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단상
墻角數枝梅 울타리 모퉁이에 몇 가지 매화
凌寒獨自開 추위를 견디고 홀로 피었네
遙知不是雪 멀리서 보아도 흰 눈이 아닌 줄 아는 것은
爲有暗香來 그윽한 향기가 퍼져오기 때문이다.
위 시는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왕안석의 유명한 시이다. 이 시를 가만히 낭송할 때마다 매화가 어떤 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울타리 모퉁이에 핀 몇 가지의 매화. 첫 구절부터 매화의 속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번화하고,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곳이 아닌 한적한 담장 모퉁이에 핀 매화는 외롭고 고고하고 적막하다. 그리고 매화는 추위를 견디며 피기 때문에 강인하다.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꽃을 피우며 주위에 향기를 발산한다. 그래서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목숨같이 여기는 선비와 같은 꽃이다. 매화의 하얀 꽃과 하얀 눈은 멀리서 보면 구별이 안될 것 같지만 매화의 그윽한 향기가 매화임을 알게 해준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매화와 같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왕안석이 정치를 개혁하고자 신법을 추진하면서 아마도 이러한 매화와 같이 굳은 의지와 향기나는 인재를 고대했을 것이다.
지난 주 남도 매화여행을 했다. 정읍을 거쳐, 담양, 순천, 광양, 구례를 5일간 돌아보고 왔다. 조계산 선암사의 고매를 보았고, 순천 향매실마을을 보고, 광양의 매실마을과 구례의 화엄사 홍매를 보고 왔다. 처음 선암사의 고매를 보았을 때, 나는 조금은 실망했고, 그것은 구례 화엄사의 홍매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마치 한창 절정기의 벚꽃같이 수많은 매화나무가 장관을 이루는 화려함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암사의 고매는 4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생명력을 부지해온 탓인지 겨우 몇 송이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화엄사의 홍매는 많은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겨우 한 그루에 불과했다. 이러한 실망감은 수많은 매화나무가 있는 광양의 매화마을과 순천의 향매실마을을 보면서 바뀌게 되었다. 특히 광양의 매실마을을 찾았을 때, 나는 매화란 어떤 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과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매화축제가 하루 전에 끝난 상태였다. 매화마을로 가는 도로에 ‘전방 10km 극심한 정체’라는 팻말이 아직도 도로상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어제까지만 해도 수많은 인파가 이곳 매화마을을 보기 위해 도로를 가득 메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내가 간 날은 매화축제가 끝난 월요일이었으므로 어제까지만 해도 정체되었던 도로는 한산했고, 매화마을에 도착해서도 주차장이 여유가 있어 쉽게 주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매화마을을 탐방했다. 매화마을에는 온통 매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내가 기대했던 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화려한 매화숲의 모습은 아니었다. 내가 선암사와 화엄사에서 매화를 보고 느꼈던 것보다도 더한 실망감이 매화마을을 보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위에서 수 시간의 정체를 감내하며 찾아왔던 이곳 매화마을에서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나는 매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매화란 근본적으로 화려한 꽃이 아니라는 것을. 매화는 고독하고, 강인하고, 향기롭고, 고고한 지조의 꽃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진정한 매화는 바로 선암사와 화엄사에 있던 그 외롭고, 고고하고 향기로운 매화라는 것을. 무리지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꽃이 아니라는 것을.
桐千年老恒藏曲 오동은 천년이 지나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매화는 관광(觀光)하는 꽃이 아니라 관상(觀賞)하는 꽃이다. 수많은 꽃이 무리지어 있는 군중의 꽃이 아니라, 홀로 고고하게 피는 선비의 꽃이다. 아무리 매화가 군락을 이루어도 매화는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선비같은 꽃이다. 광양의 매화마을의 매화는 관광객들을 위해 향기를 파는 접대부같은 매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화의 고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매실을 수확하여 이익을 내고, 음식을 팔고, 장사를 하는 매화마을은 매화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발길이 드믄 외진 곳에서 홀로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발산하는 매화. 그것이 진정한 매화의 모습이다. 사람도 그렇다. 요즘 뉴스를 보기가 겁이 날 정도로 시끄러운 세상이다. 저마다 잘난체하며, 세상을 현혹하는 화려한 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그래서 매화와 같이 조용히 은은한 향기를 품어내는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2023. 3.26)
첫댓글 인용한 두 수의 시가 압권입니다.
새봄 매화의 향기를 찾아 남도 일원을 주유하셨군요. 도화마냥 매화가 가지마다 가득 흐드러진다면 고고한 매화의 기품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또 도화나 이화처럼 한꺼번에 내질러 꽃을 피운다면 그들마냥 몇십 년 열정을 불태우고 늙어 쓰러지고 말겠지요.
결코 화려하거나 과분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뼈대가 튼실해지고 변함없이 꽃을 피우는 매화의 끈기와 은근함에 매료가 됩니다.
나래실에 40년이 채 안된 매화 대여섯 그루가 있습니다. 뒤이어 이화가 피구요. 추운 곳이라 4월 초중순에 개화를 하는데 건강해서 제법 꽃을 많이 답니다. 강원도 매화여행도 한번 오시기 바랍니다~
매화의 꽃말을 두 편의 시로 알려주셨군요. 매화를 다시 보고 음미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구경을 했군요!
소생은 오늘부터 구경중인데 구석구석에 아직은 매화꽃의 향기가 은은하군요~
백강께서 매화에 대한 왕안석의 시와 제가 좋아하는
오동나무와 매화향기를 인용한 글로 매화의 특성을 잘
설명해 주셨네요.저도 매화꽃을 너무 사랑하여 2005
년에 저의 선산 < 꿈의 동산 >에 홍매화 50그루를 심고서,죽으면 보식을 하며 매년 이맘때면 즐기던중 2016년에 11그루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가 그 후로 손을놓았지요.이색 목은이 공민왕을 그리워하며 집안 뜰에심어 충성심과 지조.절개를 상징하였던 군자.선비의꽃이지요.중공교시절 3월20일경 현장견학으로 광양매화마을 찾곤 했는데,요즘은 많이 퇴색 하였군요.
좋은 시와 더불어 매화향기 가득한 좋은 글,감사해요.
오동과 매화의 굳은 의지. 참으로 마음에 새겨 실천하고픈 시구입니다.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매한 인격 형성을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야겠죠?
매회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잃
지 않은다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