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그림자 놀이를 처음 접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기억하는가? 인류는 고대 동굴에서의 생활 이후 빛과 그림자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중세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화두를 붙들고 상상력을 발전시켰다. 촛불이나 빛을 모으는 렌즈, 유리슬라이드와 원통 등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다양하게 지속되었다.
현대식 영사기와 카메라가 갖고 있는 구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였다.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밖에 있는 대상의 거꾸로 된 이미지를 반대편 벽 안쪽에 비추는 이것을 카메라 옵스큐라라고 불렀다. 물론 양쪽 벽의 거리가 좁혀져서 카메라처럼 하나의 구조물 안으로 축소되기까지는 수백년이 걸렸다.
1614년 이탈리아의 한 의사는 질산은이 빛에 노출되면서 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후 가볍고 빛에 민감한 입자를 입힌 종이에 카메라를 사용해서 인물이나 풍경 이미지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35년 영국인 폭스 탈보트는 질산은을 고정시킴으로써 영구적으로 이미지를 고정하는 음화를 최초로 만들었다. 그 2년 뒤인 1837년 프랑스의 무대장치 설계자인 루이 다게르는 은판사진술을 발명했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거대한 산업혁명이 19세기에 진행되었다. 수천년 동안의 느린 변화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짧은 시기에 모든 것들이 변했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특히 눈부셨다. 사진의 발명도 그중 하나였다. 그후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려는 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1872년부터 1879년까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행해진 영국계 미국인 머이브릿지의 실험은 영화 탄생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달리는 말의 네 발이 지상 위로 떠 있는지 증명할 방법을 찾기 위해 그는 경주 트랙을 따라 1피트 간격으로 24개의 사진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실을 트랙에 걸어 놓아 말이 달리면서 실을 건드리면 셔터가 터지도록 장치했다. 1880년 간행된 [미국 과학인]이라는 잡지는 샌프란시스코 예술협회 모임에서 머이브릿지가 스크린 위에 살아있는, 진짜 움직이는 말을 영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화는 초창기에 움직이는 사진 즉 활동사진이라고 불렸다. 한쪽에서는 투명한 샐룰로이드 필름이 만들어지고 또 다른 쪽에서는 실용적인 카메라를 계발했다. 미국과 유럽 대륙의 과학자 및 발명가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기술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려고 했다. 에디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회전원통 안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던 에디슨은 동전을 넣으면 원통 속의 움직이는 이미지를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만들었다. 활동사진 연구에는 에디슨의 조수였던 딕슨이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1892년 수직으로 돌아가는 키네토스코프라는 기계로 최초의 활동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영화의 발생일로 생각하는 것은 1985년 12월 28일이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는 손으로 돌리는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찍은 1분 정도의 다큐멘타리 흑백 필름을 파리 시내의 지하 카페인 그랑 카페에서 상영했다. 영화제작자가 있고 상영공간인 극장이 있으며 돈을 지불하고 들어간 관객이 있는 최초의 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짧다. 처음에는 사진예술에서 진일보해서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려는 노력이 영화의 탄생을 가속화시켰다. 영화 발생의 역사는 지금의 영화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움직이는 시각적 장난감을 만들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이야기 전달의 능력을 갖게 될 수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산업혁명이라는 인류사의 격변기 마지막에 탄생된 영화는, 그 후로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인접예술, 연극이나 소설과의 변별성을 확보하려는 투쟁을 겪어왔다.
처음에 활동사진은 정지된 사진들에서 발전된 움직이는 사진 이상은 아니었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피사체를 바라봤다. 배가 다리 교각을 빙빙 도는 장면이나 파리 중앙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비스듬한 각도에서 촬영한 뤼미에르의 영화나, 파티마의 춤을 촬영한 에디슨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길이는 1분 이내였다. 물론 지금처럼 편집된 영화가 아니라 단 한 컷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초창기의 영화는 이렇게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사실적으로 기록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는 세계를 또 다르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했다. 그러나 마술사 출신의 멜리에스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영화에 접근했다. 무대 속임수를 이용한 환상적 촌극과 마술들이 공연되던 극장을 운영하던 멜리에스는, 그가 경영하던 로베르-우뎅 극장 근처의 카페에서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의 첫 영화를 본 후 영화에 매혹 당했다.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에게 카메라를 팔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멜리에스는 또 다른 카메라 발명가인 영국인 로버트 포올로부터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리고 거리에 나가 촬영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는 거리 촬영을 하다가 카메라가 고장이 났다. 한참 걸려서 카메라를 수리한 후 계속 촬영을 했는데 나중에 현상해보니까 우연히도 카메라가 고장난 시점은 버스가 지나갈 때였고 카메라를 고친후 막 재촬영을 시작했을 때 영구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즉, 버스가 갑자기 영구차로 변해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멜리에스는 흥분했다. 이것은 최고의 마술이었다.
일상의 사실적인 부분들을 기록하는 뤼미에르나 에디슨의 영화와는 달리 멜리에스는 카메라 트릭을 이용해서 [사라진 여인](1896년)이나 [달세계 여행](1902년) 등 비사실적이고 환상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특수효과에 해당되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멜리에스는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는 페이드나 이중인화, 저속 혹은 고속촬영 미니어춰 등의 방식들을 통해 새로움을 만들었다. 멜리에스에서 시작된 표현주의 영화는 최근의 환타지 영화까지 이어지면서 사실주의 영화와는 다른 뚜렷한 계보를 갖는다.
이렇게 다양한 테크놀로지가 계발되면서 동시에 콘텐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영화 발생 초창기에는 일상의 한 부분을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신기해했었다. 지하 카페의 벽에 영사기를 비추자 갑자기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굉음을 내며 들어왔을 때, 관객들은 깜짝 놀라 의자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영화로 그대로 보는 것에 관객들은 곧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차역이나 부둣가에 가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기행영화다. 지금처럼 글로벌 시대가 아니었던 당시에는 오지였던 아시아나 아프리카 혹은 북극을 여행하면서 낯선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로 찍어 보여주는 기록영화에 대중들이 깊은 흥미를 보였다. [북극의 아누크]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또 한편으로는 기록영화가 아닌 허구적 내용을 갖는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즉 소설이나 연극처럼 이야기가 있는 영화가 등장한 것이다.
극영화란, 현실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놓는 다큐멘타리와는 달리, 허구적 서사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배우가 대사와 몸짓으로 직접 표현해서 보여준다. 영화발생 초기에는 허구적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소설과, 그리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연극과 비교되었다. 이미 수천년의 시간을 통해 인간정신의 뛰어난 표현 매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던 기존의 소설 연극 양식과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영화는 단지 시기한 시각적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일부의 편견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그 후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영화는 그 어는 기존 예술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창적 표현방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차별성을 강조한다.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은 후 그것을 그대로 현상해서 영사기를 통해 상영하는 단순한 영화제작 방식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다. 쇼트(shot)와 씬(scene)의 개념은 영화적 구성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장소에서 찍은 단 하나의 쇼트로 되어 있던 초창기의 영화에 비해,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각도와 다른 프레임으로 찍은 씬들을 이어 붙이면서 영화는 이야기 전달의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새로운 표현방식을 갖는 편집기술의 발달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기법을 제공했다.
미국의 에드윈 포터가 만든 12분짜리 극영화 [대열차 강도](1903년)만 해도 하나의 씬은 하나의 쇼트로 촬영되었다. 13개의 씬으로 되어 있는 [대열차 강도]는 대부분 롱쇼트로 찍혀져 있다. 마지막 13번째 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클로즈업이다. 영화가 연극과 다른 것 중 하나는 클로즈업이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클로즈업을 통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을 강조한다. 연극은 공간이 제한되어 있고 무대의 크기도 변함이 없지만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또한 클로즈업을 통해 피사체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영화는 탄생 이후 20여년에 걸쳐 일상생활의 기록이나 짤막한 희극적 요소로부터 점차 서술적 이야기 구조를 갖는 매체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피스의 장편영화 [국가의 탄생]이 만들어진 것은 1915년이다. 링컨 시대의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국가의 탄생]은 3시간 분량의 거대한 서사구조를 갖는 장편영화다.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제작자들은 스튜디오를 짓기 시작하고 각본가를 고용해서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감독과 배우를 캐스팅해서 영화를 제작했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은 1920년대를 거치면서 확립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로 들어서면 거대한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미국에서와 달리 유럽에서는 영화가 산업의 한 형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인간 정신의 새로운 표현 매체로서 영화가 연구되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시각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달리나 피카소, 장 꼭또 같은 예술가들도 영화 제작에 참여했고 무대 셋트 등 영화 미술에 관심을 가졌었다. 피카소는 장 꼭또 감독의 [올페]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영화는 살아 움직이는 회화여야 한다’는 주장 아래 표현주의 영화가 발달했다.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이나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2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년)는 지금 봐도 뛰어난 표현적 아름다움을 갖는 걸작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확실히 거대 영화자본과 결탁해서 대중적 관심을 끌기 위해 만든 미국 영화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영화감독은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 그들은 소설가나 화가처럼 영화를 또 다른 표현 매체로 생각한 것이다.
또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소련에서는 새로운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고 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하였다. 스탈린은 영화가 갖고 있는 대중적 장점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챈 정치가였다. 그의 후원으로 1920년대 소련에서는 매우 많은 영화들이 국가적 지원을 받고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제정러시아 말기 부패한 관료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지만 그 영화적 성취는 매우 뛰어나다. 실제 있었던 전함 포테킨호의 선상 반란과 그것을 지지한 오뎃사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을 소재로 한 에이젠스타인의 걸작 [전함 포테킨](1925년), 10월 혁명을 그린 [10월](1928년) 등의 작품에서는 이른바 몽따쥬 편집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에이젠스타인은 영화예술은 편집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서로 다른 장면들을 이어 붙여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몽따쥬 편집 이론을 발전시켰다.
‘카메라-펜’ 이론이 처음 나온 것은 1950년대 후반 프랑스의 아스트뤽에 의해서였다. 펜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처럼, 영화 역시 카메라로 쓰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영화비평지 ‘까이에 뒤 씨네마’를 중심으로 일련의 비평가, 감독들- 프랑스와 트뤼포, 장 뤼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이 몰려들었고, 영화감독은 한 사람의 작가라는 작가주의 영화를 표방하는 영화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누벨 바그다.
국내에서는 뒤늦게 비디오로 소개된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1959년) 국내 극장 개봉을 거친 [쥴 앤 짐](1961년), 그리고 쟝 뤼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1960년) [자기만의 인생](1962년) 같은 영화들이 누벨 바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인데, 두 사람 모두 영화비평가에서 감독으로 변신했다는 이력이 있다. 누벨 바그 이전에 2차 대전 직후 패전국 이탈리아에서는 비참한 삶의 사실적 묘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심층을 들여다보려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년) 빅도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년)같은 1940년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있었지만, 영화를 하나의 예술 쟝르로 자리 잡게 한 것은, 누벨 바그의 공헌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영화예술의 발전은 인류의 산업구조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영화는 당대의 테크놀로지와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은 곧바로 영화예술에 응용이 되면서 놀랄만한 영상을 창조해내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은 영화산업 자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컴퓨터 그래픽없이 어떻게 [스타워즈] 시리즈가 태어나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의 거침없는 상상력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영화의 본질은 상상력이다. 헐리우드의 특수효과팀이 영화예술의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는 그런 손끝 기술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우리들 앞에 보여주면서, 그속에 나타난 인생을 통해 자신의 삶, 자신이 살고 잇는 세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예술인 것이다.
영화는 허구의 구조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삶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삶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기여하지 않는 영화는, 아무리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더라도 한 순간 사라져가는 유성에 불과하다. 물론 답답한 일상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극장이 제공하는 또다른 환영에 몰입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거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쾌락적 기능도 필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영화는 항상 우리 삶의 본질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성찰케 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