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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마15:21-28)-2021.1.24
세상에 부스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스러기는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고 천대받지만 본문에 나오는 부스러기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저는 부스러기를 신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 두로와 시돈은 넓게는 팔레스틴 땅이지만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대표적 이방인 지역입니다. 갈멜산 북쪽으로 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번창한 도시이지요. 물론 그들의 번성은 거품에 불과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번성은 하나님이 없는 번성이요, 그들의 명성 역시 하나님이 없는 명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나 도시는 헛것입니다. 사실 두로와 시돈은 바알신의 종주국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두 도시는 항상 페키지처럼 묶여 있습니다. 당시 이들은 페니키아에 속해 있었고, 지금은 레바논지역입니다. 그리고 구약 이스라엘과 무역을 통해 다양한 접촉을 하며 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북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시돈 출신이지요. 그녀는 북이스라엘에 바알 신을 퍼트린 주범입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멸망과 심판을 예언한 곳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23장을 통해 이들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26장부터 28장을 통해 심판을 예언했고, 아모스 선지자도 1장에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두로와 시돈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마태복음11장 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고라신과 벳세다의 회개치 아니하심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 상대를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두로와 시돈은 이미 버림받은 지역으로 아무 관심을 두지 아니하셨다는 우회적인 선포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두로와 시돈은 주님 눈밖에도 없는 지역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십니다. 주님의 최초의 방문이지요.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향해 한 여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이 여자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22절). 그런데 본문에서 굳이 여기서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의 호칭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메시아적인 호칭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그녀는 주님을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깜짝 놀랄만한 고백이지요.
그러면 이 여자는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을까요? 아니면 누구로부터 배웠을까요? 그녀가 이런 고백을 한 것으로 볼 때 이미 그녀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고백은 자기 백성 유대인들로부터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고백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입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이 나오다니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연륜이나 경륜이나 학습이나 훈련을 통해서 주어짐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물론 누구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믿음이 주는 고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여자에게 준비된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이라는 말이에요. 물론 우리는 그 여자가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어떤 경로를 통해 들었는지 혹은 어떻게 배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고백은 주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수준의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로부터도 그런 고백을 쉽게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여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쫑긋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부르짖음에 주님이 침묵하십니다. 여자에게 한 말씀도 아니하십니다(23절). 오히려 곁에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를 내어좇아 버리시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런 한심한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여자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24절). 주님의 말씀은 이방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요? 여자의 자존심을 뭉개버리는 말씀이었거든요.
그래도 여자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 절하며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25절). 여전히 그 여자의 입에서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것입니다. 오직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치고 싶어하는 어미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절). 요즘 같으면 언어폭력이지요. 한 평생을 이방인으로 구박받고 살아온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가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붙잡혀 살아온 운명도 억울한데 주님으로부터 그런 모욕을 당하다니요?
그녀는 주님 앞에 나와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 자기 딸이 고침 받는 것이었을 테지요. 그런데 위로는커녕 상처 받을 수 있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찌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 중에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 역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 삶 가운데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위로받고 싶었고, 의지하고 싶었던 주님으로부터 그런 모욕을 받았다면 자존심 상하다고 소리치며 돌아설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자는 큰 소리로 다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주님으로부터 침묵을 당하고 외면을 받다가 모욕적인 언사까지 받았으니 우리 같으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하지만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여자는 우리의 믿음보다 훨씬 더 고상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다. 27절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는 말합니다. 좋은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먹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청합니다. 그 여자는 인격이 없겠습니까? 그 여자는 자존심이 없냐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자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기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개도 물어가지 않는 알량한 자존심을 모두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받는 입구요, 출발점입니다. 여자에게는 부스러기라도 좋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스러기 같은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본문은 조그만 것에도 쉽게 삐지고 토라지는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부스러기 같은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부스러기 같은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은혜받기 원합니다. 과연 부스러기 같은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1) 부스러기 같은 신앙은 자기를 부정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27절)
기분 나쁘지만 인생은 누구나 부스러기와 같습니다. 부스러기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약간 부족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이 땅에 의인이 있나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말이지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부스러기와 같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인간은 성한 곳이 없어요. 모두 다 병든 인간이요, 부족한 인간이며,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사1:5-6). 이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모든 인생이 다 온전치 못하다는 말이에요. 부스러기와 같다는 말이지요. 부스러기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내려놓고 부정하는 사람이지요. 겸손한 사람이에요. 겸손은 신앙의 출발점이에요. 겸손이 없으면 절대 신앙으로 입문이 불가능해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 부스러기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이 부스러기요,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배척한 것도 부스러기 취급을 받으신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었다는 표현을 보더라도 주님은 이 땅에서 부스러기 취급을 당하고 사셨던 것입니다. 부스러기 같은 주님께서 부스러기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지요. 부스러기는 내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이 모두 다 부스러기와 같은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둔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칭찬받는 다윗도 용모와 신장이 출중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도 바울도 자신은 만삭되지 못한 자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뭔가 2%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본문의 나오는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음식만 먹는 개로 취급한 것은 겸손의 극치를 보여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개는 주인없이 들이나 거리를 방황하는 부정한 동물로 취급했습니다. 영적으로 개는 ‘퀴온’으로 이단자, 이방인, 혹은 경멸의 대상으로 사용되었지요. 심지어 개는 버린 음식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습니다. 그래서 가장 심한 저주를 표현할 때 개를 사용한 것입니다. 사무엘상17장 43절을 보면, 그 유명한 다윗의 전투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 앞에 물매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아가자 블레셋 사람이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26절에 ‘개’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하셨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시던 주님께서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이같이 극언을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정말 주님께서 인종을 차별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의도하심은 오히려 그들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깨뜨리시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지요. 유대인들에게도 고정관념이 있고 이방인들에게도 고정관념은 있습니다. 그런데 고정관념은 신앙 생활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고정관념은 신앙 생활하는데 장애물이 된다는 말이에요.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은 자기들만 선민이라는 우월감이요, 이방인들의 고정관념은 상대적인 열등감입니다. 주님은 역설적인 말씀으로 이들의 잘못된 통념들을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님의 그런 의도를 알아차린 것일까요? 어쩌면 그녀는 주님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자신의 실체를 분명히 인정하고 당당하게 고백한 것일 테지요. 비록 더러운 개 취급을 받을지라도 자신의 딸만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환자가 병을 고치려면 자존심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환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 앞에서 자신의 질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솔직히 여자에게 자존심이 없겠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인데요.
그러나 주님 앞에서 그녀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존심은 교만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자존심은 원죄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주님을 원망하거나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낙심치도 않았습니다. 비록 자녀취급을 받지 못하고 개 취급을 받을지라도 여자는 주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겸손입니다. 마치 그녀는 ‘주님, 저는 양은 못됩니다. 저는 분명히 개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겸손하면 은혜가 내려옵니다. 우리 주님은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2) 부스러기 같은 신앙은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입니다(23, 25절)
은혜는 적당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갈망하는 자,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은혜 받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간절함, 사모함, 열심이 있습니다. 만일 그녀가 자존심이 상하여 분노했다거나 원망했다면 오늘 성경은 이 기사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적인 것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 있어 본질은 무엇일까요? 자나깨나 자기 딸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귀신들린 고통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어미가 어떤 취급을 당하든지 상관없습니다. 결코 자기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든지, 혹은 개 취급을 당하든지, 부스러기 취급을 받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들림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 어미로서 간절한 소망이었을 테지요. 여인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녀는 오직 주님께 집중한 것이지요. 부스러기 같은 은혜라도 부어달라고 말입니다. 그동안 여자는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별스런 방법을 다 강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분께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움을 강청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었던 것이지요. 그녀의 생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당신의 남은 은혜, 부스러기라도 내려주시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것은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함으로 끝나지 않고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지만, 우리 편에서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침노하는 침투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냥 ‘주시면 좋고, 안주면 말고’식으로는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를 만나 밤이 맟도록 씨름하여 은혜를 쟁취했던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는 열심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충분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내는 것을 일방적으로 율법이라는 말로 비난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열심은 낼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의 열심은 쓸데없이 에너지만 소모하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이지만, 마치 사과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과부의 원한 맺힌 간구를 들어줄 줄 알거든 하물며 우리 주님이 우리의 강청함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소경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 지르는 열심으로 은혜를 받고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세리에게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열심이 있었고, 키 작은 삭개오는 뽕나무까지 올라가는 열심으로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은혜가 없음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열심이 없어서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없어서 은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한 발 자욱도 물러서지 않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반드시 자기 딸의 문제를 해결 받고 싶어 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서운 맹수들도 조련사가 열정을 가지고 자기들을 훈련시키면 조련사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읽고 순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련사가 적당히 농땡이를 치듯이 하면 맹수들도 어긋거리며 조련사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열심을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은혜 받는 열심을 보시고 감동하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3) 부스러기 같은 신앙은 주님을 감동케 하는 능력입니다(28절)
믿음이라도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있는 믿음의 수준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 있습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주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부스러기 같은 신앙에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에요. 왜냐면 부스러기 신앙 안에는 믿음이 있고, 소망도 있고, 사랑이 있거든요. 그 속에 겸손이 있고, 열심이 있고, 헌신이 있고, 인내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겸손한 믿음을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비록 여인이 부스러기 같은 인생을 살았고,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간구하였을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부스러기 같은 은혜는 아닙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은혜요, 가장 완전한 은혜며, 가장 완벽한 은혜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부스러기 같은 믿음을 통해 가장 큰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에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이 감동하시매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감동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지요.
믿음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 믿음의 불씨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안에 주어진 믿음을 확장시키는 것은 내가 감당할 몫입니다. 한마디로 내안에 주어진 믿음을 확대시키는 것은 각자가 감당할 몫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내안에 주어진 믿음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는 사람도 있지요. 우리는 내안에 주어진 믿음의 불씨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의 씨앗이라도 자라서 모든 사람들이 쉴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은 자라야 한다는 말이에요. 당연히 죽은 믿음은 자라지 않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안에 있는 믿음을 크게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비록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고 고백한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감동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여자의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딸이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 더 좋은 역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가나안 여자는 몇 가지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들 앞에서 의사표현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방인 가나안 출신입니다. 그런 모든 핸디캡을 뚫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주님으로부터 모욕을 당했지만 그녀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 안에 있는 믿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 안에 믿음의 불씨가 살아나서 타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 안에 있는 믿음이 확장된 것이지요. 보십시오. 어린아이 손에 들려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초라한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드려지니까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내 안에 있는 믿음을 확장하면,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역사를 확장하십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은혜입니다.
비록 우리 손에 있는 것이 부스러기 같이 볼품없을지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과부가 연보궤에 드린 두 렙돈은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드리는 헌신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감동하셨고, 주님이 기억하고 칭찬하는 복된 예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스러기라도 무시하면 안됩니다. 부스러기를 소중히 여기세요. 작은 물방울은 강물에 비하면 부스러기도 안됩니다. 그러나 바다는 그런 물방울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1분이라는 시간은 부스러기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혹은 일년 중에 하루는 그다지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 부스러기 같은 시간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역사는 부스러기처럼 여기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부스러기처럼 여기는 하찮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을 시계만 만들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독특한 시계를 하나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계는 시침이 구리로 되어 있고, 분침은 은으로 되어 있으며, 초침은 금으로 되어 있었답니다. 궁금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이상해요, 초보다 큰 것이 분이고, 분보다 큰 것이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왜 시간을 금으로 만들지 않고 구리로 만들었나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들아! 초침이 없이 분침과 시침이 있겠니? 초침이 가는 길이 바로 황금 길이란다, 작은 것은 매우 아름다운 거야, 이제는 일분일초라도 아끼며 살려므나”. “사랑하는 아들아, 초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부스러기 같은 신앙일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고 말입니다. 비록 부스러기 같은 신앙일지라도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겸손과 사랑, 은혜와 축복이 들어 있고, 믿음과 소망이 들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혹시 나는 내 인생을 부스러기 같은 인생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결코 내 인생을 부스러기처럼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비록 나는 내 신앙을 부스러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결코 네 믿음을 부스러기로 여기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값진 믿음으로 여겨주실 것입니다. 비록 나는 내가 받은 축복을 부스러기 같은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결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노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부스러기가 될 수 없는 것은 지금 내안에 보배로우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볼 때 내 형편과 사정이 부스러기 같이 보일지라도 내가 결코 부스러기가 아님은 내안에 보배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안에 왕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부스러기라고 조롱할 수 없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내안에 주님이 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부스러기라도 복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떤 것으로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승부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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