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본질이 탄생과 성장이라면, 제행무상, 제법무아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탄생하고 성장하니 무아요, 탄생하고 성장하니 모든 행이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 무아가 아니면 생명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본질이 무상 무아이므로 생명이 탄생하고 생명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물리학적으로 엔트로피(혼란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책상 위의 꽃병은 아무리 잘 세워 놓아도 언젠가는 바닥에 떨어지며,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자동차는 결국 망가져서 고철이 되어 제철소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새로운 물질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병이 영원히 꽃병으로 있는 한, 꽃병을 구성하는 원자는 더 이상 다른 물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생명이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이 죽어야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제행무상 제법무아는 우리가 싫어하고 벗어나야할 괴로움이 아니라, 우리 생명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있기에 무상하고, 우리가 죽지 않았기에 무아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상좌부 불교가 무상 무아를 한사코 '벗어나려하던 가르침'이라면, 대승과 화엄의 가르침은 무상과 무아가 바로 우리의 '피할 수 없는 본질'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무상 무아를 벗어나려고 하는 가르침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