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설적 혁명가이며 공포, 테러, 파괴를 연상시키는 소련체제 구축의 장본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 ~ 1924), 집권하자마자 곡물수출국 러시아를 식량위기에 시달리는 나라로 바꾸는 신기를 발휘해 대기근을 초래하고 대량 아사를 일으킨 인물.
그는 불량시민의 무자비한 박멸을 부르짖으며 1920년에 강제수용소 84개를 설치했고 3년 만에 315개까지 빠르게 늘려갔다. 흡혈귀, 거머리, 거미 같은 비열한 해충이자 계급의 적인 자들을 벼룩, 빈대처럼 박멸시키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쟈코뱅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위대한 국가건설을 위해서라면 백만 명의 목숨을 바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혁명가 마라Marat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집권하자마자 마주친 레닌의 당면과제는 유토피아 건설이 아니라 제정러시아가 벌여놓은 전쟁의 수습이었다. 그래서 엄청난 굴욕을 감수하며 독일과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발틱 국가들과 벨라루시의 일부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독일에 내준 이 조약으로 소련은 인구 1/4과 산업 1/3을 잃었다. 그리고 불편해진 국민들의 심기를
“인민의 권력은 지킬 가치가 있지만 영토나 낡은 이념 따위는 투쟁할 가치가 없다.” 라는 레닌 특유의 화려한 웅변으로 다독였다.
1922년 7월,
소련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당원 생활개선규정을 통과시켜 당 간부월급을 수백 루불 수준까지 인상했다. 당시 도시노동자의 평균 급여는 10루불이었다. 당 간부들에게는 그 외에도 식량, 주택, 의복, 의료 등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등 고위간부는 제정러시아 귀족이나 부유한 실업가들 저택을 차지했고 연극, 오페라에 가면 황제 특별석에 앉았다.
인류사상 첫 실험인 공산주의 구현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공무원은 4년(1917~1921년)만에 5배(57만 5천명 => 240만 명) 늘었다. 이들은 일치단결해 관료주의와 비생산적 체제 완성에 매진했다. 「노동자는 일하는 척하고 정부는 월급 주는 척하는」 환상적인 사회주의식 생산체계를... 무소불위의 비밀경찰 체카는 적대세력과 반체제 인사는 물론 그 누구든 처벌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체포하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이 곧 권력이라면 체카야말로 신체제의 진정한 권력자였다.
과거 짜르 체제하의 민중들은 볼셰비키들을 암묵적으로 성원해왔었다. 그러나 혁명 후 보여준 황당한 작태에 화들짝 놀란 민중들은 대번에 증오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선거로 심판했다. 혁명 후(1917년 11월) 처음 치러진 전국대의원(707명) 선거에서 볼셰비키 지지율은 25%에 그친 반면, 농민 대표인 사회혁명당은 58%(410명)의 지지를 받았다. 농촌에서 도시로 회귀한 나로드니키(볼셰비키들의 선배 격인 농촌계몽 운동가)들의 취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난 선거였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볼셰비키들은 대체로 농민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비록 토지는 나눠주었지만 농민들 부담은 오히려 제정 때보다 무거워졌다. 우선 세금이 과중했다. 또한 부과된 의무도 많았는데 그 중 벌채와 목재수송 따위 강제노역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내우외환을 맞이했던 혁명 초기의 레닌 정부는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선포했다. 경제는 중앙으로 집중되어 군사화 되었고 식량은 공출供出제 였다. 개인적인 곡물저장은 금지되고 사적으로 매매하는 자는 인민의 적으로 곧바로 총살이었다. 하지만 무상이나 다름없는 낮은 고시 가격에 곡물을 내놓으라 하자 농민들은 반발했다. 그러자 도시노동자들로 조직된 식량 공출대를 보내 징발했다. 가장 심하게 당한 지역은 대도시에 인접한 농촌들이었는데 중앙아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대가 그런 곳이었다. 볼가 강의 한 공화국은 2년간 수확량의 41.9%를 무상공출 당해 주민의 20%가 굶어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격분한 농민들이 식량 약탈자들을 살해하자 정부는 이들을 반혁명분자로 간주해 대량 처형했다. 결국 농민들은 궐기했고 농민반란(1918~20)은 적백내전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열심히 일해 봤자 돌아오는 자기 몫이 없어진 농민들은 일제히 생산을 줄였다. 식량생산이 급속히 줄자 바로 기근이 닥쳤다. 결국 식량공출정책이 기근을 불러온 셈이었다.
물론 제정 러시아 때도 기근은 있었다. 1891~92년 기근으로 40만 명이 죽은 사실이 제정러시아 비판에 종종 인용되곤 했었지만 이 숫자는 1921년 희생자의 1/13에 불과했다.
정부도 손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21년 5월에 식량 수입을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집권당의 지지기반인 도시노동자이지 농민은 아니었다.
1922년 당시의 식량구호 대상은 8백만 명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공업화가 우선이었던 정부는 기자재 수입대금으로 수백만 톤의 곡물을 수출해버렸다. 정부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결국 1920~22년 사이에 소련인구는 510만 명이 줄어버렸다. 러시아를 산산조각 낸 3년간의 내전은 13C 몽골침략 이래 가장 파괴적인 사건이었지만 내전과 병행한 기근 또한 못지않게 참혹했다.
볼셰비키와 먼저 싸우기 시작한 것은 백군이었지만 이후 다양한 집단(멘셰비키, 사회혁명당, 녹색 농민군, 코사크, 우크라이나 국민군, 소수 민족 등)이 끼어들었다. 당시 정치적 수세에 몰린 볼셰비키들에게 내전은 오히려 바람직한 사태였다. 파업 진압보다는 공개적인 반란의 무력 진압이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내전은 적대세력들의 소탕 또한 용이한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내전은 러시아 경제를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갔다. |
첫댓글 늦게나마 레닌공부 잘 했습니다.
좌빨이 이 글 읽으면 속이 편치 않겠는 걸?
그때만 해도 혁명은 말이 혁명이지 사람죽이는게 혁명이었지 아마?
혁명이라는 이름아래 죽은 사람이 몇백만이 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