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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을 계기로 조선 조정에서는 한동안 논쟁이있었던 수군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판옥선의 도입과 대량의 총통을 주조하여 각 연해포구로 내려 보냅니다.
이러한 개혁들이 훗날 이순신 장군이 전설을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사람들은 이 당시 개혁을 두고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조선은 꼭 한발 늦는다', '당대에는 결국 아무 성과도 없었다' 와 같은 박한 평가를 하더군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아닌 경우가 가장 좋기는 한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부분의 개혁이라는 것이 큰 문제를 겪고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사실 조선만 굳이 저런 평가를 받아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죠.
그리고 다른 것 보다도 을묘왜변 뒤에 임꺽정 사건이나 문정왕후 그리고 임진왜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묻힌 감이 있는데, 을묘왜변 직후에 판옥선은 톡톡히 효과를 발휘 했습니다.
명종14년에 벌어진 사건이 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을묘왜변이 벌어지고 난 4년뒤인 1559년 5월에 충청도감사로 부터 보고가 날아듭니다.
"황당선(荒唐船) 1척이 남포현에 표류하여 왔는데 마량 첨사(馬梁僉使)가 먼저 나아가 싸우다가 왼쪽 귀에 화살을 맞았으며 군관(軍官) 1명과 군사 6명이 피살되었습니다. 강가에 진을 치고 첨사 및 현감·군관 등이 일시에 함께 나아가 추격하여 8급(級)을 참수하였고, 나머지 왜적들은 북으로 달아났습니다."
황당선은 보통 중국해적선을 일컫는 말인데, 이 당시 중국해적들이 왜구와 결탁해서 중국이던 조선이던 노략질을 해대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충청도 감사의 서장에도 달아난 왜적들이 언급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황당선 1척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10일뒤에 명종이 승정원에 이러한 전교를 내리게 됩니다.
"요사이 왜선(倭船)이 전라·경상·청홍·황해도에 나타나는데, 전라·청홍 두 도가 더욱 심하여 변보(邊報)가 끊이지 않는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수사가 상세하게 기록하여 치계하고 비변사도 역시 상세하게 회계했기 때문에, 위에서 방비에 대하여 별도로 말하지 아니하였다......제주(濟州)에 왜선이 나타나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목사에게, 만약 적선을 만나게 되면 무찔러 사로잡는 데에 실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또한 이르도록 하라."
위에서 말한 황당선 뿐만이 아니라 왜선들이 황해도 부터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제주도 또한 위험할 것 같다고 언급하고 있죠. 이 말은 저 황당선 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왜선들이 해안가에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에서도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게 됩니다.
제주 목사의 계본에 "왜선(倭船) 2척을 포획해서 참괵(斬馘)하여 올려 보냅니다."하였다.
근데 한가지 특이한 점은 제주목사의 계본을 제외하고서는 딱히 전투 경과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 다는 것 이었습니다. 다만 비변사에서 이런 계본이 올라옵니다.
"각도(各道)의 사로잡은 왜인(倭人)들은 그 실지 저지른 죄로 본다면 마땅히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역시 그 나라의 일을 잘 말하여 그로 인해 적정(賊情)을 탐지할 만한 자가 있으며, 구리나 쇠를 제련하는 자, 역청(瀝靑)을 제조할 줄 아는 자, 석류황(石硫黃)을 캘 줄 아는 자도 있습니다. 철장(鐵匠)이나 선장(船匠)은 국가의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에 이익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로 하여금 다시 더 조사 심문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도에서 사로잡은 왜인들이 있고, 그 왜인들을 그냥 죽이기는 아까우니 써먹자는 겁니다. 왜구와의 전투경과 보고는 없지만 사로잡은 왜인들이 있다는 건, 이 해 연해를 침구했던 왜구들을 잡는데는 성공을 했다는 거죠.
더구나 황해도에서는 250명이나 되는 중국인 포로가 생겼기 때문에 이들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문제까지 발생하였고, 이들을 그해 11월에 중국으로 송환하기에 이릅니다.
이 조선측의 기록만 보고서는 뭐야 그냥 한 두척 짤짤이만 처리한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하겠지만 명실록에 보면
조선국왕 이환이 배신 윤의중을 보내어 동지를 하례하러 왔다....환이 함께 주문하기를 "금년 5월에 왜구가 배 25척을 몰고와서 그 나라 해안을 공격하여, 환이 관병,이탁등을 보내어 초살하고 다 끊어 버렸으며, 약탈당한 중국민 진춘등 306인과 안에서 왜를 불러 끌어들인 진덕등을 획득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그해 직접적으로 확인되는 배는 황당선 1척과 제주에 나타난 배 2척이 전부였지만, 조선이 명나라에 주문한 기록에 따르면 25척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조선이 전공을 과장 했을까?
물론 과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죠. 근데 그게 3척을 25척으로 뻥튀기하는 정도는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인 포로들과 중국인 향도들을 같이 송환하고 있기때문에 명나라가 바보도 아니고 이들을 통해서 철저히 심문하여 정황을 파악하기 때문이죠. 조선조 내내 그것때문에 왜구로부터 도망온 중국인들을 중국으로 송환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 송환하면서 3척 왔는데 25척으로 보고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략 십수척~25척 정도가 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겁니다.
(참고로 명실록에 나타난 이탁은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는데, 아마도 중국인들이 발견된 장소가 황해도여서 조선에서 대표로 이탁을 거론 한 것 같습니다. )
여기서 드는 의문이 이정도 규모면 전투경과가 나름 적혀 있어야 할텐데 왜 적혀있지 않을까?(참고로 전기왜구시기 중국에서 가장 큰 대첩으로 평가받는 망해과 대첩 당시 왜구의 선박수는 31척)
우선 한가지 이 왜구들이 스무척이건 십수척이건 한꺼번에 몰려다닌게 아니라 개별단위로 각 연해지방에 도착을 한 것 같습니다. 앞에서 서술한 명종의 발언이나 비변사의 발언을 보면 이 당시 왜구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조선해안에 온 것 처럼 서술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구들은 대체 왜 이렇게 왔을까?
그 의문과 관련된 기록이 같은해 9월에 나타납니다. 그 동지사와 함께 중국인을 보낸 뒤에 조선에서 회의가 열리는데 안건 중 하나가 "앞으로 오는 왜구 선박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냐" 였습니다. 같은해 사건을 해결하고 난 뒤에 열리는 회의인 만큼 당시 발언들은 같은 해 일어난 상황을 반영해서 낸 의견들이라고 추측하는게 합리적이겠죠.
왜선(倭船)이 나타났을 때 자세히 가려 포획하는 일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여 아뢰었다....
윤원형이 의논드리기를 : 요사이 중원(中原)에서 우리 나라로 표류해 온 왜구들을 변장이 번번이 잡아 베는데 대해서....표류하다 여러 섬에 닿은 적선은 으레 식량이 모자라 몰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와 군사나 민간인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거나, 혹 숲에 숨어서 우리 나라의 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죽이고서 빼앗거나, 우리 나라 사람의 옷을 입고서는 변장하여 해변을 횡행하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윤원형이 이 회의에서 한 발언이 요사이 중원에서 조선으로 표류해 온 왜구들을 변방의 장수가 잡아베는데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윤원형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발언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홍섬(洪暹)·권철(權轍)·윤춘년(尹春年)·오겸(吳謙)·송기수(宋麒壽)가 의논드리기를, 표류하여 온 왜선의 살려달라고 비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내는 것은 형세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심통원(沈通源)이 의논드리기를, "중국에서 도적질을 하다가 우리 국경에 표류하여 온 왜노들을 만일 쇄환시킨다면 왜국(倭國)이 이것을 빙자하여 사은(謝恩)할 것입니다.....
심전(沈銓)이 의논드리기를, "파선하여 육지에 올라와 항복을 비는 왜구들을 모두 베어 죽이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바입니다. 다만 중국에서 노략질하였으니 완전히 풀어주기도 참으로 곤란합니다....
이게 다 같은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인데 하나 같이 중국에서 도적질하다가 우리 국경에 표류해 온 왜구들을 어떻게 해야하나에 대해서죠. 즉 1559년에 왜구들은 조선에 작정하고 쳐들어 온 애들이 아니라 중국약탈하다가 표류해 온 애들이었다는 거죠.
황당선이 조선에 나타나기 한달전에 왜구 함대 수백척(;;)이 중국의 직례 절강 등을 약탈하는데 그 침략이 같은해 8월 넘어서까지 이어집니다. 아마도 그 수백척중에 일부가 표류해서 조선에 건너왔고, 그걸 조선에서 잡은 거겠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뭐야 그럼 표류해 온 찌질이들이나 잡은거잖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고려말에 그런 찌질이들도 못잡아서 안전하게 잘만 귀국시켰던 경우가 허다했던(...) 걸 생각해본다면 그렇게 볼 수가 없죠. 애초에 이때 왜구들은 조총으로 무장까지했고 선체의 크기도 대형이었던 만큼 항해술과 해상 전투력에 있어서는 그때보다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떨어졌을리도 없고요.
그렇다면 그런 애들이 왜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지도 않을 정도로 별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잡혔을까?
바로 맨처음에 말했던 '판옥선도입'이 가장 큰 이유였겠죠. 왜구 입장이 되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날 표류해가지고 겨우 도착해서 약탈 할 거리 찾고 있는데 눈앞에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왠 바다의 요새같은 큰 선박 여러척이 나타난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으신가요? ㅎㅎ
휴 죽는줄 알았네. 암튼 육지 도착했으니까 약탈거리좀 찾아보자
야 근데 여기 조선인데 조선군이 오면 어떡하지?
야 걔네들 칼싸움 못하잖아~ 내가 등선만 하면 무쌍난무 보여 줄 수 있음 ㅋ
거기다 조총도 있는데 뭐가 쫄리심?
누구인가? 누가 등선 소리를 내었어?
야! 등선만 하면 무쌍난무 찍는다며? 이제 어케 할 거임?
항복합니다... 살려주세요 ㅜㅜ
여러 정황을 가지고 추정을 한 것이긴 합니다만,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1559년에 큰 탈 없이 나름 큰 규모의 왜구들의 침략을 무탈히 잡았던 것을 보면, 왜구와 판옥선의 멋있는 한타와 승리가 없어서 우리가 제대로 느끼지 못 할 뿐이지 명종년간의 개혁이 결코 의미없는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당대에 국방에도 큰 효과를 보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명종년간 개혁을 추진했던 분들은 참 억울하셨을 듯 ㅜㅜ
근데 진짜 왜구들 입장에서 판옥선을 처음 보았을때 느낌은 어땠을런지 ㅎㄷㄷ 한산 티저 영상에서의 연출마냥 진짜 성같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한산이 잘 나오길 기대합니다. 뭐 명량이 대게를 라면에 넣은 격이라고 평가하시는 분들도 계시긴 합니다만, 가끔은 라면도 먹어줘야죠 ㅎㅎ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
특히 명의 기록과 대조하여 더 많은 일을 알아내는게 흥미롭네요.
이런걸 보면 명종도 평가할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아들의 치세를 망친 것 같아 참 아쉽군요.
중종-명종년간에 외교적이던 전쟁사적이던 나름 의미있는 일이 많았는데 당시 조선 정치사 관련 문제가 대중적으로 너무 유명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많이 묻히는 것 같습니다
문정왕후 사망이후 바로 윤원형을 내치는데 성공하고, 당시 활약했던 김수문 이윤경 등등을 발탁해서 잘 기용하기도 했고, 선조를 선택해서(대중적으로야 욕먹을 일이겠지만) 후계구도를 잘 안정시킨 걸 생각해보면 나름 사람보는 능력은 확실했던듯요 ㅎㅎ
여성에 대한 부채의식이 강렬한 586 박시백이 참 문정왕후 실드 많이도 쳐놨죠. 아니나다를까 민비에 대한 서술도 엉터리고요. 하여튼.....
대함주의자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판옥선이 건조된거보면 그 스노우볼이 엄청나게 잘 굴러갔죠
그나저나 황당선은 불법조업하는 중국어선들 기록할때 많이 봐서 여기에 왜 황당선이 나오는가 했는데
후기왜구들하고 중국해적들 결탁때문이었네요
그 황당선도 역사가 매우 깊죠 ㅎㅎ 무려 16C부터 출현 ^^;;
참고로 연려실기술에는 아예 황당선관련 기록만 다루는 챕터가 따로 있을 정도 ㅋㅋㅋ
다른 얘기긴 하지만 허블망원경도 소 잃고 외양간 잘 고친 케이스죠
미국인들은 최초에 제작에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고쳤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더군요
반면 한국에선 소를 잃으면 나라가 한심하다로 결론날 뿐이고 이미 결론났으면 아무리 잘 고쳐도 알아주지도 알아보지도 않는
확실히 한국에서 한번 잘못했으면 다시 잘해도 잘못된 거다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큰 것 같기도요 ㅜㅜ
@배달의 민족 어째 일본제국과 비슷하지만 반대로 따라가는 듯 ㅜ
일본제국: 잘못되었다는 건 알지만 국뽕과 정신승리로 덮음
한국: 잘못을 인지하면 지적질하고 같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사회 전체에 대한 수준 비하로 나는 깨시민이라는 자기만족을 하고 걍 넘어감
솔까 말해서 이런 사고방식이니 중일이 그네들 사고방식이 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선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동아시아는 정신적인 발전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는 민족집단들만 모여사는듯
겐킨이 다 작살내놓은게... 경상우수영도 그렇고 칠천량도...
정말 만번양보해서 경상우수영때까지는 어떻게든 변명의 여지가 있다 손 쳐도 칠천량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