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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26 - 전후 복구준비와 3개년 계획
휴전과 함께 북한에 닥친 가장 주된 과제는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빠른 시일 내에 복구하는 일이었다. 북한은 휴전회담이 성사되자 곧바로 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방향 등을 토의 결정했다. 1953년 8월 5~9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6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경공업과 농업을 급속히 발전시킨다’는 전후 경제건설의 기본 노선을 결정하는 한편, 전후 경제복구건설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제1단계에서는 6개월~1년 안에 전후 복구건설을 위한 준비와 정리사업을 진행하고, 제2단계에서는 3개년계획을 실시하여 경제를 전쟁 전인 1949년 수준으로 회복시키며, 제3단계에서는 제1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선에 대해 당 내 일부 세력들이 반발했다. 주로 소련계나 윤공흠 등 연안 계열의 일부 인사들로서, 소련 정책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으로 영락된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소비재 공급이 절실하며, 그를 위해서는 소비재 산업인 경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후에 이들이 중공업 발전을 강조하는 정책은 수정되어야 한다면서, 소련,중국 등에서 받은 막대한 원조로 쌀이나 천 같은 소비품을 우선 구입하자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당시 소련의 말렌코프 행정부 역시 북한이 소비품을 구입하지 않고 기계류를 사가는 데 불만을 나타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6차 회의의 방침을 밀고 나갔다.
1954~1955년의 경험적 단계가 성공적으로 평가되면서 김일성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고, 1956년부터는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농업의 동시 발전’노선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북한 현대사27 - 전후 복구사업과 노선 갈등
1956년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장악한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해였다. 1956년 8월 30~31일 평양 예숡극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전후한 시기에,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북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조직적인 반反김일성 운동’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김일성 운동은 1956년 갑작스레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전후 복구건설을 둘러싼 당 내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미 1955년부터 갈등이 표출되었다.
전후 복구건설과 관련해 193년 8월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노선을 결정했으나. 그 후의 집행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노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전후 복구건설을 집행하는 관료들의 사업작풍과 근무기강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국가 경제기관들에는 무절제와 관료주의가 팽배했고, 관료들에 대한 전문교육도 임시방편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위계적인 관료적 지시로 대체되었다.
재정운영에서도 원칙과 규율이 해이해졌고, 회계감사 기능이 약화되어 사회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런 현상들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재산을 착복하고 낭비,수뢰,직무상 배임 등의 행위가 만연했다. 당 중앙위원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1953년 6월부터 1954년 6월까지 1년 동안 당원 2만2천 명이 공금유용,관물착복 등으로 적발되었다. 1955년 4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는 전체 국영 및 협동조합 부문 재산의 약 3분의 1이 착복되거나 낭비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된 주된 요인은 1차적으로는 당과 정부의 전문역량 부족과 잘못된 지도 때문이었다. 당시 당,정을 통틀어 경제복구사업을 제대로 감당할 전문가들이 매우 부족하였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의 전문역량을 제대로 배분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잦은 인사이동으로 실무를 제대로 파악할 여건마저 되지 않았다. 전후 복구사업은 많은 문제들을 노정했고, 혼란을 초래했다.
1954~1955년에 북한은 연이어 흉작을 기록해 양곡구매와 현물세 징수사업이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농업 현물세는 과거의 비율대로 적용되었으며, 현물세 징수 과정에서 상급기관의 관료주의적 행태가 심각했다. 또한 양곡수매사업이 부진하자 내각은 쌀의 자유거래를 완전 금지했다. 이로 인해 특용작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나 도시 근로자들은 급식을 위해 양곡을 구입하는 일조차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도시 근로자와 농민 등 인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런 조치들에 대해서는 후에 김일성이 그 오류와 편향을 인정했다.
이렇게 문제들이 노출되자 소련은 1955년 5월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해 새로운 정책을 권고했다. 그 주된 내용은 “양곡판매 금지조치를 철회할 것과 국유화를 강해하던 상공업 분야의 정책을 수정하여 사기업을 폭넓게 허용할 것, 농업 부문의 위기를 초래한 기존의 농업현물세 징수방식을 폐기하고 새로운 농업세 체계를 마련할 것, 기존의 5개년계획안을 변경할 것”등이었다. 이는 북한 내부문제에 대한 심각한 지적이었고, 근본적인 정책 수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군사고문단,기술인력을 포함해 10억 루블의 차관 제공, 국제관계와 유엔 외교 등 모든 면에서 북한은 소련의 지원 없이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소련의 충고가 조선의 실정과는 다른 소련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방식을 주장했다. 또한 사상사업에서 ‘주체’의 확립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김일성의 주체노선이 처음으로 공식표명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자기방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는 복구건설사업에서 나타난 책임문제와 중공업 우선정책을 둘러싼 노선논쟁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당권을 둘러싼 권력투쟁과 연계되었다. 말하자면 김일성 세력과 소련계,연안계 사이에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진행된 것이다.
1955년 4월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안계의 박일우,김운,방호산 등과 소련계의 박창옥, 빨치산계의 김일 등이 사업작풍상의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비판받았다. 탐오와 낭비도 심각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당은 사업작풍상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당원 상호간에 ‘비판과 자아비판’을 요구했으며, 계급교양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회의 후 계급교양의 일환으로 김일성의 연설「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 독립과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를 당원들의 연구문헌으로 채택했다. 이런 분위기는 1년 내내 계속되었다.
1955년 12월 2~3일에 소집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연안계의 박일우와 소련계의 김열을 ‘반당’행위를 이유로 출당 처분했다. 박일우에 대해서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며 내무상으로 있을 당시부터 당 규율을 난폭하게 위반하고, 당의 영도를 배후에서 비방하며, 당과 대중의 이탈을 조성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는 당의 통일과 단결을 파괴하고 자기의 흉악한 출세주의적 야욕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박헌영,이승엽 도당들과 결탁하여 당을 반대하는 반당적,반혁명적 행위까지 감행하였다.”고 비판했다. 또 “이러한 엄중한 범죄적 행위에 대하여 당은 장기간 수차에 걸쳐 그가 자기의 오류를 시정하고 옳은 길에 들어서도록 간곡한 충고를 하여왔으나 심각하게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당의 동지적 배려에 대해 불순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자기의 죄행을 솔직하게 반성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박일우 등 일부 연안계가 전쟁 후 영향력이 강화된 중국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다가 김일성계에 당한 것이었다. 당시 조직부장이었던 박영빈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박일우(내무상,55년 숙청)등 일부 연안계 당간부들은 소련계들을 조직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강화된 중국의 영향을 등에 업고 당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박일우는 마오쩌둥,펑더화이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자기네 불편한 것은 펑더화이를 통해 마오쩌둥에 직접 전달해 해결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고위층과 전쟁 후 북한에 남아 있던 중국군 간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조직부장인 나를 밀어내고 자신들이 당권을 잡으려고 공작했다.
당시의 조선노동당에는 김일성계,소련계,연안계가 상호 견제하면서 물고 물리는 역학구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연안계는 소련계를 견제하면서도 반김일성 세력으로 결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박일우 등을 숙청하는 한편, 소련계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박창옥,박영빈,기석복,전동혁,정률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박창옥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경제계획수립과정에서 관료주의의 폐해를 조장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그에 대한 숱한 오류가 지적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김일성을 대신하여 ‘제1인자’의 지위에 오르려 했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당조직부장 박영빈도 비판되었다. 기석복 등의 문인들은 조선 문인들 사이에 반목을 조장하고 이승엽 그룹에 참가했던 이태준을 옹호한 것이 비판되었다. 결국 박창옥은 정치위원에서, 박영빈은 정치위원과 중앙위원에서 물러났고, 소련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김일성의 소련계에 대한 공격은 모스크바 방문에서 소련으로부터 받은 ‘권위손상’과도 관계가 있었다. 김일성은 “어떤 사람들은 쏘련식이 좋으니 중국식이 좋으니 하지만, 이제는 우리식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 전후 복구건설을 두고 벌어진 당 내 노선 갈등을 김일성은 소련,중국 등 외세의 내정간섭과 연관시켜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제는 소련이나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국을 등에 업고 당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소련계,연안계에 강력한 권고를 발하는 한편, 독자노선을 고수했다. 이제 소련계나 연안계는 상호 연합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김일성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 현대사28 - 당 3차 대회와 개인숭배 비판
전후 복구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955년 김일성은 ‘주체확립’을 들고 나왔고, 그 과정에서 연안계와 소련계의 당 내 입지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1956년에 들어서면서 소련계,연안계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를 계기로 반김일성 세력을 결집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갖게 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스탈린 사후 단일지도체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 체제로 전환했으며, 자본주의 진영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1956년 2월에 개최된 제20차 당 대회에서 공식화되었다. 이 대회에서 제1서기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을 통해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했으며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이러한 소련공산당의 변화는 세계 각국 공산당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에도 곧바로 파급되었다.
1955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집단지도 원칙을 채택하자 북한 내에서도 당 내 민주주의와 집체적 지도원칙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떠올랐으며, 일부 소련계를 중심으로 평화공존론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고 반미반제 의식이 강하게 존재하는 북한에서 평화공존 문제는 쉽게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개인숭배 비판은 상황이 달랐다. 그동안 김일성은 노선,정책대결과 권력투쟁을 통해 유일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해 왔고, 그 과정에서 점차 개인숭배 현상도 나타났다. 그런데 소련공산당 20차 대회를 계기로 북한에서도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던 것이다.
1956년 3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2월의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행한 비밀연설을 번역해 청취했고, 조선공산당 내에 개인숭배 현상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6년 4월 23일부터 7일간 제3차 조선노동당 대회가 개최되었다. 당 규약대로라면 4년에 한 번씩 열려야 하지만, 전쟁과 전후 복구건설 등 복잡한 국내 정세로, 당 대회는 1948년 3월 제2차 대회가 열린 이후 무려 8년 만에 열린 것이었다. 대회에는 전체 당원 116만 4,945명의 대표 916명 가운데 914명이 참석했다. 1,2차 대회와는 달리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등 13개국의 공산당 대표들도 축하사절로 참석했다. 회의는 김일성의 중앙위원회 사업총결 보고와 토론, 중앙검사위원회의 총결 보고, 당 규약 개정에 관한 보고와 결정, 중앙지도기관의 선거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중앙위원회 사업 보고에 나서 국제 정서,국내 정서,당 사업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고했다. 국제 정세에 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갔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와 평화공존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그것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다. 반면 국내 정세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했다. 그는 총결기간 동안 북한이 이룩한 거대한 경제적 성과를 언급하고 1957년부터 시작되는 제1차 5개년 인민경제계획의 구체적인 과업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당시 각국 공산당을 뒤흔들고 잇던 개인숭배 비판이나 집체적 지도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공산당 축하사절 대표로 참석한 브레즈네프가 축사를 통해 개인숭배 문제를 다뤄주기를 희망했으나, 김일성은 이를 총결보고에서 다루지 않았다. 결국 개인숭배 비판과 집체적 지도문제는 대회 토론과정에서 핵심의제로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토론에서도 핵심은 비켜가고 말았다. 대부분의 토론자들이 “조선노동당은 창건된 첫날부터 집체적 지도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으며 또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인 숭배를 박헌영의 ‘죄행’과 연결시켜 비판했던 것이다. 다만 제3차 대회에서는 제2차 대회 때와는 달리 ‘김일성 장군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거나 토론자들 사이에서 김일성을 칭송하는 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회에서는 당 규약도 개정했다. 새로운 당 규약은 조선노동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당’이라는 당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전국적 밤위에서 반제반봉건 민주혁명 완수’라는 당면 목적과 함께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명문화했다.
규약 개정에 이어 마지막 날인 4월 29일 당 중앙기관의 선거가 있었다. 여기서 71명의 중앙위원과 45명의 후보위원, 11명의 상무위원과 7명의 조직위원이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최용건,박정애,박금철,정일룡,김창만 등이 선임되었다. 중앙위원 가운데 확인 가능한 63명의 계파별 구성분포를 보면 항일빨치산 계열 11명, 연안계 18명, 소련계 9명, 국내계 16명, 남로당계 9명 등으로 계판간 균형을 이룬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일성의 빨치산 계열로 균형추가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대부분의 국내계와 김창만,허정숙 등의 연안계 인사들, 그리고 남일,방학세 등의 소련계 인사들이 김일성을 지지했으며, 상무위원회와 조직위원회도 이들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상무위원회
▶정위원(11명) : 김일성, 최용건, 김일, 김광협(항일유격대), 박금철(조국광복회), 김두봉, 최창익(연안계), 남일(소련계), 박정애, 정일룡(국내계), 임해(불명)
▶후보위원(4명) : 김창만(연안계), 이종옥, 이효순(조국광복회계), 박의완(소련계)
▶조직위원회 : 김일성, 최용건, 박정애, 박금철, 정일룡, 김창만, 한상두
중앙위원회는 연안계의 김두봉(2위), 최창익(8위)과 소련계의 박창옥(7위), 박의완(10위) 등이 높은 서열에 올랐으나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상무위원, 조직위원 등 실권은 김일성계가 다 쥔 셈이었다. 이로써 조선노동당은 각 정치 세력간의 정치연합적 성격이 완전히 청산되었고, 김일성의 단독체제가 확고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일성에 비판적인 세력들은 참을 수 없는 실망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숭배 비판과 집체적 지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실망감을 넘어 자신도 언제 김일성에 의해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이들은 반김일성 움직임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권력투쟁과 숙청의 회오리가 불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 현대사29 - ‘8월 종파사건’과 역동성의 소멸
1956년 6월 2일 김일성을 단장으로 한 정부 대표단이 소련과 동유럽권 나라들의 순방길에 오른 사이 반김일성 세력은 조직적으로 결집해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내려 했다. 반김일성 세력의 중심에는 최창익을 비롯한 연안계들이 있었다.
최창익을 중심으로 직업동맹 위원장 서휘, 상업상 윤공흠, 황해남도 당 위원장 고봉기 등의 연안계와 박창옥을 중심으로 건설상 김승화,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장 박의완 등의 소련계가 함께 손을 잡았다. 여기에 건재공업국장 리필규, 남로당 출신의 석탄공업상 류축운, 오기섭 등의 국내계들까지 연결되어 광범위한 반김일성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김일성을 당 위원장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다. 먼저 연안계가 포문을 열면 소련계도 함께 들고일어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김일성 순방 동안 수상 대리를 맡고 있던 최용건 등 김일성계에 포착되었다. 김일성계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한편, 지연전술과 유화전술을 구사했다. 원래 8월 2일로 예정되었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8월 30일로 연기했다. 또한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박금철은 7월 30일의 중앙위원회 부서장회의에서 당 중앙에 오류가 있었으며 김일성 개인숭배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시인하면서 당 중앙 지도부가 이 문제를 대중토론 방식이 아닌 점진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반김일성 연합세력 사이에 이완현상이 일어났고, 많은 간부들이 이탈하거나 중립으로 돌아섰다.
이런 가운데 8월 30일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원래 사회주의 국가들을 순방하고 돌아온 정부 대표단의 보고를 듣고 인민보건사업의 개선방안을 토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보고가 끝난 뒤 진행된 토론에서 윤공흠이 느닷없이 의제와는 상관없는 김일성 개인숭배와 당 독재에 대하여 비판했다. 윤공흠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김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집도 없이 토굴 속에서 병마에 시달리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며, 공부할 장소조차 없다”면서 그런데도 “정부는 이런 처참한 현실을 무시하고 군수공업 중심의 중공업 우선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해 정부 방침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 농업협동화와 개인숭배 문제 등도 비판했다.
그러자 회의장 여기저기서 “발언을 중지시켜라”,“끌어내려라”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윤공흠에 이어 고봉기, 서휘, 최창익 등이 등단해 김일성을 비판했으나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김일성을 옹호했고, 반대파의 행위를 반당으로 몰아세웠다. 조직부장 박금철,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도만에 이어 현무광, 윤기복 등 10여명이 계속해서 연안계를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몰아붙였다. 마지막으로 김창만이 등장해 최창익을 공격했다. 그러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연안계와 연합해 김일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던 소련계의 박창옥, 김승화, 박의완 등은 침묵을 지켰다.
8월 전원회의는 최창익, 박창옥 등의 행위를 ‘반당적 종파행위’로 규정지었다. 또 “당 내에서 불순한 종파행동은 무조건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그것이 무슨 구실 밑에서 진행되든지 또한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의 단결을 와해하는 범죄적 행동으로서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회의는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하고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는 출당시키고, 최창익과 박창옥은 당직을 박탈했다. 이와 함께 최창익과 박창옥의 내각 부수상직을 비롯하여 관련자들의 정부직위도 박탈했다. ‘8월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북한 역사상 유일무이한 조직적인 반김일성운동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느낀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 등은 회의장을 빠져나온 뒤 문화선전부부상인 연안계 김강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당시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였던 이상조는 9월 3일 흐루시초프 앞으로 서한을 보내 북한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서신에서 “몇몇 동지들이 오류와 결함을 퇴치하기 위해 동지적 비판 차원에서 김일성 동지의 결함을 지적”했으나 김일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같은 비판발언에 제재를 가했다”면서 “당 내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 내의 결함을 당원의 힘으로 바로잡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고 했다. 이상조는 “당원을 포함한 중앙위원 전원이 출석하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조십하도록 소련공산당의 책임 있는 지도원을 조선에 파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고, 9월 5일 이 서한을 전달하면서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조선로동당을 도와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서한을 전달받은 소련과 중국공산당은 북한노동당의 당 내 정세에 대해 토의한 후 북한 정치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당시 중국공산당 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평양에 긴급 파견했다. 두 사람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 결정사항을 취소하고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다시 소집해 윤공흠 등의 출당,철직 처분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소련과 중국의 압력에 김일성은 굴복하고 말았다. 9월 23일 전원회의를 개최해 8월 전원회의에서 당의 결정이 신중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최창익과 박창옥 등을 중앙위원으로 복직시키고 출당자들을 복당시켰다. 그러나 김일성은 9월 전원회의에서 “밑으로부터의 비판을 더욱 강화하며 당원 대중의 적극성과 창발성을 백방으로 제고함으로써 당의 통일과 전투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계속 투쟁할 것”이라고 해 후일을 기약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제로 후에 그는 ‘밑으로부터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이상조에 대해서는 ‘반역자’란 비판이 제기되었다.
9월 전원회의의 조치는 김일성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 김일성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사실 당시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친중국 정권을 세울 계획으로 북한에 들어왔으나 김일성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고 시정하겠다는 바람에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그해 가을에 다시 역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국제 정세가 김일성을 도왔다. 1956년 헝가리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제공산주의 진영에 분열이 생겼다. 또 1957년부터 중국에서는 정풍운동이 일어나고 중.소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련과 중국은 북한 내정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부당한 내정간섭에 대해 북한에 사과해야만 했다.
1957년 11월 23일 모스크바의 김일성.마오쩌둥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1956년 9월 조선노동당의 당내문제에 중국공산당이 부당하게 간섭한 것에 대해 몇 번씩 사과했다. 또한 펑더화이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와 1956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펑더화이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들 사이에서 조선돈을 찍어내고 여러 종류의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며 1956년 9월 조선노동당 내부문제를 간섭했다는 점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8년 10월에는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군대가 철군을 완결지었다.
김일성의 반격은 9월 전원회의 이후 미코얀과 펑더화이가 평양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먼저 지도부는 8월과 9월의 전원회의 문헌학습을 조직해 반대파의 ‘반당, 반혁명, 사대주의적 죄행’을 규탄했다. 최창익, 서휘, 리필규, 김승화, 고봉기 등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진행되었다. 동시에 지도부는 1956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전당적으로 당증으로 교환하면서, 당원들에 대한 당성검토와 숙청을 동반했다. 1957년 1월부터는 평양시를 시발로 당.단체들에 대한 당 중앙위원회 집중지도 방조사업을 전개했다. 1957년 5월 30일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는 「반혁명분자들과의 투쟁을 강화할 데 대하여」란 문건을 채택했고 ‘반종파투쟁’을 더욱 강도있게 진행해갔다. 이 과정에서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돼 숙청되었다. 군에서는 소련계의 최종학(총정치국장)과 연안계의 김을규(총정치국 부국장)가 총정치국에서 숙청당했다. 전체적으로 반당 종파분자들에 연루된 혐의로 200여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체포와 심문과정에서 연안계와 일부 소련계의 김일성 제거 음모가 완전히 드러났다. 최창익, 박창옥 등은 김일성을 끌어내린 후, 내각 수상은 최창익, 당 위원장은 김두봉, 외무상 이상조, 내무상 리필규 등이 차지하기로 내정해놓고 있었다. 또 이들은 8월 15일 해방기념일에 시위 노동자들을 동원해 연단에서 지도부 교체를 요구하고 직업동맹 위원장 서휘의 지휘를 받아 지도부를 체포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연안계는 완전히 몰락했고 소련계도 대거 제거되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외에 최창익과 고봉기(평양시 당 위원장), 방호산(5군단장), 이청원(조선노동당 연구소장) 등이 숙청되었다. 또한 소련계인 김승화(건설상), 이상조(주 소련대사), 박영빈(무역성 부상), 박길용(외무성 부상), 정상진(문화성 부상), 강상호(내무성 부상) 등은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가혹한 사상검토를 견디다 못해 자진 귀국 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움직임을 포착하고도 제때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김두봉도 심각하게 비판받았고, 결국은 권좌에서 숙청당했다.
1957년 10월 말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김두봉은 반당그룹과 관계된 것에 대해 비판받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학술사업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5~6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펑더화이가 자신의 집에 묵으면서 장시간에 걸쳐 대화한 사실을 숨긴 것과 사생활과 관련된 부정적인 문제들이 거론되어 또다시 호되게 비판받았다. 결국 김두봉은 58년 3월 3일 노동당 제1차 대표자대회에서 다시 한 번 비판받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958년 3월 북한은 제1회 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조선노동당에서 종파가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로써 김일성을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은 일소되었고, 명실상부한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 내 활력이 될 수 있는 건전한 의미의 다원적 요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반종파투쟁’은 김일성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그로 인해 당 내의 정치적 역동성은 사라져버렸다. 1950년대 후반기 북한의 종파투쟁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입김과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주노선을 걷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로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북한 현대사30 - 제4차 당 대회와 김일성 단독권력체계
‘8월 종파사건’이후 ‘반종파투쟁’을 통해 단독권력을 구축한 김일성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 결과 북한 정치권력의 핵심부분을 모두 항일빨치산 계열이 장악했으며, 김일성의 단독권력체계는 더욱 확고해졌다.
김일성의 단독권력체계를 1차적으로 마무리지은 것은 1961년 9월 11일부터 개최된 제4차 조선노동당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종파주의를 척결하고 당 노선의 완전한 통일을 획득했다.”고 보고했다. 동시에 당 규약에서 조선노동당은 “영예로운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명시하여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끌어냈다. 제4차 당 대회는 김일성에게 축제 같은 행사였다. 그동안 전후 복구건설과 3개년 계획, 5개년 계획 등 일련의 경제 건설사업이 성과를 내어 전쟁피해를 복구했으며, 인민생활의 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주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전쟁 기간에 파견되었던 중국인민지원군도 1958년 10월 철수함으로써 북한 내에는 더 이상의 주둔 군대가 없었고, 반종파투쟁을 통해 김일성에게 도전할 수 있는 반대 세력도 모두 숙청되었다. 반면 남한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4.19, 그리고 5.16 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4차 당 대회를 ‘승리자의 대회’로 만들고 있었다.
대회는 1961년 9월 11일부터 8일간에 걸쳐 166만 6,359명의 정규당원과 14만 5,204명의 후보당원을 대표하여, 결의권을 가진 1,157명과 결의권이 없는 대표 73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또한 소련의 코즐로프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등 32개 국가와 공산당을 대표하는 외교사절도 참석해 당 창립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다.
김일성은 대회 보고를 통해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적 개조, 5개년계획의 성공적 수행을 총결하고, 7개년 계획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이어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관해 언급하면서 학생혁명을 무너뜨린 군사쿠데타에 대해 비난했으며, 남한 정부와 미군의 주둔을 다시 비판했다. 그리고 당의 반종파투쟁과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다음 사회주의 국가 사이의 연대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전의 당 대회와는 달리 비판과 자기비판, 심지어 과거 숙청된 연안계와 소련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경제 건설 과정에서 당의 지침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겪은 작업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대부분의 토론자들은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원회의 현명한 영도”를 칭송했으며, ‘반종파투쟁’을 당 대열의 통일을 확호히 한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토론자들은 조선노동당이 “항일빨치산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당 규약에도 반영되었다.
이밖에도 규약 개정을 통해 몇 가지 당 조직이 변화했다. 우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와 조직위원회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상설 지도기관으로서 정치위원회를 설치했다. 또한 간부사업과 기타 당면한 사업을 토의하고 조직하기 위하여 부장회의가 설치되었고, 조선 인민군이 당의 혁명적 무력이라는 점이 최초로 당 규약에 명시되었다.
제4차 당 대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권력구조상의 변화이다. 제3차 당 대회까지만 하더라도 당 중앙위원회 내에서 일정하게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연안계와 소련계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이다. 제4차 대회에서는 85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선출되었는데, 이 간운데 연안계는 김창만과 하앙천, 김창덕뿐이었으며, 소련계는 남일 한 명뿐이었다. 중앙위원회 위원 85명 가운데 28명만 재선되었고, 나머지 57명은 새로이 선출되었다. 사망한 류경수를 제외한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모두가 재선되었으며, 새로이 선출된 57명 가운데서도 25명이 항일빨치산 출신이었다. 그리고 21명 정도는 분파와 관계가 없는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이나 조선인민군에서 새롭게 충원된 젊은 간부들이었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4차 당 대회에서 선출된 후보위원 50명 가운데서는 이지찬 1명만 재선되었고, 나머지 49명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 49명 가운데 8명은 빨치산 출신이었고, 37명은 이들이 훈련시킨 젊은 세대였다.
중앙위원회 핵심지도부는 항일빨치산 세력의 부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대회 마지막 날인 9월 18일 소집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창만, 이효순 등이 선출되었다. 연안계 가운데서 김창만 하나만 빨치산 세력이 아니었다. 정치위원회 위원 11명 가운데 6명(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 이효순, 김광협)이 빨치산 출신이었으며, 국내계는 3명(박정애, 정일룡, 이종옥), 연안계(김창만)와 소련계(남일)는 각각 1명씩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모두 일찍부터 김일성을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제4차 당 대회에서는 지도부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빨치산 세력의 전면 부상과 함께 김일성 단일지배체제가 확고히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들 항일빨치산 출신의 중앙위원 30명 가운데 14명은 현역 군인이었다(군인이 장관이 된 2명을 합하면 16명). 이것은 당 중앙위원회가 항일빨치산 세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면서 당과 정치, 군사가 일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외교관이 된 사람이 5명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눈에 띄는 편이다. 이것은 북한의 외교가 군사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항일빨치산 출신 중앙위원들의 당시 직책
• 김일성 : 당 중앙위 위원장, 내각 수상
• 최용건 : 당 중앙위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김일 : 당 중앙위 부위원장, 내각 제1부수상
• 김광협 : 내각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
• 한익수 : 민족보위성 부상
• 김창봉 : 인민군 총참모장
• 허봉학 : 인민군 총정치국장
• 김좌혁 :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 오진우 : 제1집단군 사령관
• 최광 : 제1집단군 참모장
• 전문섭 : 제2집단군 사령관
• 최민철 : 인민군 제4군단장
• 임철 : 인민군 제13사단장
• 지병학 : 인민군 제45사단장
• 김대홍 : 군사대학교 교장
• 석산 : 내무상
• 오백룡 : 내무성 부상 겸 호위총국장
• 최기철 : 내무성 정치국장
• 최현 : 체신상, 전 민족보위성 부상
• 최용진 : 수산상, 전 민족보위성 부상
• 박성철 : 외상
• 이영호 : 중국 대사
• 전창철 : 베트남 대사
• 안영 : 알바니아 대사
• 김동규 : 소련 나홋카 총영사
• 김병식 : 건설상
• 김경석 : 평양시 당 위원장
• 박영순 : 당 중앙위 부장
• 김옥순 : 여성동맹 제1부위원장
• 서철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전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처럼 항일빨치산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고 김일성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되면서 당 내에는 다른 견해를 가진 반대 세력이 완전히 소멸했다. 이것은 북한 정치에서 다양한 견해가 공존,병립하면서 벌이는 노선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견해의 다양성이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결국 다음에 남는 것은 도전 불가능한 절대권력자를 향한 권력의 구심력밖에 없었다. 그래서 1960년대는 절대권력자인 김일성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한 유일지도체제의 사상적,문화적 기반이 광범위하게 마련되기 시작했다.
첫댓글 북한현대사[6]을 공부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