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실 예수님
성경 말씀: 이사야 64:1-7; 마태복음 25:31-46
요약
예수님은 복음서에 이루어짐의 시각으로 서사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도 이루어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된 이루어짐은 예수님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에 설정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함께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로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함께로 마무리됩니다.
오심의 예수님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초림을 배경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온 분이시니 세상에 다시 올 분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에 태어난 분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오실 분으로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첫 오심이 믿음으로 표현되니, 예수님이 다시 오심도 믿음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첫 오심을 사실적으로 말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사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된 것은 예수님으로 마감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는 뜻입니다. 시작과 끝은 예수님으로 같아져야합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된 것의 끝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하거나 모르겠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입니다(계 22:13).
예수님으로 시작된 것은 예수님에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변화하며 요동합니다. 그리고 끝은 소멸로 말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시작된 것은 예수님으로 끝맺어집니다. 예수님에 의해 씨로 뿌려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으로 수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세상의 진행에 설정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능성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되고 전개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세상에 의존되지 않으니 예수님의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예수님으로 새 언약의 구별됨을 시사합니다. 옛 언약은 세상의 조건을 반영함으로 세상의 조건을 따라 전개됩니다. 구약은 세상의 변화와 요동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변화와 요동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삶은 세상 삶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시작된 새 언약의 삶은 세상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도 세상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고정된 형태로 지속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 형태로 고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세 교회부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교회가 교리로 굳혀져왔습니다. 교회 전통을 이어가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교리적으로 다듬어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교회 전통의 믿음이 되게 됩니다.
세상에서 기관으로 굳혀진 교회가 정립한 교리는 정통 믿음이 됩니다. 정통성을 주장하는 만큼 교리는 굳혀집니다. 그런데 정통성은 지성으로 확보됩니다. 정통성이 지성적으로 판단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교회가 설정한 정통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시작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정통성으로 굳혀지는 것은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은 정통성으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정통성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정통성은 세상에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예수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고착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정통성에 담아지지 않습니다. 정통성으로 주장되는 것은 세상에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영성입니다. 지성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함께로 인도됨입니다. 따라서 정통성으로 굳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과거로부터 유지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로 이루어집니다. 그 이루어짐은 영성으로 서사됩니다.
영성으로 인도되는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로부터 하나님과 함께로 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고정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로 이루어져서 하나님과 함께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새 언약의 삶을 삽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함께로 이루어집니다. 그 이루어짐은 성령님에 의해 인도됨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하나님과 함께를 향합니다. 곧 예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곧 예수님을 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루어지고 인도되면 정통성으로 굳혀둘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굳혀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정통성으로 굳혀지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기관으로 굳혀지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정통성으로 굳혀지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엔 이루어지는 내용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오실 예수님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혹은 오실 예수님을 향해 자랍니다. 이루어짐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자람과 추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루어짐의 마지막이 말해집니다. 이루어짐의 마지막이 수확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씨로 뿌려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열매로 수학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씨로 자라고 열매 맺는 것으로 보는 이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자라고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은 정통성으로 굳혀질 수 없는 믿음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사는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은 세상에 굳혀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굳혀지면 이미 세상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세상 토양에 뿌려지는 씨로 비유하십니다. 세상 토양에서 자라고 열매 맺지만 세상 속성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기관이 되면서 정통성을 보여 왔습니다. 교회가 세상 나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이려고 하니 정통성을 세웁니다. 세상 나라가 지속하니, 교회도 지속성의 내용으로 교리를 세웁니다. 세상 나라에서 이루어짐이나 인도됨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굳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세상에 씨로 뿌려져 수확하는 것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오신 예수님에 의해 세상에 씨로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오실 예수님으로 수확될 것입니다.
영성의 예수님
하나님 나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라이니 영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영성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지성으로 실현되는 세상 나라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구체적이지 않거나 부유되지 않습니다. 오실 예수님을 향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영성으로 인도된 삶을 살았습니다. 영성의 인도는 향하는 곳으로 말해져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유하게 됩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함께로 향합니다. 곧 예수님을 향합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가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영성으로 인도됩니다. 즉 오실 예수님은 영성으로 인도됨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실 예수님을 향해 영성으로 인도됩니다. 오신 예수님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오실 예수님을 향해 성령님에 의해 인도됩니다.
지성은 처한 세상에서 판단을 이끕니다. 지성의 판단으로 사람들은 세상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성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인도합니다. 인도할 경우 인도할 목표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오실 예수님은 영성으로 인도될 목표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영성으로 인도되지 않는 이들은 오실 예수님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성으로 인도되면, 그들은 오실 예수님을 향합니다. 영성으로 인도되는 삶은 오실 예수님을 향해 펼쳐집니다. 즉 새 언약의 삶은 오실 예수님을 향해 펼쳐집니다. 새 언약에서 예수님은 온 분이시고 올 분이십니다.
오실 예수님을 향하지 않은 영성은 개인적인 영성이나 세상 영성입니다. 영성은 예수님을 서사함으로 예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오신 예수님으로 오실 예수님을 말해야 합니다. 영성으로 인도되는 이들은 오실 예수님을 오신 예수님으로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세상에 올 분이십니다. 즉 믿음의 예수님은 세상에 온 분이시고 또 올 분이십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고백됩니다. 복음서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은 오신 분과 오실 분으로 서사됩니다.
예수님은 영성으로 온 분이시고 올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영성으로 서사하는 주축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성으로 서사하는 한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언제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질 하나님의 함께가 오실 예수님으로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에 대해 지성적인 접근을 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다고 하는 것은 영성으로 전개된 예수님의 전반적인 서사를 부정합니다. 영성으로 서사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지성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을 떠남을 뜻합니다.
지성적으로 접근하면 오실 예수님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반적인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인도합니다. 지성으로 굳혀지는 삶을 영성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믿음의 삶은 오신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생겨난 믿음의 삶이 아닌
예수님으로 씨 뿌려진 믿음의 삶입니다.
오신 예수님으로 시작된 저희 믿음의 삶은
오실 예수님으로 결실되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로 결실되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더라도
저희 믿음의 삶이 기다림 가운데 여물어지게 하옵소서.
풍성한 결실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