악령인가?
우리는 날마다 더러운 영을 몰아내고 깨끗한 영인 성령의 움직임에 내맡겨져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참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1사무1,9-20)는 자식이 없었던 '한나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말씀입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청해 봅시다!
성령을 간절히 청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항상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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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짐>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다짐>
나는
나날이
그분의 힘으로
그분과 함께
자유요
해방이니
탐욕의 영에서
벗어나
더불어함께
무관심의 영에서
벗어나
사랑과 자비로
죽임의 영에서
벗어나
돌보고 살리는
그분을 닮는
그분의 사람으로
새로 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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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번에 직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위해 중화요리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하던 대로 이번에도 고민이었습니다.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맞습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 해결을 위해 주변 테이블을 바라봅니다. 많이 드시는 음식이 맛있을 확률이 높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짜장면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직원이 고른 짬뽕을 보니 ‘짬뽕이 더 맛있겠다. 짬뽕시킬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곧바로 나옵니다.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안고 사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늘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정말로 후회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까요?
자신의 선택에 어떤 커다란 원칙을 가지고 있다면 후회가 적다고 합니다(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드리어, 음식을 선택할 때는 ‘오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른다.’라는 원칙이 있다면 후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라는 원칙이 있어도 후회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선택을 하실 때, 늘 원칙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인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치유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원칙을 누가 깨고 싶을까요? 바로 마귀는 사랑의 선택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러했지요.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정신질환이 아닌, 더러운 영이 들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랍비가 쓰던 구마 방법이 아니고 단 한마디의 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마귀의 유무를 떠나서 병마로 힘들어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셨고, 가장 빠른 방법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려고 소리소리 고함을 쳤습니다. 특히 신앙고백의 가면을 쓰고 예수님의 정체를 일찌감치 드러내어서 예수님의 선택을 방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일도 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방해받도록 하려는 잔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훼방이 예수님께서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썩 나가라는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랑의 원칙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원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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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사랑>
아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는 무척 유쾌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취한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커지면서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삶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이든 “그건 아니죠.”라면서 시비조로 말을 받습니다.
술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인들도 그랬는지 그만 먹자는 말에 서로 동의하고 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형제님은 “한 잔 더” 만을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서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그 문제의 형제님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다시는 그 형제님과는 안 마실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모습은 너무나 훌륭한데 술만 마시면 이렇게 된다면 함께 마실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이 형제님을 통해,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맞는다며 상대를 지배하려는 사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돌아가게 하려는 사람은 주변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겸손과 사랑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두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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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있는 가르침>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백성의 구원을 위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더러운 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영은 하느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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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권위 예찬>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예수님,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제가 요즘 가장 자주 많이 형제자매들에게 보내 드리는 인사말과 더불어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있는 예수님 부활상 사진입니다. 예수님 부활상 밑 바위판에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성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을 모실 때 참 건강에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드문 세상입니다.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드문 세상입니다. 지식인은 많아도 지성인은 드문 세상입니다. 권위의 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참 권위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 권위 앞에 순종하고 싶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지만 참 권위는 삶의 필수 요소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사실 실추된 권위의 회복은 요원합니다.
삶의 중심에 참권위를 모실 때 안정과 평화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에 참권위를 모시지 않을 때 불안과 두려움, 갈등과 분열의 삶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모시고 참 권위와 일치된 삶을 살 때 비로소 영육의 건강에 행복한 삶입니다. 요즘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이 모두의 궁극의 원인은 삶의 중심에 살아 있는 참 권위를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에 살아있는 참 권위를 모시지 못할 때 온갖 내적 분열에 정신 질환이요, 이를 일컬어 더러운 영이 들렸다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약하고 위태한 인간입니다. 삶의 중심에 참 권위를 모시지 못했을 때 언제든 악령에 휘말릴 수 있고 우상들에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여년전 희랍어 시간에 배운 ‘권위(ex-ousia)’란 말마디의 설명에 공감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인 내부의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외적 지위가, 화려한 의복이나 외관이, 많이 지닌 재물이 권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위에 걸맞지 않는 천박한 언행을 대할 때, 이들의 인품이나 인격의 민낯에 실망과 더불어 이들의 권위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됨의 필수 요소가 참권위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부모님은 부모님으로서의 권위를 지녀야 하고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참권위를 지녀야 거룩한 삶이요 참 건강에 참 행복의 온전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참 권위의 주님을 모실 때 강인한 영혼에 정신력입니다. 바로 참권위의 예수님을 모시는 삶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과 일치된 삶에서 유래하는 예수님의 참 권위입니다. 더러운 영, 악령들린 사람의 치유에 답은 참 권위를 지니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악령들린 사람이 상징하는 바 내적 분열의 사람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을 때, 즉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못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바로 악령들린 사람의 고백입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극도의 내적분열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러운 영의 격렬한 반응입니다. 거룩함을 못견디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빛이자 영이자 사랑이신 참 권위의 주님 앞에 악령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어 뛰쳐 나와 주님을 고백합니다. 참권위의 주님의 즉각적인 명령이 참 통쾌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납니다. 이어지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겐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참 권위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구마 행위에서처럼 참 권위는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섬김의 권위요 섬김은 바로 참 권위의 판단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참 권위의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섬김의 사랑 실천에 항구할 때 참 건강, 참 행복, 참 거룩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백 낫습니다. 애당초 내적분열의 정신질환에 앞서 미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호흡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일도 훈련입니다. 치매 예방에도 참 좋은 처방이 이런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훈련과 더불어 영육으로 건강하고 온전한 삶입니다. 바로 이런 모범이 제1독서 전형적 아나뷤인 한나입니다.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강인한 영혼의 한나인지 다음 간절한 기도가 이를 입증합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한나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어 아이를 갖게 되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지막 대목이 묘사가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불렀다.’
새삼 아이들 하나하나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산모産母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화답송 기도(1사무2,1-10)는 ‘마리아의 노래’를 연상케하는 아나뷤의 한나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선물로 얻는 자식들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늙고 병들어 아프기 전, 젊고 건강할 때 기도 훈련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 훈련에, 참으로 힘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영육의 건강에, 내적일치의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수행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악령들을 모두 몰아내 주시고, 하느님 중심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참으로 권위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제 2022년 새해 소원 기도문을 자주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시길 권합니다.
2022년 새해 소원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품이
당신의 길이
당신의 종이
당신의 벗이
당신의 증인이
당신의 배경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은총이
당신의 현존이
당신의 신비가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경청이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환대가
당신의 온유가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미풍이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향기가
당신의 섬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친절이
당신의 연민이
당신의 치유가
당신의 지혜가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정의가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격려가
당신의 선물이
당신의 자랑이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당신의 영광이
딩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셉이
성아브라함이
성모세가
성요한이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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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Ku-oIegB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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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의
권위이시다.
건강한 권위는
참된
가르침으로
드러나고
가르침은
권위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向)한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잃어버린
우리들
세대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권위가 되신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새롭게
가르쳐 주신다.
일깨움의
놀라움은
언제나
하느님께
있다.
꾸미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권위를 만난다.
하느님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건강한 삶을
가르쳐 주신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능력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건강한 삶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께
건강한 삶을
묻는다.
소중한 삶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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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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