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번째 편지 - 발레 <라 바야데르>
9월 27일 아침,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제목은 <발레의 황홀경이 온다. 블록버스터 '라 바야데르'> 그리고 부제는 <유니버설·국립발레단, 고전발레 걸작 잇따라 무대로... 한국에만 허락된 축복>. 한때 발레에 깊이 심취하여 공연을 찾아다니던 제가 어느새 발레와 조금 멀어져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제 가슴은 다시금 '발레'로 설렘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전 발레의 대작 <라 바야데르>를 대한민국의 양대 발레단이 한 달 간격으로 공연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9월 24일 티켓 오픈 후 35분 만에 전 회차 전석이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예술의전당 사이트를 찾았지만, 10월 30일부터 11월 4일까지의 국립발레단 공연은 이미 완전 매진이었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도 거의 매진이었지만, 다행히 9월 29일 일요일 낮 2시 공연의 R석 한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선호하는 자리는 보통 A지역 11번 열에서 17번 열의 오른쪽 끝 좌석인 10번인데, 이번에는 17번 열 5번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그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발레 공연을 보러 갈 때면 저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대부분 혼자 가는데, 그 편이 공연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발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함께 가자고 권하는 것은 오히려 민폐일 것 같습니다.
발레는 화려한 무대 의상과 아름다운 춤이 어우러진 예술입니다. 저는 관객도 공연에 걸맞은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여 가장 멋진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오페라 극장에 도착하면 티켓을 교환하고 프로그램 북을 구입한 뒤,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줄거리와 등장인물, 오늘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공연 시작 10분 전에 물 한 병을 사서 좌석으로 들어갑니다.
지난 일요일 오후 1시 30분,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오랜만에 발레 애호가의 마음으로 화창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걷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공연 시작 전, 문훈숙 단장께서 무대에 올라 유창한 말솜씨와 화려한 발레 동작으로 감상 포인트를 설명해 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3막에 나오는 32명의 발레리나가 펼치는 아름다운 군무 '그림자의 왕국(The Kingdom of the Shades)' 장면에 주목해 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라 바야데르>는 힌두 사원의 무희 '니키아', 그녀를 사랑하는 전사 '솔로르', 권력으로 솔로르를 차지하려는 공주 '감자티', 그리고 니키아를 짝사랑하는 승려 '브라만' 등 네 인물이 펼치는 사랑과 욕망의 이야기입니다.
3막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니키아의 영혼이 머무는 곳, '그림자의 왕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독살당한 니키아는 솔로르의 꿈에 나타나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데, 이때 32명의 무용수들이 안개 속에서 하얀 튜튜를 입고 일렬로 서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내려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발레 평론가들은 32명의 군무 장면을 발레 역사상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 중 하나로 극찬합니다. 반복적인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 없이 깊은 몰입과 명상의 상태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마치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눈앞에서 목격하는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백조의 호수>의 '백조들의 군무'가 떠올랐습니다. 두 작품 모두 클래식 발레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군무를 담고 있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라 바야데르>의 '그림자의 왕국'이 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라면, <백조의 호수>의 '백조들의 군무'는 보다 역동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느낌이었습니다. 백조들이 우아하게 팔을 움직이는 모습은 날개를 펼치는 듯하고, 발동작은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백조를 연상시켰습니다.
러시아의 무용 평론가 바가노바는 두 장면을 비교하며, 하나는 시간이 멈춘 듯한 영원의 순간을, 다른 하나는 자연의 생동감 넘치는 순간을 포착했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발레 비평가 클레멘트 크리스프는 "두 장면은 같은 달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창문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군무를 보며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무용은 침묵의 시이며, 춤추는 사람은 시인이다." 이 '그림자 왕국'의 군무는 말없이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시와도 같았습니다.
3시간 동안 황홀경에 빠졌다가 공연이 끝나고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스팔트 도로 대신 우면산의 무장애 숲길을 택했습니다. 숲길이 발레 공연의 여운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발레 관람을 통해 익숙한 고전 발레에서도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제 안의 예술적 감수성이 한층 더 깊어짐을 느꼈습니다.
가능하다면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티켓도 구입하여 관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10.2.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무용은 침묵의 시이며, 춤추는 사람은 시인이다."
좋은 글귀에 머물다갑니다. ㄱㅅ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