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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과 같이 硏究하면 좋겠소.
間島 十五萬円 事件
КазССР. Ст.Берказан., Кызылординская область(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베르카잔 역, 크즐오르다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 공산당원 최계립 동지 감사기에서.
中國 北間島(지금 朝鮮人 自治洲)에 모여든 百姓들은 己巳·庚午年에 조선에서 凶年을 못 견디어 亡命하여 온 사람들이 차츰 朝鮮人 部落을 形成하였다.
조선이 일본帝國主義者들에 强制 合邦(강제병탄)을 當한 후 조선 서울사람 이상설이 와서 龍井에다가 “서전서숙”이라는 團體를 組織하여 가지고 靑年들을 愛國精神으로 敎養하였다. 局子街에서는 “간민교육회”를 조직하고 各 處에 學校를 設立하게 着手하였는데 李東輝(이동휘)는 各 處에 巡廻하여서 舊學서재를 맡을 학교를 設하며, 조선사람들 상투를 깎고, 조선이 일본에게 强制 合倂(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된 理由를 說明하는 等 反日運動을 傳播하였다(이동휘가 演說하다 한번 울면 학교 하나씩 조직되었다고 하였음). 이때에 조선에서 亡命하여 온 革命志士들이 간도에 많이 모여서 여러 학교를 組織하고 自己들이 直接 敎授하였다.
例하면 “明東中學”에는 김약연·박태관, “창동학원” 이병휘·(이성)남공선·박운피, “광성中學校”에서는 김하석·김립·장기영·계봉우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조밥에 된장덩이도 간신히 얻어먹으면서 靑年들에게 愛國熱을 培養하여 주었다. 이로 인하여 全體 間島에 사는 조선 住民들 가운데 反日 愛國熱이 熱熱하였다.
間島에는 세 中學校 學生들을 中心하고 “철혈광복단”이라는 團體가 1914年 頃에 全一(전일) 同志 發起로 組織되었다. 團員 손가락에서 피를 짜서 血書로 朝鮮獨立에 終事하겠다는 맹세를 하였고 그 團에 當時 暗號는 “友竹先生”이었다[이 團體가 俄領(러시아령) 沿海洲, 수청 기타 등지에도 波及되었음]. 當時 間島 靑年界에는 푿뽈(축구)·베쓰뽈(야구) 기타 運動이 盛行되었다.
왕청 나재거우 깊은 樹林속에는 이동휘 선생 주최로 비밀 仕官學校를 設立하고 全一(전일)·張基永(장기영) 先生이 熱誠으로 敎授하였고, 그 地方 住民들이 極力 주선으로 유지하였으나 나중에는 經費問題로 仕官學校를 廢止하고 學生들과 교사들이 俄領(러시아령)으로 가게 되었다. 그 때가 바로 1914年 第一世界戰爭(제1차 세계대전)이 始作한 때였다
왜놈들이 강박하게 中國官廳에 交涉하는데서 “창동”·“광성” 두 학교는 문을 닫고 敎員들은 亡命하여 俄領(러시아령) 沿海洲로 가게 되었다.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 갔던 30여 명 學生들은 1914년 봄에 김병학이라는 請負業者에게 팔려서 우랄산 나제센쓰크 木材所에 팔려갔다가 1917年 2월革命 후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鬪爭으로 解屬되었다. 당시 琿春縣 內에는 “講書堂(강서당)”을 조직하고 反日운동을 進行하였다.
間島에서 三·一運動(3·1운동)
1919年 3·1운동이 조선에서 폭발되자 間島에서는 3월 12일에 빈손에 太極旗를 쥐고 萬歲를 부르게 되었다. 鐵血光復團(철혈광복단)에서 臨時로 決死隊를 組織하여 가지고 示威運動 先頭에 서서 나가다가 왜놈들의 간교한 꾀로 21인이 총살을 당하였소(中國 陸軍놈들에게 銃殺을 當하였음). 行列 先頭에 우리 체조 先生 박문호가 기를 들고 나가다 총살을 當하니 그 旗를 채창현(베림-우랄 목재소에 갔던 學生)이 들고 나가다 또 총살을 당하니, 그 기를 최익선이 들고 나가다가 또 총살을 당하여서 合 21명이 총살을 당하니 示威行陣을 停止하였다. 三日만에 총살된 시체들을 장사하였다.
그 후 鐵血光復團(철혈광복단) 幹部에서 會議를 열고 將來 운동 方針을 討論한 結果에 武裝運動으로 넘어가서 于先 間島에 있는 조선 놈 “개”무리부터 없애고 그 다음에는 武力으로 日本 帝國主義를 反抗하자는 意見이 成立되었다. 당시 우랄산에 갔다 2월革命 후에 解放되어 돌아온 임국정 同志는 말하기를 러시아노동자들도 武裝暴動으로 皇帝主權을 征服하였고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日貨 15円만 주면 五連發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武裝準備에 着手하였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임국정·최봉설(계립)·박웅세·한상호 4사람이 자기집에 있는 송아지들을 팔아가지고 해삼[블라디보스토크, 俄領(러시아령)]으로 총을 사러가니 그 곳에는 조선인 國民議會가 있었다. 박웅세·한상호는 에헤로 보내고 cт. Эхо(에호 역) 국민의회에서 조직한 白派(백위파)의 군대], 임국정이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떨어지고 나 혼자 떠나서 間島로 도로 나왔는데 인차 鐵血光復團(철혈광복단)員 윤준희를 만나서 武器를 사는 데는 金錢이 要求되니 그것을 얻을 方針을 相論하게 되었소. 처음에는 일본 농상점을 털어서 金錢을 얻자고 하다가 나중에는 일본 銀行에 每日 40萬円 돈이 있다니 그것을 한번 앗아 가지면 무기를 사고 軍人을 募集할 수 있다고 토론하였다. 그 후에 나는 다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박웅세·한상호·윤준희를 만나서 같이 간도로 돌아왔다. 올 때에 취풍 다재골 최이관네 집에 있는 홍범도를 만나서 장래 간도에 가서 독립군운동을 進行할 意見을 말하고 왔소.
日本銀行에서 親務하는 전홍섭과 相逢당시 龍井 日本銀行에서는 조선사람 전홍섭이 일하였다. 나는 임국정과 같이 하루 밤에는 그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心理를 자세히 알 수 없어 절반 위협삼아, 절반 相論삼아 그를 교제하게 되었다. 우리가 전홍섭을 믿는 것은 3·1운동 示威에서 죽은 同志들을 당시 龍井에 있던 영국병원으로 가져갈 때에 전홍섭도 같이 가는 것을 보고서 우리는 內心으로 그를 同情하기를 民族的 愛國心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果然 그는 愛國者였고, 우리를 同情하였고 意見을 털어놓고서 말하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조선 獨立은 빈손으로 萬歲만 부르고 나서서는 아무런 目的도 達할 수 없으니 반드시 武裝運動이 必要하고, 그 운동에는 金錢이 要求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용정에 있는 銀行은 차츰 하되 내가 하루 건너씩 當番을 서는 것이니 내가 당번서는 날을 알아서 하게하고 우선 지금 日本에서 吉會 鐵路를 부설하려고 日貨 30萬円이 오니 그것부터 먼저 앗아내겠소.
내가 회령 가서 그 돈을 가지고 올 터인데 내 앞에 선 말에 돈을 싣고 올 터이니 그 말을 먼저 총으로 쏘고, 그 다음 나를 신 다리를 쏘아 상해에서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나온 후 銀行까지 앗아 가지고 자기도 우리들과 같이 獨立軍으로 가겠다고 말하였소.
전홍섭은 계속하여서 말하기를, 돈을 가지고 올 때에 순사가 11명에 말이 11필, 순사들은 長銃·短銃·軍刀까지 武裝하고 오니 그리 알고서 미리 준비하시오.」하고 우리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전홍섭이 그다지 미덥지 않아서 말하기를 “우리는 홍범도군대를 풀어 가지고 오랑캐골 령에서 하자”고 거짓약속을 하고 다른 곳에서 하기로 하고서는 갈라졌다.
1919年 음 10月 15日이었다. 그리고 장날이었다. 처음에는 임국정·윤준희·최봉설(계립)·박웅세(박진)·한상호·김준 합 6인이 모여서 중국 마적-홍의적으로 변장하고서 “부채골” 어구에서 (객주집이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 기다리고 있는데 해는 지고 날은 어슬어슬하나 달이 밝은 날이었다. 과연 말 11필이 나타났다. 보호순사들은 마음 놓고서 천천히 나타났다. 우리는 미리 작정하였던 대로 한 사람이 두 놈씩 재작하였다. 그러나 전홍섭이 없었다(회령서 아니 오고 있다가 그 사건 후에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윤준희와 나는 돈이 있는 말을 하나씩 잡아타고 미리 예정하였던 山谷로 대여 들었다.
박웅세(박진)·김준은 집으로 가고, 임국정·한상호는 도보로 왔다.
나는 윤준희와 같이 말을 타고 가죽나무·자작나무가 자욱한 골짜기 산등에 가서 말을 매고 돈을 가방 안에서 꺼내어 그 가방 안에 있는 일본 여자들이 뒤에 지고 다니는 명주수건으로 갈라지게 하고, 한상호·윤준희·나 까지 세 사람이 악조을단 그 산을 내려가서, 해란강을 건너 평강을 들어섰소. 평강 벌판에서 용정서 투두거우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길로 한참 가다가 수풀이 길가에 자옥한 곳에서 세산봉이라는 山을 넘어 적안평에 당도하여 우로 보로흐강 (이 강은 연길로 가는 큰 강)을 건너 몇 산골 배시터거우를 지나 와룡동 최봉설네 집에 왔다. 이때는 새벽닭이 우는 때인데 뒤로 돌아온 길이 왜놈을 죽이던 곳에서 70리는 되었다. 이때에 임국정은 말 두필을 가지고 서산 白頭山이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집에 오지 아니하였소. 그래서 날이 채 밝기 전에 윤준희·한상호·나까지 3人은 (한상호 우리 집에서 두 집을 지내었소) 내 동생 최봉준(30년 전에 죽었소)을 시켜 소 술기에다가 돈 짐을 싣고 떠나 대략 와룡동에서 40리 되는 산골 훈춘으로 가는 근방 이랑거우 下村에 와서 최봉준이는 집으로 돌려보냈다(그와 돈이라고 말을 아니 하여 동생과도 비밀로 지켰다).
이랑거우 下村에서 山으로 들어가면 외딴 집이 있는데 이 집에는 다만 두 부처간인 애국자 - 철혈광복단 단원의 집이 있었다. 그 집 근방에 가서 돈은 널로 만들어 가지고 갔던 2궤에다가 내어서 산간 풀속에다가 파묻고 그 곳에 윤준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나는 한상호와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임국정을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날 초저녁에야 임국정을 만나서 밤으로 이랑거우로 가게 되었다.뜻밖에 만난 김하석 이랑거우 산촌에 우리가 가니 곤만 김하석이 그 곳에 왔소. 어떻게 알고 김하석이 비밀산골에 왔소.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있던 김하석 先生이여!
우리가 와룡동에서 있을 때 전홍섭이 임국정 조카(지금 연길병원 큰 의사)를 보내서 전하기를 “내가 내일 용정서 회령으로 가니, 그 다음 날에는 꼭 들어올 터이니 그리 알고 하시오” 한 사실이 있었다.
이날 밤에 정일무네 집에 김하석이 왔던 사실이 있소. 그 날 13일은 정일무 부친 회갑날이었소. 그래 우리 비밀 방에서 술을 먹으면서 김하석과 물었지요. 어째 해삼(블라디보스토크)서 왔소? 김하석은 대답하기를 “내가 용정에 있는 현시달을 보러왔소. (현시달은 당시 조선 놈인데 왜놈의 이름을 가지고 특무이고 영사에 큰 앞잡이 개인데) 내가 용정에 어제 왔다가 지금 용정서 오는 길이요.” 무슨 상론이 있었소? “내가 간도에 독립일을 하자면 이런 큰 개놈들을 게야하오.” 그래서 우리는 비밀이 그를 잘못 보고 이론하였소. 우리 일을 약속하여 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당시 내가 일본 놈들에게 큰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하필 그 이튿날 밤에 최봉설이 집을 수색하게 되었소. 이 날은 18일 새벽이었소. 하고 많은 간도 농촌인데 하필 와룡동 최봉설 내 집에 왜놈순사 30명과 중국 육군 50여명이 포위하고 수색하여 우리 아버지 최문약과 삼촌 최변국을 포착하여 갔다. 어디서 그리 잘 알겠소?
그런데 동지가 묻는 대로 쓰겠소. 1919年 8月 초에 우리는 간도서 “猛虎團(맹호단)”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간도에 있는 개들을 박멸한다는 선포문을 한 사실이 있고 개들 가운데 제일 큰 개 두 놈 안인종·조덕진을 밤중에 용정시에서 당시 임국정·윤준희·이호반·최봉설·박관해·박웅세 기타 十餘명이 사로잡아 가지고 훈춘 산속을 경유하여 俄領(러시아령)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가지고 와서 김하석에게 맡긴 일이 있었소.
당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김하석은 國民議會의 큰 장수인데 우리가 그를 줄 때에는 김하석이 그를 처벌할 줄 알았는데 준 이튿날부터 김하석은 그들과 같이 좋은 낯으로 同行하여 다니면서 그 때 그는 돈을 가지고 아마도 온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개들은 그 해 10월쯤 하여 다시 용정으로 갔습니다. 개들이 용정 영사에 가니 영사에서 너는 어디에 갔다가 왔느냐? 8월 초에 밤에 용정시가지에 나가니 별안간 단총을 빼들고, 우리의 눈을 싸매고, 몇 날인지 가고 보니 해삼(블라디보스토크)인데 어느 집에 가둬두었는데 10월에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호열자병에 죽는 바람에 우리를 수직하던 사람도 죽고 달아나는 그 기회에 도망해 왔습니다. 그런 대답을 하니 영사는 좋다. 그대로 특무로 일을 하여 왔다. 이것도 김하석이 계획인데 이들을 선두로 세우고 용정에 현시달은 제일 큰 순사다. 이런 개들과 서로 약속이 있었다.
돈을 가지고 해삼(블라디보스토크)으로 오던 사실돈을 가지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데, 나는 말하기를 홍범도가 지금 간도 하마탕에 와서 군대 본무를 두고 있는데 그 곳은 애국자들이 많은 곳이며, 이동휘·계봉우, 국민회 회장 구춘선이도 있던 곳이고, 나의 처가편도 4~5집이 있으니 그리 가서 홍범도군대에 돈을 맡기고, 한편으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무장을 사서 가져오며, 또는 전홍섭과 다시 연락을 달아서 은행에 있는 돈을 다 하여 보자고 하는데, 임국정은 이 돈을 가지고 해삼(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자는 김하석 편이었고, 윤준희는 나이 많은 사람인데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국민의회에서 벼슬을 할 일과, 그 곳 철혈광복단 書記가 될 일과 벼슬에 넘어가서 임국정이와 김하석의 편에 넘어갔소. 그래서 나와 한상호가 홍범도 있는 대로 가자고 토론에 의견 부동으로 분분히 토론하다가 우리가 소수가 되어서 해삼(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게 되었소.웅세(박웅세)·김준도 잃어버리고 그 이튿날 떠나서 山으로 琿春(훈춘) 황거우로, 전선촌 동쪽으로 俄領(러시아령) 상벌이를 넘어 보시예트 지방 목허우라는 부두에 왔지요. 밤낮없이 와서 2일 내에 중국과 러시아 국경을 넘었지요. 목허우에서 배에 앉아 해삼(블라디보스토크)을 오니 최이수가 전송왔소(마중왔음). 그래 해삼(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무사히 와서 윤준희는 조윤관 집에 쥐인하고, 최봉설은 채계복네 집에 쥐인하고, 국정(임국정)은 다른 집에 한상호도 다른 집에 있었소. 벌써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일본신문에는[『浦塭日報(포온일보)』] 間島十五萬円事件이 게재되었는데 犯人들이 吉林 方面으로 갔거나 그렇지 않으면 海三(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갔다고 하였소. 몇 날이 아니 되어 김하석이 의견에 우리 일행이 한 집에 모여 있자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회의를 늘상 할 터인데 한 곳에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소. 그리고 자기가 집까지 정해놓았다고 하여서 한 곳에 김하석이 시키는 대로 모였소. 당시 나와 한상호는 나이 어리고 노령(러시아령)을 잘 모르는 때였소.
그 때 그 돈을 가지고 할 일은, 조선신문을 내고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무장을 사서 가지고 전쟁을 할 문제이요. 사관학교는 수청에 가서 장기영과 채영이가 하게 맡기고, 사관책자는 이용·이광 등이 출판하게 하고,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백산학교 집을 샀소.
돈은 일본은행권 WºWº 들을 보고 알까하여 영국·미국 돈으로 바꾸게 하였소.
무장은 국정(임국정)이 사게 하였소. 국정(임국정)이 말하기를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는 엄인섭 같은 사람이 없소. 以前에 홍범도와 같이 조선 경흥에 義兵으로 갔다 온 일도 있고, 그가 능히 무장을 살 수 있다고 하였소. 그때 나는 말하기를 남들이 모두 엄인섭이는 개라고 하는데 어찌 무장을 사러 같이 가오 한즉, 국정(임국정)이 말이 내가 이전에 우랄산 목재소에 갔다 올 때에 엄인섭과 자귀(결의)까지 맺었으니 아무 근심 마시오. 武裝을 사가지고 같이 자동차로 훈춘까지 갈 터이니 근심 마시오, 그래 남들이 좀 의심하는데 그는 엄인섭과 같이 동령으로 간다 하고 가서 3일만에야 초저녁에 왔소. 같이 갈 적에 엄인섭이 정주문으로 들어와서 정주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까지 나는 처음으로 면목을 보았지요. 그래 3일 만에 저녁에 국정(임국정)은 말하기를, 長銃 1,000병, 속사포·폭탄 등을 샀는데 그 무기고는 백파 무기고인데 자동차에 싣고 훈춘까지 가는데 長銃 한 柄에 彈丸 1,000介式 샀다고 하였소. 그래서 그 무기를 가지고 임국정·나·한상호가 가기로 작정하였소.
근만 그러자 김하석이 우리 있는데 찾아왔소. 그가 하는 말이 “당신네 단총과 폭탄을 주시오. 오늘 밤에 선포문을 일본 헌병대에 떨구러 가는데 거기로 가는 靑年들이 단총과 폭탄을 꼭 주어야 가겠다 하여 내가 왔는데 꼭 주어야 하겠소.” 처음에는 나와 한상호한테 욕을 먹고 갔소. 그 다음에는 최이수를 데리고 왔소. 그래 먼저 임국정이 제 총을 내놓으면서 주자고 하오. 최봉설과 한상호도 주시오 하고 말하니, 김하석이가 말하기를 “여기는 별일 없소. 근심 마시오. 무슨 일이 없소. 왜놈들이 여기는 힘이 없는데 근심 마시오.”하고 그것을 (무기) 모두 가져갔지요.
그 집에 돈도 있고, 재무는 윤준희, 그가 철혈광복단 서기였소, 철괴에 피로 쓴 것도 모두 그 집에 와서 있소.
나는 총을 주고 아무 근심 없다니 한상호를 데리고 지령감 집에서 오라니 가서 술도 마시고, 국수도 먹고 밤이 깊도록 놀다가 그 집에서 자라고 하는 것을 제 기숙사에 오니 밤은 아마 11시나 되었소.우리 一行이 日兵 憲兵隊에 체포우리는 主人집 가운데 방에서 자는데 정주에서 들어오면서 첫째로 시작하여 한상호·윤준희·임국정·나·나일(그는 그날 저녁에 찾아와서 자던 자요)이 있었소.
아마 밤 2시나 됨직 하오. 그 때 문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오. 그 때까지 정주에서 주인부처는 자지 아니하고 있다가 그 누가 왔소? 하고 물으니, 일본 헌병대에서 왔으니 문을 벗기시오 하니 主人의 말이 정주문을 걸지 않았으니 정주로 들어오시오 하였다. 그 때 정주 곁에 유리 덧문을 두드리는데 조선말로 한다.
그러자 정주문으로 일본 시비리(시베리아) 出兵 衣服을 입은 軍人들이 수가 없이 들어오면서 전기등을 손에 든 놈이 처음에 섰소. 정주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선 憲兵은 두 번째 방 우리 방으로 단총 부부리와 전기등이 一時에 들어왔다. 우리 방에도 전기불이 행하였소.
이때에 우리는 모두 큰 잠을 자는데,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첫 끝에 누운 한상호·윤준희·임국정이 깨우고 제 자리에 오니 벌써 전등과 단총 부부리 들어와서 사람 하나에 세 놈씩 한 놈은 총을 빼어들고, 둘이 샅바를 가지고 동지기로 시작하였소. 총은 윤준희에게만 있는데 자던 가리에 정신을 잃은 모양인데 그 총을 쓰지 못하고 동지우기로 시작한다. 나한테도 그 모양으로 세 놈이 대드는데 그 중에는 조선놈도 한 놈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혼자라도 최후 힘을 써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왜놈들은 벌써 거저 먹었다고 쉬운 마음을 가졌다.내게 접어드는 놈을 단장에 주먹으로 모숭머리를 치고, 서구 있는 놈은 발길로 불삼을 차고, 門에 서고 있는 놈은 머리로 골받이를 하여 네 놈을 던져 놓고, 방문을 열고 복도방으로 나가 出入口를 하나 열고 다음 것을 여는 때에 방에 있던 왜놈들이 소리치면서 모두 나와서 내 몸에 달렸다. 벤자개 팔 쥔 놈, 등을 쥔 놈, 목을 쥔 놈, 一時에 몸을 쭉 빼면서 門을 여니 그 놈들이 모두 자빠져 구들에 던져졌다. 門을 열고 밖에 나서니 밖에는 총을 집고 어떻게 잡아가지고 나오는가 하여 無心히 총을 쥔 놈을 보니 그 놈 선 데는 낮소. 그래서 뛰면서 그 놈 가슴팍을 차니 그 놈도 강판에 자빠졌소. 마당에는 憲兵들이 많이 있고 20보나 되는 길가에는 그 自動車와 마도치크가 여럿이 서고 있다.
밖에 나가니 북쪽에 널 울타리를 한 것을 보고 첫 울타리를 뛰어 넘는데 사격이 始作되었다.
거기서 이 집 울타리, 저 집 울타리, 수다한 울타리를 넘어뛰어 마지막 울타리를 뛰어 넘으니 오른쪽 어깨 푸파이까에서 소음에 불이 달렸다. 눈에 번듯하게 누워 불을 끄고 나니 오른팔이 총에 맞은 것을 알고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바다로 얼음 강판을 걸어서 마아산 섬을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몸에는 內服에 푸파이까만 입고, (누르끄레한 빛) 두 발은 벗었소. 왜놈을 개보다 더 못 여기던 마음은 더욱 기색을 한층 더하였소. 이 전에 도보경주 모양으로 달리는데 왼팔로 오른팔을 쥐고 달아났소. 얼마나 얼음 강판을 건너갔던지 바닷물은 중간이 얼지 아니한 “용가름”을 만났다. 달도 없이 깜깜한 밤중에 바닷물이 흐르는 그 곁에 강판에 홀로 앉았다.
이제는 어쩌겠소? 누구와 의논하겠소? 어디로 가겠소? 이렇게 한초 동안 生覺하는 中에 北風은 시베리아 찬바람을 쏘아오는데 발을 벗고, 內服만 입은 사람인 내가 어찌 살겠소? 심장의 고동은 점점 더 합니다. 다시 생각하고 대칭거우재 Вторая речка(프타라야 레치카) 바다역 바위 밑으로 달아나서 또 앉아 생각합니다. 바닷물역에서 여기가 아마 8리쯤은 되고, 찬바람은 점점 불어오고, 몸은 핏못이고, 한 팔은 드리우고, 발은 얼어들어오는데 이제는 얼어 죽을 모양이요. 어디로 가겠소? 닭은 웁니다.
내가 앉아있는 바위돌 위에는 군사간도 있고 사사집도 있어 닭소리가 납니다. 나는 다시 신한촌 내 主人집 내가 사랑하는 채계복을 찾아가야 살 것을 생각하고 최후 용기를 내어 달렸습니다. 더운 피가 도는데서 번개같이 신한촌 학교집 앞에 돌바위 좀 높은데 와 엎드려 보니 곧 그 울니채가 우리가 일을 치렀던 곳이요. 아무 흔적이 없으니 첫째 집 우리 친구들 있던 집이기로 그 집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니 7~8명 아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불을 켜고 나의 몸에 피가 묻은 것과 또는 내 단촉한 말을 듣고 모두 자기들이 살겠다고 도망하였소. 그 때 내 생각이 어떠하였겠소?
다시 정신을 차리어 채계복네 집을 찾아가서 門을 두드리었소. 복도 첫 間에는 이혜근이라는 處女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愛國 여자이고, 당시 신한촌 愛國婦人會(애국부인회) 會長이었소. 그는 내 음성을 듣고 두루시만 입고 門을 열어주었소. 그 집에 들어가서 상에 척 앉고 나니, 사람이겠소, 귀신이겠소, 도깨비겠소, 이혜근이야 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연습된 여자니 그랬지 다른 여자라면 실력하여 먼저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곁방에서 채계복이, 채성화, 그 어머니가 나와서 채계복은 울었소.
이혜근은 내 오른팔에 탄환이 박혀 마감 가죽까지 나와 박힌 것을 빼어내어 놓고서 말하기를 나는 이 철을 영원히 보존하여 두었다가 조선이 독립된 후에 기념하겠다고 하였소.
그 나머지 어깨에 세 곳이나 조금씩 맞은 곳이 있으나 그것은 관계치 아니하였소. 전체 온 몸이 모두 얼었소. 눈과 입만 내놓고 모두 얼었소. 온 몸은 통세 나기 시작하였소.
채계복은 자기 오빠의 양복과 신발, 외투를 가져다가 나를 입혀 데리고 새벽에 날이 밝기 전에 떠났소. 그 때 그 오빠는 그 집 아래 첫 집에서 상점을 보았소. 오빠 이름은 채창도였소. 그 상점 뒷간에서 내가 치료하게 되는데 상점 두어칸을 막고 도배를 하고 채계복만 뒷문으로 통하고 상점은 거리 門에서 出入하게 하고 그 방은 뒷 울타리 안에 들어와 뒷문으로 出入하는데 나 누운 방에는 다만 채계복만 있었소. 당시 채계복이 나에게 대한 열정, 애국심, 조선독립을 위하여 헌신하던 그 진정은 내 일생에 잊을 수 없소.
날이 밝자, 채계복은 우리가 留하다가 逢變을 當하던 그 집에 갔다 와서 말하기를 그 主人집 女子말이 모두 잡히어가고, 한 사람이 도망할 시에 어찌 왜놈을 쳤던지 한 놈은 로숭이 부러지고, 밖에 있던 놈들까지 모두 5놈이 맞아 상해서 피못이 된 것을 自働者로 실어갔다고 하였소.
나는 일신이 부러져 한 달이니, 발을 동이고 손을 동이고, 대강이를 동이고, 모두 두루뭉실이 되었소. 채계복은 매일 아침이면 내 몸을 고쳐 동여 주었소. 그 때 소위 여러 친구라던 자들은 모두 農村으로 달아나고 말았소.
마지막으로 김하석이나 최이수는 구경도 못하였소. 우리 총과 폭탄들은 그가 예영가지고 그 때에 피하였다.
그 후 3일 만에 창도(채창도) 상점방에 엄인섭이란 놈이 왜놈 신문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신문에 쓰기를, 최봉설이란 사람이 달아났는데 그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그렇지 않으면 얼어 죽었을 것이다. 대일본헌병이 이런 사람 하나 잃은 것은 큰 수치라 하여 봉설이(최봉설)를 잡거나 죽이거나 하는 사람에게 일화 萬円으로 상금을 준다고 하였소. 나는 그 방에서 21일 동안 채계복의 구원을 받고 있었소. 유익정이 찾아와서 이곳에 오래 있으면 다시 붙들릴 위험이 있으니 떠나자고 해서 수청 석탄(광)풍에 가서 상처를 더 치료하였소. 그 후에 왜놈들이 채계복을 붙들자고 하여 채계복·우봉운·이이순 등이 도망하여 中國 饒河縣 등지에 가서 교사질 하였소. 그 후 자기 약혼하였던 남자 장기욱을 찾아서 조선 서울 가서 살다가 남편 장기욱은 조선조국전쟁 시에 사망하고 그 아들 장경무와 식구는 지금 평양에 있는데 채계복은 병이 나서 국가에서 구휼금을 타서 生活하며 平壤에 있다고 하오.
同志들에게 死刑판결그날 밤에 일본놈들에게 잡힌 임국정·윤준희·한상호·나일은 일본군함에 실려 日本 횡빈(요코하마)에 갔다가 東京(도쿄)에 到着되었소. 東京(도쿄)에서 그들을 조선으로 移送시켜 釜山·서울을 經由하여 淸津감옥에 와서 판결을 받게 되었소.
1920年 淸津재판에서 임국정·윤준희·한상호 3명은 각 15年 監禁, 전홍섭은 10년 監禁, 나일은 無罪放送, 최봉설 나는 결석판결 死刑을 받았소. 나한테 死刑 宣告의 原因은 내가 왜놈들이 가지고 오던 돈을 빼앗을 때에 단총 2개를 가지고 제자리에서 왜놈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서 또 5명을 쳐서 뉘이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나는 최계립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되었소.
당시 임국정 母親 뻬뻬는 예수교 傳道師였소. 영국놈 예수교 목사들이 “서울 올라가면 몇 해 안되는 판결을 받을 것이니 不服하라고 권고하여서 不服하고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英國 예수교 목사들 권고대로 不服한 結果는 서울 가서; 임국정·윤준희·한상호·최봉설은 死刑, 전홍섭은 15年 監禁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英·美國(영국·미국) 예수교 목사 놈들은 이렇게 조선 革命者들을 음흉하게 학살하였다. 청진재판에서는 間島朝鮮人 各 社會界에서 數多한 金錢을 거둬서 변호사를 내서 얻었던 결과이다. 그러나 英國 예수교 목사놈들은 그것을 無效로 하고 음흉한 계획으로 死刑을 받게 하였다. 전홍섭은 그 후 肺病으로 假出獄되어 소련으로 亡命하였다.
死刑을 당한 시체도 간신히 그 친척들이 찾아서 서울에서 장사하였다. 끝.
以上은 1957年에 받은 자료.
1958年 6월 15일에 ст.Берказан, Кызылорда (베르카잔 역, 크즐오르다)주에서 보낸 첨부자료.왜놈들을 죽이고, 돈을 가지고 이랑거우 하촌에서 적은 골로 들어가면 부처간이 사는 집을 미리 약속하였는데 김하석이 어디서 알았는지 17일 밤에 그 집에 왔다. 야! 요행 찾아왔다! 하였다. 이 사실이 모두 지도를 철혈광복단에서 한 일입니다. 그 단원들입니다. 이때에 김하석은 애국자라고 칭하는 때이다.
海三(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하기를 음력으로 11월 2일에 당도하였소. 왜놈들이 新韓村에서 우리를 포착 시는 음력 섣날 밤입니다. 그때 지상호 부친 지용수 老人이 나를 오라고 하여 한상호를 데리고 설 쇠러 갔던 일이 그냥 생각납니다. 우리가 있던 집 신한촌에 獨立門을 세웠던 골목 (Хабаровская улица (하바롭스카야 거리))인데 서편줄의 집인데 아마도 Wº10을 넘지 않게 들어와 있는데 父妻間이 살고 주인성이 林이라는 것이 생각나오. 羅一(나일)은 間島 臥龍洞 사람인데 청진에서는 無罪放送되었지만 그 後 間島에서 다시 왜놈들에게 포착되어 놈들이 그의 목을 떼어 전봇대에 달았소.
돈은 15만원인데 그 중에서 一萬五千円이나 쓴 모양이요. 사관학교 교과서를 출판하는데 백산학교를 샀던 것은 1923年 봄에 海三(블라디보스토크)이 해방된 후에 내가 팔아서 가지고, 단총을 사가지고 “赤旗團(적기단)”을 조직하여 가지고 다시 만주에 나갔는데 1926年까지 3年 동안 事業하였지요.
滿洲 反 日本 帝國帝主義 人民革命軍 第七軍을 回想하면서 원수산 동지 回想記
本名은 盧昌律(노창률)·박철호이다.1905年 正月에 咸北 鏡城郡 어랑에서 出生한 貧農民 子息이었다. 生活上 困難으로 引하여 父親은 先代로부터 二百餘年을 살아오던 其 鄕土를 떠나서 間島 평강 內豊洞에 移徙하여 오게 되었다.
바로 1914年이었다. 아버지는 말씀할 때 “살아가기도 바쁜데 저 일본놈 憲兵隊 개놈들의 등살에 입맛이 들지 아니하여서 차라리 잊을 수 없는 故鄕이라도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勤勉하신 아버지는 4~5年동안 마음먹고 晝夜로 勞力한 結果 形便은 半小作 半自作農의 살림으로 되었다.
1919年 3·1 獨立萬歲는 間島 龍井에서 3月 12日에 부르게 되었다. “大韓獨立萬歲”라는 우렁찬 喊聲은 天地를 振動케 한 것이며, 日本帝國主義 總領事 놈들은 이 우렁찬 氣勢를 壓倒하여서 將次 發動될 間島에서의 獨立運動을 말살하려는 기도로써 中國 警察을 利用하여 示威行列을 解散키 爲한 攻擊이 생기었다.
示威行列 先頭에서 太極旗를 높이 들고 前進하는 朴文浩(박문호) 先生을 射擊하여 現場에서 戰死하였다. 當時에 死亡 當한 戰士가 21人이었으며, 蔡昌鉉(채창현) 以下 數十名이 重傷되었다. 重傷者들은 제창병원에서 治療하게 되었다.
나에게 가장 큰 衝動을 일으킨 것은 이 事變에서이다. 나는 바로 “명성”小學校에서 工夫하였는데 우리 先生이신 蔡昌鉉(채창현)을 찾아 두 번이나 “제창병원”에 갔는데 先生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꼭 有名한 愛國者가 되어서 朝鮮獨立을 하여야한다”고 하였다.
三月 二十九日에 先生은 及其也에 死亡되었다. 우리 學生들은 이 先生의 葬事 時에 몹시도 울었다. 그야말로 아버지나 어머니 死亡한 것만큼이나 울고 서로 우리도 자라서 저 先生처럼 朝鮮獨立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間島로부터 沿海道나 朝鮮 各地에서 獨立運動이 組織的으로 發生되었다.
1920年은 마침내 獨立軍武裝隊가 活動하게 되었나니 義兵大將 洪範圖(홍범도) 以下 허영장·安武(안무) 等 獨立軍隊가 活動하는 中에서 봉오골과 노투거우에서 日本軍隊 數百名을 戰滅한 事實에서 나는 꼭 朝鮮이 獨立되리라고 믿었다.
그 해 十月에 靑山里에서와 왈니거우에서 日本討伐隊와 큰 戰爭이 있은 다음 獨立軍은 沿海洲로 後退하였고, 間島 各地에서는 地下室 生活을 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黃宗弼(황종필) 先生은 우리 집 뒷방에서 11月부터 正月달까지 三個月 동안 地下室的 生活을 하였다. 나는 그 때에 두 번째에 큰 衝動을 맞게 되었나니 그 先生은 나에게 이런 말을 가르치었다. “러시아에서는 레닌 先生이 新黨을 組織하여 가지고 皇帝 러시아를 征服하여 가지고 社會主義國家를 組織하였으며, 社會主義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班別이 없고 貧富가 없고 모두 다 勞力하여야 하며 財産이나 土地를 가지고 남을 부려먹는 制度를 없애는 것이며 敎育에 있어서는 國家經費로 大學까지 工夫시킨다”는 것이다.
1921年 二月 初에 황종필 先生은 上海로 떠나가신다고 하면서 떠나셨다. 先生은 또 다시 말씀하시되 “工夫를 잘 하여 가지고 愛國革命家가 되라”고 하였다. “先生이 이렇게 가시면 언제나 對面하실까요?” 하고 아버지와 어머님이 물으시니 先生은 對答하기를 “革命이 成功된 때이면 自然 對面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其後에 어머니는 나에게 물었다. “革命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고 하였지만 나는 獨立이 된 후에 만난다는 意味라고 말하였다.
1921年에서 1924年度까지 間島 東興中學에서 工夫하는 나에게는 어려운 苦生을 하는 時期였다. 學費가 不足하여서 “엿장사”·“약장사”를 하여서 學費를 保充하였다. 이와 같이 苦生스럽게 工夫하는 나에게는 황종필 先生의 말이 언제든지 記憶되었다. “레닌의 러시아는 社會主義國家로써 大學까지 國家經費로 工夫시킨다”는 것이었다.
1925年 秋期부터 龍井에서 東滿靑年總同盟을 組織할 運動이 始作되었다. 이 組織事業의 發起 組織者인 이주화 同志와 接近케 된 것은 나의 意志와 行動을 規定하여 주는 것이었다.
東滿靑年總同盟을 조직하기 爲한 發起會 조직을 召集하는 계癸期에서 이주화 同志께서 朝鮮에 高麗共産靑年會(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되었음을 알고서 그의 入會할 것을 豫定하였다.
高麗共産靑年會(고려공산청년회)는 가장 嚴密한 組織인 것만큼 其 秘密을 生命으로 死守할 것을 盟誓하고 入會하였다.
東滿靑年同盟(동만청년동맹)은 어려운 條件 下에서 1925年 12月 末에 조직되었다. 이는 이주화 同志 外 多數한 同志들의 必死的 鬪爭으로써 成功된 것이었다.
一九二六年 下半期에는 이주화 同志의 保證으로 朝鮮共産黨(조선공산당)에 入黨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 自身이 레닌주의의 볼셰비키다운 鬪爭者가 될 것을 自認하였다.
1927年 間島 투도거우 駐在 朝鮮日報社 記者일을 하게 되었는데 日本領事館 형사놈들은 나를 指目하여 共産派라 하였으며, 나와 같이 다니는 사람들까지 共産派라고 指目하여 형사놈들이 尾行하였다. 7月 어느 날이었다. 李海根(이해근)이라는 형사놈이 나의 事務室에 와서 前에 없이 親切한 態度로써 壁에 걸린 片紙綴을 한 張씩 뒤지기 始作하였다.
片紙綴 한 밑에다가 東滿道黨에 指示를 써 두었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형사놈은 300여 張의 片紙綴에서 折半넘게 벌써 뒤지게 되었다. 이 瞬間에 나는 別生覺을 다 하였다. 黨指示에는“滿洲總局으로부터 東滿道에 보내는 指示가 南유수거우에 있으니 8月 1日 內로 이속할 것”이라고 한 것인데 別에 別生覺을 다하다가 웃으면서“이상(이해근) 무엇을 찾소? 거기에 共産派 秘密이 있는가 하고 찾소? 여보 이상(이해근)! 설마 共産派 비밀이라면 거기에 감추었겠소?” 하고 大膽스럽게 操弄하듯 말하면서“어린아이 짓을 말고 술이나 가서 한잔 마시지요” 하였다.
刑事놈은 어찌 生覺하였는지 하-하 웃으면서“그러면 술이나 가서 마시자꾸나”하고 그만 일어섰다. 이 瞬間에 僥倖으로 무사하였다. 卽時 술집에 가서 술을 사 먹으므로 큰 화를 免하였다.
其後에 南우수거우에 가서 文獻을 가지고 三日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투도거우 市街 거리에서 이가놈(이해근)과 商務局 巡査 세 사람을 만났는데 “俗談에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셈이었다. 이가놈(이해근)의 命令으로 中國 巡査놈이 내 몸을 수색하게 되었으니 이 시각이 어떠하였으랴? 나는 얼른 웃으면서 무엇이 있는가고? 자 보시오 하고 洋服 바지를 內服까지 죽 벗어서 발목에 내리웠다. 數多한 男女 老少가 옥실거리는 가운데서 그와 같은 현상이 얼마나 凶하였겠는가? 이가놈(이해근)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어서“이 共産派야 어서 가거라”하였다. 中國 순사놈도 웃고 말았다. 이 瞬間에 나는 얼른 바지를 추켜 입었다. 그리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었다. 실실 전총은 발목에 감춘 것이었다.1927年 十月 三日은 잊히지 아니하는 날이다. 이 날에 龍井에서 東滿道 幹部가 檢擧되면서 共産黨員들 名簿가 脫露되었다. 그리하여 龍井서부터 檢擧가 始作되었다. 間島 各處에서 그 날 밤까지 체포된 同務들 崔元澤(최원택)·安基成(안기성)·玄七宗(현칠종) 等 其他 三十餘名이었다. 이 情報를 들은 同務들은 모두 亡命하게 되었다.
이 事變으로부터 亡命케 된 나는 盧昌律(노창률)이라는 本 姓名을 변하여 朴鉄浩(박철호)라고 하고서 北滿鐵道線인 松花江 沿岸에서 活動케 되었다. 그야말로 職業的 革命者로서 地下室 生活을 하게 되었다. 1928年 四月에 滿洲總局 指示로 東滿(동만주)에 다시 나오게 되었으니 이 地下室 生活에서 가장 困難케 된 것은“東興中學” 學生 時期에 풋볼 先手로 있었기 때문에 龍井으로부터 평강 투두거우·얼두거우·산도거우 局子街 靑少年들을 알게 된 關係上 낮에는 어디든지 다니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同務들 집 뒷 고방이 아니면 감자굴에서 歲月을 보내게 되었다. 當時 나는 이따금 1920年 冬三에 우리 집 뒷 고방에 있던 황종필 先生의 生覺이 기억되었다. 生覺할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님이 어찌 그리도 그를 신통하게 비밀을 감수하고 또 그를 愛護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이와 같은 地下室 生活에 아버지와 어머님이 念慮스러운 生覺과 못지아니하게 나의 妻에게 맞는 勞心焦思였다.
1929年 봄을 당진하고 보니 間或 내가 집에 드나든 관계로 나의 妻가 잉태 中에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日本領事館 刑事놈들에게 무서운 압박을 받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님, 나의 처, 同生네 부처간은 勿論이고 洞里사람들까지 그 개놈들에게 無數한 苦楚를 당하게 되었다. 그때 出生한 아이는 女子였는데 至今 루마니아 부하레쓰트農業大學에서 工夫하고 있다. 그 아이 이름은 노경수인데 아마 至今 조선 平壤이나 其他 地方에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1947年度 萬景臺里 革命者 遺家族學院에서 工夫하다가 1949年度에 學院이 停止될 時에 노경수는 女子임에 不顧하고 人民軍隊에 自願으로 編入되어 祖國戰爭에 參加하여 英雄的으로 鬪爭하여서 두 번이나 勳章을 받았으며 1952年度에 洪明熙(홍명희) 先生의 提議에 依하여 루마니아에 가서 工夫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同生 盧昌浩(노창호)는 1931年에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1935年에 서울 西大門 刑務所에서 死刑을 當하였는 바 그 시체를 내 弟嫂 張茱玉(장수옥) 동무가 이송하여서 咸北 어랑군 이엄리 共同墓地에 가져다가 葬事를 지내었다.
나의 妻 박봉순은 1958年度 6月까지는 平壤市 政府病院에서 衛生員으로 勤務하다가 七月부터 萬景臺里에 가서 김일성 수상님 조모님을 모시라는 黨의 指示대로 일하고 있다.
朝鮮共産黨 滿洲總局 擴大委員會는 1929年 六月에 中東鐵路驛前인 철영하에서 進行되었다. 當時 김지강·(최용진)·장시우·李養英(이양영) 等 四人의 提出한 問題가 歷史的 時期를 지은 것이니 大會는 滿洲 朝鮮共産主義者들이 中國共産黨의 領導와 조직에서 鬪爭할 것인가, 朝鮮共産主義 그룹으로 無原則한 派爭을 繼續할 것인가 하는 問題였다. 이 問題를 가지고 三日 동안이나 激熱한 理論 斗爭이 있었든 바 그 會 主動者 김찬을 首位로 하고 滿洲 朝鮮共産主義者들은 반드시 朝鮮의 解放을 爲하여 滿洲를 武裝運動을 準備하는 地帶로 利用하여야 된다는 것이었으나 마침내 大會는“朝鮮共産黨 滿洲總局 및 地方 黨部들까지 점차 解消하면서 中國共産黨의 영도와 조직에 배속하여야 된다”고 結定하였다.
이 擴大委員會議는 革命의 歷史的 계기를 지어준 것으로써 革命鬪爭에 새 전환을 가지게 되었다.
1929年 東淸鐵路事變과 1931年 9月 18日 日本 帝國主義 强奪的 滿里强点(만주사변)과 아울러 武裝鬪爭을 명시한 것이었다.
1929年 十一月에 中國共産黨 滿洲省委를 찾게 된 바 우리들은 中國共産黨으로 轉黨하게 되었으며, 滿洲總局의 병사업은 장영으로써 해소되었다.
1930年 9月 17日은 中國共産黨 滿洲省委의 北滿 委員會의 松江 中心縣 委員會는 김지강(최용진)·박철호(필자) 기타 同志들 지도 下에서 松花江 下流 통하현을 中心하고 潛在한 滿·蒙(만주·몽골) 開發隊 유동열·이동산 등 日本 帝國主義 走狗를 反對하는 큰 示威運動이 있었나니 二百餘명의 群衆은 손에 붉은 手巾을 들고 “日本帝國主義 滿·蒙(만주·몽골) 開發隊를 撲滅하자”하는 口號를 외치면서 二日 동안 계속된 示威運動은 이동산의 家産을 奪取하여 勞力大衆들에게 分配하여 주었다.
이 示威運動이 있은 直後부터 김지강(최용진) 동무는 武裝鬪爭으로써 遊擊隊를 조직할 전방으로써 일하게 되었다.
1932年 六月에 滿洲省委 擴大委員會는 北方黨大會(만주·직예·山東·山西·협서성)의 基本 政綱을 接受하는 會議였다. 北方黨大會는 취소주의자 陳獨秀(진독수)의 관외 除外說을 根本的으로 거부하면서 滿洲共産黨의 行動綱領을 樹立한 大會이었다.
“日本帝國者들이 滿洲를 强奪하고 강정 皇帝을 首位로 하고 滿洲國을 建立한 條件 下에서 滿洲共産黨은 工·農·兵士 소비에트 主權을 建設하는 鬪爭을 展開할 것”하는 테제(운동방침)였다.
滿洲에 工·農·兵士 議會主權을 樹立하는 鬪爭의 本質에 있어서 李立三(이립삼)의 취소주의적 左傾路線과의 差異点이 무엇인가? 하는 本 동무의 問答으로부터 理論이 展開되었다.
擴大委員會 成員이 11人이었는데 中國 同志가 10인인 中 南方 사람들이 있는 關係로 두세 가지 言語로 번역이 있게 되는 바 英語와 日語까지 使用하면서 理論을 展開하고 討論케 되었으니 言語上에서 不充分함에도 不顧하고 긴장된 問題는 마침내 北方黨大會의 基本 政綱을 接受하면서 필자에게 右傾을 犯할 위험성을 제지키 爲하여 6個月間 最高主義를 宣言하고 開會하였다.
各 中心縣 委員會議에 擴大委員會 結定을 通過시키는 道程에서 滿洲 政勢는 事實的으로 資本家·地主·智識界와 張學良(장학량)軍隊의 將領들 中 馬占山(마점산)·광창해·빙점산 등이 “反日 帝國主義” 및 “反滿洲國” 鬪爭이 적극화하는 事實과 아울러 吉東 中心縣 위원회의 반 동무(朝鮮人)로부터 北方黨大會의 結定과 滿洲 省委 擴大委員會 結議를 거부하면서 反 李立三(이립삼)路線으로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3年 下半期에 筆者는 烏·松(烏蘇江·松花江) 中心縣 委員會로 移動케 되었다.
그 곳에 와서 反日 遊擊隊의 崔石天[(최석천) 최용진] 同務를 만나게 되니 이는 곧 김지강 同志가 崔石天(최석천)인 것이었다. 鬪爭에서 作別되고, 鬪爭에서 相逢케 되었다. 나는 哈爾濱(하얼빈)과 中東鐵道 연선과 松花江 연선에서는 通名하던 朴哲浩(박철호)가 烏·松(오소강·송화강) 沿岸에 와서는 元秀山(원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事實上 武裝을 잡고 軍隊生活을 하게 된다면 別 일이 없겠으나 群衆組織을 맞게 되는 關係上 行動을 緊密하고 組織的으로 警覺性있게 活動하고 鬪爭하기 爲하여서는 假裝行動이 나에게만 要求되는 것이 아니라 一般的으로 변성명하는 것이 必要하였다.
최석천 同志는 벌써 1924년에 雲南軍官學校에 가서 工夫하다가 1925年에 황포군관학교에 轉學하였다가 1926年 北伐革命에 出戰한 中國共産黨員이었으며, 北伐 革命軍의 한 中隊將이었다.
1927年度의 장개석의 上海쿠데타는 國民黨과 장개석의 反革命이 극치에 달하는 反革命이었으며, 第一次 國·共合作(제1차 국공합작)의 北伐革命을 中斷하는 것이었다. 當時에 湖南省 南昌을 中心하고 向北하던 中國共産黨 毛澤東(모택동)·주은래 同志들의 領導下에 있던 朱德(주덕)·염정·하룡 等 同志들의 部隊들을 반항하는 反動的 國民黨 蔣介石(장개석) 南京政府의 黑手를 包圍解散 시키면서 共産黨 領導部와 部隊 將領들을 진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黑手가 미칠 것을 豫見하고 있는 中國共産黨은 朱德(주덕)·염정·하룡 各 旅團部에 리류 將領들과 兵士들에게 레닌主義的 緻密한 組織的 指導와 遊擊戰術로 武裝하고 있던 것만큼 1927年 8月 1日에 南昌을 占領하면서 國民黨 南京政府의 反革命性을 暴露하였으며, 中國 五億萬大衆과 廣大한 領土가 世界 帝國主義侵略에서 解脫되고, 人民大衆의 完全한 解放은 工·農 議會主權이 아니면 解放될 수 없음을 全世界의 被壓迫 大衆 앞에 宣佈한 것이었다.
南昌의 包圍線으로부터 훙파한 朱德(주덕)·염정·하룡 등 旅團部들은 遊擊戰術을 利用하면서 南으로 行進하였나니 1927年 12月 十一日에 廣州市에 工·農·兵士소비에트를 樹立하였던 것이 世上이 皆知하는 廣州꼼무나(광주코뮨)이었다.
崔石天(최석천) 동지는 이 革命大學에서 敎養된 바 中國共産黨의 領導와 組織과 指導의 智識을 學習하였을 뿐 아니라 革命運動에서에 공간되는 武裝鬪爭의 戰術은 遊擊戰術로만이 勝利할 수 있음을 實際的으로 學習하였으며 直接 行動으로 체험한 것이었다.1928年度에 廣州에서 南滿洲로 移動케 된 崔石天(최석천) 同志는 무엇보다도 武裝運動에 對한 關心은 무엇부터 始作하여야 할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1930年 九月 十七日 통하 大示威運動 後에 滿洲省委의 使命으로 武裝部隊를 編成하기 爲하여 烏·松(오소·송하)河 地帶로 移動하면서 活動케 되었나니 1930年 冬期에 탕원현 서무 農場에 30餘名 靑年들을 糾合하고 三個月 短期軍事講習會를 組織하고 軍事行動과 遊擊戰術을 學習케 하였으며, 1931年 冬期에 虎林·寶천현의 密林에다 50餘名의 靑年들을 糾合하고 軍事行動과 遊擊戰術을 學習케 하였으며, 一方으로는 遊擊隊 組織에 着手하였나니 朴元彬(박원빈)·李學萬(이학만)·박진우·최우진 등 동무들로써 赤手空擧의 決死的 行動이 開始되었다.
1933年 下半期 內에는 180명으로 編成된 “反日遊擊隊”가 活動하였다. 이는 소련 변강沿岸에서 活動케 되는 것만큼 日本帝國主義 反소련戰線의 防禦戰만 되는 것이 아니라 소련을 防禦하는 斥候的 역할이 되는 것이며, 南方運動에 特出한 遊擊戰術로 武裝한 것만큼 滿洲 日本帝國主義 强占者들과 滿洲國의 心腸에 浸透한 결핵병이었던 것은 事實이었다.
그럼으로 우리 遊擊隊는 日本帝國主義 討伐隊와 滿洲國 위군의 聯合進攻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成果의 發展에서는 破裂主義者들의 侵害도 있게 되었나니 1933年 冬期에는 이양춘의 破裂運動이 있게 되었다. 이양춘이는 엠엘당의 一分子로써 1931年 冬三에 무원현 커우성에 웅거하고 있는 日本 走狗 장민섭을 暗殺한 者인 것만큼 遊擊隊 內에서 遊擊隊의 正式 行動에는 食糧不足, 軍需品 不足, 武器와 彈藥不足 등 不費한 條件과 同時에 日本 討伐隊와 위군의 攻攻을 抵當키 어려운 것만큼 遊擊隊를 解散하고 비밀암살대를 조직하는 것이 有利하다고 破念恥한 破裂運動이 軍隊 內에서 傳開되었다.
그러나 崔石天(최석천) 同志는 卽時 그 시도를 無慈悲하게 검토하였으며, 隊內의 政治智識과 遊擊戰術과 行動的 實習을 강경케 하여 隊內를 結束하였으며, 新隊員 長成에 경성심있게 指導한 바 全隊員 半數 以上이 中國 貧農民으로 된 것이 本質上으로 옳게 된 것이었다.
崔石天(최석천) 同志에게 特異한 天才的 技術은 遊擊戰에 있어서 放禦戰 포치와 退却路 發見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隊員들에게 信望을 받는 것이며, 小部隊 遊擊行動에서는 崔石天(최석천) 同志와 같이 遊擊하게 되는 때에는 隊員들이 放心까지 하게 된 것은 긴밀한 防禦線 포치와 退却路 發見이 극치한 包圍 中에서도 隊員들을 傷함 없이 救出하는 때문이었다. 1934年 2月에 “쓰빠상지” 전영은 日·滿軍(일본·만주국군)이 한 便으로는 부진과 다른 便으로는 호림현으로부터 聯合討伐을 進行한 集合地에서 戰鬪였다.
日軍 500명과 위군 600명에게 包圍를 當한 遊擊隊 成員 130명이 崔石天(최석천) 同志 지휘로 神出鬼沒하게 包圍線을 突破하였으며, 다시 進攻하는 데로부터 日·滿討伐軍(일본·만주국토벌군) 50餘名이 戰滅되니 日·滿軍(일본·만주국군)들은 방황하여 疾走하였으며, 戰獲物로 五連發 600柄과 彈丸·軍刀·手榴彈·루가포 2門 등인데 隊의 擴張과 神出鬼沒한다는 遊擊隊 名聲이 世上을 놀래게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大小의 戰役을 經過하여 1935年 末에는 700명의 정예한 武隊로 되었다. 그러나 勝利와 損失을 거듭한 事實도 있었다. 그것은 1935年 8月 13日 新興洞 戰役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日·滿(일본·만주국) 聯合討伐隊는 푸진으로부터 松花江 輕便軍艦 二隻과 偉臨縣으로부터 烏蘇江 輕便軍艦 一隻과 繞河縣 위군으로써 三面攻擊으로 日軍 600명, 위군 700명, 日本軍隊의 고목 大尉의 지도로 遊擊隊를 하나도 남김이 없이 진멸한다는 討伐이었다. 그러나 神出鬼滅한 遊擊隊의 遊擊戰術은 230명의 隊員을 救出하였으나 遊擊隊 組織 時부터 活動하던 박지우 동지, 우 동무(中國人 共産黨員)등 12명이 戰死되었으며, 日·滿軍(일본·만주국군) 고목 大尉 以下 28명을 죽이었으나 陣地는 敵軍에게 占領을 當하고 武器까지 잃게 되었으니, 彈丸 한 개면 日·滿軍(일본·만주국군) 한 놈씩 計算하던 烏·松(오소·송화)縣 黨委員會와 遊擊隊 武裝 愛護心으로 보아 損失이 아니라 못할 것이다.
1936年 四月에는 보마정자에 주둔한 滿洲國 위군聯隊에 軍人 300명 주둔한 兵營을 進攻하고 滿軍 45명을 포로하고, 戰利品으로 五連發 70柄과 彈丸·軍刀·手榴彈·食糧까지 앗아내어서 遊擊隊에 威勢와 隊員 擴張이 크게 되었나니 정예한 基本部隊가 950명으로써 反日救國 森林隊들인 “주영장·안망·호유·명산” 등 中國部隊들과 聯合하여 1936年 6月頃에 “反日革命者 第七軍”을 組織하였다.
第七軍은 삼사로 編入된바 隊員이 1,700명에 達하는 大部隊였다.
이와 같은 鬪爭의 역사에는 人民大衆의 피로써 단련된 愛護와 組織的 動員이 없이는 結局 成果를 얻지 못하는 것이었다.
人民 革命軍 第七軍의 發展 鬪爭史에는 잊지 못할 戰士들과 群衆 鬪爭이 있으니 곧 英雄的 鬪爭에 피로 結成된 것이다.
1931年으로부터 遊擊隊의 조직과 活動에서 피 흘리고 戰士한 同志들 허양, 그를 黃 동무라고도 하였는데 延吉 局子街 小營子에 父母兄弟 妻子가 있는 職業的 革命者였고, 박진우·崔仁國(최인국)·강기범·張德洙(장덕수, 은하현 탄산진 新興村)·張基鳳(장기봉, 무원현 小 한청거우)·장 다풰장(中共人)·천류주(中共)·류동천(中共)·이호진·조영재 (咸南의원인 20餘年 革命者) 등등 적어도 6~70名에 達하나 不幸히도 나에게는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는 것이다.
群衆鬪爭의 方面으로써는 “反日人民委員會”로써 活動케 되었는 바 1934年 春期에 무연현 팔툰에서 양상봉 同務의 發起와 조직으로써 생비량(참입쌀가루) 25부대를 準備하여 遊擊에 보낸 것이니 이것이 遊擊隊의 非常食料 準備인 것이며, 1935年 秋期에 소재하에서 김두삼(예수교집사) 同志의 發起와 組織된 바 遊擊隊員 冬服 일습과 冬帽와 冬三 신발까지 70名에 冬三 衣服을 付送하였으며, 1936年 秋期에는 관문주자 왕재윤 동지의 發起로 每戶에 여름신발(짓께마비) 한 켤레씩 총 合 170벌을 遊擊隊에 보낸 것과, 1936年 秋期에는 푸진현 얼융산에서 노왕자 同務의 發起와 組織으로서 冬服 일습과 冬帽와 신발까지 都合 120명에 軍服을 第七軍隊에 付送한 事實들이 廣範한 群衆運動의 愛國主義的 熱誠을 표현한 事實들이다.
勿論 이와 같은 事實들은 적은 範圍에선 수많은 事實들이 있는 것이며, 至今 北朝鮮最高人民委員會의 常任委員會 委員長으로 鬪爭하는 최용진(최석천·김지강) 동지의 빛난 鬪爭의 歷史를 상고할 때에는 반드시 잊지 못하고 記憶되는 것은 戰鬪에서 犧牲된 동지들과 群衆鬪爭의 범위에서 活動하던 志士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筆者는 1936年 12月 21日 밤에 최석천 同志와 一部 隊員의 호위 中에서 國境까지 와서 병을 치료할 形便에서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으로 오게 되었는데 俗談에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부쳤다는 셈으로서 病은 治療하였으나 왼쪽 다리를 잃어버린 不具者가 되고 말았으니 築城餘石의 嘆을 금치 못하노라.
1945年 8月 15日에 소련 붉은軍隊의 戰役에 依하여 祖國의 解放으로부터 創建된 民主政府를 消滅하려는 美帝(미국 제국주의)와 이승만 도당의 강탈戰爭에서 英雄的으로 勝利하였으며 戰爭에서 破壞된 復舊事業과 重工業計劃에 勝利的 進行과 아울러 南北朝鮮의 平和的 統一 鬪爭이 成功되기를 祝賀하면서.
1958年 8月 15日 원수산.
以上에 記錄한 자료는 盧昌律(노창률) 同志가 나한테 參考자료로 보내준 것인데 나는 “亡命者의 手記”라는 기록, “中領(중국령)에서 進行된 朝鮮解放運動”이라는데 記載하여 두고서 나의 절실한 戰友가 親筆로 쓴 原稿를 그대로 보내나이다.
1959年 三月 一日 이인영
역사연구소 앞.
첫댓글 이런 자료는....후세들에게 꼭 보여주어야 할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