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었어, 소리? 방금 뭐였어? 어디야! 집이 흔들렸어. 다히예! 이스라엘이 다히예를 또 치고 있어. 세상에, 소리가 너무 커! 아이가 울면서 뛰쳐나왔어, 어떡하지? 새벽마다 공격을 하니 잠을 잘 수가 없어. 구급차 소리가 요란해. 다시 또! 오 주여! 연기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문틈을 수건으로 막아. 비닐봉투를 코와 입에 대고 심호흡을 해봐. 드론이 가까이서 날고 있어, 불길해. 이 영상 봐봐! 아이들의 비명소리! 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왜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거야? 끔찍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아랍에는 관심이 없어. 레바논은 버려졌어...”
‘왓츠앱’이라는 해외 메신저에는 베이루트에 사는 아기 엄마들이 모여 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그룹 소통망이 있다.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후 이곳은 실시간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장이 되었다. 몇 년 전 레바논에 어린 자녀들과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이 땅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중동의 화약고라는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전쟁을 실제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한국전쟁 발발 후 70여 년 동안 나에게 전쟁이란 TV 속 분쟁지역 소식을 통해서나 가끔 접해보았던 그런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이후 1년 넘게 전쟁의 공포가 일상이었던 베이루트에서 전쟁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가져오는 물리적 고통을 두려워한다. 폭격이 내는 굉음, 충격, 파편, 냄새, 유혈, 비명 등. 하지만 정말 괴로운 것은 심리적인 고통이다. 일상의 흔적과 추억이 서린 곳이 한순간에 폐허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삶이 지옥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쉬지 않고 유포되는 사진과 영상 또한 마음을 괴롭힌다.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 채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잠든 아기의 모습과 폭격 직후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눈물 훔치며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가히 심리전이라 할 만큼 공포를 조장하는 거짓 소문도 난무한다. 얼마 전에는 유치원을 폭격한다는 거짓 정보에 혼비백산한 부모들로 도로가 마비되어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장까지 멎을 것 같았다.
가장 슬픈 것은 불안한 미래와 비극의 대물림이다. 교회에서 함께 난민 사역을 하는 현지인 M 집사님은 내전 중에 태어나 2006년 이스라엘 공습 때 신혼을 맞이했다.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다히예’라는 무슬림 지역에 이웃한 그리스도인 마을에 산다. 전투기가 옆 동네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딸들과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한다. 왜 자녀들까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묻는다. 기독교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하지만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된 상황을 맨정신으로는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헤즈볼라, 무슬림)도 결국 우리와 같은 레바논 사람이에요. 우리의 형제, 자매예요.”라는 그녀의 고백에 마음이 너무 먹먹했다.
시리아 내전 때 피난 온 쿠르드족 S는 최근 시리아에 있는 양가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이번 전쟁으로 시아파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정부에 도전하며 민간인들을 협박하고 있어 그녀의 가족들도 급히 탈출해야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하고 두렵다며 부디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더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시리아에서 소수민족으로 핍박받다가 전쟁으로 레바논에 왔는데, 이제는 레바논에 전쟁이 벌어지고 심지어 시리아에 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예수를 믿게 된 후 무슬림 가족들을 보러 갈 수 없어 멀리서나마 기도하며 발을 구르는 이 친구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기도 어렵다.
과연 중동에도 평화가 찾아올까? 정말 한반도가 위험해질까? 오직 주권자이신 주님만 아실 것이다. 다만, 우리는 공포에 억눌려서도 전쟁에 무관심해서도 안될 것이다. 분열과 불안을 조장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분쟁 소식이 들릴 때마다 유가(물가)와 부동산(자산)을 걱정한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남의 나라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난민은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전쟁을 모르기 때문이다. 전쟁은 떠난 자에게나 남은 자에게나 깊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한순간에 집과 가족과 건강을 잃고 알 수 없는 미래로 던져지는 삶. 어쩌면 전쟁의 참상은 폭격이 멈춘 후부터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레바논의 교회들을 통해 희망을 가르쳐 주신다. 수많은 피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학교와 집을 열어 무슬림 이웃을 받아들였다.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고 있다. 이 일로 무슬림 지도자가 레바논 교회에 공개적으로 감사를 전해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70~90년대의 내전, 2006년 8월, 그리고 2024년 10월, 16~18년마다 전쟁의 아픔을 겪어온 레바논 사람들. 그들은 아는 것 같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요 감사라는 것을. 그리고 누가 진정한 평강의 왕이시며 참된 소망이신지를 말이다.