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떨어지는 산자락들 사이로 개울물이 맑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산골짜기의 돌멩이들은 평원의 돌보다는 훨씬 산의 정수를 많이 간직
하고 있다. 그 위로 개울물이 흐를 때 나는 통탕거림은 탄생의 노래이
자 필멸에 대한 좀 이른 장송곡이다. 데스필드는 산골 마을 앞의 돌다
리 난간에 앉아있었다. 다리 바깥으로 내민 그의 발 아래쪽에서 개울
물이 통탕거리며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데스필드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뒤쪽, 그러니까 다리 상판쪽에는 세 개의 배낭이 옹기종
기 모여있었다.
물소리와 잘 어울리는 휘파람이 꽤나 길게 이어지고 나서, 데스필드
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리 저편의 오솔길은 침엽수들의 가지들이 우거져 작은 터널처럼 되
어 있었다. 그리고 데스필드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터널의 안쪽 어
두운 곳에서부터 두 시체가 나타났다.
살아있냐고 물어보면 회의적인 대답을 할 테니 시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은 경력 있는 도보여행자가 되기
직전의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처해있었다. 이 단계만 넘어서면 걸음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라 숨쉬는 것처럼 편안한 활동이 되겠지만, 아직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이 시점이 가장 힘들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런 상태를 고도 10,000 피트 지대에서 맞이하는 것은 그들
에게 있어 또다른 불운이었다. 데스필드는 측은한 표정으로 두 성스러
운 이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무지막지한 노정은 파킨슨 신부의 '오
발'에 대한 복수의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었지만 데스필드는 자신의 앙
갚음이 약간 과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 그래서 그는 기뻤다.
오솔길을 빠져나온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앉아있
는 다리 난간까지의 거리가 마치 판데모니엄에서 패러다이스까지의 거
리라도 되는 것처럼 헉헉거리며 걸어왔다. 데스필드는 몸을 돌려 난간
에서 뛰어내린 다음 정중하게 박수를 몇 번 쳐줬다.
다리에 이르자마자 파킨슨 신부는 난간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고 핸솔 추기경은 아예 돌다리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배낭 무
더기에 등을 기대었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들의 짐까지 지고서 걸어온
데스필드에게 뭐라고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마
음껏 원망했다.
"너, 허, 일부러, 휴, 빨리, 흐, 걸은, 허어, 거지?"
"제국어로 말하쇼, 제국어로. 그거 엘핀이오, 뭐요?"
"너일부러빨리걸은거지-익!"
숨이 차다는 이유로 단번에 고함질러버린 파킨슨 신부는 곧 머리가
띵해지며 양쪽 관자놀이가 두개골 안쪽으로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
다. 앞이 캄캄해진 파킨슨 신부는 비틀거렸다. 데스필드의 손이 빠르
게 움직였다. 데스필드는 신부의 허리 뒤쪽을 움켜잡아 재빨리 신부를
난간 위에 엎드리게 했다.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처치에 고마워하
며 개울을 향해 구토하기 시작했다. 히죽 웃던 데스필드는, 그러나 파
킨슨 신부의 구토가(嘔吐歌)를 듣던 핸솔 추기경의 얼굴이 노랗게 변
하는 것을 보곤 황급히 그를 안아올렸다. 데스필드는 추기경을 난간
위에 패대기쳐 놓은 다음 두 사람이 개울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양
손으로 두 사람의 허리띠를 움켜쥐고는 먼산을 바라보며 피식거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뭉게구름 하나가 유유히 흘러갔다.
잠시 후 두 성직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이 탈진한 상태로
다리 상판에 주저앉았다. 데스필드는 산골마을의 높은 지붕들을 가리
켜보이며 두 사람을 다그쳤다.
"바로 저기가 마을이오. 다 왔다고. 조금 더 가서 쉽시다, 예?"
"나… 농담이 아닌데, 정말 한 걸음도 더 걸어갈 힘이 없다. 데스필
드…"
핸솔 추기경의 경우에는 아예 말도 할 힘이 없는 듯했다. 데스필드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는 배낭들을 휙 들어올렸다. 파킨슨 신부는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데스필드는 그대로 마을 쪽을 향해 걸어가버렸다.
시간이 약간 지난 후, 데스필드는 덜커덩거리는 수레 하나를 끌고서
다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아무 말도 없이 신부와 추기경을 수레 위에
안아올렸다. 짐을 부리는 인부처럼 신속한 동작으로 두 사람을 짐칸에
얹은 데스필드는 그대로 수레를 끌며 마을쪽으로 걸어갔다. 파킨슨 신
부는 눈물이 핑 도는 눈을 힘겹게 닦으며 낮게 속삭였다.
"고마워, 데스필드."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데스필드는 조금 후에야 대답했다.
"뭐, 두 당신 다 오늘은 꽤 잘해줬으니까 본인도 이 정도는 해줘야
지."
핸솔 추기경 역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위액 때문에 입안이 쓰
린데다가 눈 앞이 빙빙 돌고 있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수레에 얹
혀서 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산길인지라 수레가 덜컹거릴 때마다 신부
와 추기경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어야 했다.
조금 후 탈진해버린 두 사람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쯧쯧! 그래서 수레를 달라고 하신 거군. 흘리고 온 게 사람이
라고 말하지 그랬소. 그럼 나라도 같이 갔을 텐데. 혼자서 끌고 오셨
소?"
"별로 무겁진 않수."
"그러고보니 숨소리도 고르군. 산사람이오?"
"패스파인더요."
역시, 과연, 어쩌고 하는 말이 짧게 이어졌다. 그리고 두 성직자는
힘센 팔에 의해 들어올려지는 자신을 느꼈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을
들어올린 사내의 수염 텁수룩한 얼굴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지만 자신
이 과연 똑똑히 말했는지 자신이 없었다.
산골 마을에 이른 저녁이 찾아왔을 때에야 핸솔 추기경은 처음 보는
곳에서 깨어났다.
학자이기도 한 핸솔 추기경은,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머리 속으
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물이라는 내용의 성명서 한 편을 탈고
하고 말았다. 물을 찾아 일어나던 핸솔 추기경은 침대 옆의 땅이 맨바
닥이라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맨발에 흙을 묻히며
돌아다니던 추기경은 방안을 한 바퀴 일주하고 나서야 침대 머리 쪽에
놓여진 조그만 질그릇 주전자를 발견했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성
급한 손놀림에 적지 않은 물을 앞가슴에 흘렸지만, 어쨌든 핸솔 추기
경은 주전자 부리에 입을 댄 채 물을 다 마셨다. 다시 침대에 주저앉
은 핸솔 추기경은 입가를 닦으며 방안을 관찰했다. 조금 전엔 물 이외
엔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그의 눈
에 들어왔다.
창문은 방 안쪽을 향해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을 뿌리고 있었다. 굵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이었고 돌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벽난로는 여름인
지라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핸솔 추기경 자신은 속옷 바람으
로 두툼한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어둑어둑한 방안을 방황하던 그의
눈이 조금 후 그의 옆에 누워있는 파킨슨 신부를 발견했다. 파킨슨 신
부는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잠들어있었다. 그를 깨울까 생각하던 추기
경은 신부 역시 일어나면 목이 마를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핸솔 추
기경은 침대 주위를 살폈고, 조금 더 어두운 곳에 얌전히 놓여있는 자
신의 신발과 겉옷을 발견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추기경은 한 손
에 빈 주전자를 들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추기경은 잠시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앞을 바라보았
다.
울타리 안쪽으로 좀 넓은 텃밭이 있었다. 그리고 그 텃밭에서는 타오
르는 메밀꽃들이 붉은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 학자 영
역은 그 순간에도 조파된 여름메밀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지
적하고 있었지만 추기경은 여전히 그것을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양탄
자로 느꼈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메밀밭 가장자리에 앉아 입에서
연기를 뿜어대는 데스필드를 보았을 때 그가 불타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데-스필드! 데-스필드 군!"
데스필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핸솔 추기경은 그의 당혹
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손에 쥐어진 작은 파이프를 보고선 자
신이 참 말도 돼지 않은 상상을 했음을 깨달았다. 데스필드는 추기경
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도 밟으셨소, 각하 당신?"
"아니, 아니오. 난 잠시 당신이…" "데스필드! 무슨 일이냐!"
다음 순간 데스필드는 메밀밭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고 그 모습에 놀
라 뒤를 돌아본 핸솔 추기경 역시 기겁하며 쭈그리고 앉았다. 속옷 차
림으로 핸드건을 휘두르며 달려나온 파킨슨 신부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조준하려 애쓰고 있었으며, 그 눈은 아직까지도 반쯤 감겨
있었다. 핸솔 추기경과 데스필드가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악을 써대는
것은 파킨슨 신부가 이성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를 더 어리
둥절하게 만들뿐이었다.
다행히도 핸드건의 도무지 대책이 없는 파괴력에 대해서 가장 잘 알
고 있었던 것은 파킨슨 신부 자신이었고, 그래서 신부가 얼떨결에 암
소나 거위 등을 쏘아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전되고 나서 파킨슨 신부는 오두막의 벽 아래 놓여있는 긴의자에 앉
아서 껄껄거리게 되었고 데스필드는 그 앞에서 옷을 털며 투덜거렸다.
"여기가 어디냐?"
"이름은 없고, 그냥 도스 계곡 직전의 마을이오. 한 서른 가구 정도
사는 모양이더군. 여기선 밤에 싱잉 플로라의 노래도 희미하게 들려온
다던데요? 해가 지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직접 들을 수도 있겠지."
"여기 주인은 어디 있지?"
"조금 전에 염소 한 마리 끌고 갔소. 저녁식사 때 대접하려고 잡으러
간 것 같은데, 사실 불필요한 일이지."
"불필요하다니?"
"두고보면 알 거요."
데스필드의 예언은 정확했다. 그날 저녁,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부
는 오래간만에 보는 '아궁이로부터 나와 식탁에 올라온'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한 점의 고기도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집주인을 상심시켰다.
하지만 플레리라는 이름의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산 증세일 겁니다. 너무 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오셔서 그런 거지
요." 파킨슨 신부는 염소 뒷다리를 들고 신나게 뜯고 있는 데스필드에
게 저주 섞인 시선을 날려보냈다. "귓속이 멍멍하거나 하지는 않습니
까? 아, 예. 두 분 다 물을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
다."
핸솔 추기경은 질 좋은 와인을 간신히 삼키며 말했다.
"이거 죄송하군요. 플레리 씨. 음식 대접을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어, 아시는군요? 그렇지만 여기서도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이
는 건 똑같이 실례입니다. 그런 실례를 할 수야 있겠습니까."
플레리는 사람좋게 웃으며 두 성직자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물
인 와인을 한 병 더 꺼내와 테이블에 놓았다. 집 뒤에서 떠온 차가운
샘물을 와인에 타서 파킨슨 신부에게 건넨 플레리는 의자를 삐딱하게
놓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럼… 이 자리를 식사 자리 대신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 만들까요.
두 분 모두 빨리 주무시고 싶겠지만 식후에 곧장 누우면 더 힘드실 겁
니다. 위에 부담이 없어야 잠이 잘 오죠. 그리고 낮에도 많이 주무셨
고. 이야기나 좀 하지요. 이렇게 급하게 올라오신 건 뭐 때문입니까?
싱잉 플로라를 구하시기 위해서입니까?"
핸솔 추기경은 데스필드를 보았지만 데스필드는 여전히 걸신들린 듯
이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가 배고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추기
경은 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추기경은 데스필드가 먹을 수 있을
때 꽉꽉 채워두는 성격일 거라 짐작했다.
"아닙니다. 주인장. 우린 도스 계곡을 지나서 제국으로 들어갈 생각
입니다."
치즈 조각을 씹고 있던 플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도스는 위험합니다. 나으리."
각하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겠지만, 어 든 추기경임을 밝힌 적이 없
으므로 플레리가 저렇게 부르는 것은 추기경의 행동거지에서 배어나오
는 품격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우리 패스파인더가 그쪽으로 가자더군
요."
"패스파인더가 찾은 길이라면 저로선 특별히 할 말은 없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입니다만 부인이나 자녀분은
없습니까?"
"혼자 삽니다. 나으리."
핸솔 추기경은 약간 이채롭다는 듯이 플레리를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수염이 아니더라도 40대는 넘겨보이는 연배였다. 그런 사내가 이런 곳
에서 이렇게 큰 집을 혼자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에겐 의외로 느
껴졌다. 어쨌든 그와 파킨슨 신부가 잠들어있었던 침대는 분명히 두
개였다. 핸솔 추기경은 그 점을 지적했고 플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딸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산 아래쪽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협하기로 했죠. 적당히 떨어져 살면 나도 그들이 보고 싶어
질 테고 그들 역시 나를 보고 싶어할 테니까요."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함께 살면 보기 싫어진단 말입니까?"
"예."
플레리가 그렇게 말할 때 그의 얼굴엔 자조와, 그것보다 더 희미하지
만 더 시선을 끄는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핸솔 추기경은 고개를 갸웃
했고 플레리는 잠시 후 설명했다.
"싱잉 플로라 때문입니다."
"아아."
"아내와 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죠. 하지만 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소리가 없는 곳에선 제가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들었던 소리니까요. 음. 전 아내에게 제 문제를 설명
하고 분란거리와 함께 사느니 그냥 떨어져서 살자고 제의했습니다."
"노랫소리가 어째서 분란거리가 됩니까?"
"됩니다. 나으리. 저는 그 노래를 듣다가 아내나 딸이 하는 말을 못
듣곤 무슨 말을 했냐고 되묻는 일이 있지요. 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
것만큼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도 드문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잠시 이상하게 생긴 구름만 보고 있어도 아내는 또 그 노랫소리를 듣
고 있냐고 핀잔을 주지요. 아내 역시 싱잉 플로라는 낮에 노래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이란 건 화가 치밀 땐 그런 당연
한 사실도 잊어버릴 수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전 함께 살며 매일 서로에게 화를 내느니 약간 떨어져
살더라도 서로 보고 싶어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말했지요. 아내와
딸도 동의했지요. 아마 딸 쪽이 더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남자애들한
테 어떻게 보이느냐가 지상 최대의 문제인 나이거든요. 그런데 이 마
을의 남자애들이란 것들은 모두 밤이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서 근
사한 연애 상대는커녕 적당한 이야기 상대도 못됩니다. 껄껄."
"그 노래가 그렇게 요사스러운 것입니까."
무심결에 질문했던 핸솔 추기경은 플레리의 얼굴을 보곤 헛숨을 들이
켰다. 플레리는 딱딱하게 말했다.
"전 지난 42년 동안 한번도 그게 요사스럽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
다."
"미안합니다. 기분 나쁘셨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나로선 사람의 올바
른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라면 그게 좋은 것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는
군요."
"그럼 사랑도 나쁜 것입니까?"
플레리의 질문엔 공박하는 태도가 없었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반
박하기 위한 대답보다는 토론하기 위한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깐 시간
을 지체했다. 그 때 플레리가 말했다.
"직접 들어보시는 편이 낫겠군요- 시작되었습니다."
핸솔 추기경은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론 산골 지방의 뿌연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오후에 그를 경탄하게 했던 메밀밭은 젖빛 융
단으로 바뀌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떠도는 별들은 반딧불이일까?
그리고 그 노래가 먼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커리돈 왕가의 아홉번째 왕이며 대륙 최고의 말조련사이자 가끔씩은
자신이 미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쑥스러워서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남자는 천막을 요란하게 걷어붙이며 밖으로 달려나
왔다.
그 바람에 촛불이 꺼질 뻔했다. 이 흉악무쌍한 전쟁터에서 국왕 대신
화살을 맞겠다는 심정으로 따라왔던 시종장과 시종들은 황급히 수건과
담요 등을 챙겨들며 - 그 시종들은 경애하는 국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 뒤따라 나왔다. 그들의 짐작대로, 마왕 빌레스는 그대로 말
구유에 상체를 들이박았다. 풍덩!
대포에 명중당한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물방울이 위로 치솟았
다. 마왕은 그대로 꼼짝을 하지 않았으며 수면 위로는 공기 방울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시종들은 약간의 씁쓸함도 배어있는 표정으로,
하지만 공손하게 수건과 담요를 든 채 시립했다.
"푸우하!"
격한 숨소리를 토하며 마왕이 다시 일어났다. 마왕의 얼굴과 가슴에
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말구유에 비치던 달
빛이 몇천 조각으로 갈라졌다. 잠시 후 빌레스 국왕은 갈기 같은 그
긴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다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빌레스 국왕은 두 손으로 말구유를 짚은 채 앞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에 무서운 웃음이 떠올랐다.
"흐음. 그 어린 놈이 나를 능멸했다는 말이지?"
시종장은 차분히 다가가 빌레스 국왕의 머리 위에 수건을 널어놓은
다음 다시 조용히 물러났다. 빌레스 국왕은 뭔가가 눈 앞을 가리자 기
분 나쁘다는 듯이 그것을 집어들어 땅에 내동댕이쳤다. 시종장은 다시
차분히 다가와 땅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든 다음 - 새 수건을 얹어놓았
다.
빌레스 국왕은 대범해 보이기 위해 떠올렸던 웃음을 포기하고는 투덜
거리며 머리와 상체를 닦았다.
"하빈저 부관!"
시종들과 함께 달려나왔지만 늘상 옆에서 보는 그들과는 달리 마왕의
이런 모습을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래서 처음 목격한 그 모습에 충격
을 받아 입을 다물고 있던 하빈저 부관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나왔
다. 마왕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둔 채 하빈저 부관을 쏘아보았다.
"노이에스 놈이 다케온과 불침 협정이 맺은 것이 정확히 언제였나?"
"6월 5일입니다. 전하. 그리고, 옥체를 보전하시길."
"옥체인지 급체인지 하는 건 열심히 씻고 닦고 하고 있으니 걱정마."
"…황공하옵니다. 전하."
빌레스 국왕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둔 채 좌우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
다. 시종들과 하빈저는 목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충성스럽게 국왕의 모
습을 바라보았고 멀리 서있던 보초병들은 이 모습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마왕은 여전히 왔다갔다하며 질문했다.
"땅꾼 놈들은 언제 쯤이면 도착하지?"
"리저드라이더 말씀이십니까? 빠르면 내일 저녁, 늦어도 모레까지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나를 잡아먹겠단 말이지. 그래, 좋다구. 좋은 기백이다."
하빈저 부관은 마음 속으로 약간의 놀라움을 느꼈다. 그가 차마 전하
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말똥내 나는 늙은
이'의 몸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썰어 목도리도마뱀들에게 나눠먹이자
고 결의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왕은 다시 대포처럼 고함질렀다.
"발 달린 뱀이나 타는 것들이 감히 나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훔쳐보던 보초병들은 기겁하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마왕은 계속해서
리저드라이더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으며 열심히도 오락가락했고,
하빈저와 시종들은 그들 중 누가 마왕에게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면 어
떻겠냐는 말을 꺼낼 것인가를 마음 속에서 점쳐보고 있었다.
리저드라이더들에 대한 폄하와 모욕의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빌레스
국왕은, 그러나 마음 속으론 그 욕설들을 전부 되끌어와 자신에게 퍼
붓고 있었다.
'어리석은 늙은이!'
은근한 말 한 마디에 속아 대군을 이끌고 록소나로 와버린 자신이 너
무나 한심했다. '국왕께서 다케온의 머리를 누르면 제가 그 허리를 치
리다. 그리고 저 오만한 광부 놈들에게서 그들이 독식할 권한이 없는
다이아몬드를 빼앗아 전하의 말 편자를 장식하시길.' 참으로 무서운
유혹이었지만 빌레스 국왕도 한번 정도는 조심해볼 수 있는 인물이었
다. '다케온과 국경을 대하고 있지 않은 다벨이 어떻게 그 허리를 치
겠다는 것이냐?' 그러자 휘리는 마치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말
하는 것처럼 팔라레온을 정복해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 신속한 정복
에 놀랐지만 그중 가장 크게 놀라고 감동받은 이는 다름아닌 빌레스
국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케온에 쳐들어왔고 - 지금 오도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빠져있었다.
휘리 노이에스가 다케온과 불침 협정을 맺어버린 것이다.
빌레스 국왕은 그제서야 휘리 노이에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국왕은 그 깨달음에 경악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시종장
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빌레스 국왕은 고개를 돌리는 대신 손을 들어 귀찮다는 듯이 흔들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종
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 유혹은 몇 가지나 되는 노림수가 겹쳐져 있는 한 수였다. 휘리는
그 말 한 마디로 마왕의 관심이 팔라레온이나 심지어 다벨 본토에 돌
아가는 것을 막았고, 그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다케온을 바쁘게
만들어줬으며, 이로써 팔라레온을 장악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게다
가 부록 삼아 다이아몬드 채굴권까지 받아내었다. 마왕은 솔직히 혀를
내두르고 싶었다. 악마 같은 놈!
"전하."
"왜?"
"외람됩니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대처 방안은 조속한 회군이라고 생각됩니다."
빌레스 국왕은 오락가락하던 것을 멈추고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하빈
저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왕의 출정 결심에 기겁한 왕가의
원로들이 제동장치 삼아 데리고 갈 것을 강요했던 왕실의 먼 친척 뻘
되는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원로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
하고 있었다.
"묻지도 않는 말을 해주는군, 하빈저."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빌레스 국왕은 무의식 중에 손을 올려 다시 머리를 닦으면서 하빈저
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원군이 되어주리라 생
각했던 다벨군이 움직이지 않게 된 이상, 아직 다케온 내부에 깊숙이
들어오지는 않은 지금이 회군하기엔 가장 좋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지휘관들을 불러오도록. 대응 태세를 의논하겠다."
하빈저는 국왕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리저드라이더들에게 맞서싸울 생각이십니까? 이제 여름입니다. 목도
리도마뱀들은 거의 날아다닐 겁니다. 우리 말들은 그 모습에 기가 죽
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요."
"그 덩치 큰 도마뱀을 잡아서 군량으로 써야겠다. 고기가 꽤나 나오
겠지."
하빈저는 지금 농담하실 때냐는 눈빛으로 그의 국왕을 바라보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밤인지라 하빈저의 눈빛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고, 더 안좋은 점은, 빌레스 국왕이 그의 얼굴
대신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흐음. 좋은 날씨군."
"전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팔라레온을
상대로 했던 휘리 노이에스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다케온은 팔라레온
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마왕의 오른손으로부터 수건이 갑자기 날아왔다.
하빈저의 목 뒤로 한 바퀴 돈 수건은 마왕의 왼손에 붙잡혔고 빌레스
국왕은 그대로 수건을 앞으로 콱 끌어당겼다. 가장 성질 사나운 종마
도 아직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왕의 솜씨다. 하빈저는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앞으로 끌려갔다.
빌레스 국왕은 수건을 올가미처럼 움켜쥔 채 하빈저의 얼굴을 코앞까
지 끌어당겼다. 숨이 막혀 시뻘개진 하빈저의 얼굴을 향해 빌레스 국
왕은 또렷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묻지 않은 것을 계속 말하는데, 그 노이에스 놈이 정말 영
리했다는 건 나에게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지휘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상관이 두 번 말하게 하는 부관은 부관 자격이 없
어."
하빈저는 창백해진 얼굴을 어깨 사이에 파묻은 채 급히 떠나갔다. 빌
레스 국왕은 그가 수건을 돌려주지 않고 목에 건 채 떠난 것에 대해
짧게 혀를 찬 다음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화환을 둘러쓰고 있었다. 빌레스 국왕은 그 모습을 보며 약간은
애처로운 만족감을 느꼈다. 휘리 노이에스는 그를 속일지 몰라도, 저
달무리는 그를 속이지 않으리라.
"나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것 없으시오, 파킨슨 신부?"
핸드건을 홀스터에 꽂았다 갑자기 빼서 전방을 겨냥하는 - 핸솔 추기
경은 도대체 신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포
를 빨리 뽑는 연습을 하는 건가? 그렇다면 핸드건을 도로 꽂아넣을 때
저렇게 빙글빙글 돌리는 이유는 뭘까? - 행동을 되풀이하던 파킨슨 신
부는 핸솔 추기경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추기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부는 또다시 손가락으로 핸드건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그것을 홀스
터에 꽂아넣었다.
"부탁?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넘겨짚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난 왠지 당신이 성
직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끝에 핸솔 추기경은 허공에 성호를 그어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신
호였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성
직자가 성직자를 필요로 하는 성사엔 어떤 것이 있지?
"고해 말씀입니까? 각하. 기도는 항상 하고 있으며 질문은 계속 던지
고 있습니다만, 전 아직까지도 제가 주님의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선 신성 펠라론에 도착할 때까지 거론하
지 않기로 약속해주셨던 것 같은데요. 추기경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아, 나도 그건 알고 있소. 나는 초조해하지 않아요. 성하를 친견하
게 되면… 관둡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 데스필드 군에 대한
일이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의아해졌다.
"예? 데스필드요?"
"파킨슨 신부. 짧은 기간이지만 난 당신과 데스필드 군을 보아왔고,
당신이 데스필드 군을 대하는 태도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주님
의 목자가 그 신도들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소. 그리고…
도대체 부랑아나 뒷골목 잡배들이나 할만한 무지막지한 행동들은 뭐
요? 신도의 몸 주위로 핸드건을 쏘다니. 법황청은 교회의 보물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면 질겁할 것이오."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핸솔 추기경의 말을 이해했다. 신부는 어깨
를 으쓱이며 싱긋 웃었다.
"맞추지는 않았습니다."
"파킨슨 신부, 제발! 이 무슨 풋내기 수도사나 꺼낼 대답이란 말이
오. 굳이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성전의 율법까지 논할 것도 없이, 당
신은 봉사와 희생과 순종을 맹세한 사람이잖소? 형제께서 스스로 한
맹세를 어기고 있음을 내가 지적해야만 하겠소?"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약간 진지해지기로 결심했다. 핸솔 추기경은
근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혹시라도 그를 깔보거나 그를 증오하거나 한 것은 아니오? 그를 업
신여긴다거나 조롱한 것은? 성직자에겐 그런 마음가짐조차도 죄가 되
는 것 아니겠소. 변명하고 싶지 않습니까?"
파킨슨 신부는 잠깐 동안 자신을 억누르려고 노력했고, 실패했다.
"그럼 신도를 죽여버리는 것은?"
추기경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들기름 등잔에서 피어오르는 약한
빛은 그것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신도를 암살하려한 주제에 군자연하지 말라는 의미인 거요?"
"각하. 어쨌든 우리는 협정을 맺었습니다. 각하께선 제가 질문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런 질문에 대해 가장 높은 권위로써 대
답해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펠라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동
의했고요. 그래서 각하와 저는 그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발 제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변명하지 않을 테니까요.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형제여. 당신의 말이 나에겐 퍽 위험하게 느껴져요. 성직에 몸을 담
은 이가 확신을 가질 곳은 오로지-"
"그만하십시오! 제가 각하께 율리아나 공주 암살건에 대해 후회하거
나 변명하실 것이 있으시냐고 물어보고 싶어지기 전에!"
핸솔 추기경은 입을 다물었다. 파킨슨 신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
다.
바깥으로 나온 파킨슨 신부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잠시 호흡을
골랐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튀어나오길 바라는 욕설들이 목젖을 간지
럽혔다. 분노는 격심했지만, 신부는 그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노의 목적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던 파킨슨 신부는 저
쪽 어둠의 장막 아래에서 데스필드의 모습을 발견했다.
데스필드는 메밀밭 가장자리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에 떨어지는 달빛
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로부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멈춰졌을
때 데스필드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차분히 말했다.
"핏대 올리지 마쇼, 신부님 당신. 고소적응하는데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들리더냐?"
"산 속은 고요하거든."
파킨슨 신부는 작게 투덜거린 다음 데스필드의 옆에 앉았다.
산이 고요히 호흡하는 밤기운이 골짜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데스
필드는 가끔씩 파이프를 입가로 가져갔다가 희푸른 연기를 날려보내었
다. 그리고 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 하지
만 데스필드의 말대로 산 속은 고요했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감각
을 믿기가 어려웠다.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
고 그의 청각은 주위가 고요하다고, 바람의 맥박소리까지 들을 수 있
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말 없이 기
다리는 시간들의 끝에서 파킨슨 신부가 입을 열었다.
"데스필드."
"예?"
"사효적효력(事效的效力)ex opere operato이라는 말을 아느냐?"
"대충."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안다고? 그럼 인효적효력(人效的效力)ex opere operantis이라는 말
은?"
"역시, 대충. 서로 반대 의미죠, 아마? 성사의 효과는 그 성사를 주
관하는 당신이 성총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법도와 규칙의 올바른 수
행에서 나온다는 말일걸. 그 반대가 인효적효력이고. 교회는 인효적효
력을 부정하고 사효적효력을 인정하지요. 그러니까… 급한 상황에서
살인강도범 당신이 해준 세례라도 그 행위가 정확한 규칙을 지켰으면
그 세례 성사는 유효한 것이지요. 사효적효력이니까."
"허! 정확한 대답이다. 너 신학교에도 다녔냐?"
"본인의 과거 행적이 궁금하쇼?"
"아니, 됐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파이프 한 대를 다 피운 데스필드는 담뱃재를 털어버린 다음 그것을
셔츠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두 다리를 편하게 뻗은 다음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좋아요, 신부님 당신. 들어보리다."
파킨슨 신부는 솔직하게 말했다.
"뭘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데스필드."
"글쎄. 당신이 한 일은 마음에 들어요, 신부님 당신. 괴로워하지 마
쇼."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성직자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교회는
인효적효력을 부정한단 말이야."
"어째서 그런 거요?"
"신학교는 안 다닌 모양이군."
데스필드는 피식 웃었다.
"동냥 바가지 들고 다니는 수도사님 당신들도 때론 본인의 패신저가
되곤 하오. 그 당신들은 종교적 열정이 지나쳐서 본인에게 참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 정도라서 피곤하더군. 어쨌든 그런 당신들은
본인으로 하여금 몇 가지 관념 정도는 외우게 했지. 됐소? 계속합시
다. 어째서 그런 거요? 성직자 당신은 왜 규칙을 지켜야 하지? 옳은
일이라면 규칙 같은 거 잠시 접어두는 융통성도 필요하잖소."
"사효적효력이란 말이 때때로 꽉 막힌 말처럼, 어쩌면 규칙 자체에
대한 숭상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아무리 훌륭
한, 예를 들어 성 페이루스가 강림하셔서 집전한 미사라도 그게 규칙
에서 틀리면 엉터리 미사인 것이고 포악한 살인강도가 집전한 미사라
도 올바르게 행하여졌으면 효력이 있는 미사라… 이상하게 들리지?"
"그렇소."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구원
하기 때문이다."
"흐음."
"어떤 주인이 노예에게 일을 시킨다고 하자. 착하고 똑똑한 노예가
엉터리로 일하는 것과 못되고 어리석은 노예가 주인이 시킨대로 일하
는 것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겠느냐?"
"착한 노예 당신이 한 일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일 수도 있잖소. 주인
당신이 시킨대로 한 건 아닐지 몰라도."
파킨슨 신부는 킥킥 웃었다.
"그렇지. 그 주인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지만 만일 그 주인이 절대
로 틀릴 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아. 주님 당신 말이군요."
"그래. 성사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고 비할
데 없이 선량하고 일개 군단 쯤의 성령이 임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틀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다. 무
류의 인간이란 건 없는 법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신이다."
설명을 끝낸 파킨슨 신부는 입을 다물었고 데스필드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 주위를 살펴보던 데스필드는 달이 하얀 목거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데스필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고지대에서
비를 맞으면 두 성직자 당신들은 결딴날지도 모르는데. 골치아프군.
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출발해야 할까?
파킨슨 신부가 상처에 아파하는 부상자처럼 말했다.
"나는 배교자일까?"
데스필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부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교회가 내 속에 있다는 생각은 내가 테리얼레이드 교구 신부라서 가
지게 된 망상은 아닐까? 희망없는 전도에 매달리고 반드시 무너질 교
회를 끊임없이 신축하는 동안, 나는 그 무의미하게 보이고 미련스러워
보이는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 관념을 자신에게 선물해버린 것 아
닐까?"
"신부님 당신."
"혹시 나는 펠라론이 내게 고마워해야 된다고 믿어버리게 된 건 아닐
까? 그래서 펠라론이 하는 일을 심판할 권리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무릎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파킨슨 신부의 목소리는 깊고 우울했다.
"어느 당신이 다른 당신을 죽이는 일은 나쁜 일이오. 어떻게든."
"어쨌든 그건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 가장 나쁜 독신이
될 수 있다. 데스필드. 악의적으로, 혹은 이기적 욕심에 의해 율법을
파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독신이지."
"젠장. 뭐가 그렇게 지랄 같이 어렵소? 썅! 그럼 뭐가 좋은 것이고
뭐가 나쁜 건지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성전에 비추어 판단하면 돼지. 성전의 율법엔 다 나와있다."
"그럼 됐군! 본인이 알기로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소. 당신
이 한 일은 그 율법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고. 괴로워할 것이 뭐요?"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편하겠냐."
"저 노래 때문이오?"
데스필드의 질문은 내용상 갑작스러웠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들어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던 데스필드는
어두운 골짜기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 노래 때문이군. 좋을대로. 본인은 저곳으로 패스를 설정했소. 꼬
리는 못 뺄 거요."
"무슨 말이냐?"
"지금 저곳으로 가기 싫어서 이상한 소리 하고 있다는 거 다 아니까
적당히 하라는 말이오. 아시겠소?"
"무슨…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데스필드는 손가락을 세 번 빠르게 튕겼다. 흡사 마법사를 연상시키
는 동작인지라 파킨슨 신부는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데스필드는 싱
긋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고 들어가 누우쇼. 밤이 깊소. 내일 걸어가려면 고민은 누워
서 해보는 편이 낫겠수다."
================================================================
예. 타자, 투표까지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사효적효력이나 인효적효력 뒤에 나와있는 라틴어를 보시곤 P/R의 세
계에선 라틴어도 사용하냐는 질문은 하지 마시길. 타자가 사용하는 영
어나 한자, 혹은 라틴어 따위는 모두 이해를 돕기 위해 - 누구보다도
두드리는 제 자신을 돕기 위해 적어두는 것일 뿐입니다.
언어는 기호이자 동시에 상징이다. 이러한 기술기호와 구분되는 상징
기호로서의 언어적 특성 때문에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표
현이자 동시에 이해이며 그 양자가 혼재된 - 그러나 놀라울 정도의 정
밀규칙에 따라 피드백되는 - 행동양태이다. 그러므로 글쟁이는 영원한
이야깃꾼임과 동시에 신화제작자이며, 근원적 의미에서의 영웅 - 아킬
레우스보다는 외디푸스적인 - 에 닿아있다… 그러나 글쟁이가 그걸 모
른다면, 말짱 황이다.
타자의 잡설에 너무 신경쓰지 맙시다. 하하.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0. 새장 속의 왕…2.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들의 사나운 목도리도마뱀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덩달아 흥분하고 있었다. 만일 진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를 찔러대기라도 할 태세였다. 군령으로 금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케온군은 리저드라이더들이 목도리도마뱀들에게 사용하는 흥분향을
자기 자신에게도 사용하는 것을 완벽히 막지는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것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리저
드라이더들은 그들의 도마뱀에게 그것을 흡입시킬 때 '순수한 연대감
으로' 함께 흡입하고는 도마뱀과 똑같이 미쳐날뛴다. 아마도 자기최면
일 테지만 그렇게만 설명하기엔 목도리도마뱀과 리저드라이더들의 감
정공유에는 섬뜩한 면이 있다.
"쐐-애애액!"
목도리도마뱀들은 적과의 거리가 터무니없이 먼데도 불구하고 그 프
릴을 펼치며 포효했다. 그리고 리저드라이더들 역시 안장 위에서 울부
짖었다. "쐐애애애-액!" 극도로 흥분한 리저드라이더들은 놀랍게도 목
도리도마뱀과 비슷한 포효소리를 내며 손에 든 무기를 휘둘러대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모두 지쳐 쓰러릴 것
같다고 판단한 리저드라이더들의 지휘관은 드디어 힘차게 손을 들어올
렸다.
"무례한 마구간지기에게 남부 신사의 예의를 가르쳐준다! 돌격-! 앞
으로-!"
목도리도마뱀들은 화살처럼 튕겨져나갔다.
화살처럼 어쩌고 하는 낡은 관용구가 이토록 사실과 가까왔던 적도
드물 것이다. 목도리도마뱀들의 강력한 뒷다리가 땅을 박찬 순간, 거
칠게 할퀴어진 대지가 자신의 권리를 소리높이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물론 대지는 자신의 권리를 다시 확
인받았다. 땅이든 수면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목도리도마뱀들도
허공을 달릴 수야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땅에 내려섰을 때 그들은
이미 수 로드 앞쪽의 땅을 디디고 있었다. 강인한 꼬리는 약간 들려져
균형을 잡고 있었고 허공에 건들거리는 두 앞발에는 리저드라이더들이
취향대로 장착시켜둔 무기들이 끔찍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도마뱀
들은 바깥을 향해 직각으로 굽힌 두 뒷다리를 좌우로 휘두르며 경쾌하
게 달리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애애애-애애액!"
두두두두! 땅이 울리며 도마뱀들이 피워올리는 먼지가 화산연기처럼
솟아올랐다. 비아냥거리는 것에서 삶의 완성을 느끼는 특출한 냉소주
의자라면 그 모습을 보며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좌우로 힘껏 쳐올려지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뒷다리는 분명히 미학적이
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그 동작에 내포된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을 테고, 꼬리를 제외해도
15 피트 크기나 되는 생물이 그런 힘을 내뿜으며 달려온다면 그 모습
에서 유머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록소나의 용감한
기사들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입에서 신음처
럼 말과 기사의 수호성녀인 성 엑시아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이저- 내렷!"
철컹, 철컹. 기사들의 손이 얼굴 부근을 빠르게 움직였다. 호면(護
面)이 내려지며 기사들의 시계는 이제 그들의 말과 마찬가지로 슬릿을
통해 보이는 모습, 즉 전방만으로 좁혀졌다. 옆에 서있는 동료의 모습
같은 것은 사라지고, 이제 록소나 기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쳐죽여야 되는 적의 모습뿐이었다.
"랜스- 앞으로!"
세워들려 있던 랜스가 구령에 따라 앞으로 내뻗어졌다. 다시 철컥거
리는 금속성이 울려퍼지며 랜스의 자루 부분이 기사들의 흉갑 옆구리
에 고정되었다. 그 끝은 예리하게 번득였다. 지휘관은 마지막으로 대
갈했다.
"성 엑시아여, 우리를 가호하소서. 돌격-!"
말들의 발굽소리가 지축을 진동시켰다.
비극이 무제한의 속도로 피어올랐다.
프릴이 펼쳐지며 톱날같은 이빨들이 번득였다. 검이 살아있는 몸으로
부터 피를 퍼내고 도끼가 살아있는 머리로부터 추억을 퍼내었다. 희망
의 사그라듬 위로 쏟아지는 핏방울들은 인간의 것이든 말의 것이든 목
도리도마뱀의 것이든 모두 뜨거웠다. 어떤 악마의 가호를 받은 랜스는
두 마리의 목도리도마뱀을 한꺼번에 꿰뚫기도 했다. 랜스 사용자의 기
량보다는 격돌 순간 양자의 끔찍한 속도 때문일 것이다. 너무 흥분해
버린 목도리도마뱀 하나는 앞쪽의 기사의 머리를 짓밟고 뛰어올라 그
대로 록소나 기사들의 머리 위로 달려가기도 했다. 목도리도마뱀의 앞
발이 자신의 말 머리를 부수는 순간에도 도마뱀의 목을 겨냥하는 록소
나 기사의 눈에는 인류의 역사가 그 장식술로 삼아온 영원한 슬픔이
엿보인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답해다오.
찢어발겨지는 몸들, 유혈의 강, 검날 위로 떨어지는 눈물. 이미 목이
쉬어버린 사내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 대신 불경하고 험상궂은 말
들을 외치며 인간애라는 낡은 믿음의 장사를 치른다. 그러나 신이나
악마가 귀기울이는 흔적은 찾기 어렵고 포식을 기다리며 활공하는 독
수리들만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시끄럽고, 시끄럽고,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다.
구름이 모여들고
전투 후의 벌판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피를 핥던 파리들은 분개한 듯한 날개 소리를 내며 황급히 흩어져갔
다. 풀잎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얼룩졌던 핏자국이 다시 녹아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생명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다. 정신을 잃었던 병사의
볼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회색빛의 빗줄기 사이로 꿈틀 일어서는 병
사의 모습은 유령처럼 보인다. 그러나 빗방울이 걱정스럽게 그 볼을
두드려대어도 이미 죽음을 호흡하고 있던 많은 병사들은 일어날 줄 모
른다.
쏴아…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늦은 비다. 달무리는 분명히 하늘에서 으슴푸레하게 반짝였고 비는
확실히 왔지만, 그것은 부상자들을 괴롭히는 비였을 뿐이었다. 빌레스
국왕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우울한 빗소리와 부상자의 신음소리들이 록소나 국왕 빌레스가 받은
승전 축가였다.
땡- 땡- 땡-! 강렬하게 울려퍼지던 종소리는 잠시 후 종 치는 이의
심정을 담아 종이 깨어져라 쳐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때대대대댕!
노스윈드 선단의 배 위에서는 일항사나 갑판장들이 목이 터져라 고함
을 질러대고 있었다. "귀함-! 귀함하라고! 빨리 달려라, 이 잡것들
아!" 그리고 다림의 부두에서는 각자의 배로 달려가기 위해 인간의 한
계속도를 시험하고 있는 해적들의 모습이 줄을 이었다. "비켜! 다 비
켜!" "비키라고 외치는 너부터 빨리 내 앞에서 그 엉덩이 치워!"
페가서스호의 갑판 위에서 하리야 선장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에 카드장을 든 채 달려오고 있는 해적은 틀
림없이 펍에서 카드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
고 치마를 입으려 애쓰면서 달려오는 해적의 경우엔 그들이 어떤 노역
에 종사하고 있었는지 추리하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어쨌든 오
늘 다림시내에선 바지를 입은 매춘부가 최소한 한 명은 될 것이다. 정
신나간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해적들 사이에서 왠 선원의 등에 업혀 달
려오고 있는 킬리 선장의 만취한 모습을 본 하리야 선장은 아예 고개
를 돌려버렸다.
그들을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노스윈드 선단의 엄한 기율을 일부
러 완화시켜준 것은 다름아닌 하리야 선장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다림
시민들과의 융화 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하리야 선장은 되도록이면 해
적들이 적극적으로(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다림 시민들과 접촉하는 것
을 장려했다. 그래서 노스윈드의 해적들은 최소인원만 배에 남겨두고
다림 시내를 쏘다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작금의 사태는 모조리 하이야
선장의 책임이었다.
자유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하리야 선장은 노성을 지르고 있는 식스
일항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자유호의 일항사!" 하리야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선원들의 귀
함은?"
"물수리호는 완료된 모양이군요."
식스 일항사는 특별히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푸념하듯 말했다. 하리
야 선장이 성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들을 퍼부어대지 않은 것도 그 때
문이다.
"물수리호의 형제들이 항상 배에 붙어있다는 건 나도 잘 아네. 기다
리지 말고 앞바다로 나가게!"
"지금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누구든 좋으니까 키 큰 친구 하나에게 검은 코트를 입
혀서 선교에 세워. 알았나!"
하리야의 의중을 짐작한 식스는 두말없이 몸을 돌렸다. 명령이 노예
장에게 전달되었고 최고전투속력을 요구받은 노들은 동체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물을 때렸다. 곧이어 자유호는 육중한
선체를 뒤틀며 앞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리야 선장의 뒤에서 약간 근심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은 키 드레이번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 것이다. 그
런 장난이 통할까?"
"통할 거요."
"그렇게도 키 드레이번을 믿나? 저들은 오히려 좋아하며 쏠지도 모르
는데, 자유호가 위험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키 드레이번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
만 정확히 말한다면, 나는 키 드레이번의 안목을 믿고 있지요."
"안목?"
"식스는 키 드레이번이 뽑은 일항사요. 그는 최소한 귀함이 완료될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줄 거요. 그리고 당신 말인데-"
하리야는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라미는 조용히 그의 얼굴을 마주보
았다.
"도와준다고 했지요?"
"어떻게 할까?"
"수면 아래에서 발포가 개시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그 이후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라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뱃전 위에 올라섰다. 다음 순간 요
란한 물보라가 솟아올랐고 그 물보라가 가라앉았을 때 하리야는 푸른
물속 저편으로 사라지는 희고 굵은 동체를 언뜻 보았다. 하리야는 다
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선 행동의 우선순위가 면밀하게 매겨
져 있었고 그 순위에서 자유호의 전진, 대사의 배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당연히 강철의 레이디의 점검이다.
"그랜드머더호! 그랜드-머더호! 킬리 선장의 상태는 어떤가?"
"3분만 기다려주십시오! 새신랑만큼이나 말쑥하게 만들어놓겠습니
다!"
그랜드머더호의 요리사가 뭔가 인간이 먹어선 안될 것 같은 시커먼
액체를 큰 잔에 따르며 대답했다. 그의 발치에는 킬리 선장이 불콰해
진 얼굴을 한 채 큰댓자로 누워있었다. 하리야 선장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그랜드머더호의 조타수가 비장한 얼굴로 킬리 선장의 입을 벌
렸다. 하리야는 그랜드머더호의 갑판원들이 그들의 선장에게 먹이려는
것이 뭔지 대충 짐작할 것 같았고, 그래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
렸다. 그 자신도 급히 술에서 깨어나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저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맨정신의 하리야 선장에게 저걸 먹이
려 든다면 코가 으스러질 각오 쯤은 해둬야할 것이다… 잠시 후 킬리
선장의 애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하리야는 킬리를 위해 짧게 기도한 다음 그랜드파더호를 돌아보았다.
"돌탄 선장!"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쏠까?"
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떠있는
10 개의 마스트를 보던 하리야는 거리를 어림해보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맙소사, 이 거리에서도 가능한가?"
"카능해. 약칸 모차라킨 하 치만, 파람이 토와추커튼."
"아, 쏘지는 말게. 일단 사격 준비 갖추고 기다려. 강철의 레이디 하
나는 쓸 수 있단 말이지… 제발 빨리빨리 좀 승선해라!"
그 동안 앞바다로 나간 식스는 하리야 선장의 예견대로 시간을 끄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의 깊게 사정거리 바깥에서 자유호를 정선시킨 식
스는 갑판원들에게 석궁을 준비시키는 한편 포수들에게도 발포준비를
시켰다. 하지만 대포를 쏘지는 않은 채 식스는 깃발 신호를 보내기 시
작했다.
'키 드레이번이 정체불명의 선박들에 고한다. 그 자리에서 멈춰라.
더 이상 접근하면 공격하겠다.'
일견 무미건조해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란하다고까
지 말해도 좋을 엄포였다. 식스 같은 노련한 뱃사람이 상대방의 정체
를 모를 리는 없었지만 그는 일부러 '정체불명의 선박들'이라는 신호
를 선택했다. 과연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식스의 눈에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정체가 친절히 소개되었다.
'우리는 사트로니아 함대다.'
흘끔 봐도 짐작할 수 있었던 거다, 이 친구들아. 사트로니아 함대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식스는 짓궂게 웃으며 깃발 신
호의 나머지를 기다렸다.
'바스톨 엔도 장군이 키 드레이번에게 말한다.'
식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는 그 고
명한 무장이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식
스는 그들이 자신처럼 바스톨 엔도 장군의 이름을 빌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 동안에도 깃발 신호는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목적은 전투가 아니다. 보트를 보낼 테니 공격하지마라.'
식스는 잠시 기다렸다. 과연 10척의 롱 갤리어스들은 제자리에 정선
했고 그 배들 사이에서 조그만 보트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식스는 재빨리 뒤쪽을 향해 외쳤다. "보오드! 안으로 들어
가!"
키 드레이번과 비슷한 신장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은 외투를 걸치고
으스대고 있던 갑판원 보오드는 황급히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식스는 고물 쪽으로 달려간 다음 부두쪽을 향해 손짓 신호를 보내었
다. 다행히도 망원경으로 식스를 보고 있던 트로포스가 그 신호를 보
았다. 트로포스는 페가서스호를 향해 그 신호를 외쳐주었고 하리야는
황당함을 금치못했다.
"바스톨 엔도 장군? 어, 그렇다면 팔라레온 해방군인가? 저 자들이
여기엔 왜 온 거지?"
사트로니아의 보트가 자유호에 닿았다. 식스는 일단 몇 명의 갑판원
들에게 검을 뽑아들게 한 다음 올라오는 사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분명히 사트로니아 해군으로 보이는 수병들 몇 명과 선장 하
나가 약간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갑판에 올라왔다. 무리도 아니다.
그들은 자유호에 올라온 것이다. 선장은 헛기침을 한번 한 다음 누가
지휘자냐는 듯이 둘러보았고 식스는 그제서야 앞으로 나섰다. 선장은
식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나는 사트로니아 해군의 엔도호 선장 파이크 롱버드 벡스요."
"자유호의 일등 항해사요. 선장님께서 직접 오셨다고?"
"그렇소. 당신이 일항사라면, 키 드레이번은 어디 있소?"
"당신들이 암살자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장님을 뵙게 해드리겠
소?"
이 말을 위해 식스는 일부러 몸수색을 하지 않았다. 파이크 선장인
피식 웃었다.
"헛. 선장을 어떻게 암살자로 쓰겠소?"
"내가 볼 수 있는 건 선장 복장을 하고 있는 한 명의 사트로니아인일
뿐이오."
파이크 선장은 기어코 불쾌한 얼굴이 되었다.
"키 드레이번이라는 자, 알고보니 겁쟁이군."
"말을 삼가시오."
"그런 말이 듣기 싫으면 낯짝을 내놓으면 될 거 아닌가!"
"그 말투는 마음에 들지 않소."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건가, 일항사?"
"내가 알고 있는 말투 교정법은 불행히도 모두 폭력적인 것들 뿐입니
다."
"뭣이 어째?"
식스로서는 너무도 기쁘게도, 파이크 선장은 식스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며 계속해서 오만불손한 언사를 내뱉었다. 자유호의 해적들의 얼
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트로니아 수병들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사트로니아 수병들은 그들의 선장의 허리
라도 찌르고 싶었지만 식스는 그들이 나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파이
크 선장에게 말을 시키며 부두 쪽을 훔쳐보았다.
마침내 부두 쪽에서 노스윈드 함대의 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
으로 환호를 질렀지만, 식스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리며 말
했다.
"선장님은 이 배에 안 계시오."
"뭐라고?"
"안 계시다고 했소. 중대한 볼일이 있으셔서 다림 시내에 계시거든.
전할 말이 있으면 하시지요. 내가 전할 테니까."
"그럼 진작 말해야 했을 것 아닌가! 제길, 떠날 테니 키 드레이번을
불러다놓도록! 다시 오겠다!"
파이크 선장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식스는 재빨리 눈짓을 보내었고
그 순간 지금까지 분을 참느라 반쯤 돌아버릴 지경이었던 사내가 표범
처럼 움직였다.
파이크 선장은 시야를 가로막는 넓은 가슴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올린 파이크 선장은 꽤나 높은 곳에 있는 아피르족 전사
의 얼굴을 발견하곤 허옇게 질려버렸다. 그에겐 안된 일이었지만, 그
아피르족 전사는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너무나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식스는 느릿하게 말했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 군을 소개하겠소. 나는 칸나 군이 그 말하기
곤란한 습관을 버렸다고 믿지만, 때때로 어린 시절의 습관은 꽤 오랫
동안 남는 법이라지요?"
칸나는 입맛을 다시며 씨익 웃었다. 사트로니아 수병들은 자신도 모
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고 파이크 선장은 쥐어짜듯이 외쳤다.
"무, 무슨 짓이냐!"
"왔다가 그냥 가시면 섭섭하잖소. 왜 키 선장님께 직접 말해야 된다
는 거지요? 나한테 말해도 됩니다."
그로부터 2분 후, 자유호를 향해 최고속도로 나아가던 페가서스호 위
에서 하리야 선장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손짓을 보게 되었다.
"여행하기엔 좋은 날씨입니다."
라이온의 말에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세실은 라이온이 하늘의 날씨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무슨 말이야?"
"온통 전쟁통이니 제국의 공적 1호가 옆을 지나가도 신경쓸 수 없는
날씨란 말입니다. 키 선장님이 육지를 여행해야 된다면 이보다 좋은
날씨도 없겠군요."
세실은 이해했다. 그리곤 다시 우울한 표정으로 앞쪽의 언덕을 바라
보았다.
언덕 위에는 스무개 남짓되는 기둥이 서있었다. 세실의 기나긴 연대
기에서 저것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된 페이지는 제법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가가지 않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세실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도 그것이 무슨 기둥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
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앞쪽에서 언덕을 바라보던 키는 고삐를 잡아챘다. 말은 불
평하듯 투레질을 한번 한 다음 언덕 쪽을 향해 걸어갔다. 언덕 아래를
지나치면서 키와 세실은 언덕 위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온은
그것이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것처럼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라이온은 언덕 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살아있어요!"
라이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멈춰세웠다. 세실은 어느새 언덕 위
로 달리고 있었고 라이온은 벌써 안장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시
체를 파먹고 있던 까마귀들이 라이온을 향해 깍깍거렸지만 라이온은
팔을 휘둘러 까마귀를 쫓아버렸다. 라이온이 나이프를 꺼내었을 때 언
덕 아래쪽으로부터 낮고 엄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려는 건가?"
"풀어줘야죠!"
키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라이온 역시 알고 있을 테고, 알면서 하
는 행동이니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키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언덕 위
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 동안 라이온은 나이프를 휘둘러 조금 전 기침
을 했던 여인을 기둥에서 풀어내었다. 밧줄에서 풀리자마자 여인은 라
이온의 품에 힘없이 쓰러졌다.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여인 역시 온 몸에 화살이 꽂혀있었다. 살
아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 같다. 라이온은 그녀를 똑바로
눕히고선 화살을 뽑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지금 화살
을 뽑으면 상처가 덧날 것이라고 판단한 라이온은 일단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안장에서 뛰어내린 세실이 황급히 그녀의 눈꺼풀을 뒤집
어보고 수통의 물을 입 안에 흘려넣을 때, 그제서야 도착한 키가 느릿
하게 말했다.
"내 신발끈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세실과 라이온 모두 흠칫하며 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아무 대답
이 없자 키는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가 저편으
로 걸어갔을 때에야 세실은 작게 투덜거렸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눈앞에서 사람이 이
지경이 되어있는 걸 어떻게 못본 체하고 지나간단 말이야?"
라이온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 세실. 바쁜게 문제가 아닙니다. 다벨군의 추적을 당하게 됩니
다. 아니면 다른 팔라레온인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거나."
세실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라이온을 보고는 다시 여인을 내려다보았
다. 기둥에 매달린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여인은 틀림없이 다벨군
에 의해 매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벨군은 기둥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면 눈을 뒤집고서 그녀를 풀어준 자를 찾아다닐 것이다.
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그녀의 등 뒤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
려왔다.
고개를 돌린 세실은 소름이 쫙 돋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키 드레이번이 어깨에 시체 하나를 매고 걸어오고 있었다. 라이온과
세실이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키는 두 사람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여인이 매달려 있던 기둥에 시체를 묶었다. 시체를 다 묶은 키는
어깨를 털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라이온과 세실은 그제서야 키가
맨 끝에 있는 기둥으로부터 시체를 풀어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키는 자신의 말로 돌아간 다음 밧줄을 꺼내었다. 말 세 마리와 비어
있는 기둥을 연결한 다음, 키는 그 때까지 언덕 위에 있던 두 사람을
향해 한심스럽다는 듯이 으르릉거렸다.
"거기서 살 건가?"
라이온은 황급히 여인을 안아든 다음 언덕을 달음박질쳤다. 라이온과
세실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자 키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이랴아!"
세실도 황급히 자신의 말과 라이온의 말을 독려했다. 밧줄이 팽팽해
지고나서 얼마 후, 기둥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뽑혀나왔다. 기둥이 언
덕 아래로 굴러내려오자 키는 말의 목을 쓰다듬어준 다음 라이온에게
다가갔다. 키는 손을 내밀었고,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여인을 건네었다. 여인을 안아든 키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언덕 위로 가서 기둥 자국을 지워라. 라이온."
"아… 예! 선장님!"
라이온은 부리나케 언덕 위로 뛰어갔다. 키는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
고는 인상을 찌푸린 다음 거칠게 화살을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바라보
고 있던 세실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인의 몸에서 튀어나온 화살을
마치 가지를 쳐내듯 대충 부러뜨린 키는 세실을 향해 말했다.
"말 위에 올라가."
세실은 황급히 말 위로 올라갔다. 라이온은 그녀의 무릎 앞에 여인을
올려다주며 말했다.
"잡아."
"많이 흔들릴 텐데."
"흔들리지 않게 해. 잡아."
세실이 두 손 들었다는 표정으로 여인의 허리를 붙잡자 키는 자신의
말로 돌아가 안장 위에 올랐다. 키는 손을 뻗어 라이온의 말 율리아나
의 고삐를 쥐며 말했다.
"가자."
"자, 잠깐. 라이온은?"
"벌이야. 가자."
키는 자신의 말과 라이온의 말을 출발시켰다. 세실은 황당하다는 표
정으로 말을 출발시켰다. 세 마리의 말 뒤로 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
며 끌려가자 언덕 위에서 땅을 다지고 있던 라이온은 울 것 같은 얼굴
이 되었다.
세실은 말을 달리며 한 손으론 여인의 허리를 단단히 쥔 채 탄복했다
는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하네? 기둥 자체를 뽑아버리면 하나가 없어진 것은 표시가 안난
단 말이지?"
키는 아무 대답 없이 앞쪽만 바라보았다. 세실은 빙긋 웃었다.
"이보라구, 다벨군이 쫓아올 거란 생각은 못했단 말이야. 그런 상황
에서도 머리 굴리는 작자가 이상한 거 아냐? 뭐, 어쨌든 고마워. 음.
이 여자도 고마워할 거야. …이봐. 조용히 있으면 무섭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키는 세실의 말을 받아들여 입을 열었다. "계속 떠들면 벌 받는 사람
이 하나 늘 거다."
세실은 찔끔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기둥 자국을 다 지운 라이
온은 이제 기둥이 일으키는 먼지를 다 뒤집어쓰며 달려오고 있었다.
으음. 이 나이에 저 꼴을 당하는 건 아무래도 볼썽사나운 일이겠군.
기둥을 끌면서 가는 것이라 말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그래
서 라이온은 키의 눈치를 보다가 율리아나에 살짝 올라탔다. 키는 뒤
를 돌아보지 않았다. 반시간 쯤 달려간 후에 키는 손을 들어올려 일행
을 서게 한 다음 기둥을 풀어 수풀 속에 차넣었다. 기둥을 처리한 키
는 다시 달려갔다.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외딴 곳에 있는 반쯤 불탄 농가를 발견한 키
는 일행을 서게 했다. 그리고 언덕을 떠난 이후로 처음 입을 열었다.
"라이온. 조사해봐."
라이온은 찍소리도 내지 않고 집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라이온은
창가를 통해 밝은 얼굴로 손을 저었고 키는 세실에게서 여자를 받아든
다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를 침대에 눕힌 키는 세실에게 그녀를
간호하게 한 다음 말들을 끌고 헛간으로 걸어갔다.
헛간에 말을 숨겨놓은 키가 집 안으로 돌아오자 라이온과 세실이 여
인을 간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키는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세실은 여자의 이마를 닦아주며 말했다.
"이 아주머니 귀족이었을 거야. 손발 좀 보라구."
"어떤가."
"화살을 뽑아야겠는데…"
키는 의자 하나를 찾아낸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아서는 구경해줄 테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것처럼 세실과 라이온이 하는 양을 바라보기 시작
했다. 라이온으로 하여금 나이프를 뽑아들게 한 세실은 나이프를 향해
짧게 중얼거린 다음 손가락을 빠르게 튕겼다. 잠시 후 나이프가 새빨
갛게 달구어졌고 라이온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여자에게 손수건을 물리고나서, 세실은 여자의 상체를 지긋이 누르며
라이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심호흡을 한번 한 라이온은 곧 여인의 몸
에 나이프를 꽂아넣었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하리야는 약간 주춤했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자연스럽게 감추기 위
해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유호의 갑판은 회담을 위해 비워져
있었다. 사트로니아의 수병들이 10여명 가량 올라와있었지만 솔직히
하리야는 그 수병들보다는 그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바스톨 장군의 모
습에서 더 위압감을 느꼈다. 칸나가 자기 옆에 서있었다면 좋겠다는,
그보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키 드레이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하리야는 다시 책상 너머로 바스톨 장군을 바라
보았다.
바스톨 장군의 안색은 태연했다. 하리야 역시 태연했으므로 둘의 모
습만 놓고 본다면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둘은 자
유호의 갑판에 앉아있었으며, 사트로니아 함정들과 노스윈드 선단의
포수장들은 모두 그들 사이에 떠있는 자유호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합
계 500문 가까운 포문이 겨냥하고 있는 살벌한 회담자리였지만, 하리
야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철탑으로 갔었소. 하리야 헌처크 선장."
"그냥 하리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엔도 장군님."
"그럼 나 또한 바스톨이라고 부르시구려."
하리야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를 난처하게 하시는군요. 저 같은 해적놈이 당신과 같은 고명한
무인을 그렇게 부른다면 세인들이 분수도 모르는 자라고 저를 비웃을
겁니다."
비위를 맞춰줘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바스톨 장군은 별로 즐거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해적에 대해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습에서 많이 벗
어나는군요. 하리야 선장. - 이렇게 부르면 되겠소? 그럼 이야기나 계
속합시다. 나는 철탑으로 갔었소. 변론가 린타는 그의 기록 속에 철탑
의 위치를 남겨놓았지. 그래서 나는 철탑에 도달했지만, 그 안에서 대
사를 찾아내지는 못했소."
"잠깐-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철탑 내부로 들어가셨다고요? 어떻
게?"
"우리에겐 린타가 남겨준 구슬이 있었소. 대사가 그에게 선물했던 것
이지. 그것을 이용하여 철탑에 들어갈 수 있었소. 하지만 대사의 모습
은 발견할 수 없었소. 그녀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이상한 연 하나를 찾아내었소."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소이다. '다림으로 오라. 키 드레이번.'
당황스러운 내용이었지만 나는 일단 그 내용을 믿기로 했소.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고."
"알겠습니다. 그 연은 키 선장님이 대사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
데… 왜 대사를 찾으시려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바스톨 장군은 잠시 하리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바스톨 장
군은 '그것은 대사에게 말할 일'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리야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좋소. 내가 아는 바로, 철탑은 오왕자의 검을 지키는 감시탑이오."
"감시탑이라고 하셨습니까?"
"오왕자의 검에 대해서는 아는 모양이구료."
"약간은. 말, 철, 밀, 다이아몬드. 오왕자의 땅에 있는 네 개의 주인
없는 검입니다. 다이아몬드와 밀은 일종의 전략 단위이고 말과 철은
전술 단위겠지요. 개개로 나뉘어있을 땐 위험이 되지 않지만 하나의
주인에게로 모이면…"
"왕을 태어나게 할 수 있소."
"반왕이지요."
하리야는 부드럽게 노무인의 말을 바로잡았다.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반왕이오. 그리고 대사는 바로 철탑이라는 감시탑에서 그
네 개의 검이 하나로 모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소."
바스톨 장군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하리야는 철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울리는 이름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철과 탑, 견고함과 감
시, 견고한 감시. 바스톨 장군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네 개의 검을 가지고 싶다면 대사를 물리쳐야
하오. 얄궂게도 거꾸로 되어버린 거요. 대사가 그 네 개의 검이 하나
로 모이는 것을 막기 때문에, 거꾸로 대사를 쓰러트리는 검이 바로 다
섯번째의 검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네 개의 검의 소유자가 되게 되는
거지요. 그것이 다섯번째의 검, 오왕자의 검이오. 음? 왜 그러시오?"
하리야는 자신이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뱃속이 좀 안좋
았던 거라고 설명하려 애썼다. 바스톨 장군은 하리야의 설명을 받아들
이는 듯했다. 하지만 하리야는 마음 속으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대사를 쓰러트린 검?'
"그리고 지금, 한 젊은이가 한 일에 대해 세인들이 놀라고 걱정스러
워하고 있소."
"휘리 노이에스."
"그렇소. 그래서 나는 그가 다섯번째의 검인지를 대사에게 묻고 싶
소."
"그 답은 저도 할 수 있겠군요. 휘리는 다섯번째의 검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리야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입을 단속했다. 대사를 쓰러트린 건
키 드레이번이라고 말하는 대신, 하리야는 약간 돌려서 말했다.
"조금 전에 장군께서는 대사를 쓰러트린 검이 다섯번째의 검이 될 것
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대사는 살아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쓰
러트리지 않았으니, 다섯번째의 검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은 것 아니
겠습니까?"
바스톨 엔도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대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좀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소. 하지만 그녀가 철탑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거
요?"
"무슨 말씀인지?"
바스톨 장군은 대답 대신 몸을 조금 돌렸다. 그를 따라왔던 호위병들
중 하나가 탁자 위에 조그만 상자를 내려놓았다. 하리야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바스톨 장군은 상자를 열어 그 속에서 구
슬을 꺼내어보였다.
하리야는 약간 실망했다. 구슬은 마녀들이 사용하는 수정구와 별 다
를 바가 없었다. 아니, 어느 마녀의 천막에 놓여있으면 그대로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스톨 장군은 그 구슬을 하리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어떻소?"
"수정구입니까?"
"아니, 아까 말했던 구슬이오. 대사가 린타에게 선물했다는 것. 수정
구라. 그러고보니 그렇게도 보이는군. 하지만 보통의 수정구와는 달리
그건 원래 속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소."
"빛이라고요?"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보시는 바와 같이 아무런 빛이 없지. 대사가
린타에게 그것을 주며 말하길, 만일 자신이 더이상 철탑의 주인 노릇
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구슬이 흐려질 거라 말했소. 그리고 우리가
그 빛이 흐려진 것을 발견하고나서 얼마 후 휘리 노이에스의 활동이
시작되었소."
"아… 그렇습니까."
하리야는 구슬을 한번 더 살펴본 다음 조심스럽게 상자 안에 집어넣
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아까부터 많은 참을성 발휘해주신 것 압니다만, 한번만 더 이 무례
한 해적의 처사를 참아주시겠습니까?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스톨 장군은 말해보라는 듯이 턱을 약간 기울인 채 하리야를 바라
보았다.
"휘리 노이에스가 다섯번째의 검이라고 대사가 확언해준다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막을 것이오."
"막는다고요?"
"그의 정복전쟁을 분쇄하고, 그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천사가 선물
했다는 그 목소리로 노래나 부르게 할 작정이오. 그리고 당신에겐 우
리에게 협력하는 즐거움을 드리겠소."
바스톨 장군은 협박을 하진 않았다. 말을 알아듣는 사람에겐 협박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리야는 말을 알아들었기에 속으로 투
덜거렸다.
"예. 아까부터 대충 그런 의도로 말씀하시던 것 같군요. 왜지요? 사
트로니아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 텐데요. 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
곳에서 휘리 노이에스의 정복 전쟁을 막겠다고 나서는 거지요? 약간
조야하게 말해본다면 마치 남 잘되는 꼴 못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
서는 심술쟁이처럼도 보이는군요. 그렇잖으면 사트로니아군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나선 의용군이라고 주장하실 겁니까?"
바스톨 장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하리야 선장. 우리가 너무도 고결해서 지상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죄악을 좌시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주장하진 않겠소. 우리 또
한 우리의 이해 관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일 뿐이오."
"어떤 이해가? 지금 휘리 노이에스의 정복 전쟁은 사트로니아와는 아
무런 관계가 없고-"
"사트로니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게 될 무렵에는, 휘리 노이에스의
신발은 너무 커져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예?"
"아직은 네 개의 검이 하나로 모이진 않았소. 휘리 노이에스가 가진
검은 현재 두 개요. 다벨의 철과 팔라레온의 밀. 다케온과 록소나가
버틸 거라 생각하시오? 천만에. 휘리는 합리성에 기반한 정확한 순서
를 지키고 있어요. 계획표 짜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아닌가 싶기도 하
군. 어쨌든 그는 그런 정확한 순서만이 가져올 수 있는 확실한 결과
또한 얻게 되겠지. 그 때가 되면, 휘리 노이에스는 도저히 넘볼 수 없
는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오. 하이낙스가 쥬르노 산을 뭉개버린 바로
그 순간처럼."
하리야는 하이낙스라는 이름에 주춤했다.
"그렇게까지 염려하십니까?"
"하이낙스가 쥬르노 산을 없애버리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선장과
같은 말을 했소. 그 마법사에 대해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고. 그리
고 그 다음엔?"
"염려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지요."
하리야는 간단히 응답하며 자신 속으로 잠깐 빠져들었다. 이것이 단
지 자라보고 놀란 작자의 솥뚜껑 환시증일까? 한 때 소제국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사트로니아의 현재 모습은 그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기 어려
울 정도이다. 제국 최고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이낙스를 무
시했기에 호된 꼴을 당했던 사트로니아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들의 이
런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두번 다시는 그
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겠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더 장군님을 귀찮게 해드
려서는 안되겠군요. 대사를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부탁
좀 드립시다."
바스톨 장군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비추고 싶은 것을 참으며
참을성있게 질문했다.
"또 뭐요?"
"아, 별 거 아닙니다. 장군님의 부하들에게 대포를 쏘지 말라고 좀
전해주십시오. 대사는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있거든요."
바스톨 장군은 사트로니아 해군이 그렇게까지 자기 통제를 모르는 군
대는 아니라고 딱 잘라말했다. 하지만 하리야 선장은 계속 고집을 부
렸다. "원하신다면 저희들 쪽의 선단에도 같은 신호를 보내셔도 무방
합니다. 조금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나 발포할 필요는 없다는 내
용이면 충분합니다." 바스톨 장군은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하
리야의 요구에 따랐다.
따라서 대사가 수면 아래로부터 솟구쳤을 때, 사트로니아 함대의 배
한 척이 엉겁결에 발포해버린 사건에 대해 바스톨 장군은 두고두고 창
피스러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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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모으미 벚꽃… 윽. 평소 말하던 버릇이. 카드캡터 사쿠라 실사판
오프닝을 봤습니다. (통신망마다 있다지요, 아마?) 다 본 순간 인간이
라는 종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 속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거
촬영하신 일본 청년분들,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비가 오는군요. 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0. 새장 속의 왕…3.
"이 자식, 악취미야."
세실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헛간 외벽을 쳐다보았다. 헛간 벽에는
분필로 커다랗게 '정의의 심판을 받아랏!'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친
절하게도 그 아래쪽엔 '서 슈마허'라는 서명까지 되어 있었다. 세실은
푸념처럼 말했다.
"카밀카르 기사단은 서 슈마허의 용맹무비한 행동을 그들의 전승록에
기록할까?"
"아무리 뻔뻔한 기록관이라도 말을 훔치고 벽에 악취미적인 잡담을
남긴 것을 가지고 용맹무비하다고 기록하긴 어려울 겁니다. 낭만주의
자는 못말린다니까."
"흐음. 그 말은 자기반성으로 여기겠어."
"…나도 후회합니다. 그 자식을 바다에 던져버리지 않고 곱게 돌려보
내준 거. 젠장."
"저 서명의 의도는 뭘까?"
"별 거 아닐 걸요. 자기가 그랬다는 거 알리지 않고 못 배기겠던 모
양이지요. 낭만주의자라니까요."
라이온은 율리아나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젯밤 야음을 틈타
은밀히 헛간에 침투하여 키 일행의 말들의 고삐를 풀어내어 그들을 모
조리 쫓아버린 서 슈마허로서는 복장이 뒤집힐 일이겠지만, 말들은 아
침이 되자 모두 농가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세실과 라이온은 태
평한 심정으로 헛간 벽의 낙서를 보며 시시덕거리고 있을 수 있었다.
"그 친구 그런 끼가 있긴 해도 똑똑한 젊은이로 보이던데. 숨은 의도
가 있을지도 몰라."
"난 슈마허의 숨은 의도보단 숨겨놓은 활재주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
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요렇게 되면 어쩌죠?"
라이온은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며 혀를 빼물어보였다. 세
실은 라이온의 행동에 섬뜩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르
스름한 안개가 끼여있는 농가의 아침은 고요했고 당장은 화살 맞을 일
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농가의 헛간에서 수탈을 면한 건초와
보리 푸대를 찾아낸 라이온은 말구유에 그것을 쏟아 붓고는 몸을 돌렸
다.
"어쨌든 빨리 떨쳐내던가 도망치던가 해야겠군요. 슈마허 혼자라면,
음, 우릴 덮치지 않고 말만 풀어버렸으니 혼자일 겁니다. 그 녀석 혼
자라면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녀석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인다면 문제입니다. 키 선장님의 현상금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쉬울 걸요."
"그렇겠군. 그 친구가 다벨군이라도 끌어들이면 진짜 골치아프겠어."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이 집쪽으로 걸어올 때였다. 키 드레이번이 문
을 열고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키는 잠시 두 사람을 흘끔 바라보고는
그대로 걸어왔다. 라이온이 밤 동안 슈마허가 치러야 했던 전쟁에 대
해 짧고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말을 가다듬고 있을 때 키가 먼
저 말했다.
"고맙다."
라이온은 - 세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 흠칫하며 뒤로 물러
났다. 경계의 빛으로 얼굴 전부를 물들인 채 라이온은 조심스럽게 대
답했다.
"예?"
"고맙다고 했다."
"죽고 싶지 않아요!"
"…식전부터 그 따위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꼭 해야 되나, 빌어먹
을."
"그 동안 고마웠다는 인사 아니었습니까?"
"아니다. 피나드 부인이 깨어났다."
세실과 라이온은 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 부인의 이름이 피나드 부인이었습니까?"
"그래. 그리고 그녀는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의 소재를 가르쳐주었
다. …하루 정도는 잘난 체하는 거 봐주겠다."
키의 조처는 충분히 빠른 것이었지만 이미 라이온의 콧대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키는 속이 끓는 것을 참는다는 표정으
로 겸손하게 라이온을 바라보았고 세실은 배를 움켜쥐고 소리없이 웃
었다.
"다벨군이 그녀를 매달기 전 율리아나와 오스발, 그리고 바탈리언 남
작이 그녀의 집에 들렀던 모양이다. 그들은 라트랑으로 간다고 했던
모양이군."
라이온에게 설명하던 키의 시선이 갑자기 헛간 쪽으로 향했다. 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 분필 찾아라."
"어, 예?"
"우리도 라트랑으로 떠난다."
그날 한낮 무렵, 여름의 하늘을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비명에 질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새는 비명이 들려온 땅
을 내려다보았고, 외딴 농가의 헛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고
있는 한 젊은 사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래로 내려간 참새는
헛간 벽에 이상한 무늬가 있는 것은 보았지만 그 무늬와 사내의 절규
를 연결짓지는 못했다. 참새가 본 무늬는 달필의 페이노로서 이런 내
용이었다. '그대가 기사라면 상처 입은 과부를 모른 체하진 않겠지.
피나드 부인을 잘 부탁한다. - 라이온. PS : 내 말 율리아나가 자네에
게 안부 전해달라는군.'
"라이온, 이 개에에에자식아!"
남으로 다벨에서부터 북으로는 그리치까지 뻗은 미리온 산맥. 제국의
울타리라 할 수 있는 미리온 산맥은 페인 제국과 그 주위의 군소국가
들 사이에서 지리적 경계 역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 경계의 역할도 수
행하고 있었다. 머나먼 변방의 땅인 자마쉬나 레우스, 바다 건너의 카
밀카르가 말하는 '제국'과 라트랑, 바이스라, 혹은 록소나 등이 말하
는 '제국'이 비슷한 뉘앙스를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마쉬가 제
국으로부터 수평적 거리감을 느낀다면 록소나 등의 나라는 수직적 높
이에 의해 역시 거리감을 가지게 된다. 남부 국가들 사이에 페인 제국
은, 그 꼭대기에 만년설이 덮인 미리온 산맥 너머 아득히 머나먼 어떤
땅이다. 어쩌면 천국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름답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득하다는 의미에서.
하지만 미리온 산맥에도 인간이 넘을 수 있는 길은 여럿 있다. 그런
험로를 통해 제국의 손길은 주위의 국가들에 뻗는다. 정치가 전달되고
문화가 오고가며 경제가 소통된다. 물론 그런 교통로 중 상당수는 야
만스러운 고산족, 위험한 괴물들의 땅을 통과하기도 한다. - 물론 괴
물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괴물은 역시 추위와 굶주림이라는 괴물일
것이다. - 따라서 미리온 산맥을 넘는 이들은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패
스파인더를 고용하거나, 그렇잖으면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다.
데스필드의 경쾌하기까지 한 댓구에 파킨슨 신부는 신음을 흘리며 다
시 통나무 같은 다리를 끌어당겼다.
고산 지대의 메마르고 거친 돌 위로 세 사람의 발이 힘겹게 움직였
다. 미리온 산맥이 높긴 하지만 머리 바로 위로 솟아오른 여름의 태양
은 도스 계곡에 폭염을 퍼붓고 있었다. 주위로 만년설이 보이는 이 높
은 땅에서 더위를 느낀다는 것이 신부에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온몸에서 땀이 흘러나와 옷이 다 젖을 정도였다.
파킨슨 신부는 마흔 세 번째로 이마를 닦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
다.
"오늘은 더 가까워지겠죠?"
주어가 생략된 말이지만 그의 곁을 걷고 있던 핸솔 추기경은 신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겠지요."
"글쎄요. 뭐랄까요. 무섭다고 해야 되나."
"부지런히 걸읍시다. 이 지긋지긋한 계곡도 빨리 지나갈 수 있을 테
고, 지쳐서 푹 잠들면 노래소리도 안 듣게 되겠지요."
"그런데, 각하. 그게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 생각되십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핸솔 추기경은 데스필드가 '오늘은 저기까지'라고
말했던 능선에 도달할 때까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지
칠 줄 모르던 학자의 학구열도 찜통 같은 도스 계곡에선 깡그리 증발
된 듯하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모르겠소. 파킨슨 신부."
데스필드는 산양처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산양이라도 저런
모습으로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짐과 두 성직자의 짐 - 이젠
그것은 원래부터 데스필드의 짐이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 까지
둘러매고 성직자들이 걸어올 길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길을 선
도하는 데스필드의 모습은 가히 초인적이었다.
파킨슨 신부는 계속 무슨 말인가 꺼내려 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저
앞쪽을 쉬지않고 걸어가고 있었고 핸솔 추기경은 기어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파킨슨 신부는 계속 말하고 싶었다. "신학교 초년
생이었던 시절이 생각나는군요. 도반들과 함께 저는 고행이랍시고…"
평소 때의 핸솔 추기경이라면 과거로 돌아가는 식의 이런 화법은 이야
기를 간절히 하고 싶은 증거임을 쉽게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숨쉬기조차 버거웠고, 그래서 매몰찬 무시로 파킨슨 신부의
입을 막았다.
햇살은 바위를 두쪽낼듯 쏟아졌다. 달궈질대로 달궈진 바위는 펑펑거
리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녹아내릴 것만 같다. 속
눈썹에 맺히는 빛살에 눈이 멀 것 같은 폭염 속에 사방은 고요했다.
이 고지대에서는 벌레소리 하나 들을 수 없었다.
걷는 것은 두 다리지만 산을 오를 때는 온몸이 아픈 법이다. 파킨슨
신부는 온몸에서 전달되어오는 악랄하게까지 느껴지는 고통을 잊고자
자신도 모르게 기도했다.
부디 저를 궁휼히 여기시와 제 앞에 나타나주소서. 저는 너무 고통스
럽…
파킨슨 신부는 흠칫하며 기도를 멈췄다. 이런 맙소사! 신부는 자신을
저주하며 성전의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핸솔 추기경은 흘끔 그
모습을 돌아보고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둠으로써 어둠을 가리시고, 빛으로 빛을 드러내시는 내 주여. 무
위(無爲)로 창세하신 세상에 무언(無言)으로 지혜를 설파하시는 내 주
여. 나의 원수 중의 원수이신 주여. 나의 고난에 고난을 선사하시는
주여.'
어둠으로 어둠을, 빛으로 빛을. 이 구절은 신이 그 자체로 규칙의 제
일원리임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따라서 창조자는 창조'행위'를 하지
않는다. 행위는 원인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원인보다 뒤에 오
는 단계이다. 돌을 던지는 것은 돌이 있기 때문이고 하품을 하는 것은
피곤하기 때문이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이 있기 때문이
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없는 행위는
하나도 없다. 바꿔 말한다면, 모든 상황엔 그에 앞서는 제반요건이라
는 것이 따른다. 그러나 규칙의 제일원리인 창조자는 모든 종류의 행
위에 앞선다. 따라서 '무위로써 창세하는 것'이다.
무언으로 지혜를. 신은 보편개념보다 앞서는 존재다. 그가 바로 보편
개념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지혜를 말할 필요가 없다. 가
장 간단한 지혜, 예를 들어 1+1이 2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절대로
틀릴 리가 없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1+1이 2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런 결과가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것뿐이다.
만약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모한 존재라면 우
리의 이런 믿음(지혜)을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로 치부할 것이다. 모든
지혜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경험을 취합하여 과거에 그랬으니 미래에
도 그럴 것이라 믿는 '믿음'일 뿐이다. - 1+1이 항상 2였으니 미래에
도 그럴 거라 믿을 뿐이다. - 따라서 세계 자체의 원인인 창조자는 세
계보다 하위 개념인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신이 시도 때도 없이 네거
리 교차로에 나타나 나를 믿으라고 고함지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
문이다. 신이 신도들에게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말도 건네
지 않는 것은, 신도들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짜 웃
기는, 그야말로 우주론적으로 웃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혜로는 세계
조차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세계의 원인인 신을 어떻게 설명하겠는
가.
기억의 깊고 어두운 창고에서 신학교에서 배웠던 모든 지식을 악착같
이 끌어내며 파킨슨 신부는 이를 사려물었다. 하지만 탐욕스럽게 공기
를 찾아 헤매는 파킨슨 신부의 폐는 그 주인의 존엄성을 어딘가로 걷
어차버린 채 그 주인을 한없이 헐떡거리게 만들었다. 땀이 솟아났다가
증발하기를 수십회, 팔다리에는 허연 소금기가 잔뜩 묻어있다. 파킨슨
신부의 몽롱한 의식 속에서 바라보는 도스 계곡은 꿈 속의 정경 같았
다. 일종의 망아 상태 속에서, 파킨슨 신부는 다시 신을 부르고 말았
다.
펠라론의 명령을 거부한 제 행위는 역시 배교였습니까?
이건 그 벌이나이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그 암살의 주모자인 핸솔 추기경 역시 그의
옆에서 똑같이 헐떡이고 있었다… 아니다. 확신할 수 없다. 핸솔 추기
경은 펠라론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
다… 답을 알려는 것은 부질없는 소망이다. 신은 '원수 중의 원수이며
고난에 고난을 선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귀 속으로 들려오는 이명은 집중된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고요한 계곡. 저 위쪽에서 들려오는 주르륵거리는 모래소리. 데스필
드 또한 무게를 가진 현실의 존재임을 나타내어주는 것은 간혹 들려오
는 그런 잡음들 뿐이었다. 데스필드는 떠다니듯 움직이고 있었고 그
모든 동작은 비현실적이었다. 가벼운 동작들. 세 사람 몫의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동작들이다.
지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걸어가던 데스필드가
샘물을 발견하고 성직자들을 멈춰세운 건 제 11 시 무렵이었다.
"해가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더 가봐야 이보다 좋은 잠자리는 없겠
군. 멈춥시다."
"은총이로다!" 파킨슨 신부는 그렇게 외친 다음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드는 크게 한숨을 쉰 다음 배낭들을 던져놓고는 핸솔 추기
경을 업으러 계곡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갔다.
데스필드가 혼자서 장작을 모으고 먹을 것을 만드는 동안, 두 성직자
는 그렇게하면 자신들의 죄의식을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기도문을 중
얼거렸다. 그러나 데스필드의 서릿발같은 야유가 날아들자 '접신하셨
소들? 그거 방언의 은사요?' 두 사람은 기도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얌전히 데스필드의 시중을 받아야만 했다.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구료, 데스필드 군. 우리에게도 일을 시켜주
시오. 아, 그리고 내일부턴 우리 짐은 우리가 들겠소."
"됐수. 신경쓰지 마쇼." 퉁명스럽게 말한 데스필드는 잠시 후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본인이 판단할 거요. 당신들이 짐을 맬 만
하다고 생각되면, 매기 싫다고 해도 매게 할 거니까 걱정마시오."
핸솔 추기경은 약간 밝은 표정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고산
증세 때문에 저녁식사는 그냥 배를 채워놓는다는 의미밖에 없었고 조
악한 식사가 끝나자마자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은 급하게 찾아든
고지대의 밤을 이불 삼아 모닥불 주위에 곯아떨어졌다.
데스필드는 두 성직자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모닥불을 약간 줄였
다. 짐승들이 볼지도 모르고, 장작을 낭비할 필요도 없으니까. 낮 동
안 달구어진 계곡의 돌들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어서인지 계곡 안은 그
다지 춥지 않았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
꽃을 줄여놓고는 파이프를 꺼내어들었다.
지금쯤 시작될 건가 하고 생각했을 때, 그 노래가 시작되었다.
데스필드는 의식을 자신의 안쪽으로 돌렸다. 한참 동안 자신의 호흡
을 냉철히 관찰하며 그것이 충분히 가늘고 길어졌다고 판단되었을 때,
데스필드는 의식을 바깥으로 돌렸다. 바깥에서 맴돌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노래소리가 매끄럽게 그의 귀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름다운 노래였다.
도스 계곡은 거대한 공명통처럼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를 진동시켰
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노래소리의 진원지를 알 수 없었다. 이곳인가
싶으면 저곳에서, 저곳인가 싶으면 이곳에서 노래가 이어지는 식이었
다. 데스필드는 머릿속으로 계곡 여기저기에 피어있는 싱잉 플로라들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생각해보았다. 방향성이 없는 노래가 대충
설명되는 듯했다. 데스필드는 손을 뻗어 불 붙은 잔가지 하나를 들어
올린 다음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알싸하고 고소한 담배연기가 코 끝을 스쳤다. 데스필드는 모닥불 주
위에 쓰러져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고산증세와 강행군 때문에 녹초가 되어있던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
경은 아직 저 노래에 크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았다. 데스필드는 여행
속도를 조금 늦추면 그들도 덜 지칠 테고, 그럼 저 노래를 들을 수 있
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저 노래를 들려줄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가까워지긴 한 모양이다. 어젯밤에 듣던 것보다는 훨씬 더 크
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데스필드는 음악에 대해서는 별 조예가 없었고
음악을 좋아해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그 노래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뭘까.
내용이 없어.
그것은 내용이 없는 노래였다. 행진가든 애모곡이든 찬가든 장송곡이
든, 사람이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감정이나 내용이 담겨있다. 그렇기
에 야만인들의 노래를 들어도 그것이 대충 어떤 노래인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스 계곡에서 들려오는 싱잉 플로라의 노래는
노래 자체를 위한 노래였다.
하긴, 꽃들 당신이 사람 당신들의 감정을 노래할 리는 없겠지.
아니, 감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를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슬픔에 관계된 것이라고밖에는… 하지만
어떤 슬픔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데스필드는 눈가를 비볐다.
어떻게든 두 성직자를 푹 쉬게 하려고 무리했던 후유증이 나타난 듯
했다. 그는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담배와 섞어피운 마약도 누적된 피
로를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조만간 위 아래로 피를 흘리며 쓰러질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상상에
기분이 나빠진 데스필드는 떫은 표정으로 파이프를 내려놓고는 두 팔
을 들어올리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데스필드는 기지개를 켜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호흡을 멈춘 그의 귀에 자신의 맥박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데스필드
는 이를 악물었고 그 때문에 눈 앞에 아지랑이 같은 빛이 떠다니는 것
이 보였다. 들었나? 데스필드는 주의깊게 고개를 돌렸지만 실상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싱잉 플로라의 노
랫소리였다.
그런데 왜 그게 말소리처럼 들렸던 걸까?
…래의 불꽃…
데스필드는 두 손을 내리고 재빨리 파이프를 껐다. 그는 호흡을 억제
하기 위해 애쓰며 싱잉 플로라의 노래소리에 집중했다. 그것은 어제까
지와 마찬가지로 노래소리였지만 데스필드는 자신이 들었던 것을 무시
할 수가 없었다. 데스필드는 어쨌든 자기부정이나 의혹 따위는 취급하
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것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세계를 바
라보는 데 익숙했다.
'당신들이 세상은 이렇다 저렇다 말해도, 본인은 패스만 봐. 본인은
세상을 걷지 않고 패스를 걷지. 자, 모든 당신들이 노래소리라고 말하
는 것에서 본인이 뭘 들을지 볼까?'
…으로 그녀를…
데스필드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그것은 확실히 노래가 아니었다.
"좋다구! 본인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겠어. 그거야 모든 미치광이
당신들이 하는 말이지만, 어쨌든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으니 본인은
미치지 않았다고 하겠어. 계속해봐! 들어줄 테니!"
그 순간 노래가 멎었다. 데스필드는 어이없음을, 심지어 불가해한 억
울함까지 느끼며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알버트 선장을 향해 노래부르고 있던 검은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갸
웃했다.
알버트 렉슬러 선장 이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물론 다림항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지만,
소녀는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단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사람만을 위해 노래해왔다. 검은 소녀는 주춤거리며 갑판에서 일어났
다.
멀리 자유호에서 물수리호를 바라보고 있던 바스톨 장군은 고개를 갸
웃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소녀가 왜 노래를 멈춘 거지요, 라미 님?"
바라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물결을 일으키던 밤바람이 그녀의 옷
도 펄럭이게 만들었다. 라미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똑바로 일어난 검은 소녀는 물수리호의 갑판 위를 죽 둘러보았다. 그
러나 다림항에서 그녀의 노래에 신경쓰지 않는 유일한 사내들은 이미
갑판 아래로 내려가 잠들었고 그래서 물수리호의 갑판은 고요했다. 천
천히 한 바퀴를 돈 검은 소녀는 다시 메인 마스트를 바라보게 되었다.
알버트 선장이 그곳에 있었다. 어디로 갈 리는 없다. 돛대에 못박혀
있으니까. 검은 소녀는 한참 동안 돛대를 바라보았다. 알버트 렉슬러
선장의 무시무시한 육신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검
은 소녀는 다시 갑판에 앉았다. 그리고 단아한 입술을 열어 노래를 부
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다시 시작되자 데스필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침착하려 애
쓰면서 동시에 흥분해버렸다. 말이 안되는 상상이지만, 데스필드는 도
스 계곡의 싱잉 플로라들이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노래를 멈췄다는 가
설을 버리기 어려웠다. 저것들이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나? 데
스필드는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고, 이번엔
마약 없이 담배만으로 파이프를 채웠다. 정신 좀 차리고 들어야겠어.
파이프에 불을 붙인 데스필드는 차분하게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 노래소리가 다시 말소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노래가 다시 시작되자 바스톨 장군은 만족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가
만히 노래를 듣던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라미에게 질문했다.
"왜 해적들은 그녀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습니까?"
"이름? 글쎄. 그대가 지어보겠나, 바스톨? 그녀에게 어떤 이름이 어
울리겠나?"
바스톨 장군은 라미의 대답에 약간 당혹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물
수리호 쪽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은청색 갑판 위에서 검은
소녀의 모습은 검어서 잘 보였다. 노장군은 갑자기 이질감을 느꼈다.
검어서 잘 보인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하나밖에 가지
고 있지 않은 특성이었다.
"그림자 같군요."
"그림자?"
"예. 저 소녀의 모습은 그림자 같군요."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싶은가?"
"아니오. 이해하겠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군요." 노장군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그녀
는 분명히 다른 존재이기에."
"나처럼?"
바스톨 장군은 라미를 돌아보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라미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분명히 다르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지난 천년 동안이나 왕자의 땅을 주시하며 죄없는 전략가들,
혹은 머리좋은 이들로 하여금 탁상공론가 취급을 당하게끔 주의깊게
조절해온 존재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열린 눈
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 뻔한 사실이었다. 왕자의 땅.
그곳을 쟁취하기만 하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다. 지극히 단순한 사실
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천년의 세월의 힘을 빌어 그
들을 비웃었다. 그것이 그토록이나 당연한 일이라면, 왜 지난 천년 동
안 아무도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10년도 아니고 100년도 아닌,
자그마치 천년이다. 서른 세대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아무도 그 땅을
차지하지 않은, 그래서 대륙을 제패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철
탑이나 대사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이나 전략가
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묵묵부답인 그들을 향해
조소와 비난을 보내며 그것이 머릿속으로나 구현 가능한 지적 유희임
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었다.
바스톨 장군은 잠시 선배 전략가들을 동정했다. 그들이이 처해야 했
던 상황은 지나치게 난감했을 것이다.
오왕자의 검이라는 말은, 사실 일종의 타협이다. 자신의 주장을 부정
할 수도 없지만, 설명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렇게 한
발 물러나는 투의 말을 만들어내었다. 조건을 단 것이다. 그 땅을 가
지기만 하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지만, '시운과 재능과 행운을 가진
인간만이 그 땅을 가질 수 있다'고.
그 황당한 말이 사실과 약간의 관련이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검'이
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바스톨 장군은 갑자기 의심을 느꼈다. 그들 중
일부는 대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어렴풋하게나마 있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대사를 쓰러뜨려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를 우회적으
로 표현하기 위해서 '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천년 동안의 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시운의 검날과 재능의 칼자루와 행운의 칼
막이를 가진 검, 즉 인간으로 해석했다. 사실은…
"아무나 될 수 있었겠지요."
"뭐라고 했나?"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왕자의 땅의 주인 말입니다. 특별한 사람
이었을 필요는 전혀 없었지요."
"그래. 나를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래. 저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같은 작자라도 다섯번째의 검이 될 수 있다. 그리고서 대륙
을 제패하여 지상의 절대권력자가 될 수 있다. 메르데린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다."
"그래도… 그 천치는 약간 곤란하지요."
바스톨 장군은 곤혹스럽다는 투로 말했고 라미는 방긋 웃었다.
"사트로니아의 침묵에 감사한다. 바스톨."
"제가 받을 감사는 아니군요. 그것은 린타와 사트로니아가 지켜온 비
밀이고, 제가 사트로니아에 속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대단히 놀랐습니다. 오왕자의 검이라는 것
이 그런 뜻일 줄은 짐작도 못했지요."
"그래도 그대는 지금 사트로니아를 대표하고 있다. 내 감사를 받을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의 비밀을 지켜온 사트로니아에게 이제 대답
해주십시오. 휘리 노이에스가 다섯번째의 검입니까?"
바스톨 장군은 약간 흥분되며 동시에 초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
트로니아는 이미 한 번 실수했었다. 그것도 존폐가 위태로울 정도의
큰 실수였고, 그 대가로 사트로니아는 소제국이라는 그 영화로운 이름
을 잃었다. 다시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지독한 고
통이 필요할 것이다. 사트로니아는 이를 갈며 두번째 실수는 하지 않
으리라 맹세했었다. 그리고 엔도를 사트로니아에 맡겼던 바스톨 장군
역시 간절한 심정으로 사트로니아의 의지를 지지했다.
더군다나 이번 경우는 무시한다면 실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불가해한 마법을 사용했던 하이낙스의 경우와는 달리, 휘리 노이에스
는 그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무기를 모으고 있었다. 더군다
나 그들은 그 휘리 노이에스가 사실은 휘리 타르타니어스임도 알고 있
다. 절대 실수할 수 없다.
라미는 몸을 뒤로 조금 기울여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멜바골이 화살
이 하늘의 중심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녀는 맥풀린 어조로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흥분이 컸던 만큼 당황도 컸다. 바스톨 장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라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휘리 노이에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
"따라서, 네가 말한 대로 나를 쓰러트리는 검이 다섯번째의 검이라
면, 휘리 노이에스는 다섯번째의 검이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난 적도
없으니까."
바스톨 장군은 신음을 흘렸다. 하리야 선장이 이미 그런 말을 내비쳤
기 때문에 바스톨 장군은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탈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렇기도 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에 앞서, 내가 지난 천년 동안 했어야
했을 일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당신이 했어야 했을 일이오?"
"그렇다."
바스톨 장군은 다시 당황했다.
"어, 왕자의 땅을 정복하려는 시도를 방해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어야 했을까? 힌트를 주지. 세상
엔 전략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심가도 있다."
바스톨 장군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생각해보기로 했다. 상황과 가설
이 종합되며, 잠시 후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관념이 떠올랐다. 바스톨
장군은 흠칫하며 라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떠오른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본 순간 바스톨 장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며 라미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
다.
"다, 당신은-?"
"나는?"
라미는 말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가볍게 댓구했다. 바스톨 장군은
컥컥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그, 그들을- 왕자의 땅의 가, 가치를 알아보고는 그것을 워, 원했던
자들을-"
"그런 자들을?"
그 다음은 말하기 어려웠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미는 바스톨 장군을 도와주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짐작하는 대로다."
바스톨 장군은 이제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호흡
을 가누기 위해 애쓰며 장군은 대사의 얼굴에서 죄의식, 혹은 슬픔과
같은 감정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런 표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장군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가 했던 일에 동의할 수도 있
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라미는 평온하게 말
했다.
"자신의 고찰을 그저 타인에게 알리는데서 즐거움을 느끼려 했던 자
들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는
자들은 문젯거리였지. 타인에게 왕자의 땅의 가치를 설명하는 대신,
자신이 그 가치를 이용하려 했던 자들…"
바스톨 장군은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공포를 참아내
었다. 라미의 말은 높낮이도 없이 계속되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enslaver. 나의 다른 이름이지. 나의 유혹에 빠지
는 것은, 그들이 유혹을 원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런 자들은 왕자의 땅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야심
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리고 철탑으로서 왕자의 땅을 지키던 대사는,
그런 야심가들에겐 인슬레이버였던 것이다. 이 대비되는 두 개의 단어
의 결합에 담겨있는 의미를 곱씹어보며 바스톨 장군은 힘겹게 말했다.
"얼마나… 되는 숫자였습니까?"
"많았다. 어쨌든 천년의 세월이었으니까."
바스톨 장군은 멍청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셀 수조차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라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를 비난할 건가?"
"모르겠습니다."
"비난한다는 뜻이군. 그럴 수도 있겠지. 그들 중에는 정말 뛰어난 이
들도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반신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의 영웅도 있
었지. 만일 그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졌다면, 너희들이 영웅으로 생
각하는 리플리나 제부르카스, 타르타니어스 따위는 그 발을 씻을 자격
조차 없는 위대한 이름이 될 수도 있었던 이들도 있었지. 그래. 안타
까운 손실이었다."
바스톨 장군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왕자의 땅에 관심을 가질만한 자들
이었다면 그만한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
게 라미의 몸을 바라보았다. 저 속에 그들이 있단 말인가? 역사에 기
록되지 못했을 뿐 혼자서 역사에 기록된 위인들 수십 명에 필적할 자
들이, 단지 금지된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뱀의 먹이가 되었다고?
"당신이 해왔던 일이 무엇인지는 알았습니다." 바스톨 장군의 목소리
에는 거친 울림이 섞여 있었다. "이제, 설명해주십시오. 휘리 노이에
스가 다섯번째의 검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너는 조금 전 아무나 왕자의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했
다. 그래. 휘리 노이에스 역시 지난 천년 동안 나를 찾아왔던 이들과
같은 인물일 테고, 그 역시 왕자의 땅을 가질 수 있을만한 인물일 것
이다. 하지만 그에겐 이전의 인물들관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점?"
"내가 계속해서 오왕자의 땅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너희들이 휘리 노
이에스를 주목하기 훨씬 전에 그를 찾아내어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타났을 때 나는 오왕자의 땅을 감시할 수가 없었다."
"왜지요?"
"키 드레이번 때문에."
느닷없이 나온 이름에 바스톨 장군은 약간 당황했다. 키 드레이번 때
문이라니? 그러나 다음 순간 바스톨 장군은 철탑에서 보았던 연을 생
각했다.
'다림으로 오라, 키 드레이번.' 그것은 완전한 명령이었다. 주인이
그 노예에게 하는 듯한 말투.
바스톨 장군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가- 당신을 쓰러트렸습니까?!"
"그렇다. 그가 다섯번째의 검이며, 천년만에 나를 쓰러트린 무사이
며, 오왕자의 땅을 지키던 철탑을 정복한 자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
는 오왕자의 땅을 감시하지 못했고, 그래서 휘리 노이에스를 놓쳐버렸
다."
"복수, 그렇군요. 브라도 경의 복수가…" 그 순간 바스톨 장군은 마
음 속으로 일생의 라이벌을 향해 무수한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이 덜
떨어진 늙은이야. 검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무사로서는 죽어 마땅할 일
이다만, 네 검을 빼앗아간 그 해적놈이 그 검으로 한 일을 좀 봐라!'
그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는 동안에도 라미의 말은 차분하게 이어
졌다.
"이제는 휘리 노이에스를 조용히 처리할 수가 없지. 그는 너무 유명
해져버려서. 일이 참 우습게 되었다고 해야 될까."
"우습다고요?"
바스톨 장군은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지만 라미는 실제로 밝게 웃었
다.
"그래. 전략가들이 자기위안삼아 했던 말. 그게 그만 사실이 되어버
렸지."
"그 말씀은-"
"시운, 재능, 행운. 휘리 노이에스에겐 시운이 있었지.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이라는 얼간이가 모든 전쟁준비를 마쳐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
었으니까. 그에겐 재능도 있다. 실제로 일어나자마자 팔라레온을 정복
한 재능은 놀라운 재능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겐 행운도 있었
다. 키 드레이번이 나를 무력화시켰을 때 일어났다는 것.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야심을 가졌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도 느꼈
을 것이다. 아마도 거의 내 근처에까지 왔을 테지. 하지만 그가 나에
게 도착하기 직전에 키 드레이번이 나를 쓰러트렸기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겠지. 말이라는 것, 말이 가진 힘이라는 건 정말 재미있지 않은
가?"
그러나 바스톨 장군은 전혀 재미있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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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POLARIS RHAPSODY
10. 새장 속의 왕…4.
넓은 들판 곳곳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의 높이는 사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매캐하게 솟아오른 연기 때문에 밤하늘의 별이 보
이지 않을 정도였고 불길 주위의 밝은 땅 위로는 가끔 끔찍한 그림자
들이 길게 늘어졌다.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비틀거리고 있
었고 간혹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판 한쪽의 언덕 위에서, 바탈리언 남작은 땅에 엎드린 채 그 모습
을 보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밤하늘을 태워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군."
남작의 옆에 엎드려 있던 오스발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가 남작이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입을 열었다.
"승전 축하연입니까?"
"그렇긴 한데 저건 좀 너무하군."
"너무하다고 하셨습니까?"
"저건 축하가 아니라 광란이라고 해야겠군. 자네 아까부터 노래소리
를 들은 적이 있나? 그래. 나도 못들었어. 저 정신나간 모닥불도 그렇
고, 도저히 이성이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없군. 저건 마치…"
갑작스러운 외침소리에 남작의 말이 끊어졌다. "크아아악!" 이번의
외침소리는 확실히 비명이었다. 그러나 장작불 주위의 그림자들 중 그
소리에 동요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
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포로를 괴롭히고 있군. 고문하는 건가?"
오스발은 '고문이오? 살해였던 것 같은데요?' 라고 되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남작 역시 자신이 했던 말을 곧 취소했다.
"아냐. 죽이고 있는 거야. 제기랄. 마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노스윈드 선단에서도 가끔 포로를 공개처형 하던데요. 널빤지
걷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저와 같이 노를 젓던 친구 하나가 말해주던
데 그건 해적 나으리들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하는 행동이라 이거지? 나도 알고 있어. 칼에 피를
먹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지. 해적이나 병사 같이 싸움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가끔 피를 먹여줘야 하지. 마왕도 아마 그런 생각
에서 포로를 괴롭히도록 허락했을 테고. 하지만 저건 정도에서 벗어났
군. 널빤지 걷기는 밝은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갑판 위에
서 벌어질 텐데. 맞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 록소나군은 이 어둠 속에서 포로를 죽이고 있어. 그런 피
먹이는 작업을 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엄숙하게 해야
돼. 그래야 광기는 억제되고 올바른 죄의식과 함께 그 효과만 가슴 깊
이 간직되지. 하지만 저렇게 어둠 속에서 할 경우에는 광기는 부풀려
지고 효과는 망각돼. 죄의식은 없고. 술과 어둠은 눈 앞을 흐리게 한
다는 점에서 똑같아. 취한 상태에서 하는 일에서 무슨 효과를 얻겠
나?"
"그렇습니까."
"어둠 속에서 목숨을 끊고 뭐든 다 태워버리고 내일 쓸 것 같은 건
생각도 안하고… 안 좋아. 저런 광기는 우두머리 자신이 냉정함을 잃
었을 때 부하 통솔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야. 아무
래도 마왕이 걱정스럽군."
바탈리언 남작은 뒤로 물러나자는 신호를 보내었다. 언덕 뒤로 내려
온 바탈리언 남작과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가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돌아갔다. 마부석에 앉아서 고삐를 꼭 쥐고 있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남작은 낮게 웃었다.
"이런. 우리가 너무 조용히 돌아왔나 보군요."
"조, 조금 놀랐어요. 잘 보셨어요?"
"예. 공주님. 아무래도 아까 제가 했던 말 취소해야겠습니다."
"취소요?"
"예. 국왕 친정이니 잘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
다. 아무래도 우회해야겠습니다."
"우회요?"
"지금 빌레스 국왕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다가가봤자 좋은 일은 없고
나쁜 일만 많겠습니다. 저 친구들은 지금 정신의 반쯤은 미쳐있고 나
머지 반쯤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다 흘린 것 같습니다. 마왕은 저럴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이겼다지만, 그래도 적국 가운데 있는 것이고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부하들을 저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놀아나게 할 사람이 아닙니다. 뭔가 마왕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있
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상태라면, 산발탄원 같은 건 무의미하
겠습니다."
"그렇게 심한가요?"
"그렇습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오
늘 밤 내에 최대한 멀리까지 가야겠습니다. 오스발. 자네도 마차 안에
타게. 안에 타고 있다가 혹시라도 마차가 정지하면 자네가 얼굴을 내
밀게. 공주님은 의자 아래에 숨기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이 마차 안에 오르자 남작은 조용히 마차를
출발시켰다. 고함을 지르고 정신나간 듯이 불을 피우는 록소나군이 멀
리서 들려오는 마차소리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남작은 최대한 소리를
줄이기 위해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래도 달빛이 있는 바깥과는 달리 불빛 하나 없는 마차 안은 캄캄하
기 짝이 없었다. 자기 코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율리아나는 답답
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남작이 마차를 조용히 몰고 있는 것은 마차 안
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지라 율리아나 공주는 말을 꺼낼 생각도 못했
다. 하지만 암흑은 공주를 오그라들게 했고 불안은 그녀를 떨게 했다.
결국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이 앉아있는 방향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오스발?"
대답이 없었다. 너무 낮았던 모양이다.
"저, 오스발?"
"예?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저, 예. 불렀어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없는데요."
"그러십니까."
"어, 당신은 뭐 나한테 부탁할 거 없어요?"
오스발은 웃어버렸다.
"그런 건 없습니다."
"미안해요. 우음. 캄캄한 데서 가만히 앉아있으려니까 진짜 무섭네
요. 폐소공포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차가 자꾸 좁아지는 느
낌 비슷한 것이 드는 걸로 봐서 그런 증세가 조금 있는지도 모르겠어
요. 노래 부르고 싶어요. 그러면 안되겠죠?"
물론 공주에게 폐소공포증은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
태에서 소리없이 위험 한가운데를 지나간다면 누구라도 불안할 것이
다.
"지금 내 모습은 내 처지의 축소판 같네요."
"축소판이라고 하셨습니까?"
"캄캄한 마차 안에 갇혀서 뭔지도 모를 위험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거. 내가 지금 이렇죠. 난 왜 스스로 걸어다니지 못할까요. 자유호에
서는 당신, 테리얼레에드에서는 신부님과 데스필드 - 그 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 그리고 다림에선 바탈리언 남작님이군요."
"혼자 걷는다는 건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보다는 내 발로 걷는 것이 멋있잖아
요. 아-아. 나도 알아요. 그게 약간은 유치한 생각이라는 거. 관두지
요."
오스발은 공주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도 공주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오스발은 약간의 요령을 터득
하고 있었다.
"저, 공주님?"
"예?"
"아까 남작님이 산발탄원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나 다른 곳에 정신 팔게 만드려고 그러는 거죠?"
오스발의 요령은 이미 들킨 모양이다. 오스발은 어둠 속에서 짧게 웃
었다.
"흠흠. 물었으니 대답은 하죠. 그건 고난에 처했거나 모욕을 당한 과
부, 혹은 처녀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취하는 매우, 매우매우매우 고
전적인 수단이죠. 대신 싸워줄 기사 - 남편이나 연인이겠죠. - 가 없
는 그런 여인들이 머리를 풀고 왕에게로 나아가 탄원하는 거예요. 그
럼 왕은 스스로, 혹은 자신의 기사 중 하나에게 명령하여 그 여인의
명예를 지키게 하거나 고난을 해결하게 하는 거죠. 바드들이나 오늘
아침 처음으로 면도날이 필요해진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근사한 장면
이겠죠."
"아, 예. 머리는 왜 푸는 거죠?"
"아- 머리카락은 여인의 성(城)이니까요. 그걸 푸는 건 자신이 무방
비하고 무력함을 나타내는 거죠. 사실 보기 근사하다는 이유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시큰둥하게 시작되었지만 율리아나는 곧 자신의 설명에 빠져버렸다.
율리아나는 설명을 하면서 중간중간 자신에게 묻고 "그런데 정말 그럴
까요?" 또 스스로에게 대답하며 "그건 이런 이유에서일 거야. 난 그렇
게 생각해요." 열심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율리아나의 설명에 찬성해
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오스발은 안심하게 되었다.
시린 새벽, 까마득한 나무 그림자 위에 매달린 외로운 둥지.
지난밤의 이슬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반짝인다. 둥지 안쪽, 헝겊 무더
기 같은 깃털 더미 사이에서 어린 매의 머리가 비비적거리며 튀어나온
다. 올 봄에 태어난 놈인 듯, 아직 그 어깨와 등에 보송보송한 솜털을
얹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 날개에는 바람을 희롱할 억센 깃털이 자랑
스럽게 나있다.
아침의 향기에 속아 눈을 떴건만 높은 하늘은 아직 어둡다. 그러나
지평선 가까이 낮은 하늘은 발그레한 빛으로 물들어 어린 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다른 새끼들과 어미는 아직 노곤한 잠에 취해있지만, 어
린 매는 동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동녘의 하늘에 태양이 나타났다.
창공을 향해 비상하기 전, 태양은 빛을 두 손 가득히 쥐어올려 대지
를 향해 던졌다. 수줍은 소녀의 볼과도 같은 붉은 빛이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숲의 머리를 빗질하는 빛, 강물 속으로 스며드는 빛, 바다
를 불태우는 빛. 그리고 어린 매의 솜털 사이로 스며드는 빛.
이제, 날아볼 때가 되었을까. 바람이 매를 부른다.
푸드득거리는 날개짓이 위태롭다. 오른쪽으로 갸우뚱. 이크이크. 매
는 비비적거리며 발을 떼지만 날카롭게 휘어진 발톱을 어떻게 처리할
지 몰라 곤혹스러워한다. 어쩌나어쩌나. 발톱에 걸리는 나뭇가지들이
아우성을 지른다. 삑삑. 어린 매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득인다.
햇살 머금은 솜털들이 홱 날아오른다.
다음 순간 어린 매는 아침 햇살 속의 그림자가 되어 날고 있다. 어린
매는 자신이 매라는 사실까지 잊어먹을 정도로 놀란다.
삐이- 삐이-익!
자마쉬는 이미 햇살 속에 새 날을 맞이하고 테리얼레이드는 아직까지
도 새벽빛 속에 잠겨 있을 때, 도스 계곡에서 데스필드는 무릎에 파묻
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높은 봉우리들은 아직 밤 속에 서있었지만 햇살은 계곡을 거슬러오르
고 있었다. 아침의 낮은 태양 때문에 곳곳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
고, 그래서 데스필드의 눈에 들어오는 도스 계곡의 모습은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 같았다. 바위틈에 맺혔던 이슬들이 음영 속에서 반짝였고
계곡 듬성듬성 나있는 나무들은 햇살을 향해 메마른 손짓을 던진다.
데스필드는 앉은 채로 목을 몇 번 돌려보았다. 별로 반갑지는 않은
소리가 몸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데스필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다음 동쪽 하늘을 보았다. 오늘의 날씨도 참 굉장하겠다고 생각하며
데스필드는 잠시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싱잉플로라가 부르던 노래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려 했지만 전혀 생
각나지 않았다. 하긴, 밤새도록 데스필드가 들었던 것은 노래가 아니
라 말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잊어먹을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 사실에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패러다이스와 판데모니엄의 일은, 그곳에 관심 있는 당신이나 신경
쓰라지. 패스파인더 본인관 상관없는 일이야.'
누구나 마지막으로 걸어야 하는 그 길에는 패스파인더가 필요없다.
만일 거기서 길을 잃는다면 지상 최대의 희극일 것이다. 그러니 데스
필드에겐 가장 관심없는 이야기였다. 데스필드는 몸을 일으켰다. 지독
하게 더워지기 전에 이동하려면, 지금쯤 두 성스러운 패신저들을 두드
려 깨워야 될 것 같다. 데스필드는 휘파람을 불며 핸솔 추기경과 파킨
슨 신부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두 성직자는 절대로 게으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성직에 종사한다는
것은 군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필요로 하는 일
이다. 복사 3, 4년, 신학교 5년(말 그대로 목자 타입이라 느긋할 경우
엔 10년), 부신부 5년 정도를 거치고나면 절식과 금욕의 생활로 수척
해지긴 하지만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된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장의사들이 보면 반가워할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 아침 두
성직자들은 데스필드를 별로 괴롭히지 않고 쉽게 일어났다. 물론 투덜
거리고 약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아침 기도와 식사 등은 한 시간만에 끝났다. 핸솔 추기경은 자신의
말대로 자기 짐은 자신이 지겠다고 나섰다. 파킨슨 신부 역시 같은 주
장을 했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좋을대로 하라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태양이 하늘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구르기를 하고 있을 때 세 여
행자는 야영지를 떠나 도스 계곡의 정상부를 향해 올라갔다.
얼마 걷지 않아, 데스필드는 자신의 패신저들이 어제까지와는 다르다
고 느꼈다. 걸음은 느리지만 리듬이 딱딱 맞았고 발디딤은 무거우면서
도 큼직했다. 각오가 서린 얼굴을 하고 걷기 시작했던 추기경과 신부
도 자신들이 별 고통없이 숨을 쉬는 것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들은 드디어 노련한 도보 여행자가 된 것이다. 심지어 파킨슨 신부는
말을 꺼내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금 전부터 하늘을 흘끔
거리던 신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매인가?"
말은 쉽게 흘러나왔다. 파킨슨 신부는 환한 얼굴로 핸솔 추기경을 돌
아보았고 추기경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의 땅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파란 하늘에서 검은 점이 동그라미치고 있었다.
"그렇구료, 형제. 매인 것 같소. 이 계곡에 들어와서는 처음 보는 짐
승인 것 같군."
추기경 역시 밝은 얼굴로 쉽게 말했다. 두 사람은 매를 보았다는 것
이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서로에게 웃어보였고 상대방의 웃음을 보며
더 즐거워했다.
"원은 완전성의 상징이지요. 저 난폭한 맹금마저도 주님의 뜻을 표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 이디오테우스가 그러셨지요. 신학서의 테두리를 장식할 염료를
얻기 위해-"
"-신께서 훨씬 더 잘 만들어놓으신 신학서를 꺾는 무지몽매함이여."
말 끝에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데스필드는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기에 따라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도 계속 무관심해할 수는 없었다. 유쾌하게 시작된
두 성직자의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 튀기는 설전으로 바뀌어버
린 것이다. 이제 산을 타면서 말하는 것 쯤은 우습게 여기게 된 두 성
직자들은 지난 며칠 동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을 모조리 나누겠다는 태
도로 떠들어대었다. 오랜 금욕 생활이 성직자들에게 남겨주는 것은 마
르고 단단한 몸 뿐만은 아니다. 먹거나 마시거나 자는 등 몸에 신경
쓸 시간을 모조리 정신으로 돌린 결과로 성직자들은 모두 왕성한 상상
력과 치열한 토론열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과 파킨슨 신
부는, 데스필드로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자기 모욕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사소한 교리상의 문제를 가지고 끈덕지게 싸워대었다.
마치 린타와 아델토라도 되는 것처럼…
판데모니엄의 일곱 하이마스터 중 '이름'이 알려진 것은 린타에게 패
배했던 황금의 조커 아델토뿐이다. 데스필드는 잠시 그 멍청한 악마를
비웃었다. '인간을 상대로 아흐레 밤낮을 이야기한 것은 실수였어. 그
냥 손가락으로 눌러버렸어야지.' 어쨌든 어젯밤 이후로 데스필드는 판
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들 중 또 한 명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가 신경쓰고 있는 것은 좋은 말
로 패신저들을 달랠 것이냐, 아니면 여행 속도를 더 높여서 그들로 하
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후자의 경우에 매력을
느꼈다…
그녀의 이름은
노래의 불꽃 벨로린.
우리는 슬픔으로
그녀를 찬양한다.
"그러고보니, 라트랑 후작부인이 바다의 공주님이었지요?"
라이온의 질문에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의 왕국 카밀카르엔 세
명의 공주가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셋째인 율리아나 공주였지만
바다의 공주라고 불리는 것은 둘째인 이루미나 공주였다. 그리고 그녀
가 가진 것도 그 호칭 뿐이다. 세기의 신부라는 화려한 이름은 역시
율리아나 공주에게 돌아갔다.(율리아나 공주 자신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세실은 까르륵거리며 심술궂게 말했다.
"그 이야기 들어봤나? 라트랑 후작이 결혼 신청을 보내었을 때 카밀
카르에선 그가 뭔가를 혼동했다고 생각했다지?"
"셋째와 둘째를 헷갈렸다고 생각했다죠."
"맞아맞아. 그 때 후작의 대답이 일품이었잖아."
"멋을 너무 부려서 별로 근사하지는 않던데요."
"젊잖아. 응? 그러고보니 너도 젊은 나이인데 왜 그 지경이야?"
키는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다는 기분만
을 느꼈다. 세실은 겉모습이야 그렇지 않지만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마법사였고 라이온은 (어쨌든) 바다 사나이였건만, 두 사람은 마치 주
말에 교회 앞에서 만난 젊은 부인네들처럼 죽이 잘 맞아서 가십거리를
교환하고 있었다. 키는 두 사람을 무시하며 말의 속도를 높였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키를 곧잘 따라옴으로써 그를 좌절시켰
다.
세 사람은 팔라레온 땅을 지나와 지금은 다케온의 평원을 달리고 있
었다.
그들은 다케온과 록소나를 가로지르는 디즐 강 유역에 펼쳐진 이 평
원을 따라 달리다가 디즐 강의 하류 부근에서 라트랑으로 넘어갈 생각
이었다. 디즐 강 유역은 말을 달리기 좋은 땅이었고 라트랑까지는 최
단거리인지라 세 사람의 선택은 잘못된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그곳이 전력을 재정비한 다케온과
마왕 빌레스가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고 있는 땅이라는 점이었다. 사
람들에게 접근하여 이야기를 걸어볼 처지가 못되는 그들은 록소나와
다케온의 전쟁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강변 언덕 하나를 넘어섰을 때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이 활을
겨눴을 때 라이온은 제국의 공적 제 1 호의 대륙 여행이 들켰다고만
생각했다. 그가 용맹한 함성을 지르며- 뒤로 돌아 달리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외침소리 때문이었다.
"정지! 정체를 밝혀라!"
키 역시 그 외침소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말을 제자리걸음 시키며 키는 병사들을 관찰했다. 여
덟 명 정도의 병사들은 모두 활을 들고 있었고 그들을 빈틈없이 겨냥
하고 있었다. 키는 일단 조금 전 고함을 지른 병사를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라트랑으로 돌아가는 여행자요. 당신들은?"
"말에서 내려!"
키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병사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확연히 드
러났고 라이온은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해적들을 가호하
는 성인이 계시던가 하는 따위의 망상을 잠깐 해보았다. 키는 명령한
병사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한 번 더 묻겠는데, 당신들은 뭐요? 강도?"
"어, 말에서- 내리시오. 우리는 전쟁 중이란 말이오." 말투가 한 계
단 쯤 올라갔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겠소.
내리시오!"
키는 말에서 내렸다. 세실과 라이온 역시 말에서 내린 다음 고삐를
쥐고 섰다. 병사들은 아직까지 활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조금 안심하는
얼굴들이 되었다. 키에게 명령을 내리던 병사는 자신이 골도 백부장이
라고 밝히며 질문했다.
"신원을 증명할 것이 있소?"
"말했듯이 우린 여행자일 뿐이오. 그런데 전쟁? 다벨과 팔라레온의
전쟁 말이오?"
골도 백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키를 보다가 미심쩍게 말했다.
"아주 멀리까지 여행을 갔던 모양이군. 어, 난 당연히 우리들이 누군
지 짐작할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거요."
"그러셨소?"
"우린 빌레스 국왕 전하의 군대요. 지금 다케온과 전투 중이고."
라이온과 세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키 역시 눈꼬리를
조금 올렸다 낮추며 중얼거렸다.
"록소나와 다케온이 전쟁을?"
키의 반응을 본 골도 백부장은 이들이 간첩이거나 할 리는 없다고 생
각했다. 키의 반응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긴 간첩이라면
이렇게 대낮에 보라는 듯이 달릴 리는 없겠지. 더군다나… 다음 순간
골도 백부장의 사고는 딱 정지해버렸다.
키와 라이온은 록소나 병사들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
인지 알 수 없었다. 키는 라이온을 돌아보았고 '너 또 무슨 황당한 짓
했냐?' 라이온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키를 쳐다보았다. '선장님의 정체
가 들킨 것 아닐까요?' 그러나 조금 후 키와 라이온은 모두 허탈한 웃
음을 지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
해였다.
어쨌든 키와 라이온은 세실을 젊고 날씬한 여자로 생각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록소나 병사들은 목 말라하는 눈으로 세실을 바라보았고 라이온은 이
불쌍한 이들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세실은 팔짱을 끼고는
병사들의 시선을 일일이 마주받아 주었다. '풋내나는 녀석들이 까불고
있군.' 골도 백부장은 세실을 흘끔거리며 키에게 말했다.
"음. 잘 몰랐으니 여자도 있는 여행객이면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오
셨군. 어떻소? 우리가 보호해드리지."
"그럴 필요는 없소."
"아니, 아니오. 이곳은 전쟁터란 말이오. 다케온 놈들이 당신네들에
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단 말입니다."
"바로 그러니까 싫소."
"뭐요?"
"나는 당신네들과 함께 있다가 다케온 병사들에게 발견되기라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소. 싸움이 벌어지면 위험해질 테니까. 말씀 고맙지만
여행은 우리끼리 계속하겠소."
키의 직설적인 말에 대해 골도 백부장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골도 백부장과 다른 병사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키는 등자에 발을 올
렸다. 그 때였다.
"골도 백부장!"
높고 사나운 고함소리였다. 병사들은 기겁하며 몸을 돌렸고 키는 맞
은 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몇 명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기사
들 가운데에는 투구 대신 간소한 금관을 쓴 사람이 노기충천한 얼굴을
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빌레스 국왕인
가.
순식간에 달려온 기사들은 병사들 앞에서 말을 제자리걸음 시켰다.
전쟁터라 그런지 병사들은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마왕은 키를 흘끔
바라보고는 골도 백부장을 향해 말했다.
"이들은 뭔가?"
"아, 라트랑인입니다. 전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자라고 하더군
요."
"그런데 지금 자넨 뭐하고 있는 건가? 간첩이거나 밀정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함부로 보내주려는 건가!"
"그, 그렇지만, 전하. 여자도 있고 해서…"
"이 멍청한 놈. 수녀를 데리고 다녀도 조사는 해봐야지! 조사했나?"
골도 백부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빌레스 국왕은 짧게 혀 차
는 소리를 내고는 키를 향해 말을 몰아왔다.
키는 말머리가 자신의 가슴 앞 1피트 거리에 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마왕은 말 위에서 쌀쌀맞은 눈으로 키를 내려다보았
다.
"나는 록소나의 국왕 빌레스다. 그대는 뭐 하는 작자인가?"
"전하. 저는 라트랑에 사는 칼이라 합니다. 팔라레온의 투란에 볼 일
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에 전쟁이 벌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하께서 이곳에서 전쟁 중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뒤의 남녀는?"
"제 동생과-" 키는 조금 전 죽이 잘 맞아 노닥거리던 두 사람의 모습
을 떠올렸다. "동생의 아내입니다."
라이온은 마음 속으론 절규를 내지르고 있었지만 겉으론 천연덕스럽
게 세실의 어깨에 팔을 얹었고 세실 또한 자연스럽게 라이온에게 기대
었다. 빌레스 국왕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잃고는 다시 키를 돌아보았
다. 마왕의 눈이 키의 어깨에 잠시 머물렀다.
"등의 그것은 뭔가? 검인가?"
키는 뱃가죽이 당기는 기분을 느꼈다. 알아볼까 싶어 천으로 두른 채
매고 다니던 복수에 마왕의 시선이 닿았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풀어보라."
라이온은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세실 역시 초조한 표정으로 키의 등
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키는 복수를 푸는 대신 마왕을 쏘아보았다.
"싫습니다."
"뭐라고?"
"검을 견식하고 싶으시다면 정중히 요청하십시오. 왕이라도 예를 무
시할 수는 없습니다."
빌레스 국왕의 눈꼬리가 둥글어졌다. 미소를 짓던 국왕은 등자에서
오른발을 뺐다.
그리고 그 발이 키의 얼굴을 걷어찼다.
다행히도 국왕의 철화(鐵靴)는 다른 기사들의 철화와는 달리 대보병
공격용의 스파이크가 박혀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판으로 되어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키는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세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라이온은 재빨리 손을 뒤로 돌렸
다. 그러나 골도 백부장이 그 모습을 보았다. "멈춰!" 골도의 검이 먼
저 뽑혔고 그러자 칼자루를 쥐었던 라이온의 손이 멈췄다.
빌레스 국왕은 그대로 다리를 안장 위로 돌려 말에서 내려섰다. 갑주
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마왕은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며 키에게
로 다가섰다.
"이젠 황야의 부랑자까지도 나를 능멸하는군."
마왕을 호위하고 있던 하빈저 부관은 투구 속에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그의 왕을 저 지경으로 만든 휘리 노이에스를 저주했다. 빌레
스 국왕은 노성을 질렀다.
"이 천박하고 오만한 녀석, 한 자루 칼을 차고 있으니 무사라고 주장
할 셈이냐? 나는 왕이다! 왕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더냐! 네가 왕에
게 예가 어쩌니 했단 말이냐!"
키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술을 훔쳤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나와 손에 묻어나왔다. 키는 그것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마왕을 올려다
보았다. 마왕은 롱소드를 그의 가슴에 겨누고 있었다.
"용서를 빌어라!"
"…그러지 않겠다면?"
퍽! 잔인한 소리와 함께 키는 다시 뒤로 나가떨어졌다. 쇠신발에 맞
은 얼굴과 땅에 부딪힌 뒤통수 중 어느 쪽이 더 아픈지도 잘 모를 지
경이었다. 빌레스 국왕은 씨근거리며 걸어와 키의 가슴을 내리밟았다.
"미천한 놈, 선택 같은 것은 없다! 용서를 빌게 해주는 것은 왕의 자
비다.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죽이고 네 동생 녀석에겐 네 시체를 먹이
겠다. 그리고 네 동생의 여편네는 내 병사들에게 봉사하게 하겠다!"
왕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던 록소나 병사들은 그 마지막 말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왕과 함께 달려왔던 기사들도 세실을 흘끔 쳐
다보았다. 세실은 어이가 없었고 라이온은 낮게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키는 빌레스 국왕의 발에 밟힌 채 차분하게 마왕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기회를 주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보겠지요."
"물론이지."
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바보요, 빌레스 국왕."
"뭐라고?"
다음 순간 키는 마왕의 발을 붙잡아 옆으로 팽개쳤다. 마왕은 쓰러지
지는 않았지만 몇 번 주춤거려야 했고 그 틈에 굴러일어난 키는 등에
서 검을 빼어 그대로 휘둘렀다. 빌레스 국왕 또한 녹록치 않은 인물인
지라 제때에 검을 뿌려 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덕분에 키의 첫번째
공격은 마왕의 목을 날리는 대신 그 롱소드를 부러뜨렸다.
마왕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검을 바라보다가 다시 키의 손을 들여
다보았다. 격돌 순간 찢어진 천이 옆으로 떨어져내리며 복수의 화려한
검신이 드러났다. 빌레스 국왕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네 사망증명서지!"
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마왕에게 육박한 다
음 그대로 마왕을 끌어안으며 쓰러졌다. 그리곤 그 몸에 올라탄 채 부
러진 마왕의 검을 움켜쥐어 그 목에 가져다대었다. 하빈저 부관이 비
명을 질렀다.
"전하!" "움직이지마!"
검을 뽑아들던 기사들과 활을 들어올리던 병사들 모두 찔끔하며 손을
멈췄다. 키는 부러진 칼을 빌레스 국왕의 목에 갖다댄 채 복수로는 사
방을 경계하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서툴게 움직이면 빌레스의 목숨은 없다. 모두 무기를 땅에 버려라!"
록소나군은 하빈저를 쳐다보았고 하빈저는 입술을 깨문 채 키의 명령
대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키는 다시 마왕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라이온! 세실! 무기를 전부 수거해."
라이온과 세실은 아무 대답없이 몸을 움직였다. 빌레스 국왕은 하얗
게 질린 얼굴로 키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키는 그 얼굴을 향해 싱긋 웃
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크으윽!"
"전하!"
키는 부러진 검을 빌레스 국왕의 오른쪽 어깨에 꽂았다. 록소나 기사
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키는 이미 빌레스 국왕의 목에 복수를 갖다대고
있었다. 복수의 칼끝을 마왕의 목에 댄 채, 키는 천천히 왕의 몸 위에
서 일어났다.
"일어나 앉아라, 빌레스."
빌레스 국왕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채 일어나 앉았다. 어깨의 통증
때문에 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지만 키는 복수의 칼끝으로 그의 턱
을 들어올렸다.
"바보 늙은이 같으니. 난 기회를 줬다. 네가 걷어찼지. 빌레스."
빌레스 국왕은 키의 말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후벼팔듯이 찔러오는 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는…?"
"말해봐."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키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제국의 공적 제 1 호다."
록소나 병사들 사이에서 낮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다와는 인연
이 없는 록소나인들도 키의 공포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
의 공적 제 1 호. 제국 전체의 적이 그들의 왕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고 병사들은 라이온
과 세실마저도 공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갑자기 어깨
를 펴고 당당하게 보이려 애썼고 세실은 그런 라이온을 비웃었다. 빌
레스는 힘겹게 말했다.
"정말 키 드레이번이냐?"
"그렇다."
"네가 육지에는 왜…?"
"왜 올라왔냐고?"
"그, 그래."
키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보던 빌레스는 그것이 경멸감
이라는 것을 깨닫곤 당황해버렸다. 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어서 말
했다.
"이웃에 싸움을 걸고, 칼끝으로 부당한 사과를 받아내고, 무사의 예
를 비웃고, 죄없는 여행자를 죽이고, 그 육친에게 육친의 시체를 먹게
하고, 남편 있는 여인을 능욕하려고."
빌레스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이건 비난인가? 하지만 빌레스는
왠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키는 그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그래서 빌레스는 네놈 또한 잔인무도한 해적이지 않더냐 따위의
말은 떠올리지 못했다. 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나 빌레스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복수의 칼끝은 늙은 왕의 목을 매섭게 찔
러대고 있었고, 키는 냉엄하게 말했다.
"일어나라, 형제. 나와 함께 가줘야겠다."
"노스윈드!"
부관 하빈저가 비명을 질렀지만 키는 냉랭하게 말했다.
"움직이지마!"
"아, 알겠습니다. 인질이… 예. 필요하시겠지요. 저, 그런데 전하께
선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내가 그 분을 모시면 안되겠습니까?"
키는 잠시 하빈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빈저는 대해적의
시선을 거북해하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누구냐?"
하빈저는 투구를 벗으며 대답했다.
"하빈저라고 합니다."
"서 하빈저. 인질은 한 명이면 충분해."
하빈저는 잠시 키를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의 손이 내려오며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하빈저는 허리로 손을 가져가 검집을 푼 다음
검도 땅에 던졌다. 맨손이 된 하빈저는 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나는 인질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왕을 모시게 해주십시
오. 전하께선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당신이 안전해진 다음에 전하를
풀어준다 하더라도 전하께선 말을 몰 수 없으십니다. 그러니 내가 전
하를 보필하게 해주십시오."
"전하라고 했나?"
키는 대답 대신 이상한 말을 했다. 하빈저는 눈살을 찡그리며 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그럼 이 자는 너의 왕이란 말이군. 그리고 넌 이 자의 명령을 따른
단 말이겠지. 주인이 시키면 아무나 강간하겠군. 넌 발정난 개새끼
냐?"
하빈저의 성실해 뵈는 얼굴에서 표현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가 그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불길 같은 노성을 토해놓는 대신, 하빈저
는 낮게 말했다.
"그것은 그 분의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절대로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 한 악마 같은 이의
농간에 빠지셨기에 잠시 이성의 가닥을 놓치신 것일 뿐입니다. 그 분
은 자신이 그런 지독한 유혹에 빠져, 예. 당신 말대로 자신의 백성들
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노여워하시고 슬퍼하시다가 그렇게
되신 겁니다."
빌레스 국왕은 당혹한 얼굴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가
느다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빈저…" 하지만 하빈저는 키를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린 그런 전하의 모습을 증오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고 있음
을 알아주십시오, 키 드레이번 선장. 그 분이 내 왕이냐고 물었습니
까? 대답하겠습니다. 그 분은 내 왕이십니다."
빌레스 국왕은 눈물 어린 눈으로 하빈저를 바라보았다. 키는 투덜거
리듯 말했다.
"악마 같은 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법에라도 걸렸다는 건
가?"
"마법보다 더 음험한 것이오. 길게 설명해야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관둬."
키는 다시 빌레스 국왕을 돌아보았다.
"아니란 말이지."
키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사실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라이온과 세
실은 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것
은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열 명도 훨씬 넘는
병사들과 기사의 존재 뿐이었다. 그들이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말을 꺼내려 했을 때 키가 빠르게 말했다.
"하긴 혼자선 말 타기도 힘들겠군. 좋아. 서 하빈저. 갑옷을 벗고 빌
레스의 갑옷도 벗긴 다음 함께 말에 타도록. 라이온! 활을 들어-" 키
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마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하를 겨냥하
라."
하빈저의 얼굴이 밝아졌다. 빌레스 국왕은 입술을 깨문 채 키를 쳐다
보았다. 키는 검을 옆으로 조금 치우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불쌍한 녀석."
"뭐라고?"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나, 빌레스?"
마왕은 키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빈저는 저 이해할 수 없
는 질문이 혹 그의 왕에게 위해가 되는 질문은 아닌가 의심하며 조마
조마해 했다. 하지만 키는 단조롭게 말했다.
"아마 없겠지. 네 새장은 너무 단단하고, 그 열쇠는 네게 있지 않다.
새장을 떠날 수 없다면 새장과 더불어 행복해야겠지. 네 새장을 껴안
고 네 나라로 돌아가라."
몇 분 후, 록소나의 병사들은 무장 해제를 당한 채 멀어져가는 대해
적과 그들의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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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10 끝났습니다. 재미있으셨는지요.
타자는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