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가츠히로(荒井 克浩) 씨의
‘무교회의 변혁’을 읽고
< 浜松성서집회 잡지 '미기와(물가)' 65호>
사사이 아카네(笹井 あかね)
하마마츠 성서집회
2023년, 당시 나는 일본기독교단의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무교회 전국집회라는 게 어떤 건지 보고 싶어 참가하게 되었다. 거기서 아라이 씨의 성서강의를 듣고 씨의 견해에 크게 놀라, 하마마츠 성서집회에서 감화시간에 이를 보고하였다. 이 아라이 씨의 이야기를 전국집회 참석하는 분들 전체가 인정하는지 부정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가는지 전국집회 기획자의 의도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마마츠에 돌아와, 형제자매들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출판된 아라이 씨의 ‘무교회의 변혁’이 긴자에 있는 그리스도교 서점 교문관에서 ‘올해의 인기도서 2위’에 랭킹되었다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몇 월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출판사가 그리스도교 서적 출판계에서 노포라 할 수 있는, 대단한 타이틀을 가진 회사였다는 점이 신뢰감을 주어 구입한 사람이 많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출판 후 1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이런저런 의견으로 설왕설래하는 게 보여, 당시 충격을 받은 나로서는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 소고(小稿)에서는 특히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 부인, 속죄신앙을 부인하고‘하나님이 죄가 되었다’라는 주장, 예수 부활의 부인 등 세 가지를 논해보기로 한다.
첫째, 아라이 씨는 마리아 동정녀 잉태를 분명히 부인하고 있다.
아라이 씨는 저서 안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성령에 의한 동정녀 수태가 아니라, 요셉 이외의 남성에 의한 성적 모욕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강간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세계 각지의 그리스도인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예수 탄생 이야기를 예배 설교에서도 듣고, 또한 성서에서도 읽는다. 구태여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매주 예배에서 외우는 사도신경을 생각해 보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있지 않은가. 함께 모인 형제자매들과 소리를 내어 읽으며 자신의 신앙을 확인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사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을 믿는 신앙공동체임을 확인한다.
381년에 제정된 니케아 신조의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태어나심’에 의해 우리는 그대로 따르고 믿으며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케아종교회의 이전에는 어떠했을까? 참고자료를 찾아 보니, 마리아에 대해 170년경에, ‘철학자 켈소스에 의하면, 마리아는 로마군 병사 판테라와의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낳았다’라는 전해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土井健司, 교부학입문, 신교출판사, 2022, 84쪽).
그러나 철학자 켈소스라는 사람도 로마 병사 판테라도 정체불명의 이름이어서 신빙성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전승 하나로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난폭한 비약이다. 게다가 아라이 씨는 ‘강간의 경우는 상대 남자가 사형에 처해집니다.’라고 썼는데, 그런 기록은 성서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또 신약성서 외전에 있는 ‘야곱 원복음서’도 마리아의 이야기가 공관복음서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거기도 역시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음을 분명히 기록하였다.
결국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부활신앙에 기초한 신화적 창작이다’라고 한 아라이 씨의 견해는 신약성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속죄신앙을 아라이 씨는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상 오랫동안 신학적 논점이 되고 있는, ‘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물이 되어 돌아가셨다는 설, 자기를 희생하셨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설, 하나님 자신이 그런 고통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였다는 설, 하나님의 연약함을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설 등등 온갖 설이 있어 왔다.
대충 살펴보아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설이 대다수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아라이 씨는 특이하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설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아라이 씨는 이렇게까지 주장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다. 우리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어 주셨다. 함께 죽으신 하나님, (중략)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거룩함을 버리고 우리 편으로 와서 인간과 함께 있어 주시는 하나님, 함께 신음하고, 함께 죽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아라이 씨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당연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 죽는 연약한 하나님’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강한 하나님의 이미지와 전혀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죄가 되시었다’라는 주장은 무엇인가. 인간이 죄를 범하듯이 하나님도 똑같이 죄를 범하는 분이라는 말인가. ‘하나님이 죄’라는 표현을 써가며, 하나님을 인간과 똑같은 상태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씨는 또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우리와 같이 죄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며,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을 혼용하여 하나님과 예수가 죄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은 이사야서 53장 9절을 인용하여 ‘이분은 죄가 없으시며, 입으로도 거짓을 말하지 않으셨다’고 기록하였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곧 죄인이라 말하는 건 옳지 않다.
더 나아가 아라이 씨는 하나님도 인간과 같은 죄인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죄인이 되셨다’라는 사실이 평안을 가져다 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성서의 정확한 기술에서 벗어난 해석이며, 십자가 사건을 판타지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셋째,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고전 1:23).”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아라이 씨는 현재완료형으로 씌어있기 때문에 정확히 풀이하면, ‘십자가에 달린 채로 계시는 그리스도’가 되며,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권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연약하고 고통에 신음하며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채로’라면, 저 무거운 십자가(나무)를 등에 진 채로 두 여인에게 나타났고, 엠마오로 가셨으며, 제자들 앞에서 빵을 나누었다는 것인가. 나는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 자체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주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만인을 위해,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계신다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때만이 아니라, 그분의 대속 행위는 계속되고 있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평안을 주시고, 지상의 생애를 살 수 있게 해주신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죄를 범했던 사람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도, 앞으로의 미래도 언제나 함께 걸어주신다는 진리를 상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현재완료형을 썼던 것이 아닐까!
이상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아라이 씨의 견해와 다른 점을 써 보았다. 아라이 씨는 책에서, “다카하시 선생은 우치무라 간조의 배타성을 비판하였다. 무교회의 섹트화, 무교회인 동지들의 심각한 상호비판 현상은 그 배타성의 영향이라고 보았다.”고 하면서 배타적 비판을 경계하였으나, 무교회 집회 안에서 의견을 내고, 그에 대해 찬성, 또는 반론을 하여 깊이 있는 논의를 해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그동안 기독교의 교회들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각 계열(감리고, 장로교 등의) 신학공부를 한 후 목사가 되고, 신자들은 일요일에 예배당에 모여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형식으로 이어져 왔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교회는 달랐다. 각자가 능동적으로 성서나 주해서를 읽고, 그리스어와 헬라어를 공부하여 원전을 파헤쳐가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무리였다. 주일에 모여 성서를 읽고, 각각 공부한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이 무교회이다.
전국집회에서 아라이 씨의 강의를 듣고, 나 자신 지금까지의 신앙이 무엇이었던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성서를 읽었다. 또 선배들의 연구 성과를 다시 읽을 기회를 가졌다. 쓰카모토(塚本虎二) 저작집의 로마서 해설,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의 요한계시록 해설, 매월 무교회연수소의 강의로 도움을 주시는 츠키모토(月本昭男) 선생, 신주쿠무교회집회에서 성서강의를 해주시는 가와지마(川島重成) 씨, 시라이(白井德萬) 씨의 성서 해석을 들으면서, 헬라어의 표현에 주의하며 성서를 읽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또한 이 반론글을 쓰기 위해 맥그라쓰(McGrath)의 저작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마음까지 일어 그 책을 손에 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문득 깨달아 감사한 시간이었다.
참고문헌 1. 月本昭男, 우치무라 간조의 속죄신앙, 그 특색과 현대적 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는다”
일본그리스도교단출판사, 국판 2022.
2. 關川泰寬他 편, 개혁교회 신앙고백집
기본신조에서 현대일본의 신앙고백까지
교문관, 2014.
3. 무교회연수소, 무교회 연구 제27호, 2024.
4. 荒井獻 편, 講談社문예문고 신약성서외전, 강담사, 1997.
5. Alister McGrath, I believe exploring the Apostles, Creed
(IVP Books, 1991)
첫댓글 정확한 지적이네요 그 누구도 성서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